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ArtStation - Snake Illustration, Anabel Martínez Bañ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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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꿈틀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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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가 들리니?


네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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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신이, 서서히 눈을 뜬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여주는 괴상한 침식체에게 당한 탓인지 머릿속이 잔뜩 어지러워 눈을 찡그렸다.


의식을 되찾은 데다가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을 보아하니 죽은 것은 아닐 터. 


정신을 차린 주시윤에게 보이는 것은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팔다리의 감각도, 고개를 돌리는 것도,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죽음 같은 정적이 귀를 가득 메꾸었다.



"....."



보통이라면 금방 패닉에 질렸을 테지만, 주시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했다. 


지금 이 상태는 자신이 악몽을 꿀 당시의 그것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 빠진 채,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점까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존과 같은 속삭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하하-

엄마! 아빠!



사람들의 소리였다. 


한 아이가 부모를 향해 달려가는 소리.


사랑이 가득 담긴 기쁨의 웃음소리.


남성이 어이쿠,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는 아빠를 따라 어이꾸, 하고 어줍잖은 발음을 따라한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연신 어이꾸, 어이꾸. 혼자 아빠의 말을 따라하며 까르륵 웃는다.


세 명이 다시 웃음꽃을 피웠다. 화사한 목소리가 마음 한켠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아이가 저렇게 어이쿠 하는 탄성을 따라하며 웃는 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까르륵-

하하하!



가족의 밝은 웃음소리가 지금 이 순간을 기분 좋은 꿈처럼 만든다.


아들과 아빠, 엄마가 서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소리가 들리다가



우리 이건 아들~!

우리 나의 몸이다 아들-

하하하

#$^!&%*#%@$!

아아아아아아악!!!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웃음소리는 절규가 가득한 비명소리로 오염된다.


웃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탄에 빠진 탄식과 절망만이 귓가에 잔향을 남긴다.



%@#아!!, %@#아!!!!

태초의뱀께서이몸에강림하사인세에지옥을내리시니

안돼, 안돼!!!!

그의통치하에모든산자들을말없는시체로만들라

내 아들은 안 돼!!!



그 뒤로 들려오는 소리들은 전부 끔찍한 것들 뿐이었다.


무언가 마구 부숴지는 소리.


아들을 잃은 남자와 여자의 절규, 피가 튀기는 소리, 고통에 절은 신음소리,


폭력, 피, 살의, 광기, 죽음이 하나의 악보를 만들어낸다.


아이가 엄마와 아빠를 찾으며 나지막히 울부짖는다. 


어디선가 괴물이 그르륵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노이즈가 잔뜩 낀 속삭임도.



엄.... 마....?

그분을받아들이라그분을받아들이라경배하라산제물을바쳐라

아... 빠....?

눈을뽑고내장을꺼내고시체를찢어발겨그분을기쁘시게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경배하라



움직여야 해.


주시윤의 마음 한 켠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저 아이에게 큰일이 닥칠거라고.


주시윤은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존재하지도 않던 팔과 다리가 갑자기 몸에서 느껴졌다.


나타난 팔과 다리에 힘을 주자 욱신거리는 고통이 전신과 머리를 찌릿 하고 강타했다. 


이 공간에서는 무엇 하나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니. 무력감은 오히려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주시윤은 고통을 무시하고 우악스럽게 다시 힘을 주어 팔다리를 움직이려 들었다.


이번에는 단순히 움직이려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 공간 전체를 찢어발길 기세로 팔다리를 마구 뒤틀었다.


천근만근 같았던 팔과 다리가 서서히 가벼워지며 통제권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큰 파열음이 들려왔다. 이 칠흑과도 같았던 어둠 속 세계가 금이 가며 부숴지기 시작했다.


세계가 무너지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이 번쩍 하고 뜨였다.


이제는 몸도 움직이고, 눈 앞도 보인다. 주시윤은 재빨리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좌우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불바다와 폐허가 된 집의 거실 한복판에 쓰러져 있었다. 


사방이 칼에 베이고 긁힌 자국과 우악스러운 폭력으로 인해 박살난 자국, 그리고 선혈이 낭자했다.


그리고 눈 앞에 두 명의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주시윤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두 사람은 다름아닌 자신의 부모님, 주한과 연화의 시체였다.


또다. 또 이런 식으로 사람의 과거를 끄집어내 괴롭힌다. 복잡미묘한 감정과 분노가 어우러져 몸이 부르르 떨렸다.


별안간 빌딩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파열음이 들렸다. 세계가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져 갔다.


부모님의 시체도, 폐허가 되어있던 거실도, 점점 폴리곤 덩어리가 되며 산산히 부서졌다.



"큭-?!!"



동시에 주시윤의 머리가 깨질듯이 찌르르 하고 조여왔다.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처럼 세척되는 느낌과 함께, 새로운 기억들이 하나 둘씩 주시윤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하하-

어이쿠, 우리 아들!

헤헤, 어익꾸! 어익꾸!

그래그래~ 그 말이 마음에 들어?어이쿠~



처음 보는 기억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까 들었던 목소리가 지금의 기억들과 연결되어간다.



아아아아아!!! 엄마!!! 엄마!!! 아빠!!!!!

시윤아!! 시윤아!!!

안 돼! 안 돼!!

내 아들은 안 돼!!!!



영문 모를 자신의 고통어린 비명소리,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는 어머니와 아버지.


세계가 무너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새로운 기억들도 더 빠르게 떠올랐다.


갑자기 시야가 암전된다. 어디선가 괴물 울음소리가 소름끼치게 귀를 긁어댔다. 


뒤이어, 연화와 주한의 단말마와 함께 피가 스프링쿨러처럼 흩뿌려지는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주시윤은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 가운데 어린 시절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욕지기를 내뱉었다.


부모님이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부 떠오르자, 세계는 완전히 부숴져 검은 바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주시윤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검은 공간 저 너머에 금줄로 단단히 묶여있는 거대한 뱀의 모습이었다.


뱀의 흉흉한 붉은 눈이 주시윤을 응시했다. 눈을 볼 수록 주시윤은 그 색깔에 자신이 무심코 끌리는 것을 느꼈다.


저 뱀은 대체 뭐지? 이 기억이 이제서야 떠오르는 이유는 뭐지?



그 생각을 끝으로, 주시윤의 의식은 암전되었다.




(BGM out)




.....




나나하라 대저택

주시윤의 방

p.m.09:15



주시윤이 누워있는 침대를 둘러싸고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차례의 청문회가 열렸다. 피고는 하야미 사나에, 추심자는 힐데.


주시윤이 의식불명에 빠졌다는 사실에 힐데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사나에에게 이것 저것 캐묻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라. 하야미 시종장. 내가 날뛰지 않고 납득할 수 있게 말이야."


"이 침식체는 결계가 통하지 않는 개체였습니다. 시윤 군이 저 대신 시간을 끌겠다고 하셔서 저는 다른 거점으로 떠났고, 그 사이에..."


"결계가 통하지 않는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더냐?"



힐데의 다그치는 목소리가 사나에의 귀를 강타했다. 당장에라도 물어 뜯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이 사나에를 노려보았다.



"저택을 습격한 침식체 군단이 그 결계에 모두 무력화되고 전멸했다고 들었다. 그 놈 하나만 예외라는게 말이 안되지 않느냐!"



사나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벽 한 켠에 기대어 서 있다 말고 루시아가 옆에서 넌지시 사나에의 변호를 거들었다. 



"제가 설치해둔 결계가 감지하는 것은 침식체의 존재가 아니라, 침식체의 인간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에요. 결계에 묶이지 않았다는건 이 침식체에게는 기본으로 갖고 있어야 할 인간에 대한 적의가 없었다는 것."



결계를 직접 설계한 그녀는 알고 있다. 힐데의 추궁은 부당하며, 사나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힐데의 분노에 찬 사나운 시선이 이번에는 루시아를 향해 돌아섰다.



"그거부터가 상식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현상이에요. 설계를 벗어난 돌연변이 개체가 어쩌다 거기에 있었던 것을, 누군가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닐까 싶네요. 진정하세요. 소대장님."


"지금 내가 진정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나!?"


"지금 이러시는 거, 단순한 화풀이로밖에 안보이거든요."


"뭐?"


"전장을 관할하는 사람은 시종장님이었다지만 결계의 설계자는 저. 이번 사태에 대해 하야미 시종장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꼭 욕을 하시려면 저한테 하시는게 맞다고 보는데요?"



루시아의 지적이 정확했다. 화는 났지만 힐데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 행동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힐데도 알았다.


제자인 주시윤이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뒤로, 걱정이 앞선 끝에 그녀는 감정의 제어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제자를 향한 애정과 걱정, 불안함이 방향을 잃고 방황했다. 그러다 보니 애먼 사나에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힐데는 눈을 한번 감고, 한숨을 쉬며 지금 드는 생각들을 한 차례 꾹 눌러담았다.



"그보다, 시윤이의 상태는?"



치후유와 치나츠가 기다렸다는 듯이 힐데에게 말했다.



"외상은 없습니다. 다만, 의식을 잃은 채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정신 계열의 공격을 받은 것 같아 제 힘을 이용하여 응급처치는 해놓았어요. 남은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요."



나나하라 자매가 말을 하던 와중에, 누워 있던 주시윤의 몸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주시윤의 실눈이 살짝 찌푸려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침대로 옮겨졌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힐데였다.


 

"시윤아...!!"


"시윤 군! 괜찮습니까?"


"주시윤. 정신이 드느냐? 몸은 좀 괜찮고?"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 대신 자신을 둘러싼 다섯 명의 여성들이었다.


제3자가 본다면 히로인들에게 걱정을 받는 남자 주인공이라며 부럽다고 추파를 던져댔을 상황이다.


아직 몸이 덜 깨어났는지, 주시윤은 멍하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살짝 피곤한 듯한 목소리로 주시윤이 말했다.



"상황은 정리된겁니까? 피해는요?"


"결계랑 너의 활약 덕분에 저택에 피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다친 사람이 몇 있긴 하지만 치나츠 가주가 있다면 경미한 부상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야."



치나츠가 주시윤의 앞으로 다가갔다.



"정신 계통의 공격을 받았으리라 짐작해서 제 힘으로 응급처치는 해뒀습니다. 빨리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시윤 씨."


"아, 네... 감사합니다. 그보다 어떻게 된거죠? 그 침식체는..."


"죽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너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으니 말이야."



힐데가 주시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정도의 실력자가 그 침식체에게 뭘 당했길래 의식을 잃었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깨어났으니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



언제나와 같은 냉혹한 말투가 주시윤의 귓가에 내려앉는다. 


힐데는 결코 온정적인 타입의 스승이 아니었다. 항상 이렇게 차갑고 서툰 사람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을 우려한 것인지,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아가 힐데의 옆에서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말은 이렇게 차갑게 하신다지만 사실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가문 사람들이나 나나, 너네 스승님도 포함해서. 그렇죠? 소대장님?"


"쯧. 쓸데없는 날조는 그만둬라."



루시아가 장난식으로 발랄하게 말하는 것을 힐데는 성가시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만 쉬어라. 향후 처리해야 할 일들은 내가 전부 해놓겠다. 너는 아무 걱정 말고 회복에만 신경써라."



루시아의 노력이 무색하게, 힐데는 할 말만 하고 주시윤의 방을 나섰다.


주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무표정으로 방문을 나선 힐데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아주 태도가 휙휙 바뀌시던데요?"



들려온 목소리에 힐데는 가려다 말고 멈춰서 뒤를 돌아봤다.


주시윤에게 자꾸만 치근덕대는 소녀 카운터. 루시아 테일러가 자신을 따라나와 있었다.



"깨어나기 전에는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세세히 캐물어 보시면서 전전긍긍 하시더니, 정작 깨어나고 나서는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시고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루시아는 바로 답하지 않고, 손을 뻗어 벽에 갖다댔다.


손을 중심으로 푸른 빛의 결계가 두 사람이 서 있는 복도를 회로처럼 가득 메워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주 회의 때 봤던 외부로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막는 결계였다.



"시윤이 스승님이라면서요. 제가 아는 한, 저희 아카데미에도 소대장님처럼 제자를 차갑게 대하는 선생님은 없거든요. 그래서 좀 이질적으로 보인다고나 할까요."


".....좋을 대로 생각해라. 우리 사이에 대해 네게 해줄 말은 없어."



힐데는 아무 말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하찮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루시아를 뒤로 하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 수비적인 태도에도 루시아는 무엇을 원하는 건지 은근슬쩍 계속 달려들었다.



"뭔가를 숨기고 계신건 아닌가요? 그러지 않고서야 시윤이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을텐데."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 했다."


"예를 들면.... 시윤이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던가."



힐데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나 보네요?”



루시아는 입꼬리만을 살짝 올려서 웃음지었다.


힐데의 머리가 냉정하게 사고하기 시작했다. 이 소녀의 말 마디마다 들어있는 속뜻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무엇을 위해 루시아는 결계까지 쳐가면서 자신에게 대화를 걸어온 걸까. 그 의도가 뭘까.


눈초리가 루시아를 향해 돌아갔다. 짧은 순간동안 힐데가 내린 결정은 블러프를 동반한 정면돌파였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쩔 테냐?"


"호오?"


"네 생각이 사실인들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잘못을 캐물어서 내게 가책이라도 느끼게 하려는 거냐? 알게 된지 1달도 채 안된 그 아이를 위한답시고? 웃기는군."


“글쎄요~ 딱히 어떻게 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힐데 소대장님.”


“마찬가지다. 나 역시 네 추측이 맞다고 말한 적은 없지.”



고압적인 말투로 되묻는 힐데에게 루시아는 별 생각 없었다는 말투로 응수했다. 


말은 몇 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당장에라도 험한 말이 오가고 싸움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침묵 가운데 수없이 많은 수 싸움이 소리없이 이어져간다.


두 소녀의 눈이 서로의 모습을 담았다. 힐데는 루시아를 노려본 반면, 루시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더 할 말 없다면 그만 가보겠다. 결계를 풀어라."



힐데는 빠르게 털어버리고 돌아가려 했지만, 결계는 풀리지 않았다.


 

"...따뜻하게 좀 대해주시죠."


“뭐?”


“시윤이요. 당신이 그 아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아이에게 당신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보호자니까요.”



힐데는 기가 차서 할 말이 없었다. 


이 소녀가 무엇을 위해 결계까지 쳐가며 자신을 불러세웠나 했더니, 이유가 고작 잘 부탁드린다는 내용 하나였다니.


그것도 타인을, 힐데 자신이 업어 키우다시피 한 애제자인 주시윤을 잘 대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우스워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생판 관계도 없던 남에게까지 들을 소리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녀석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네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니 신경 꺼라.”


"나름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요."



루시아의 눈빛이 변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던 눈동자가 한순간 선명해졌다. 



"성장하는 나무는 아직 뿌리가 얕기에, 바람에 쉽게 넘어지죠. 소대장님의 그 태도가 언젠간 시윤이의 성장에 제동을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무슨 의도지?”


"친구로서의 걱정입니다."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대뜸 꺼내든 이야기가 남의 성장과 미래에 대한 메시지다. 


말이 친구로서의 걱정이지, 평범한 소녀가 할 수 있는 생각 수준에서 나올 주제는 아니었다.


아니, 정말로 친구로서 걱정하는 의도를 갖고 저런 말을 꺼냈을까? 나이도 주시윤과 동갑인 소녀가?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힐데는 더 이상 이야기를 길게 끌지 않기로 했다.



“아까부터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데,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그 아이를 착실히 보호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내 방식이 그릇된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너와 내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강하게 나가면서 이야기를 아예 끊어낸다. 다시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그럴 생각으로 힐데는 일부러 말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런 식으로 협잡질을 일삼을 생각이라면 좋게 말할 때 그만둬라. 아니면 뭐냐? 그 뱀 자식이 뿌려놓은 권속이 너라도 된다는 건가?”


"아무리 애제자가 위험에 빠졌기로서니, 그거에 흔들려서 이젠 아군마저 의심하시는 건가요?"


"처음 의심한건 그쪽이었다만."



의심에는 의심으로 되돌려준다. 


힐데의 대화술에 말려들자, 먼저 말을 걸어오던 루시아 쪽에서 이번에는 침묵이 찾아왔다.


힐데는 가만히 루시아를 지켜보았다. 저 아이는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대로 후퇴를 할까?



"....."



따악-


정적이 자리한 복도 한 가운데에서 손가락이 튕겨지는 소리가 났다.


결계가 흐릿해지며 사라져갔다.


루시아가 한 선택은 후퇴였다.



"....시윤이 친구로써 스승인 당신의 반응이 조금 이해가 안갔어요. 제가 말이 너무 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세 좋게 미소를 띄고 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진중한 표정만이 남았다.


루시아는 고개를 숙여 힐데에게 무례를 사과했다.



"....."



먼저 꼬리를 내린 사람을 구태여 추궁하며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힐데는 쿨하게 대화를 끝내고 뒤로 돌아섰다.



"충고 하나 하지. 얄팍한 추측은 그만두는게 좋아. 되려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을테니 말이다."



그 말만을 남기고, 힐데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루시아는 움직이지 않고 힐데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원래라면 후퇴하지 않고 계속 캐물을 생각이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굳이 그것들을 밖으로 꺼내기엔 긁어 부스럼일 것만 같아서 침묵을 지켰을 뿐.



"나 참... 누가 누구에게 충고할 입장이라는 건지."



안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루시아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주변을 푸른빛의 선들이 감싸더니 곧 루시아의 모습은 폴리곤 덩어리가 되어 사라졌다.



"생각보다 쉽지 않겠는데. 시기를 앞당겨야겠어. 그걸 보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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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 바쁜거 더 오래 끌면 영원히 안쓰겠다 싶어서 이 악물고 롤드컵도 안보고 악깡버로 써왔다.


ㅈㄴ 못쓰고 늦게쓰고 약속도 안지키고 뭐든지 7% 못해서 그저 죄송할 따름임....


그럼에도 항상 봐주는 너희가 있어서 열심히 달릴 수 있었다. 고마워.


게임도 힘든데 이거라도 보면서 우리끼리 게임을 즐기자.



오늘의 요약포인트.


- 주시윤의 과거가 옛날과 다름. 힐데가 죽인 것으로 돼있지만 주시윤이 새로 떠올린 기억에는 힐데가 없음. 


- 과연 뭐가 진실일까? 메인스트림의 기억? 아니면 이 문학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