그녀가 내게 처음 건넨 말은 놀라웠다.


"샤오린입니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미련없이 퇴각하겠습니다."


뭐야? 아무리 저격수라지만 마지막까지 당신을 지키겠다는, 

뭐 그런 립서비스조차 없는 건가?


그리고 그녀는 매사에 틱틱거리는 여자였다.

항상 위로 치켜뜨고 있는 듯한 눈매, 날카로운 목소리...

키도, 가슴도 또래보단 좀 부족했지, 본인도 신경쓰고 있긴하지만.

어쩌다 시선이 흉부로 향했던 적이 있는데, 그 매섭게 노려보는

섬뜩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초기의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경계를 늦추지 않는 길냥이?

그랬던 그녀가 점점 신경이 쓰이게 된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그녀가 쭈뼛거리며 사장실에 커피를 놓고 후다닥 도망친 날부터?

돌아볼때마다 눈이 마주치고, 그럴 때마다 어색하게 고개를 떨군날부터?

내 실수로 실패하게 된 전역에서, 

"난 괜찮으니까, 버리고 가!" 라고 외치던 모습에서부터?

"x월 x일. 날씨 맑음. 요즘은, 여기 생활도 꽤 마음에 든다.

비밀이지만, 사장님도 사실..."

하는 일기를 보게 된 날 부터?


... 물론 소녀의 일기를 훔쳐본 댓가로 응징당했지만, 그날의

샤오린 양은 최고로 귀여웠다.


종합해보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일기에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직후 고백했고,

그 날 당황하다가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샤오린 양의

표정을 떠올리면 지금도 표정관리가 안 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내가 심혈을 기울여 계획한 데이트 코스마다

그녀는 그리 기뻐보이지 않았고, 결국 나는 알트 소대의 리더

서윤 양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상담을 받기에 이르렀다.


"어머, 요즘 린이가 맨날 헤실거리고 얼빠져보이는 이유가 있었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대장의 목표를

훔쳐가버리네요?"

"뭐? 누구의 목표?"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그렇지만 사장님, 린이에 대해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나."


나는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남자라고 자부하지만, 이번 사태에

한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그녀에게

해결책을 물었고, 궁금하면 일요일 오전 9시까지 알트소대 숙소로

오라는 서윤 양의 지시가 바로 지금 내가 알트 소대 숙소 초인종을

누르게 된 계기이다. 


띵동-. 띵동-.

묵묵부답. 

문 안쪽에선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감히 사장을 농락해? 

아무래도 서윤 양이 몰래 빼돌린 이터니움을 부사장에게 넌지시

일러줘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더 눌러본다.


띵동-. 띵동-.


"네에... 택배는 앞에 두고 가주세요..."


드디어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서윤 양의 목소리가 아니라,

잠에 취해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은 있지만 분명 샤오린 양의

목소리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날세. 샤오린 양."

"네에.. 네?!"


우당탕 쿵.

한바탕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 이후 깃털같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이내 벌컥, 문이 열린다.


"아..."


아직 잠이 묻어있는 눈꺼풀과 대충 올려묶은 똥머리, 오버핏의

흰색 반팔티와 남색 돌핀팬츠를 입은, 평소와는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샤오린 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하, 좋은 아.." "꺄아악!"


쾅!


"..침."


뭐지, 문전박대 당한건가? 라고 당황스러운 와중 문이 아주 살짝 열렸다.


"사, 사장님. 죄송한데 아주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아.. 얼마든지. 조급해 할 것 없네."


다시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나는 뭐하면서 시간을 때울까 하며 데이트

플랜을 다시 점검해본다. 그건 그렇고, 무방비한 샤오린 양도 

정말 선녀같았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늘 굉장히 고생중인 문이 열렸다.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 오세요, 사장님."

"아, 그럼 실례하겠네."


여자 넷이 생활하는 숙소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내 손을 잡아 끌고는 거실로 인도했다.


"마실 거라도 가져올게요. 앉아 계세요."

"서윤 양은 없는가?"

"대장은 왜요? 저보러 온거 아니었어요?"


금새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하는 모습이 애정을 갈구하는 

고양이같아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래도 내가

서윤 양에게 제대로 놀아난 모양이지만, 좋은 구경도 했으니

넘어가주도록 할까.


"아, 아무것도 아닐세. 녹차 있는가?"

"네!"


그녀는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것이 여간 기쁜게 아니었는지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 주방으로 향했다. 

... 헤어밴드로 앞머리를 까고 있다는 건 언제 말해줘야 하나?


**


"차 맛이 좋군."


나는 그녀 눈치를 보며 대화의 물꼬를 트려고 시도했다.


".. 왜 말 안해주셨어요?"

"하하.. 어떤 걸 말인가?"

"이마 훤히 까고 있다는 거..."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그만.."


나왔다. 그녀 특유의 매서운 눈초리. 

하지만 예전과 달리 애정이 살짝 섞인 원망이라 오히려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도 좀 중증인가?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어요?"


차를 홀짝이던 샤오린 양이 물었다. 


"...지나가다가 샤오린 양이 보고싶어서 들렀네."


오랫동안 살아오며, 세계를 넘나들며 늘어난 것은 눈치와

거짓말 그리고 뻔뻔함이다. 내 직감이 서윤 양 얘기를 꺼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울렸기에 거짓을 말했고, 배시시 피어오르는 미소로

보아하니 나는 정답을 고른 것 같다.


"다음엔.. 미리 말씀이라도 주세요. 저도 준비할 시간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건 안 되겠는데, 미리 말했다면 잠이 덜깬 레어 샤오린 양도, 

이마를 훤히 드러낸 쓰알 샤오린 양도 못봤을 거 아닌가?"

"... 정말..."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는 그녀도 귀엽다. 그리고 오늘 따라 그녀가

평소보다 편안해보이고 자연스럽게 아름답다.

내 직감이 다시 한번 번뜩였고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나갈 준비 할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아니."


나는 일어나려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오늘은 집에서 놀도록 하지. 괜찮겠나?"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나는 또 정답을 고른 모양이다. 브라보, 나의 직감.


***


"그런데 언제까지 손님을 거실에만 있게 할 건가?"

"네에? 거, 거실이면 됐죠!"

"사오린 양의 방이 궁금한데."


직설적으로 본론을 꺼내자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

나는 안절부절하는 샤오린 양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제 방은 왜요? 별로 볼 것도 없어요.. 제발.."

"음 .. 여긴가?"

"아아악! 거기는 소빈언니 방! 안 돼요 사장님!!"


필사적으로 붙잡는 그녀를 매달고서 이곳 저곳 기웃거리니

반응에서 누구 방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가장 미적지근하게

말리는 방은 유진 양 방이겠군.


그리고 옷깃을 잡아당기는 힘이 점점강해지는 걸 보니 내 목적지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장님...? 우리 넷플렉스볼까요? 거실에서..."

"오, 좋지! 방에서 보도록 할까?"


안간힘에도 내가 아랑곳하지 않자 그녀는 특단의 조치로 나를 저지했다. 

뒤에서 나를 와락 껴안은 것이다.

봉긋한 가슴이 존재감을 과시해서 내심 살짝 놀랐다. 

내 등이 누리는 호사를 정면으로 맛보지 못한게 불만스러웠을 뿐.

부끄러움이 많은 그녀의 얼굴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사장님, 약속하나만 해주세요... 실망하지 않으신다고.."

"실망? 내가 자네에게 실망을 왜 하겠나?"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스르르 백허그가 풀렸다. 아, 좀 밍기적댈걸.

샤오린 양은 차마 방을 볼 수 없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나는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산뜻한 색깔의 벽지, 귀여운 디자인의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총기 손질도구. 채광이 잘 되는 창가에 놓인 화분 속 풀들이

바깥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침대위에는 소녀스러운 인형들과

얼마 전까지 그녀를 감싼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불이 놓여있어

이불을 뒤집어쓴 그녀를 상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제법 향긋한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지, 지금 비웃으신거 아니죠? 정리 못하는 여자애라고..."

"아니, 너무 귀여워서 웃은 걸세. 그리고 내가 정리를 잘하니 괜찮아."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건지 얼굴이 한층 밝아진 게 귀여웠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침대를 한동안 응시하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뭘 생각하시는 거에요? 변태 사장님."

"으응? 아니,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


그녀는 샐쭉해진 표정으로 은근슬쩍 침대를 정리했다.


"크흠, 크흠. 샤오린 양은 보통 집에서 뭘 하고 지내나?"

"일단 늘어지게 잠을 자구요,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넷플...이

아니라 쿠키를 굽거나 차를 마시고 독서를 해요..."


생각만해도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던 그녀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천상 집순이였군. 이러니 빡빡한 데이트코스에서 

쉽게 지칠 수 밖에. 집에서 활기찬 모습의 그녀는 생기가 넘쳐보였다.


"하하, 이미지 관리할 필요 없네. 솔직하지 못한 연인관계는 오래

가기 힘들어. 자신을 연기하는 것만큼 내외면이 피곤한게 없거든."

"아주 연애에 능숙하신가보네요. 칫."

"..라고 책에서 그러더군. 마침 나도 넷플렉스시청이 취미인데. 

같이 보겠나?"


우리는 태블릿을 사이에 두고 볼만한 것을 고르기 시작했지만,

사실 어지간한 것들은 이미 다 시청완료컨텐츠였기에 고르는 데

한 세월이 걸렸다. 

입술을 가느다랗게 벌리고 신중하게 영상을 고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진 그녀를 보고 있자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다가 19세 이상 컨텐츠에 이미 시청 완료 표시가 되어있는 걸

본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내가 소리를 낸 이유를 파악한 그녀는 허둥대며 변명했다.


"아,아니 이건...! 소대원 전부가 같이 쓰는 계정이라... 맞아요.

멧돼지, 멧돼지가 본 걸 거에요!"

".. 솔직하지 못한 연인관계는..."

"아잇 진짜! 제가 봤어요! 됐죠?"

"좋아! 자네가 이런 쪽에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선택의

폭이 더 넓어졌군."


그렇게 내가 고른 것은 제법 찐한 묘사로 소문난 영상이었고, 

용케 아직 미시청 컨텐츠였기에 바로 재생할 수 있었다.

연신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째 방을 둘러본다고 할때보다 저항이 적었다. 


"사, 사장님이 보신다고 한거니까.. 어울려 드릴게요."

"야한 거 싫어하나, 샤오린 양? 솔직하게."

"..싫진 않습니다만.. 여자친구에게 무슨 말까지 시키실 건가요?"


영화는 소문대로 찐한 키스신부터 시작하더니, 전개가 어떻게

되던간에 그쪽으로 향하는 듯 했다. 의상비는 정말 안 들었겠군.

이거 내가 추천했지만 다소 부끄럽구만.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펴본다.

붉게 상기된 볼과 집중하고 있는 표정, 꼼지락거리는 앙증맞은

발가락이 미칠듯이 귀여웠다. 꿀꺽, 하고 침삼키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숨도 작게 쉬며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샤오린 양. 태블릿 뚫어지겠네."

"히이익?! 아, 아니거든요! 너, 너무 야해서 곁눈질로 보고 있었.."

"눈 시릴정도로 깜빡이지도 않던데..."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난 자네만 보고 있었거든."


야한 영화보다 야한 영화를 보고있는 샤오린 양이, 소위 말해 더

'꼴렸다'. 이렇게 말은 못하겠지만 최소한 내 시선을 더 끄는 건 맞았다.

그렇게 극구부인하더니 뻔뻔하게 다시 몰입하는 그녀가 너무 예뻐보인다. 한창 관심가지게 될 나이겠지. 

그녀는 갑자기 내 곁에 찰싹 붙어왔다. 뭐지? 유혹인가?


"화, 화면이 작아서."

"거의 화면으로 빨려들어갈 만큼 집중하던데."


거의 심장소리가 들릴정도로 밀착된 둘 사이에 야릇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가 살짝만 움직여도 닿은 몸을 움찔할 정도의 거리. 

그녀의 호흡과 내 호흡이 점차 일치한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도 영화가 아닌 나를 보고 있었고, 우린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화면 뚫어지겠어요."

"하하.. 무슨 소린가. 나는 자네만 보고 있었는데."

"거짓말. 제가 사장님만 보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 눈여겨봤던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단 하나의 저항도 없이 내 목덜미에 팔을 감아왔다.

달콤한 체취와 체온에 취할 것 같았다.

관객없이 재생되던 영화속 주인공은 키스신에 돌입한 듯 했다.

나는 누워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상기된 얼굴을 마주하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진한 키스후에, 더 원한다는 표정의 그녀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난 한번 정한 타겟은 놓치지 않아요, 앞으로는 쭉 함께입니다. 아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