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pixiv.net/artworks/6022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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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번뇌와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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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난이 함께 하더라도, 선택을 통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것.


그것이 신이 그대 인간들에게 내려준 축복일지니.


네 의지로 일어서 세상을 바라보라. 세상이 네게 건네는 새로운 의미를 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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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나 되는 시간이 흘렀다.  


주시윤은 대저택에 딸린 자기 방에서 호사스러운 환자 생활을 만끽하게 됐다.


뭔가를 하려 할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앞다투어 도와주려 든 탓이었다. 식사도 아예 방에 따로 배달되었다. 


자기는 괜찮다고, 별 문제 없다고 몇 번이나 항변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저택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며 주시윤을 극진히 대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호원으로서 주시윤의 임무는 사실상 종료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방에 박혀서 회복에만 전념한다곤 해도 딱히 심심할 일은 없었다. 일본에 와서 알게 된 동갑내기 카운터, 루시아가 걸핏하면 찾아와주었다.


찾아와서 할 이야기가 그렇게나 많은지. 루시아는 찾아올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갔다. 


치후유와 치나츠 또한 봉인지에 가 있는 시간이 아니면 주시윤의 방에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두 사람도 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주시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이렇게나 말이 많았었나 싶어서 주시윤 스스로가 놀랐을 정도였다.




.....



결과적으로, 저택 사람들과 힐데의 정성어린 보살핌 덕분에 쇠약해졌던 주시윤의 몸은 금방 나을 수 있었다.


애초에 정신 계열의 공격을 받았을 뿐 큰 외상도 없었으니 낫는다는 말 자체가 어폐였지만.


환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힐데의 태도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힐데는 주시윤의 회복에 그녀답지 않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이고, 봉인지에 봉인을 조정하러 가는 것이 아니면 주시윤의 방에 가장 빈번하게 들어와 있었다.


주시윤은 걸핏하면 자신의 침대 맡에서 잠들어 있는 힐데의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변한 힐데의 모습은 주시윤으로 하여금 옛날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주한과 연화가 죽고 난 뒤, 힐데는 서툴긴 했지만 그를 먹이고 키우는데 있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주시윤이 12살일 때만 해도,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주시윤과 힐데의 사이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냉정하고 무감정해보이는 여신은 홀로 남은 아이 앞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웃어주었다. 


주시윤은 힐데를 진심으로 따랐고, 힐데는 그런 주시윤을 성심성의껏 아꼈다.


그 관계에서 슬슬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이 바로 요 근래. 주시윤 자신이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동안 보여줬던 태도와는 달리 힐데는 주한과 연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최대한 피하려 들었고, 일말의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옛날에는 이렇게 서로 쌀쌀맞지 않았던 것 같은데.


주시윤은 침대 맡에서 졸고 있는 힐데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에 잠기곤 했다.



....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해 보니 00:30이라는 숫자가 표시됐다.


주시윤은 팔을 눈가에 갖다댄 채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정확히는, 자려고 해도 머리가 복잡해서 잘 수가 없었다.


몸의 회복은 힐데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극진한 도움으로 빠르게 나았지만, 오히려 주시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육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정신적인 부분이 그의 생각을 계속 꼬이게 만들었다.


그 이상한 침식체에게 연결 비슷한 것을 당한 후, 주시윤은 자신의 의식 너머에서 새로운 기억들을 접하게 됐다.


이상하게도, 그 전까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던 기억을. 


부모님이 죽던 시절의 기억을.


깨어난 직후에는 그 기억들을 거짓으로 여겼다. 적이 보여준 환각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자신이 아는 것과 많은 부분이 달랐으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부모님의 최후는 힐데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새로운 기억에서는 부모님이 죽어 있었음에도 힐데의 모습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거짓 기억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진위여부의 판단기준은 점차 흔들려갔다. 주시윤은 그 거짓일 것이라 생각했던 기억을 차마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기억은 환각 내지는 거짓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나 친숙한 기분이 들었다.


인간은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것이 맞다라는 확신을 여러 세부적인 내용들로부터 찾는다.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여러 세부적인 내용들, 그 순간의 느낌, 감정, 촉감, 소리. 그런 것들을 통해 인간은 그 기억을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새로운 기억은 그 모든 조건들을 만족했다. 


부모님과 있으면서 느꼈던 행복감, 안도감, 영문 모를 괴물의 소리, 고통, 끔찍한 소리.


그것들이 새로운 기억을 확실히 주시윤 자신의 기억이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하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주시윤은 머리를 부여잡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새 기억과 기존의 기억들이 뒤섞여가며 머릿속을 끝없이 괴롭힌다. 


그래. 만약 그 새로운 기억이 진실이라고 쳐 보자.


그렇다면 부모님을 죽인 것이 스승님이 아니라 누구란 말일까?


혹, 스승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승님이 아니라면 부모님을 죽일 사람이 있긴 한걸까?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걸까?



"....."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혼란은 또 다른 혼란을 낳는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던 것들이 근본부터 부정당하는 느낌에 주시윤은 눈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힐데가 부모님을 죽여야 했던 이유를 찾으려 했다.


힐데가 마냥 나쁜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을 죽인 이후에 자신을 이렇게까지 애지중지하며 키웠을 리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이 부모님을 죽여야 했다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부모님의 죽음을 밝혀내려는 조사는 그런 가정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며칠 전 이상한 침식체로부터 전해받은 이 새로운 기억들은 그것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 기억이 지금 자신에게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만약 부모님을 죽인 것이 힐데가 아니라면?'



그 의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이 의문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힐데에게 그 날의 진실을 직접 물어보는 것 뿐이지만, 힐데는 주시윤의 부모님 얘기만 나왔다 하면 학을 떼고 일체의 언급을 금하곤 했다.


그렇게 된다면 진실을 알기 위한 주시윤의 발걸음은 지금 이 순간부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부모님의 가문이나 출생에 대한 것, 용혈이라는 능력에 대한 것 등. 애초에 자신의 정보력과 연줄만으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그 날의 진실에 대해서 자신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부모님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 그것이 평생의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주시윤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도 돼?"



듣기만 해도 싱그럽고 명량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브금 반복을 꼭꼭 켜주세요)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찰랑이며 루시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잘려고 불을 꺼뒀던지라 주시윤의 방 안은 어두웠다. 



"잠깐만. 불 좀 킬게."



방 불을 키는 스위치 소리 대신, 루시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한번 휘저었다.


파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주시윤의 침대 맡에 푸른 빛의 선이 나타난다. 선들이 얽혀가며 육각면체 형태의 자그마한 구조를 자아냈다.


육각면체 형태를 띈 그 결계 구조체는 주시윤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은은한 빛을 머금고 주변을 비추기 시작했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여름 밤하늘이 결계의 푸른 빛과 어우러져, 방 안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결계 능력으로 이런 것도 가능한가요?"


"응. 스스로 빛을 내거든. 덕분에 전기세도 덜 들고 좋아."



이쯤되면 결계 능력이 아니라 물질 생성 능력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주시윤은 이상할 정도로 높은 능력의 다양성에 속으로 너털웃음을 지었다.


루시아는 자기가 만들어낸 구조체의 빛을 따라 주시윤의 침대 맡으로 걸어와 앉았다.


맑고 다정한 목소리로 루시아가 말했다.



"이 시간까지 안자고 있었어?"


"하하. 제가 좀 야행성이거든요. 생각할 것이 있다 보니까."



기억을 갖고 혼선을 빚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 주시윤은 그저 고민이 있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흐음, 하더니 루시아는 음흉한 미소로 주시윤을 바라보았다.



"흐흥. 또 누구 생각을 그렇게 하시느라 잠을 못 이루셨어요? 짝사랑도 너무 담아두고 있으면 힘들어진다구?"



금발 소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눈매가 휘어진다.


주시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사람, 또 장난칠 생각이라고.


어쩔 수 없다. 장난에는 장난으로 대응한다. 능글맞게 사람을 대하는 주시윤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어이쿠. 제가 허구한 날 여자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시는 거에요?"


"아니었어?"


"아닙니다."


"아니었구나. 다섯 명이나 되는 여성진 앞에서 깨어나는걸 보면 여성 복은 타고 태어난 녀석인데, 관심이 하나도 없다니. 너 혹시...."



뻔한 패턴이다. 이대로 나올 만한 대답이라 해봐야 고자라던지, 이상성욕이라던지, 어린 몸에 욕정하냐는 내용일 터.


주시윤은 먼지를 털어내듯 루시아의 말을 원천차단했다.



"네~ 고자 아닙니다. 이상성욕에도 관심 없고요, 어린 체형에도 관심 없어요. 서운하게시리, 절 뭘로 보시는 거에요?"


"응? 부처님이 아닐까 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는데? 설마 그런 쪽을 생각하고 있던거야?"


"....."


"뭐야~ 외관은 그렇게 안생겼는데 너도 의외로 글러먹은 생각을 하는구나?"



장난이 성공한게 기분이 좋았는지 루시아는 까르륵 웃었다. 그녀는 이런 식의 장난을 굉장히 좋아했다. 


주시윤은 루시아를 뻘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설마 자기가 심심하다고 이 야밤에 찾아와서 이런 장난질을 할 생각이었다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고민을 하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는데, 이제는 이런 장난질을 받아주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어딘가 모르게 우스워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루시아가 다시 말했다.



"또 그 악몽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못자고 있던거야?"


"이번에는 아니에요."


"아니면?"


"옛날 일에 대해서 고민할 것이 하나 있어서요."


"흐음. 그래?"



이상한 침식체에게 당하고 난 직후, 주시윤은 혼자서 가만히 고민에 빠져 있는 시간이 크게 늘었다.


새로 얻은 기억과 기존에 알고 있던 사실 간에 매치가 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새로운 기억을 부정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힐데에게도, 치나츠에게도, 이 가문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 자신의 과거 이야기.


과거이기에 오롯이 자신만의 문제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렇게 답답함에도, 이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에게 위험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힐데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움직임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테니까.


구조체의 은은한 푸른 빛이 루시아의 얼굴을 비춘다. 주시윤은 고개를 들어 루시아를 쳐다봤다.


주시윤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얼굴은 차분했다. 마치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줄 수 있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주시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침묵이 자리했다. 


주시윤도 루시아도,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구조체의 푸른 빛과 여름 밤하늘을 배경삼아, 둘이 자아내는 몽환적인 풍경 속에서 가만히 표류한다.



"....사실은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주시윤의 입이 열렸다.



"제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분명하게 남아 있어요. 마치 책의 특정 페이지를 누군가가 가위로 잘라낸 것처럼요." 


"응."


"그 옛날 기억의 실마리를... 이상한 침식체에게 당해 쓰러진 이후로 찾게 됐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어?"



주시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있어서 말하지 못했을 뿐이죠."


"....이해해. 개인적인 일이니까."



사정이 있어서 말하지 못했다고는 했지만, 본심을 숨기려는 의도와 다르게 주시윤의 입과 마음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전하려고 애썼다.


기억을 찾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찾은 그 기억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어느 쪽이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있는가?


주시윤에겐 없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힐데부터가 그 기회를 원천차단하고 있었다.


마치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심정을 주시윤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데, 모든 사실들이 저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그 느낌을 아시나요? 이게 당사자 입장에선 미칠 것 같은 상황이란 말이죠."


"....."


"제가 하고 있는 고민이라는 건 그런 종류의 것이에요. 막상 털어놓는다 한들 변하는 것도 없으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기도 하고."



루시아는 줄곧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결계 구조체가 뿌리는 푸른 빛 가운데, 루시아의 푸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 그런건 겪어보지 못했거든. 하지만... 알고 싶은 것에 닿지 못하는 그 느낌은 알고있지. 그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한지도."


"....."


"난 그럴 때일수록 끝까지 파헤쳐야만 한다고 생각해. 결국 실패한다 하더라도 말이야."



주시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기껏 속마음을 털어놨더니 돌아온 말은 이상론에 불과했다.


여전히 답답했다.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실패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 그럼에도 시도를 하라고? 그 무슨 무책임한 생각이란 말인가?


불편한 마음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주시윤은 반감을 살짝 실어 루시아에게 말했다. 그의 실눈이 붉은 빛을 머금었다.



“루시아 양. 실례가 안된다면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아프지 않게 문다면 허락해줄게.”


“만약... 루시아 양의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 루시아 양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자신의 상황을 그대로 루시아에게 되돌려주는 질문.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다.


친해졌다곤 하지만 남의 가족사만큼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하물며 루시아는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그럼에도 주시윤이 이런 잔혹한 질문을 던진 것은, 일종의 반감이었다.


당신은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나요? 라는 의도.


작은 뱀이 과거라는 독이 서린 이빨을 소녀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아프지 않게 물으랬더니 굉장히 아픈 질문을 하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답하기 싫으시면 없던 일로 하죠.”


“후훗. 아냐. 답해줄테니까, 고민할 시간을 줄래?”



도발적인 질문이었음에도 루시아는 화 하나 내지 않았다. 오히려 별 거 아니라는 듯, 시원하게 답하고는 차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주시윤은 속으로 살짝 놀라워했다. 당장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잔혹한 질문에도 이렇게 진지하게 대하다니.



“우리 부모님을 죽인게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말꼬리를 길게 끌다가 루시아는 웃으며 답했다.



“역시 죽여버릴 각오로 두들겨 팰 것 같아.” 


“흐음... 그렇군요.”


“아, 죽이진 않을거야. 대신 이유를 묻겠지. 그에게는 부모님을 죽인 이유를, 나 자신에게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그건 왜죠?”


“괴롭겠지만... 알아야 하니까. 이유를 알아야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선택의 순간까지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으니까.”



루시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상론을 넘어서 터무니 없을 만큼 이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러한 욕망에 전면적으로 반하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구조체가 내뿜는 푸른 빛이 살짝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죽였으면 죽임 당한다, 뺏으면 빼앗긴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이고, 인간도 이 논리에 의해 움직이곤 하지. 단순하고 좋잖아.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인간은 복잡한 사고를 통해 더 큰 선을 이룩할 능력을 갖고 있어. 우리는 합리적 선택이라는 틀 하에, 선택을 할 때 자신과 타인을 모두 고려하곤 하지. 역사 속 성인들이 말하는 가르침이라는게 다 그런 거잖아? 인생의 황금률이니, 용서의 미덕이니."


"그게 인간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해. 운명이라는 여정 가운데에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


"운명과 선택....인가요."



루시아가 펼쳐내는 꿈과 같은 이야기에 주시윤은 답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듣고 따라갈 뿐이었다.


솔직히 주시윤도 루시아가 이 정도로 진지하게 이상론을 펼치리라곤, 그것도 직접 체험한 것과 같은 진솔한 이상론을 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말 나온 김에, 시윤이 너는 운명과 숙명의 차이를 알아?“


“둘이 비슷한 말 아닌가요? 잘 모르겠네요.”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주어진 길. 그리고 숙명은 내가 나에게 부여하는 길. 쉽게 말하면 뭔가를 선택하고 책임을 지는 것."



운명과 숙명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루시아의 푸른 눈동자는 어딘가 허전하면서 밝은 빛을 머금은 듯 보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지금 여기, 주시윤의 방이 아닌 다른 곳의 저 너머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하게 돼.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후회하고, 더는 선택을 하지 않겠다며 차갑게 식은 채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어. 하지만 인간은 선택하는 것을 포기해선 안 돼.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다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숙명을 따라야만 해."


"그것이 실패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말인가요?"


"그래. 부모님을 죽인 놈에게 그 날의 진실을 캐묻는다 해서, 내가 온전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실패하고 거기서 끝낼 생각이야?"


"그건....."


"실패할지라도 물어야지.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해야 하잖아. 왜 그랬는지를 듣고, 끝까지 고민하고, 다음에 나아갈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 순간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더 좋은 선택을 해야 하니까."


"....."


“설령 지금껏 실패만 해왔을지라도 괜찮아. 그 선택들이 모두 모여 언젠가 너를 결말로 이끌거니까. 선택을 관둔다면 결말에 이르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테니까."


"그러니 혹여나 그런 일이 닥쳐오게 된다면, 선택을 관둬선 안 돼.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을 믿지 말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고민하고 네 길을 정해. 그럼에도 용서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면... 그 때는 주저하지 말고 베어버려야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고 했잖아?"



장황했던 루시아의 이야기가 끝을 맺었다. 동시에 밝아졌던 것 같은 구조체의 푸른 빛도 처음처럼 살짝 어둡게 가라앉았다.



“도움이 좀 됐어?”



주시윤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사실 주시윤은 루시아가 무슨 말을 해오건 거기에 반박할 생각이었다. 터무니없는 이상론에 자신의 생각을 굽힐 의도가 없었다.


'결과가 실패일지라도 괜찮다' 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껏 인생을 살면서 자신에게 그런 것을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힐데에게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무력을 배웠다.


김하나와 코핀 컴퍼니 사람들에게는 어른이 되려면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배웠다.


실패를 당당히 인정하고, 실패 하나하나에 의미를 갖고 다른 선택을 또 하라니. 처음 들어보는 가르침이었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고 주시윤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루시아 양 말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얘기를 듣다보니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주시윤은 자신의 생각이 일차원적이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루시아의 말을 듣다 보니, 이전에 치후유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자신의 옛날 이야기를 해주며 치후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는 것과 현실은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그 때의 제가 언니를 믿지 못했던 것처럼, 상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답니다.'



처음 치후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다. 


자신의 부모님과 과거에 대해 진솔한 질문을 던진다 해서, 힐데가 그것을 받아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루시아가 해준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할지라도 선택해서 밀고 나가라는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면 타당한 이야기다. 


고립되어 죽거나, 뚫고 가려다가 죽거나, 두 선택지밖에 없다면 일말의 생존 가능성이라도 있는 후자를 택하는 것이 더 희망적이지 않는가.


루시아가 말하는 선택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면, 행동하지 않고 이대로 고민에 빠져 익사하느니 차라리 미친 척 하고 한 번 정면으로 들이받는게 나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불편한 관계를 유지한 채 끝나지 않는 고민으로 고통받을 수는 없다.


그것이 주시윤이 내린 결론이었다.


주시윤은 루시아를 향해 웃어보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 방향성이 잡혔어요. 그리고 괜히 날카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합니다."


"뭘 그런걸로 사과를 하고 있어. 괜찮아."



루시아는 사과할 게 뭐 있냐며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시윤아."


"네?"



루시아는 주시윤을 향해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말이야.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갑자기요?"


"응. 네가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게 너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주시윤은 손을 선뜻 잡지 않고 망설였다. 대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감사히 받죠."


"거절이구나?"


"....남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해결될 고민도 아닐 뿐더러,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고민이니까요."


"기억이라도 해둬. 지금 하고 있는 고민에는 내가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다른 문제가 생겼을 땐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가령 예를 들면... 지금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해준다거나."



루시아는 재차 손을 내밀었다. 은은한 빛 가운데 손을 내미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원래의 주시윤이었다면 대충 답하면서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의심 많은 그의 성격 상 선뜻 들어온 제안은 덥석 믿을 것이 못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주시윤은 루시아를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루시아라는 한 인간과, 그녀가 하는 말은 여타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 도와주겠다는 말도 결코 허황된 립서비스 차원은 아닐 것이다.



"그건... 확실히 그렇네요."


"그렇지?"



주시윤은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이 보드랍게 느껴졌다.


손을 떼어낸 루시아는 싱긋 웃으며 침대 맡에서 일어났다.



"가보려고요?"


"응. 나도 자러 가야지. 덕분에 즐거웠어."


"저야말로요. 덕분에 생각이 많이 정리될 수 있었어요."



루시아가 일어나 문가로 향하자 침대 맡에 떠 있던 구조체는 빛무리로 변해가며 사라졌다.


방문을 나서려다 말고 루시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도, 네 나름의 대답을 꼭 찾길 바랄게."



문이 닫혔다. 주시윤도 다시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빛의 주인이 떠나갔음에도, 은은한 푸른 빛이 여전히 방 내부를 수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잡은 손의 따스한 느낌도 여전히 오른손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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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쓸 수 있는게 아니다보니까 아~~ 이장면은 여기까진 진도 빼야해!! 하고 쓰다보면 이번 화처럼 양이 증식하드라...


주시윤의 고뇌라던가 루시아와의 대화 끝에 길을 정하는 걸 잘 표현해내고 싶었는데 내 능력으론 무리였음. 


괜히 불필요한 내용만 많은거 같아서 영 그렇네.


오늘도 자캐딸 네덕문학을 봐주는 게이들의 무한한 성원에 그저 감사합니다.


다음 화는 너네가 그렇게 좋아해 마지않는 여신님이 나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