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ArtStation - Snake Illustration, Anabel Martínez Bañ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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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진실이 담긴 독배 -2-




"고운 소년아, 너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내 딸들은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내 딸들이 밤마다 축제를 열자고 하는구나


너를 위해서 밤마다 춤추고 노래를 부를 거란다."


- 슈베르트, '마왕' 中




제8봉인역

????

p.m.????







"용혈과 제 조상님들에게 그런 사연이 얽혀 있다는건 재밌는 이야기였어요. 그렇다면, 이 모든 이야기를 다 아는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뭐라?"


"구도자가 용혈을 갖고 있었다면, 그의 후예들 또한 용혈을 계승해왔을 터. 그런데 당신이 아까 그랬죠. 같은 고귀한 피를 갖고 있다고. 그럼 뭡니까? 당신이 제 조상님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뱀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리라.


그래. 다 좋다. 네가 얘기한 구도자의 이야기, 용혈의 진실, 어머니의 이야기. 진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시윤의 질문은 그 모든 정보 더미 너머의 본질을 관통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얘기하는 너는 누구인가?


공교롭게도 뱀은 자신이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밝힌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주시윤은 여세를 몰아 밀어붙였다.



"루시아 양이 그러더군요. 제 영혼에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는 흔적이 있다고. 조상님이라는 작자가 후손의 영혼에 손을 댄다...


하하. 가관이군요. 혹시 내가 갖고 있는 용혈이란 것도 실은 용혈이 아니라, 당신이 변질시킨 더러운 피인건 아닌가요?"


"그 망할 년이 쓸데없는 말을 했군. 그 년의 말은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을 터인데?"


"본지 몇 주는 된 사람과 본지 1시간도 안 된 괴물 중 누구를 믿는게 타당해 보이나요?"



자꾸만 루시아를 끌고오는 뱀의 발언에 주시윤은 정면으로 논박했다.


뱀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시윤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태도는 꺾이지 않았다.



"반대로 묻지. 피가 섞이지 않은 남과, 같은 피를 지니고 있는 자. 누가 더 믿음이 가겠느냐? 나는 너와 같은 피를 갖고 있는 이로써, 누구보다도 너희 가문의 진실에 근접해 있는 존재니라."


"고민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격언과는 정 반대인 사람이라서 말이죠. 같은 피보다, 같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 더 믿을만하거든요. 내가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에겐 뭐가 있죠? 내가 당신을 믿어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죠? '어떻게 같은 피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후손의 질문에 답조차 하지 못해주는 조상을 내가 믿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두 마리의 뱀이 몸을 뒤틀어가며 논리의 전쟁을 치루었다.


신뢰의 문제, 혈육의 문제. 어느 쪽이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진리의 명제들.


주시윤도, 뱀도 양 쪽 모두 일리가 있는 말만을 꺼내들었고, 그들의 논쟁은 활화산과도 같은 기세로 불타올랐다.



"답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나는 이미 네게 진실을 이야기해줬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네가 너무나 가여워서, 네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먼저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시간'을 준 것일 뿐."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시간을 들여 판단했죠. 당신의 말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는 것을. 


당신이 나와 같은 피를 갖고 있고, 내 부모님과 용혈에 대해 알고 있다면, 왜 당신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말해주지 않는지."


"이야기에는 순서라는게 있는 법이다. 너무 큰 진실을 받아들이기 전에 준비할 시간을 제공하는 배려라곤 생각하지 않았느냐?"



뱀도 주시윤도, 한 치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논리의 허점을 공격해 들어갔다.


주시윤의 눈동자가 점점 핏빛의 붉은색을 머금어갔다. 경어 따위는 치워버린지 오래였다.


주시윤은 진심으로 눈앞의 이 괴물에게 감정을 담아 언어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당신이 말한 것들 중에 진실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진실들 속에 거짓을 섞어서 말하면 속아넘어갈거라 생각했나? 


계승할 사람이 없는 까닭에 용혈에 저주가 쌓여가며 방치되고 있다면, 같은 피를 가진 당신이 삼킬 것이지 왜 내게 떠넘기려는 거지?"


"간단하다. 내가 삼킬 수 없기 때문이지. 바로 이 내가, 용혈에 쌓여가는 저주를 형상화한 존재이기 때문이니라."


"뭐라고?!"



또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가 주시윤의 뒷통수를 강타했다. 뱀을 향하고 있던 언어의 칼날이 순간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이건 또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뱀이 용혈에 쌓인 저주라니?



"인간들은 나를 클리포트의 마왕이니 뭐니, 그런 호칭으로 부르며 봉인시켰지만 실상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거대한 힘이면 다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지. 


그래. 용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 분에 넘치는 힘은 파멸을 불러온다곤 하나, 경계할 것 없다. 구도자의 혈족인 네게는 나의 힘이 전혀 과분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저 바깥에 있는 그 외톨이 년도 네게 그러지 않았더냐? 위험한 힘일수록 활용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힘 없는 정의는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고. 


오히려 그 말대로라면 네가 내 말을 믿고 날 흡수하여 진정한 구도자로 거듭나는 것이 타당하지 않더냐?"



빙고.


주시윤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빙그레 미소지었다.


언제 나오나 했더니, 드디어 나왔다. 


놈은 자신을 용혈에 쌓인 저주 그 자체이며, 자신을 흡수하여 용혈을 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천명했다.


주시윤이 알고 있는 지식 선에서 보았을 때 아주 그럴듯한 헛소리였다.


아직 미숙하다지만, 주시윤에게는 힐데와 함께 지내며 들었던 이야기들과 일본에 와서 들었던 뱀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들이 있었다.


봉인되어 있는 뱀은 클리포트의 마왕의 한 분리체.


힘을 원하냐며 힘을 주겠다는 족속들을 반드시 경계할 것.


루시아의 영혼결계로 정신이 흔들리지 않는 한, 주시윤의 영민한 사고는 가진 정보를 토대로 멈추지 않고 적의 발언을 간파해낼 수 있다.


흉계만을 꾸밀 줄 아는 흉물이 감히 누굴 속이려 든다고?


주시윤은 역겹다는 듯 감정을 실어서 내뱉었다.



"당신이 클리포트의 마왕이 아니라고? 웃기는 소리는 그쯤 하실까요? 스승님께 이미 다 들어서 알고있으니까."


"가관이로군. 네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조차 숨기고, 용혈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주지 않던 사람을 정녕 믿느냐?"


"말했을텐데. 내게는 지내온 시간이 피보다 더 진하다고?"


"아니.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네가 날 찾아온 것은 네 스승을 더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더냐? 믿지 않기로 결심하고 여기까지 찾아와선, 다시 그녀를 믿겠다고? 


그건 진실의 취사선택이요, 자기과신의 오류이다. 영특하지만 이리 주관이 편협한 아이일줄은 몰랐노라."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아까는 같은 피를 갖고 있다며 속이려 든 주제에, 이제는 자신이 용혈에 쌓여가는 저주의 총체라고? 앞뒤가 안맞는 것도 정도가 있어."


"식견이 짧은 탓에 쓸데없는 곳에서 딴지를 거는구나. 네가 원하는 답을 해주면 믿겠느냐?


좋다. 내가 네 시조이다. 네 시조였던 내가, 내 영혼을 바쳐 연성해낸 힘이 용혈이다. 힘을 맡아줄 이가 없다면 홀로 남겨진 힘은 폭주하게 될 뿐이지. 그래서 네게 용혈을 맡아달라고 말하고 있건만, 그것마저도 믿지 않으려 드느냐?"


"진실의 유무와 발언의 의도가 항상 비례하진 않는 법이거든."



주시윤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뱀을 향해 손을 털었다. 그의 오만한 눈초리가 뱀을 내려다보듯 하였다.


논리의 공방을 나눈 결과, 주시윤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는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 자신이 카드를 제시함으로써 얻어갈 수 있는 정보는 더 이상 없었다.


뱀이 내세우는 정보는 매우 귀중해 보이지만, 나의 말이 곧 진실이니 믿으라는 달콤한 독이 든 초콜렛과도 같다.


진실이라는 상자에 독이 발려있는 줄도 모르고 덥석 잡을 만큼 주시윤은 바보가 아니었다.


애당초 루시아가 영혼에 씌워준 결계 덕분에 속고 싶어도 속을 수도 없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곳까지 뱀을 만나러 온 주시윤에게 뱀의 말재간은 이미 부처님 손바닥 안의 재롱과도 같았다.



"애당초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믿을 생각이 없었어. 진실이라는 것은 말하는 이의 주관이 항상 섞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니까. 그저 내가 원하는 것들만을 캐물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본색을 빨리 드러낼 줄은 몰랐는걸."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음 수단은 무력이다. 주시윤의 눈이 뱀의 증오스러운 거대한 육신을 담았다.


붉게 빛나던 눈에서 흉흉한 기운이 서려나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CRF의 힘과는 다른, 차원이 다른 농밀함을 가진 힘이 몸을 타고 흐른다.


주시윤은 아예 용혈의 힘을 깨워 뱀과 정면 대결을 벌일 심산이었다. 


몇 번 사용해보진 않았지만, 뱀이 말한 것처럼 자신이 구도자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면 금방 힘을 끌어올릴 수 있을 터.


정신을 지배하는 용혈의 힘으로 놈을 꺾고 굴복시켜, 모든 정보를 뽑아낸 후에 처리해주마.


어느 때보다도 크게 뜬 눈 안에 환멸감에서 비롯된 증오를 머금었다.


피의 권위가, 세계의 법칙에 한 줄의 메시지를 고했다.



"다시 시작해볼까? 말해. 우리 부모님이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 그 날, 무슨 일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는 다음 구절이 주시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



순수한 피의 권위가, 깨져간다.


펜촉에서는 잉크가 나오지 못하고, 써내려갈 페이지는 닫히고 만다.


눈을 가득 채웠던 증오는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주시윤의 세계가 한순간 일변했다.


불길한 무언가가 바닥을 타고 흐르며 주시윤의 몸을 점점 잠식해나갔다.



그대사람의아이여위대하신태초의뱀을목도할영광을입은자여



아니야. 무언가 잘못됐어.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이 주시윤의 몸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들려선 안될 것들이 들리고, 보여선 안될 것들이 보인다.


소중한 것을 놓쳐버린 것만 같은 이 공허한 느낌은, 대체 뭐지?


그래. 이 느낌은 분명-


처음 뱀의 모습을 눈에 담았을 때 찾아왔던 그 순간.


그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정신이 먹혀버릴 뻔했던 그 아찔한 감각.


그 극독의 마수에 자신의 정신이 휘둘리고 있었다.



"....!!!!"



주시윤은 그제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상냥한 차가움을 머금은 그 장막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정신간섭을 막아내고 있던 루시아의 영혼결계가 없어진 것이다.


바깥에서 이변이 일어났음을 알아채자 주시윤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정신결계가 깨진건가? 갑자기? 어떻게?'


"무슨 일이지? 표정이 영 좋아보이지 않는다만?"



하지만 어째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주시윤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뱀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바깥에서 루시아가 배신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수상한 구석이 없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주시윤에게 제공해줬던 조언이나 도움들은 결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관리자의 사주를 받고 활동한다. 관리국 비밀 디바이스까지 사용하는 사람이 대뜸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밖에서 뱀이 수하들을 풀어 루시아를 방해한 것일까? 침식체 몇 마리 정도에 방해받을 만큼 루시아가 약하진 않을텐데?


당황한 주시윤의 머릿속에는 온갖 가설들이 빠르게 제시되고 사라져갔다.


주시윤의 귓가 너머로 다시금 그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려오는 저주의 목소리는 그대로 생명의 위협이 되어 주시윤의 심장에 칼을 들이민다.



그대사람의아이여위대하신태초의뱀을목도할영광을입은자여

그대심장을꺼내뱀에게바칠준비가된자여영혼을꺼내뱀에게바칠준비가된자여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은 것은 칭찬해주마. 이렇게나 치밀한 준비를 하고 찾아왔을 줄이야. 과연 나의 후손다워."


"후손, 이라니.... 개소리를....!!!"



뱀의발치에는인간의피와내장이항상가득하기를

뱀이지나가는길에는죽음의흔적만이남기를



주시윤은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마구 머리를 뒤흔들었다.


몸이 그 저주에 반응이라도 하듯, 머리를 뒤흔들 생각이 없었는데도 알아서 흔들렸다.


머리를 흔들어도, 귀를 막아도, 반복해서 속삭여오는 목소리들은 사방에서 들려왔다.


마음 속에서, 뇌 속에서, 눈가에서, 피부를 타고, 다리와 팔을 휘감으며, 목소리가 울린다.


뱀을 찬송하는 저주가, 죽음을 칭송하는 저주가, 


온통 저주 투성이의 공기가 주시윤을 덮쳐서 좀먹어간다.



"젠장, 크, 으으... 뭘... 한 거냐!! 너-"


"딱히, 아무것도? 그저 바깥에서 일이 벌어지길 기다렸을 뿐이지.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그 외톨이 년을 믿지 말라고."



뱀은 콧방귀를 뀌며 그 거대한 몸체를 들어 주시윤을 내려다보았다.


독이 들어 무력화된 먹잇감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눈초리. 포식자의 눈매는 오싹하기 짝이 없었다.



"믿음의 기준을 지내온 시간으로 판단한다고 하였느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 속은 모른다 하였다. 


고작 시간 같은 것으로, 정 따위의 여흥으로 남을 믿으려 한 너의 패배니라."



제물이될자여기쁘게운명을받아들여라

뱀의곁에는항상밤과같은죽음이함께하기를



"닥...쳐....!!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나가, 라고!!!!"



뱀의곁이피보라와피냄새로아름답게장식되기를

뱀을위해제물을바치라피를바치라영혼을바치라



"크, 으으....!!! 이.... 자, 식....이.....어윽극-"



주시윤은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땅과 공기가 제멋대로 뒤흔들렸다. 격한 발작이 찾아오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실이 끊어지는 듯 하였다.


주시윤은 검을 땅에 꽂고 지팡이 삼아 중심을 겨우 잡았다.


용혈의 힘으로 끝없이 자신에게 세뇌를 걸고 있기에 망정이지, 용혈이 없었다면 진작에 영혼을 먹히고 말았을 것이다.


지지 마라. 지지 마라. 주시윤.


원래 네 것이었을 힘이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주시윤은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버텨라. 버텨라. 놈에게 굴복하지 마라.



죽이고죽이고죽이고시체로동산을뒤덮고피로강을이루어

시윤아엄마야엄마는아빠와잘있단다

우리아들많이힘#%@$^!온사방천지를죽음으로물들여한폭의그림을바치자

뱀님과함께그분의안에서너무나행복하단다

그러니까!@#%!@죽여라죽여라목을자르고내장을찢고피를마셔길을예비하라



"-----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퍽, 퍽, 퍽. 하고.


피가 날 정도로 칼집에 머리를 박아대며 주시윤은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아니, 부여잡는다는 표현이 맞는 것일까. 잡을 정신이 남아있기는 한걸까. 


온 세계가 뒤집히고 뒤틀려가고 있는데 그 혼자만 살아남을 수 있을리가.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험한 꼴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을. 네게 이런 불필요한 시련을 내리는 내 마음은 오죽하겠느냐?"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스쳐갔던 이들의 남겨진 목소리가, 끔찍한 형태로 뒤틀린 채 뱀의 것처럼 뇌와 귀를 헤집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와 눈에서 흐르는 피, 온 몸으로 일으키는 발작.


곱상한 얼굴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표정은 이성을 유지하려는 피나는 노력과 환상이 주는 고통으로 기괴하게 뒤틀렸다. 


살아만 있을 뿐 주시윤의 몰골은 시체와도 같았다. 시체라 하면 양호한 표현일 정도였다.



"하아... 아름다운 광경이긴 하나, 소중한 아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구나."



안타깝다는 말을 하면서도 뱀은 상당히 즐겁다는 듯 주시윤이 괴로워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좋다. 내가 만들어낸 나의 후손이여. 네게 줄 상이 있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네가 바라던대로 그 날의 진실이 어땠는지를 거짓 하나 없이 보여주마. 아깐 거짓을 섞었지만 이것만큼은 전부 진실이니, 믿도록 하거라."



뱀의 눈이 순간 붉게 빛나며 신묘한 무언가를 머금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날의 진실이라니,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는 거지? 라고 되물을 새조차 없었다.


가까스로 뜨고 있던 주시윤의 눈과 뱀의 시선이 맞닿자, 주시윤의 정신은 또 어딘가로 아득히 멀어져만 갔다.



*************






"시윤아!!! 시윤아 안 돼!!!!"


"안 돼!! 내 아들은 안 돼!!!"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집안을 수놓는다.


무언가 부숴지는 소리, 깨지는 소리, 파괴의 행진이 우악스럽게 집안 모든 것을 잿더미로 물들인다.



"엄마! 아빠! 왜 피하는 거야? 한번에 머리를 터뜨려서 뇌수를 흩뿌려주고 싶었는데? 왜!!!! 왜 도망치는거야 왜!!!!!!!!!"



마치 뱀과 같은 자세로 바닥에 엎드린 채, 어린 주시윤은 붉은 눈을 부라리며 꽥꽥 소리쳤다.


어린 주시윤은 악령에 빙의라도 된 것인 양 몸을 마구 뒤틀어댔다. 그리고 주한과 연화 부부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달려들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벽이 날아갔다.


발을 내리찍을 때마다 바닥이 산산조각이 났다.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은 자그마한 체구가 불가사의할 정도의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시윤아...!! 정신 차려 제발!!"


"여보!! 일단 막아야 해. 놈이 시윤이의 영혼을 완전히 먹어버리기 전에!!"


"머리를 좀 쓴다만, 어림도 없어. 가 곧 주시윤이고, 주시윤이 곧 야. 키히히, 히히히, 히히히히하하하하하!!!!!"



어린 주시윤은 기지개를 키고 상쾌해하며 주한과 연화 부부를 보란듯이 노려보았다. 기분나쁜 미소가 얼굴에 지어졌다.



"하아. 구도자에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군. 이렇게나 진한 농도의 용혈을 타고 태어난 아이가 있을 줄이야!"


"우리 가문 사람들도 모잘라, 이젠 내 아들까지 잡아먹을 셈이냐 이 괴물!!! 용서 못해! 절대 용서 못해!!"


"용서 안하면? 어쩔건데? 어쩔건데? 응? 엄마. 어쩔거냐니까? 캬하하하하하! 어쩔건데말을해봐어쩔건데어쩔거냐고말을해봐!!!!!"



어린 주시윤은 번개처럼 달려들어 연화를 노렸다. 손에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날이 서슬퍼런 식칼이 들려 있었다.


옆에서 주한이 쏜살같이 검을 들고 연화의 앞을 막아섰다. 주한의 표정은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로써 아들의 몸과 적으로 조우하고 있는 이 비극적인 상황이 그의 얼굴을 잔뜩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크히히히 엄마히하하하!!! 죽어라, 죽어! 죽어!!!! 키히히히히히!! 히히히히!!!!"


"연화야!! 도망쳐서 스승님께로 가!!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아. 그건 안되지. 아빠.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슨?!!"



말 한마디만 했을 텐데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자 주한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둘 다 미치게 만들어서 서로를 난도질해 죽이는걸 생각했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내가 엄마를 찢어 죽이고 난 다음은 아빠야." 


"안 돼!! 안돼!!!! 멈춰 이 자식아!! 멈추라고!!! 연화야, 당장 도망쳐 연화야!!!"


"맨정신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죽아빠 걸 지켜보고 난 뒤에, 자신이 찢겨죽어가는 감상을 꼭 말주길 바랄게. 자 그럼, 엄마? 안도망갈거지?"



연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과 슬픔으로 얼룩져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어린 주시윤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왜 가문 전체가 이 괴물에게 시달려야 했고, 내 아들까지 그것의 족쇄를 벗어던지지 못해야 하는 걸까.


그 뒤로는 뻔했다.


어린 주시윤은 들고 있던 식칼로 연화를 간단하게 죽였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어른이 아이의 손을 뒤틀듯이.


수도 없이 찌르고 베고 토막내면서 아예 형체조차 남지 않게 될때까지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옆에서 몸이 굳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켜봐야 했던 주한은 광기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다.


다음은 주한의 차례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칼날에게 온 몸이 회포가 떠지면서, 그 역시 연화와 같은 최후를 맞았다.


서걱, 서걱, 하고 살을 토막내는 소리와


퍽석, 퍽석, 하고 뼈를 자르는 소리와


주르르륵, 하고 피가 흐르는 소리가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곤 볼 수 없는 기괴한 웃음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변의 공간이 유리조각처럼 서서히 깨져간다. 환상이 끝맺어지고 있었다.




******************************************



"말도... 안돼...."



곱상한 얼굴은 더 이상 없었다.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푸른 눈에서도 이젠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주의 목소리가 끝없이 들려오며 정신을 갉아먹은 결과였다.



"말도안돼, 말도안돼, 말도안돼말도안돼말도안돼...."



주시윤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말도 안된다는 말만 연신 되읊었다.


말이 될리가 없다.


부모님을 죽인 것이 힐데가 아니라니.


부모님을 죽인 것이 나라니. 


이 용혈의 힘에 취해서 이 두 손으로 부모님을 찢어발긴 것이 나라니.


그딴 거, 말이 될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주시윤은 말조차 제대로 이어가질 못했다. 시야에 들어온 양 손에는 마치 그 날의 기억처럼 피와 내장으로 점철된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지금껏 무슨 짓을 했는가?


이딴 것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실이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왔다는 것인가?


그제서야 주시윤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승인 힐데가 왜 주시윤의 과거를 전부 비밀에 부치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는지.


왜 과거를 찾으려는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극구 말렸었는지.


왜 용혈을 절대 쓰지 말라며 엄금하고 쓰면 죽일거라며 협박에 가까운 금제를 걸었는지.


생각해보면, 전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한 힐데 나름의 보호책일 뿐이었다.


그녀가 어찌 입에 담을 수 있었겠는가?


주한과 연화가 죽은 것은 네가 한 짓이다, 라고. 아이에게 그런 잔혹한 진실을 알려줄 수 있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사력을 다해 자신을 지켜주려 했었던 힐데를, 자신의 유일하게 남은 보호자를,


주시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앙심을 품어왔고,


부모자식간의 관계도 모르게 하냐며 막말을 내뱉고, 


그런 스승 같은건 필요 없다며 매몰차게 내쳐버렸다.



"하.... 하하....."



주시윤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무릎 꿇어지는 그 시간조차 찰나의 순간처럼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세계 전체가 그를 짓누르는 듯 했다. 마치 패닉이라도 온 것인 양 주시윤은 정신 나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정처없이 저 너머를 바라봤다.


손을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스스로 썰어재끼던 그 끔찍한 감촉이 아직도 손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표정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을 죽이면서 광소했던 그 웃음의 흔적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었다.


절규하고 싶어도 절규할 수가 없었다.


왜냐니. 부모님을 죽인 패륜아 따위에게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으니까.



그대심장을꺼내뱀에게바치라영혼을꺼내뱀에게바치라

모든것을제물로기쁘게헌납하라우리의의무요존재이유이니



"하하하.... 이런거.... 였어...?"



다시금 저주의 목소리들이 세상을 채워나간다.


무릎꿇은 죄인을 대상으로 무수한 저주의 파도가 화살처럼 쏟아졌다.


이제는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아니, 저항할 수 있을지라도 하고싶지 않았다.


이렇게 되는 것이 맞았다.


부모님을 스스로 죽인 나 같은 인간 쓰레기는, 이렇게 응보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시윤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새끼 뱀을, 기다렸다는 듯 온갖 종류의 저주들이 사방에서 에워싸며 속삭였다.


검은 바다에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헤일처럼, 저주의 목소리는 주시윤을 덮쳐 삼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어둠 가운데로 몰고 가며, 한없이 정신을 휘젓고 섞어대며, 



마음을 검게 물들인다.





그는

죽음의기묘자요

전지全知의모사라

파멸시키는독이고

영존하시는질서이며

만악의왕이시라



들리는 것은 찬송, 찬송, 또 찬송.



죽음의기묘자라전지의모사라전능의독영존의질서시여만악의왕

그가이르되무서워말라보라내가온열방에미칠큰기쁨의좋은소식을너희에게전할지니

지극히높은곳에는죽음의영광이요땅에는죽음을입은시체들중에평화로다하니라

죽음의기묘자라전지의모사라전능의독영존의질서시여만악의왕



목소리가 끝없이, 끝없이 들려온다.


검게 변한 마음을 아직도 부족하다는 듯 계속 물들인다.


마음을, 몸을, 귀를, 눈을, 팔과 다리도, 온 몸과 모든 영혼의 정수 하나하나까지.


전부. 남김없이.


전부.


뱀이 내뱉는 저주의 속삭임들이 주시윤이라는 한 존재를 채우고 채우고 또 채웠다.



온세상의업많은모든이들아다뱀께로오라그가너희를쉬게하리니

그대모든열방의왕들이여뱀의멍에를메고뱀에게배우라뱀에입맞추고가르침을얻으라

죽음의기묘자라전지의모사라전능의독영존의질서시여만악의왕




마음 문을 열어라


나를 받아들여라


열지 않겠다면


문을 부수겠노라



....




마지막으로 들려온 속삭임은, 분명 저 네 마디 뿐이었다.


그걸 끝으로 더 이상의 속삭임은 들려오지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영혼을 갉아먹는 고통에서 비로소 해방되었지만, 주시윤은 마음 한 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였다.


더는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생각도,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님을 무참히 살해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가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몸을 감쌌다. 주시윤은 바닥에 쓰러져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잔혹하다. 잔혹하기 짝이 없다.


이런 끔찍한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내가 밉다.


이런 운명을 선사한 세상도 밉다.


진실을 찾으라며 여기까지 자신을 부채질한 루시아도, 관리자도,


자신을 향한 자조와 혐오는 이내 타인과 세계를 향해 확산되어갔다. 혐오는 더 큰 혐오를 낳고, 더 큰 혐오는 끝없는 혐오로 이어진다.


모든 것이 밉다고 생각해버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젠, 나같은 건


존재할 가치조차도,


없겠구나.



그것이 마지막으로 주시윤이 구멍난 마음 속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들기 무섭게-



"좋다. 잡았노라."



라는 말과 함께, 뱀은 그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먹음직스러운 진수성찬을 향해 맹수와 같이 달려들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소름끼치는 뱀의 괴성과 뜯어먹히는 듯한 소리.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끝없는 공허함, 그리고 몸이 어둠에 삼켜지는 감각.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뱀의 입 속 너머 끝없이 펼쳐진, 꿈틀대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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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는 열면 안되는 것인wwww


아니 게이야 주인공이 벌써부터 저모양 저꼴 났는데 이거 주인공 주시윤 맞노? 예아 맞습니다.


사실 현생이 너무 바빠서 쓰는게 점점 힘들어짐. 계속 퀄리티도 나빠지고 있는거 같아. 


이번 화만 해도 묘사도 자꾸 사이코같은 반복문구만 채우고 말이야. 역량이 진짜 떨어진게 새삼 느껴져.


지금도 몇번이고 그냥 던지고 내뺄까 하는 생각이 들음. 나 재밌자고, 챈럼들 반응이랑 댓글 보는게 너무 좋아서 글쓰는 거긴 한데...


1주일에 하루밖에 쓸 시간이 안나오는 마당에 그 역량마저 떨어지니까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미안...하다..... 너네가 항상 좋게 봐주고 개추 잘주는데 약한소리 그만하고 다음편까지 또 힘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