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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시윤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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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두 갈림길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


- 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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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결계 최심부

제8봉인역

p.m.10:30




츠즈즈즈즈즈-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주변의 공간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시윤과 루시아는 더 이상 방에 있지 않았다. 거대한 동굴 한복판이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동굴 내부는 푸른 빛의 선들이 곳곳에 나무뿌리처럼 뻗어 있어서, 마치 몇 천년 동안 숨겨져 있던 미지의 세계를 보는 듯 했다.


루시아는 앞장서서 주시윤의 손을 잡고 길을 인도했다. 앞에 펼쳐진 동굴의 경관은 안내가 없다면 어디가 길일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계를 직접 설계한 루시아나, 봉인을 대대로 지켜온 나나하라 자매와 힐데 정도가 아니라면 백 퍼센트 헤매겠지.


주시윤은 홀로 이곳에 찾아오지 않은 것을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스승님이 저흴 분명 쫓아올텐데요. 안 들킬 방법 같은건 있습니까? 이미 눈치채셨을거에요."


"네 말대로야. 이미 눈치채고 여기로 달려오고 있겠지."



하지만, 이라 말하며 루시아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술자는 작업할 때 항상 후환을 대비할 장치를 해놓기 마련이거든. 설마 내가 순수한 의도로 결계를 보강하기만 했을까봐?"


"지름길이군요."


"응. 공간을 통째로 넘어온거지. 여길 평소 오던 대로 찾아오려면 시간 좀 잡아먹을걸?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어."



푸른 빛이 감도는 동굴 계단의 층계참을 밟으며 주시윤과 루시아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면 갈수록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갔다. 결계를 여기까지 설치할 수는 없었는지, 푸르른 빛도 점점 옅어져만 갔다.


주시윤은 마치 어둠이 꿈틀거리며 속삭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았다. 


정말로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당장에라도 주변에 산재해 있는 어둠이 꿈틀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듯 했다.


루시아의 구조체가 내뿜는 빛에 의지하며 주시윤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계속 움직였다.


짙은 침묵과 어둠 속에서 둘은 소소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뱀을 없앤다는게 가능한 일인가요? 이전에, 치나츠 양이 첫날 뱀을 없애달라는 말에 스승님께선 단호하게 거절하셨잖아요?"


"그래.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일축했지만, 그건 나나하라 가문의 힘만으론 불가능하다는 의미. 시윤이 네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해."


"또 용혈인가요? 이 힘이 대체 뭐라고...?"


"어렵지 않은 얘기야. 뱀의 힘과 네가 가진 용혈은 근본적으로 같은 힘이거든. 그렇기에 부수는 것도, 다루는 것도. 누구보다 네가 수월하게 할 수 있지."



걷다 말고 주시윤은 발걸음을 멈췄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생뚱맞은 이야기가 주시윤의 사고를 강타한다.


나의 용혈과 그 미친 침식체의 힘이 같은 힘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건 또 무슨...."


"어떻게 그게 가능한진 잘 몰라. 아마 네 스승님이라면 알테지만, 너도 알지? 쉬이 말해줄 인물이 아니라는 거."



주시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였다면 이런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하도록 대화를 단절시켰겠지.


지금 같이 있는 사람이 힐데가 아니라 루시아여서 다행이라고 주시윤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알기론 용혈이란 피를 매개로 하여 이뤄지는 주술의 모든 총체와도 같은 힘.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것은 그 편린에 불과해. 영혼을 정화하고, 악을 사멸시키고, 그 외에도 많은 권능을 내포하고 있는 신성한 힘... 이라고나 할까."



처음 들어보는 사실에 주시윤은 귀를 집중하여 루시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제게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었군요...."


"생각보다 유니크한 능력이거든 그거? 물론 뱀 역시 너와 같은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너를 찾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하기 시작한 거지. 예를 들자면-"


"꿈인가요?"


"이해가 빠른데? 맞아. 그 이상한 꿈의 정체는 뱀의 영혼과 네가 상접하면서 일어난 공명 현상과도 같은 것. 아마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던가 그랬을 텐데?"



루시아의 말대로였다.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계승자야. 결단의 때가 왔다. 널 구속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거라.


그런 목소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삭임은 주시윤의 꿈 속에서 계속해서 들려왔다.



"네. 하하, 보지도 않았는데 정말 잘 아시네요."


"그 꿈은 너는 물론이고 뱀에게도 영향을 줬어. 뱀은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존재를 발견하자, 어떻게든 양자간의 힘을 통하게 만들 '길'을 뚫고자 했을거야.


봉인지 쪽에 있었던 나와 네 스승님에게 모습을 드러내 움직임을 묶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부하들을 네가 있는 저택으로 보내는 양동작전을 쓴다던지. 그런 식으로 말이야."


"설마.... 그 이상한 침식체도...."


"추측컨데 뱀의 수하겠지. 내 결계가 감지해내지 못한 이유는 아직도 불명이지만서도. 어쨌든, 그 날의 저택 전투는 그렇게 일어난거야."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주시윤의 생각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뱀이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자신과 같은 힘을 가졌고, 무엇 때문에 자신을 노리는 것일까.


놈이 자신과 같은 힘을 가졌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며, 우리 가족은 무엇이었을까?


뱀의 환생이라도 된단 말인가?



"루시아 양. 그럼 저와 제 가족들이 용혈이라는 위험한 힘을 갖게 된 이유는 뭐죠? 저희 가족은... 대체 뭔가요? 인간이 맞긴 한건가요?"



주시윤은 평소처럼 말을 정리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루시아에게 털어놓았다.


구조체가 뿜는 빛에 의해 주시윤의 표정이 드러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어딘가 모르게 슬픔과 의문이 섞인 얼굴이었다.


대체 어째서 자신과 가족이 그런 저주스러운 힘을 품고 살아야 했는지, 주시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 그 힘 때문에 부모님이 힐데에게 죽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체 어떤 존재였길래?



"....글쎄."



루시아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과 달리, 바로 답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말하려곤 하지만 말하지 못하고 계속 우물쭈물했다.


루시아는 심호흡을 했다. 말해야만 한다.


이런 질문까지 해올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힐데와 다른 노선을 타겠다고 내걸은 이상 그녀는 모든 진실을 말해줄 이유가 있었다.



"가능성은 두가지. 뱀이 너희 가문의 혈통에 손을 대서 자신과 같은 힘을 갖게 만들었다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너희 가문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시작됐다던지."


"그건....?!"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야. 적당히 걸러 듣도록 해. 말이 안되잖아? 이렇게 순도 100% 인간인 네가 사실 인간이 아니라니. 차라리 내가 그림자 침식체라는 말이 더 현실성 있겠어."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루시아 역시 정확한 답을 해주지는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생판 처음 본 타인이 뭔가를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한들, 가족사까지 전부 꿰고 있을 리가 없다.


사장의 지인이어도 전해들은 사실이 아니고서야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할 터였다.



"반복하는 거지만 결국 진실을 아는 것은 네 스승님이거나, 아니면 뱀 뿐이야. 어쩌겠어. 스승님을 두들겨서 진실을 알아낼 순 없으니, 나쁜 놈을 두들겨서 진실을 캐내는 수 밖에."



괘념치 말라며 루시아는 주시윤을 다독여줬다. 여전히 생각이 복잡한 지금, 그녀의 위로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주시윤은 지금껏 들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차분하게 정리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과 정보들이 그를 뱀에게로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뱀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부모님에 대한 진실을 파헤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내려가는 길은 더 이상 없었다. 


아까 전부터는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는 통로를 기약 없이 걷고 또 걸어왔다. 이쯤 오니 결계의 빛은 배터리가 다 된 손전등처럼 옅어졌다.


대신, 칠흑같은 어둠 너머로 무언가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출처 :  깜짝....나나하라가문 이벤트 컷씬 유출...jpg - 카운터사이드 채널 (arca.live) 



"이건.... 일본의 전통 건축물 아닌가요?"


"도리이야. 다 왔어. 여기가 봉인의 최심부야."



도리이란 신사의 입구에 보통 세워지는 구조물. 신성한 곳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가진 관문이다.


인간이 사는 물질 세계와 신들이 사는 신성한 세계의 경계를 나누는 구조물이지만, 봉인하고 있는 대상 탓에 지옥과 현실의 경계를 보는 것처럼 영문 모를 불길함이 느껴졌다.


도리이 너머로는 칠흑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정말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점이 되려 공포심을 자극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은 결전의 때가 왔다는 것.


저 문을 넘어서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자신을 덮칠 것이다.


주시윤은 자신의 등을 타고 오르는 긴장을 오롯히 감내했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것을 읽었는지, 루시아는 잡고 있던 주시윤의 손에 더욱 힘을 꽉 주었다.



"걱정 마. 가자."


"...네."



맞잡은 손으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힘내라고 다독였다. 


손길의 따뜻함에 힘입어 주시윤은 루시아와 함께 도리이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온통 흑색 뿐인 저 너머로 발걸음을 뗐다.


기분 탓인진 몰라도 무언가가 꺼림찍하게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 했다.


정말 드문드문 들리던 속삭이는 소리도 더 자주 들려왔다.


타인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절대 제정신으로는 혼자 이 곳에 들어오지 못했으리라.


경계를 통과하여 조금 걷자, 아까와 같은 거대한 대공동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공동 내부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주변을 뒤덮고 있는 어둠이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까 전부터 그런 낌새를 느끼긴 했었는데, 최심부까지 내려오니 그것이 정말일 줄이야. 


아마 뱀의 영향권 아래 일어나는 현실 침식 현상의 하나일 것이라고 주시윤은 짐작했다.



"이쪽이야."



루시아는 주시윤을 대공동의 정중앙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이 걸치고 온 얇은 겉옷을 벗어 그 한복판에 놓고, 거기에 주시윤을 앉혔다.


이곳 저곳을 쳐다보며 루시아는 바쁘게 손짓했다. 그녀가 손짓할 때마다 푸른 빛의 선이 그녀의 발치로부터 이어져 시선이 맞닿았던 곳까지 이어졌다.


본래라면 찬란히 빛나야 할 선들이 이번에는 제대로 빛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공동을 잠식하고 있는 어둠에는 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쁘게 밑작업을 진행하는 루시아를 향해 주시윤이 말했다.



"루시아 양. 용혈을 깨우는 것이 정말 옳은 선택인 걸까요...?"


"응?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뭔데?"


"얘길 듣다 보니 스승님께서 왜 용혈 사용을 막으려 드셨는지, 이제 좀 와닿아서 말이죠."



힐데가 했던 말에 의하면, 뱀은 말만으로 사람을 홀리고 영혼을 타락시킬 수 있다.


지금껏 오갔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종합해 봤을 때 용혈과 뱀의 힘이 같다고 가정한다면, 용혈을 발동하는 즉시 뱀이 자신의 영혼을 침식시키려 들 터.



"제 용혈이 정말 뱀과 같은 힘이라고 한다면, 이 힘을 썼을 때 제가 뱀에게 물들지 않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같은 힘이라면, 힘의 사용 자체가 놈과 저 사이의 연결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때 아닌 반문에 루시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흐음, 하고 루시아는 대답 대신 주시윤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자꾸만 딴지를 거는 것이 루시아는 짜증난다기보다는 되려 흥미로웠다.


주시윤의 사장이라는 '그 녀석' 이 사람 하나는 굉장히 잘 골랐구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마음 속에 돋아났다.



"이래서야 저도 망설여지는걸요.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그래.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주시윤은 그냥 영민한 인재 정도가 아니었다.


아무리 옆에서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고, 납득할 만한 답이 나올 때까지 묻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상처를 입었음에도, 상대를 한 쪽으로 규정하려 하지 않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우유부단한 사람, 바보 내지는 등신이라고 폄하하겠지.


하지만 몰라서 고민하는 것과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이 소년은, 영민한 뱀의 후예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 항상 가치를 재단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미안해. 다른 방법은 없어. 그것 또한 네게 주어진 운명이요, 네가 넘어야 하는 산이야."



그렇기에 루시아는 더욱 강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어느 세계든 답을 구하는 자는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는 옳은 길을 걸었음에도 먼지가 되어 스러져갔다.


단지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힘이 곧 정의가 된다는 세계의 논리에 의해서.



"조금 진지한 얘기야. 잘 들어줬으면 해."



적어도 주시윤은 그런 결말을 맞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루시아는 주시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뱀은 아마 네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너와 같은 본질과 혈맥을 가진 유일한 존재야. 


그렇기에 뱀을 없애는 것은 인류를 구한다는 공리적인 이야기 이전에, 네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


이대로 돌아간다면 네가 진실에 접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뱀을 없애버릴 다음 번 기회가 있을지는 미지수야."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놈은 너를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어. 네가 힘을 쓰지 않겠다고 해도, 언젠가는 꼭 너를 찾아가고 말 거야. 


너 뿐만이 아니야. 놈은, 놈들은, 이 세상 전체를 멸망으로 끌어내릴 생각밖에 안하는 괴물이니까."



루시아는 주시윤 앞에 자세를 굽혀 앉았다. 그녀의 손이 주시윤의 양 어깨에 얹어졌다. 두 남녀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의 청명한 빛을 담았다.



"지금의 세상이 누리는 안정은 결코 오래가지 못해. 화산폭발로 멸망할 뻔했는데, 편법을 써서 화산을 잠재운 거지. 화산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하지 않겠어?"



루시아는 주시윤 앞에 자세를 굽혀 앉았다. 그녀의 손이 주시윤의 양 어깨에 얹어졌다. 두 남녀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의 청명한 빛을 담았다. 


어깨에 얹은 손에 무심코 힘이 더욱 들어간다. 루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하고 힘있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 네게 힘이 있다면 사용할 줄 알아야 해. 힘을 얻을 기회가 왔다면, 놓치지 말고 잡아야 해. 


힘없는 정의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으니까. 화산이 폭발한다면 네 후배건, 네 소중한 사람들이건, 아무도 지켜줄 수 없으니까.


네가, 지키는거야. 오직 너만이, 지킬 수 있어."



너무나도 절실한 말투.


그 진심어린 말에 주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감화되어갔다.


그래. 지켜야 한다.


부모님을 지키지 못했듯, 다른 사람들마저 지키지 못하고 싶진 않으니까.



"루시아 양...."


"그리고 말야. 네 의문은 아주 예리했어. 확실히 그럴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지. 다만, 내가 그에 대한 대책도 없이 널 무작정 여기로 끌고 왔을까봐?"



루시아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그녀의 등 뒤에서 푸른 색 선이 은은하게 빛무리를 일으켰다. 


공간 너머에서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나타나려 했다. 루시아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묵빛의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그마의 본체보다도 살짝 더 큰 묵빛 케이스의 한 켠에는 하얀 글씨로 자그마하게 무언가 쓰여 있었다.



Administration license

Tech Lv.5

-Confidential-

Brionac, The fallen divinitas



상자에 적힌 것은 관리국임을 드러내는 문양과 문자.


루시아가 자신을 사장의 아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은 확실히 빈 말이 아니었다.



"테크 레벨 5... 관리국 디바이스? 사장님과 아는 사이라는거, 정말이셨군요."


"이게 네가 말했던 걱정에 대한 대책이야. 내가 네 사장님 지인이 아니면 이 관리국 장비를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루시아는 어깨를 으쓱 하며 미소지었다.



"어때. 이제 좀 내 방법에 대해 확신이 들어?"


"......"



주시윤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에 루시아가 말했던 것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메아리쳤다.


주시윤은 스스로 되물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있느냐고.


유미나와 힐데, 서윤과 알트 소대, 부사장 이수연, 에디 소대, 김하나 부장, 레나와 클로에, 코핀 컴퍼니의 모든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다시 되물었다. 이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있느냐고.


주시윤은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힐데가 가르쳐준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여전히 그냥저냥 평범한 카운터였고, 그냥저냥 잘 싸우는 전사였다.


이번에는 지켜내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부모님의 그리운 얼굴을 떠올린다.


부모님 생각에 주시윤은 고개를 떨궈 표정을 숨겼다. 주시윤의 양 주먹이 꽉 쥐어졌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은 사치일까? 그리움으로부터 비롯된 후회와 슬픔은 차곡차곡 쌓이며 계단을 이루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었다. 힘을 얻을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다시는 누군가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힘을 얻겠냐고.


주시윤의 마음은 그 계단을 딛고 올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진실을 향해 해쳐나가겠노라고.


더는, 잃지 않겠노라고.


굳게 선언했다.



"쓰겠습니다. 용혈."



주시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다. 어떤 순간보다도 확신에 차 있었다.


그깟 힘, 모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써주겠다.


루시아가 말했던 것처럼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써주리라.


확실한 대답이 나오자 루시아의 표정이 한결 밝아진 것처럼 보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고마워."



루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주시윤도 그녀를 따라 웃음지었다.


결심이 섰다면, 지금부터는 결전의 때이다.


치맛자락을 툭툭 털고 일어나며 루시아가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너는 뱀이 봉인되어 있는 이면세계 최심부로 떨어지게 될거야. 놈의 영혼과 대면한다고 생각해. 


놈은 너를 만나면 네 정신을 침식시켜서 먹어 치우려고 할거야. 같은 힘을 가진 존재라니, 놈에게는 최고의 진수성찬일 테니까. 


네 스승님이 말했던 거 기억하지? 카운터든 아니든 '사람' 이라면 전부 놈의 양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


"말만 들어도 인간은 미쳐버린다고 하셨죠. 그런 거랑 대면해서 살아있을 수나 있을런지 싶지만."


"물론이야. 널 지켜내려고 가져온 것이 이 장비거든."



루시아는 등 뒤에 서있는 묵빛 케이스를 곁눈질로 가리켰다.



"이 장비의 연산보조능력으로 내 결계능력을 증폭시켜서 시윤이 너의 정신에 결계를 씌울거야. 컴퓨터로 치면 바이러스 침투를 막기 위해 방어벽을 설치하는 것. 


그러면 놈이 백날 네 귓가에 떠들어대도 정신 침식을 무시할 수 있게 되지. 단,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네 영혼을 지키는 것 뿐. 그 이상의 지원을 해줄 수는 없어."


"놈을 마무리짓는 것은 오롯이 제 몫이라 이거군요."


"응. 저택의 대결계에다가, 이 봉인에도 결계를 쳐두느라 힘을 너무 많이 소모했거든.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뇨. 놈으로부터 정신을 보호해주신다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게다가..."



주시윤의 순박한 눈이 무서울 정도의 투지를 머금었다.



"대충대충 생각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저는 제가 마무리를 지어야 할 일이라면 제 손으로 끝장을 내야만 적성이 풀리는 타입이거든요."


"후후. 그렇구나. 시작할게."



루시아는 무릎을 꿇은 채 주시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까 설치해 두었던 결계들이 그녀에게로 응집되어 가며 주변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루시아와 주시윤의 푸른 눈이 선과 선으로 이어졌다. 주시윤은 익숙한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아까 방에서 가만히 있으라며 자신을 지긋이 쳐다봤을 때의 그 느낌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감각과 풍경 너머로, 새로운 심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세계가 보인다. 푸른 극광이 자리한 하늘이 보인다.



"?!"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밀어내는 듯한 느낌에 주시윤은 뒷걸음질치며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뭔가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넘어졌는데도 그의 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추정컨데 영혼만이 빠져나가 이동하는 것이겠지.


정말 영혼만을 빼서 저 너머로 보낸다니, 루시아가 말했던 영혼과 대면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넘어진 것에서 멈추지 않고, 주시윤은 무언가에 강하게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행운을 빌어."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실이 끊어지듯 무너지는 자신의 몸을 받아내는 루시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


주시윤의 의식은 한없이 뒤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BGM out)




.......




주시윤의 몸에 결계를 둘러 안전하게 보호하고 나서, 루시아는 자신이 가져온 케이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철컥, 하고 소리가 나며 루시아가 가지고 온 묵빛 케이스가 열렸다.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는지 증기가 내부에서 뿜어져 나왔다.


검은 상자 안에서 날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황금빛의 창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창의 몰골은 생각보다 초췌했다. 루시아가 꼭 구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에 비해, 그 모습은 위용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눈에 봐도 제대로 보수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창날은 마모되었고, 어떤 부분은 아예 없어져 있기까지 했다.


루시아는 그리움에 가득찬 시선으로 창을 잠시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할 때다.


루시아는 손을 뻗어 창을 잡았다. 익숙한 느낌이 창을 통해 전해져온다.



시스템 접속.


신성창 브류나크 기동.


경고. 장비 파손 및 호환성 문제로 인한 기능 잠금.


한정기동 실시.



기동이라도 되는 것이 어디인가. 이 정도만 해도 주시윤의 정신을 지키는 것에는 무리 없을 것이다.


루시아는 내심 자신의 협력자인 관리자에게 감사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형태로 창의 옵션을 조정했다.


창날이 촤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전개되어간다. 창은 루시아의 손을 떠나 공중에 뜬 채 스스로 길이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창날이 펼쳐지고, 창대가 수축과 변형을 반복하며 기계장치처럼 새로운 형태로 짜맞춰진다.


변형을 마친 창은 무기로써의 모습 대신, 나무와도 같이 변해 있었다. 


녹슬고 마모된 부분이 좀 있었기에 창은 어딘가 엉성한 겨울 나무처럼 보였다.


나무로 변한 창으로부터 은은한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창과 루시아의 CRF가 공명하며 빛의 울림이 대공동을 찬란하게 장악해갔다.



".....이제 그만 숨어있지 말고 나오지 그래?”



루시아는 어딘가를 향해 들으란 듯이 분명히 적의가 담겨 있는 어조로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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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주일만에 써왔어!!!!!!!! 칭찬해죠!!!!!!!!!!!!


너무 길어져갖고 쳐내고 쳐내다보니 원래 이번 화에 담고 싶었던 내용은 분량 상 다음 화로....


주시윤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의문을 갖고 답을 내리려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현자의 면모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음.


별 같잖은 내용인데 자꾸 분량만 늘어난다. 그래도 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나 고마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