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allhaven.cc/w/kwd6p7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 친구로써



--------------------------------------------------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 야베스의 기도 中



--------------------------------------------------



- 힐데가 봉인지로 떠나기 1시간 전

주시윤의 방

p.m.09:17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과연 뭐길래 날 이렇게 불렀을까?" 



살짝의 비음이 섞인 목소리를 하고 뒷짐을 진 루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에는 '지금 당장 와주실 수 있나요? 할 말이 있습니다.' 라는 주시윤의 메시지가 나타나 있었다.


허심탄회한 말투로 주시윤이 말했다.



"귀국하게 됐습니다."


"엥? 갑자기?"


"자세한건 설명하기 복잡해서요. 그렇게 됐다, 라는것만 알아주세요."


"음... 마지막 인사 차원에서 부른 거구나?"



볼맨 소리를 내며 루시아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말투와는 정반대로, 그녀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주시윤을 게슴츠레하게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걸 말하기 위해 날 부른게 아니잖아. 루시아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시윤 또한 눈으로 그에 답했다.


당연히 아니죠. 지금부터가 본론입니다. 라고.



"아뇨. 그 반대에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찾았는데, 이대로 그라운드 원에 강제로 돌아갈 순 없거든요."


"오호?"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죠? 지금 그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며칠 전, 루시아는 주시윤과 대화하며 선뜻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내비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탐탁치 않아하던 것을 뇌물을 건네듯 억지로 쑤셔넣었던 기억이 살아난다.


힐데가 자신을 강제로 송환시킨다는 초강수를 둘 거라곤 주시윤으로써도 생각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루시아의 조력 선언은 그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이자 조커 카드였다. 받아두길 잘했다며 주시윤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루시아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럴 줄 알았다는 미소를 지은 채 주시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너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루시아의 손가락이 튕겨졌다. 그러자 방 전체에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루시아를 중심으로 푸른색의 가느다란 선들이 회로를 이루며 방 전체를 나무뿌리처럼 잠식해 나갔다.


첫 날, 회담장에서 루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 봤던 결계능력이었다. 분명 도청 및 인식저해를 위해 설치해두는 것이리라.



"솔직하게 답해주길 바래. 도청은 걱정 말고."


"그러죠. 이상한 질문만 빼면요."



두 사람은 미소를 띈 채 시시콜콜한 말을 주고받았다. 


미소의 뒷면에는 무슨 질문이 들어올지,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를 갖고 끊임없는 두뇌회전이 시시각각 일어났다.


더 이상 힐데를 믿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루시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도 않는다. 주시윤은 뱀처럼 루시아를 은연중에 지긋이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루시아는 바다와도 같은 푸른 눈 속에 공허함을 품은 채 주시윤에게 미소짓고 있었다.


자, 첫번째. 라며 루시아가 운을 떼었다.





(반복재생 ㄴㄴ)



"이 도쿄 에어리어에 온 뒤로 악몽을 자주 꿨지?"



상정 외의 질문이 들어온 탓에 주시윤은 흠칫하며 놀랐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내가 어떻게 아는가는 중요하지 않아. 난 솔직하게 답해달라고 말했어. 도움을 받고 싶다면 꼭 제대로 말해줘."



주시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했다. 자신은 루시아에게 악몽을 꾼다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처음 밤산책 때 그녀와 시간을 보냈을 때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네요' 같은 뉘앙스의 말을 했을 뿐이다.


그것 하나만 갖고 주시윤은 악몽을 자주 꾼다는 사실을 도출해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두번째 질문이야. 기존에 꾸던 악몽이나 새로 떠오른 기억 속에서 '거대한 뱀'을 본 적이 있어?"


"....!!"



정확했다. 주시윤은 실제로 악몽을 꿀 때도, 다시 살아난 기억이 끝나가는 순간에도 거대한 검은 뱀을 목격했다.


그 부분만큼은 말싸움했던 힐데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루시아가 그것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한 주시윤이 뭐라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에, 루시아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말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알아챈 거지? 독심술사라도 되는 건가? 아니면 독자적인 정보망?


주시윤은 슬슬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또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일까.


이 소녀의 입에서 어떤 사실이 튀어나오려는 것인가.


항상 따뜻하게 느껴졌던 결계의 푸른 빛이 이 순간만큼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게 보였다.


루시아가 재차 입을 열었다.



"-너에게 특별한 힘이 하나 있지 않아? 용혈이었던가, 그런 이름이었을 텐데."



주시윤은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즐겨쓰던 단검을 꺼내들고 루시아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전투와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예리한 감각이 위험하다며 소리친다. 이 이상 그녀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은 위험하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아가 지금껏 물어본 것들은 주시윤이 알려준 적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용혈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주시윤의 주변에는 힐데의 엄금으로 인해 용혈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적어도 주시윤의 세상에 용혈이라는 개념을 아는 사람은 힐데와 그 자신, 단 둘 뿐이었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처음 친해진 사람이 그 용혈을 입에 담는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주시윤은 직감했다. 그녀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카운터 아카데미 학생? 그런 것 따위는 결코 아닐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벽처럼 루시아와 주시윤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걸 어떻게....!!!"


"안심해. 나쁜 의도는 없으니까."


"믿을 수가 없네요. 용혈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저희 스승님이나 저 말고는 없습니다."


"그럴까? 세상에 용혈을 가진게 너 외에도 몇명이나 있었는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되거든."



뭐가 신기할 것이 있냐는 듯 루시아의 시원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한걸음, 두걸음. 그녀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주시윤은 움찔 하며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더욱 수축시켰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뭘... 하시려고?!"


"나쁜 짓 하는거 아니야. 가만히 있어볼래?"



루시아의 푸른 눈이 주시윤의 눈동자를 한껏 담았다. 동시에 주변에 쳐진 결계가 공명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눈동자 속 공허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아니, 무언가가 아니다. 빛이었다. 빛이 보인다. 


푸른 빛, 희미하지만 분명히 푸른 빛이다. 눈동자 너머에 푸른 극광이 보인다.


망망대해와도 같은 눈동자 너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 주시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눈을 찌푸렸다.


그러기를 십 여 초. 지긋이 주시윤을 바라보다 말고 루시아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수상한 짓을 하려는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걱정어린 표정이 루시아의 얼굴에 나타났다.



"충격받진 마. 본론부터 말하자면, 상태가 심각해. 어째서인지 봉인되어 있는 뱀과 너 사이에 영혼이 연결된 듯한 흔적이 있어."


"잠깐만. 뭐라고요?"


"조금만 네가 약했더라도 뱀은 너를 그 악몽에서부터 먹어치웠을거야. 딱 좋은 타이밍에 도움을 요청해서 망정이지."



루시아에게 들려온 이야기는 충격적이기 짝이 없었다. 뱀이 자신을 잡아먹으려 했다니. 요 근래 들었던 이야기 중 가장 믿기 힘들었다.


게다가 영혼이 연결되어 있었다? 갇혀 있는 괴물이 무슨 수로 자신과 영혼을 연결한단 말인가?


주시윤 입장에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와도 같았다.



"저랑 뱀 사이에 영혼이 연결되어 있다뇨? 전 그 뱀인지 뭔지 하는게 어떤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연결 같은게 가능하죠?"


"아마, 그 새로 떠올랐다는 기억이 열쇠이지 않을까?"


"기억..... 아!!"



주시윤의 머릿속에 전구가 번쩍 하고 불을 뿜었다.


괴이한 형태의 침식체에게 당해 의식을 잃게 된 것은, 무언가 이상한 촉수 같은 것에 몸이 꿰뚫리고 난 직후였다.


그 이후로 기억하지 못하던 것을 새로 떠올렸고, 살아난 기억의 말미에 거대한 검은 뱀을 보는 것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째깍째깍. 주시윤의 사고가 시곗바늘이 회전하는 소리에 맞춰 빠르게 움직인다.


주시윤에게 찾아온 극적인 변화는 전부 그 침식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만약 그 연결이라는 것이 그 날의 일 때문에 일어났다면-



"설마...."


"기억이라는 것은 영혼이 갖고 있는 힘의 세포와 같아. 영혼은 외부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기 때문에, 보통 인간의 기억은 쉽게 변질되지 않거든."



기억과 관련된 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정신은 너무나 섬세하기에, 침입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기억을 건드리려는 움직임이 있다면, 피접촉자의 영혼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제거하려 든다. 외부의 병균을 항체가 잡아먹듯이.



"하지만 새로운 기억이 별일 없이 불현듯 떠올랐다는 것은, 외부와 너 사이의 연결이 거부반응 없이 이뤄졌다는 얘기가 돼. 


그건 좀 눈여겨 봐야할 문제야. 놈이 무슨 짓을 했길래 힘들이지 않고 네 기억에, 영혼에 간섭할 수 있었는지가 말이야."


"이 기억이 뱀이라는 괴물의 함정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내 생각에는, 그래."



결계가 자아내는 푸른 빛이 루시아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푸른 눈동자가 이 순간만큼은 유달리 더욱 빛나는 듯 했다.


빛과 함께 루시아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주시윤의 귀에 천천히 내려앉아갔다. 



"처음은 꿈이었겠지. 꿈 속에서 목소리만 들려오는 식으로. 거기에 더해 잊혀진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면, 그것이 널 더욱 혼란스럽게 했을 터.


네가 알고 있는 것과 새로 알게 된 것이 혼선을 일으키다 보면, 너는 참다 못해 계속 진실을 찾아 헤멜거야.


종국에는 진실에 눈이 먼 나머지 주변의 만류들을 전부 뿌리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수준까지 갔을 거고. 그렇게 되면?"



와앙!! 하고 루시아가 양 손의 손가락들을 세우며 짐승처럼 작게 포효했다.



"게임 오버. 뱀은 지속적으로 단서를 뿌리며 혼자 남은 네가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거나, 모종의 방법을 통해 너를 덮쳐 잡아 먹었겠지."


"...왜죠? 왜 그것이 저를 노리고 있는 거죠? 저와 뱀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시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어둡게 물들어만 갔다.


루시아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다 정답이었다. 직접 옆에서 자신을 관찰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자신만큼이나 스스로의 상태를 잘 안다는 듯 말해온다.


심각해지는 얼굴을 한 주시윤과는 달리, 루시아는 손가락을 휘휘 흔들며 쾌활하게 말했다.



"글쎄.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직접 가서 물어보는 수 밖에 없지 않겠어?"


"절 노리고 있는 놈에게 찾아간다고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걱정 마. 내가 널 잡아먹히게 내버려둘 사람으로 보여?"



쿡쿡 웃으며 루시아는 주시윤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 


따뜻한 손의 온기가 어깨를 통해 느껴졌다. 따스하고 상냥한 말투가 주시윤에게 들려왔다.



"말했지? 널 도와주겠다고. 네가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널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무엇인지 밝혀줄게. 대신 조금 과격한 방법이 될 수도 있어. 괜찮겠어?"


"......"



이전에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노라고. 주시윤은 힐데에게 선포하다시피 말했다.


그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겠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내고 말겠다는 주시윤의 굳은 결심이었다.


과격한 방법일지라도 상관 없다. 주시윤은 진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시윤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루시아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좋아. 잘 들어. 지금부터 널 데리고 뱀을 찾아갈거야."


"....어이쿠. 진심으로 하시는 말일 줄은."


"널 봤을 때부터 줄곧 진심이었어. 녀석은 좋구나 하고 달려들겠지만, 나는 네가 놈에게 지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줄거야.


놈에게 캐낼 수 있는 건 다 캐내도록 해. 아마 네게 벌어졌던 일련의 일을 주도한 것은 전부 그 놈일 테니까.


일이 다 끝난다면, 내 보조 하에 네가 놈을 꺾어서 그 힘을 역으로 뺏어버리면 돼. 네 용혈을 사용하기만 한다면 가능한 일이야."


"용혈.... 이요?"



용혈.


힐데도 자신도 아닌 남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는 감각은 주시윤에게 있어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다 좋다. 뱀이 날 두고 벌이는 음모가 있다는 것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날 도와주겠다는 루시아의 의사도.


하지만 왜 하필 용혈인가? 힐데가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며 한사코 막았던 힘을 사용하라니. 


루시아의 방향으로 기울려던 마음이 순항 중에 방지턱을 만나 덜커덕거렸다.


주시윤은 힐데에게 의지하기를 그만두고 끊어내리라 다짐했었지만, 그것만큼은 아직 쉬이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의심이 역력한 표정으로 주시윤이 입을 열었다.



"....루시아 양. 용혈을 깨운다면 제가 스승님께 먼저 박살이 날겁니다. 그걸 도운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동반자살이 꿈이신가요?"


"어차피 네 스승님이랑도 척을 진 마당에, 아직도 망설이는거야?"



주시윤은 답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불온한 공기가 루시아로부터 흘러나왔다.


평생을 힐데와 함께 정도正道를 걸어왔다. 그런 자신조차 몇 번 사용해본 적 없는 금기된 힘을 대뜸 쓰라고 한다.


그런 말을 쉬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제 스승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힘, 용혈은 사용하면 할수록 세상에 망조가 드는 것은 물론, 저 자신마저 집어삼키고 말 것이라고요."


뱀의 수작질을 막고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겠다 하셨잖아요? 그런 당신이 용혈을 쓰라고 하는 건 제게 마치 뱀에게 잡아 먹히라는 것처럼 들려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거니?"



어린 시절, 힐데는 주시윤에게 항상 용혈의 위험성에 대해 말해왔다.


보유자를 집어삼켜 괴물로 만드는 악마의 힘이라고. 힘에 먹히지 않게 하기 위해 곁에서 도와주겠노라고.


그 금언은 아직도 남아 주시윤의 마음을 근본부터 옭아메고 있었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루시아는 주시윤의 금제를 풀어내야 했다.



"오히려 제가 힘을 깨우는 것이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저희의 신상에는 아주 불리하답니다. 애초에 그런 제안을 하는 의도가-"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루시아는 주시윤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었다. 주시윤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에 들려온 말은 주시윤을 다시 한 번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유미나. 네 후배라는 그 아이. 그 아이는 힘을 마음껏 써도, 아무에게도 책망받지 않잖아?"


"....?!"


"하지만 너는 어때? 남다른 힘을 갖고 있음에도 그 힘을 쓰지 못하도록 계속 틀어막힌 채, 알고 싶은 것조차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살아왔지. 


네 스승이 미나랑 너를 대할 때 차이가 있지 않아? 왜 그런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



또다. 또 예상 너머의 사실들이 루시아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용혈의 존재, 말한 적도 없는 자신의 몸 상태에 이어 이젠 유미나에 대한 이야기까지.


주시윤은 분명 기억했다. 루시아와 만났던 첫번째 날, 그녀는 유미나 이야기가 나왔을 때 잘 모른다고 답했다.


휴학 후에 다시 들어온 편입생이라서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라면 알지 못한다고.


그랬던 사람이 대뜸 유미나와 힐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언급한다? 


주시윤은 깜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미나 양과 스승님의 관계는 또 어떻게..."



뒷걸음질친 만큼, 루시아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위험한 힘일수록 담아두려고만 하지 말고,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 단련의 시간은 끝났어. 이제 네게 남은건 널 둘러싼 의문들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것.


힐데와 유미나 간의 관계, 네가 꿔왔던 악몽, 감춰졌던 네 기억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용혈을 깨워 뱀을 굴복시키는 것 뿐이야.


"용혈이 뭐 하는 힘인지는 알고 그러는 겁니까?! 애당초 이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것부터가 수상ㅎ-"



다급해보이는 모습으로 주시윤은 루시아에게 윽박질렀다.


그런 그에게 진정하라는 듯, 루시아는 검지손가락을 뻗어 주시윤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기품있는 움직임. 여유로운 미소. 흔들림 없는 눈.


루시아가 보여주는 것은 악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카리스마가 아니었다.


많은 의심이 들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주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녀는 분위기로 주시윤을 이끌고, 한 마디의 말로 상황을 결정짓는다.








"-라고, 너네 사장이 귀띔해주더라고."


"뭐라고요?"



주시윤은 아연실색했다. 뒤이어 들려온 대답은 놀랍다 못해 오히려 믿을 수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용혈에, 유미나와 힐데 사이에 이어, 코핀 컴퍼니의 사장을 거론하다니. 이 여자,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사장이라면 믿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주시윤은 반쯤 놀란 가슴을 부여안고 게슴츠레하게 눈을 치켜뜨고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제가 그걸 손쉽게 믿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루시아 양?"


"응. 믿어줬으면 해. 너희 회사 사장님인 머신 갑에게 모종의 의뢰를 받았어.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기로서니, 너희의 개인사까지 꿰고 있다는건 이상하잖아?"



주시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루시아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 역시 지워지지 않았다.


숨길 대로 숨겨온 힐데에게 이미 된통 상처를 입은 새끼 뱀은 조용히 몸을 움츠린 채 루시아를 응시할 뿐이었다.



"너네 사장이랑 구면이다.... 라고 말한들, 쉽게 믿을수는 없겠지. 그치만 난 너희 스승과는 달라. 네게 숨기는 것 없이 털어놓아야만 네가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렇다고 대뜸 난 너희 사장님 지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몇 번 흔들어댄 다음에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


"......"


"네 스스로 고민하고, 네가 판단해. 이전에 내가 말했던거 기억하지? 넌 여타 아이들이랑은 다르게 영민하니까." 


선택을 관둬선 안 돼.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을 믿지 말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토대로 고민하고 네 길을 정해.


달밤 아래에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되살아난다.


영민한 뱀은 천천히, 루시아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하나하나 복기한다.


그녀가 언급했던 것들을 전부 교차검증하며, 루시아 테일러라는 소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재단한다.


일본에 오자마자 친해진 것. 악몽과 기억에 관한 해박한 지식. 용혈의 존재. 힐데와 유미나의 관계.


루시아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그 모든 발언들이, 코핀 컴퍼니 사장 머신 갑의 존재로 인해 한데 얽힌다.


발언의 출처는 믿을 만 한가?


개연성이 있는가?


나에게 해를 끼칠 여지는 없는가?


침묵이 흐르고, 시간이 느리게 이어진다.



"....그런가요."



판단 완료. 주시윤은 결정을 분명히 했다.


사전에 모두 합의된 관계이고, 공유되었던 정보라면 이렇게 해박하게 아는 것이 당연하다.


오히려 루시아가 말했던 대로 처음부터 그녀가 머신 갑과 아는 사이임을 천명했다면, 주시윤은 그녀를 더욱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리라.



"하하... 어쩐지 처음부터 뭔가 죽이 잘 맞는 것 같다 했더니, 이거야 원. 제대로 당했네요."


"믿기로 했구나?"


"일단은요. 사장님과 연줄이 있다고 한다면, 손을 잡을 최소한의 확증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시윤은 허탈하면서도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그런 거였구나. 


말은 잠정적인 신뢰랍시고 했지만, 일본에 온 이래 처음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래.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 하나는 내가 널 도와 뱀을 없애는 것이 계약의 일환이라는 거, 다른 하나는 너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 계약 때문이 아닌 진심이었다는 거야. 어때? 이정도면 정리가 될까?"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루시아가 머신 갑이 보낸 사람이라면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녀는 힐데처럼 된통 꽁꽁 싸맨 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지금은 스승인 힐데보다 훨씬 믿음직한 조력자였다.


한껏 편해진 표정이 주시윤의 얼굴에 자리했다. 푸르른 결계의 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그윽하게 비추었다.


주시윤의 마음 한복판에서 마지막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머신 갑과 루시아가 연줄이 있었다면, 루시아는 어떤 사람이기에 머신 갑과 연결될 수 있었을까?


푸른 빛의 한복판에서 주시윤은 떼묻지 않은 순수함을,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루시아에게 건넸다.



"...한가지만 묻죠. 루시아 양은 정말로 뭐하는 사람이죠?"


"흐음...?"



이것만큼은 알려줄 생각이 없었는지, 루시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침묵이 감돌았다.


웅웅거리는 결계의 소리는 루시아의 갈등하는 마음 상태를 알려주는 듯 했다.


솔직히 주시윤은 이 질문에 루시아가 답하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사람인 이상 비밀이 없을 수는 없는 법. 그녀는 이미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다. 신뢰할 수 있는 조력자에게 비밀 한 두개 정도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십여 초 동안 말이 없다가, 루시아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친구로써 묻는 거야? 아니면 용혈의 계승자로써 묻는 건가? 대답 여하에 따라 내 대답도 달라질거야."



새침한 표정을 하고 루시아는 빤히 주시윤의 눈과 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주시윤은 빠르게, 신중하게 답을 내놓았다.



"....친구로써입니다."


"후후. 그래."



내가 누구인가- 하고 루시아는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얼굴에는 싱긋 하고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도내 SSR랭크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고등부 2학년 편입생. 주시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마성의 소녀."


".....네?"



주시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들려온 대답은 완전 딴판이었다. 


어째 그럴 것 같더라니. 장난기 많은 루시아는 보통 이런 식으로 곤란한 상황을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을 통해 주시윤은 루시아의 진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너의 아군. '친구로써' 너를 돕고 싶어하는 자."



친구로써, 금발의 소녀는 새끼 뱀에게 아군임을 천명한다.


친구로써, 금발의 소녀는 자신의 아군에게 고운 손을 내민다.


친구로써, 금발의 소녀는 순수한 미소를 띈 채 눈 앞의 소년을 향해 웃는다.



"....그렇군요."



그리고 친구로써, 주시윤은 루시아의 손을 살포시 맞잡았다.



"좋습니다. 믿도록 할게요. 친구로써."



실눈을 뜬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눈을 온전히 뜨고 푸른 눈동자를 드러낸 소년만이 거기 있었다.


같은 색의 눈을 가진 두 사람을 이어주듯, 은은한 빛을 내뿜던 결계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주시윤의 방을 뒤덮고 있던 푸른 빛의 회로들이 전부 사라지자, 두 사람의 모습 또한 온데간데 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



1주일만에 써왔어!!!! 칭찬해죠!!!!!!!!!!!!!!


전편 도입부에 통화하던건 루시아와 관남츙이었답니다~ 사실 ㅈㄴ 막혀서 안써졌는데, 내가 쓰고 싶었던 대사를 다 쳐내고 쓰니까 매끄럽게 써지더라.


각시윤 나온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완결이 안나는 각시윤 소설이라서 미안하고, 이런 웹소같지도 않은 틀딱픽 똥글 계속 봐줘서 정말 고마워.


주시윤과 루시아에게 어떤 일이 펼쳐지는지, 그리고 힐데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 줄거리를 지켜봐주길 바래. 밝은 내용은 아닐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