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네바다주에는 미 정부가 극비리에 운용하는 실험기지가 존재한다. 제 16 실험기지라고 불리는 이곳엔 정보부 주력 타격부대 4개 중대와 중앙정부 소속 A급 카운터 능력자 6명 이상이 항시 주둔중이다. 

 

일개 실험기지에 이토록 주둔병력이 많은 이유는 16 실험기지의 위험성에 있다. 이터니움 반응로부터 로스트쉽, 반쯤 괴담에 가깝다고 알려진- ‘구 관리국’에서 사용하던 장비까지. 이면세계와 관련된 것들 중 최고레벨 기밀로 지정된 모든 것이 제 16 실험기지에서 연구되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잠입을 막기 위해 시설 주변 20km 근방에는 모든 인공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설방어와 지원을 겸해 주둔중인 가장 가까운 군부대조차 40km는 떨어져 있다.

 

기지 계획 초안에는 적어도 주변 30km 내에 군시설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혹시 모를 침식파 오염을 대비해 현재의 지리조건을 만족하게 되었다.

 

제 16 실험기지 내에선 외부와의 연락수단이 일체 봉쇄된다. 유일한 통신법은 기지 내의 유선 장거리 통신망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지 내 연구원들은 이에 상당한 불만을 표하지만, 상부에서 이 불만을 해소해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카일, 여기 적혀 있는 내용들 전부 진짜냐?”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겁니까? 대령님께서도 기지에 몇 번 가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뭘 그렇게 까칠하게구나? 카일 웡 대위, 델타세븐 인원 모집 계획서 몇 번 쓰게 했다고 삐진 건가?”

“삐진 거 아닙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 종이는 선임 연구원들이 신입 연구원을 골려먹으려고 만든 겁니다.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보단 평상시 업무에 좀 더 충실하게 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 참, 지금 직속상관한테 훈계하는 거냐? 이번 달 부대 운영계획서도 직접 쓰고 싶은 모양이지?”

 

제이크와 카일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늘은 화창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번화가를 이루고 있었다. 반대편 건물에선 거대한 전광판에서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디자인, 중후한 블랙 컬러. 한정판 머신갑 화보집 예약판매 중.’

 

“그래서, 나는 왜 데리고 온 거야?”

 

옆자리에서 음료를 쪽 빨던 실비아가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휴일이니까 데리고 온 거 아니겠나, 실비아양?”

“...휴일인 거랑 지금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휴일이래봤자 어차피 실비아 너는 개인실에 틀어박혀 게임만 할 거고, 카일 넌 서류나 뒤적거리고 있겠지. 그럴 바에야 부대 밖에서 바깥바람이라도 쐬게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부대 운영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드는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애초에 각자의 의견조차 묻지 않은 채 이렇게 강압적으로 계획을 잡으시는 건..

“-라고 중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속 말해 보도록, 카일. 자네 의견은 내가 경청한 뒤 중장님께 직접 말씀드리지.”

“... 굉장히 센스 있는 방법이셨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웃고 있는 걸 보니 절로 제 마음속에 자긍심이 샘솟는군요. 과연 중장님이십니다.”

“잘들 논다. 잘들 놀아.”

 

한심하단 듯 둘을 쳐다본 실비아는 고개를 돌리고 도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실비아는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기분인 듯했다. 사람들을 구경하는 실비아의 발이 리듬감 있게 까닥였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직원이 카일과 제이크가 주문한 음료를 들고 올라왔다. 갈색 음료로 가득 찬 유리잔은 척 보기에도 청량해 보였다. 음료를 건네받아 마신 카일이 당황한 목소리로 직원을 호출했다.

 

“잠시만요, 제가 주문한 음료는 콜라 아니었습니까? 이건 뭐죠?”

“네? 저희가 주문받은 음료는 콜라 한 잔, 매실 아이스티 한 잔이었는데요.”

“... 매실 아이스티? 나이드신 분들이나 마시는 걸 대체 제가 왜-”

“중장님께서 요새 즐겨마시길래 카일 너도 한번 마셔보라고 주문했다. 소감이 어떤가?”

“-라고 생각했었지만 나쁘지 않군요. 자극적이지 않은 이 느낌....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베스트셀러가 생각나는 맛입니다.”

“하하! 그렇다니 다행이군. 중장님께서도 함께 마실 사람이 늘어나서 기뻐하시겠어.”

“......”

 

카일은 끝내 아이스티 한 잔을 더 마셨다.

 

 

 

“다음은 어디로 갈 거야?”

 

실비아의 물음이었다. 제이크는 저 앞에 보이는 의류매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왕 나온 김에 옷도 좀 사면 좋겠지. 사는 김에 중장님 드릴 옷도 사면 더 좋겠고.”

“다음 주면 벌써 중장님이 돌아오실 때가 되었군요. 고심도 이면세계 탐사팀에 따라가신 거였지요? 다치지신 않았을까 걱정입니다.”

“니가 중장님 걱정할 짬이야? 쓸데없는 걱정 말고 선물이나 고르지그래.”

“그 말도 맞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군요. 차라리 쿠퍼 씨의 파멸멸적인 안목을 걱정하는 게 더 실리 있겠습니다.”

“뭐? 내 안목이 어때서 그래?”

“몰라서 물으십니까? 휴일에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누구든지 저처럼 생각할 겁니다. 제발 다른 사람 눈도 생각해 주시죠.“

“휴, 휴일에 내가 내 마음대로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

“지금 입고 나온 옷도 세련돼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철 지난 후드티에 낡은 청바지. 이제 보니 리프노드엔 웃기는 모자도 씌워 놓았군요.”

“.. 그건 마리아 중장님이 직접 씌워주신 건데. 쓸쓸해 보인다고.”

“.... 유머감각이 돋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안목이 탁월하시군요. 저도 아직 배울 점이 많이 남은 거 같습니다.”

“사실 뻥이지롱. 아하하하하!”

“이런 ㅆ-”

 

참지 못하고 험한 말을 내뱉는 카일과 배를 붙잡고 폭소하는 실비아를 보며 제이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느새 매장의 입구가 코앞이었다. 제이크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때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스마트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제이크는 당황했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번호로 전화가 와선 안될 사람이기도 했다. 제이크는 꺼림칙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제이크 대령, 자네인가?-

“마크 핀리, 당신이 웬일이지?”

 

 

 * * * *

 

 

“그럼 그렇지, 내 팔자에 쇼핑은 무슨...”

 

제이크를 포함한 3명은 네바다주 사막 한복판에 있었다. 그들 주위엔 일렬로 장갑차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오래된 군용 차량은 갈라진 도로를 넘을 때마다 덜컹거렸다. 실비아가 뒤에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크는 전화 내용을 회상했다.

 

-...16 실험 기지가 습격당한 거 같다고? 확실한가?

-그래. 14분 전 급작스럽게 공격받고 있다는 통신이 들어왔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통신이다. 현재는 아무런 연락이 되지 않아.

 

통화가 끝난 뒤 그들은 실험 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군부대로 향했다. 군부대는 이미 비상이었다. 정찰부대가 돌입한 뒤 마찬가지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주력 부대는 방금 편성이 완료되어 출발하던 참이었다. 제이크와 카일, 실비아는 이들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실험 기지가 보입니다, 대령님.”

 

옆자리에 앉아있던 카일이 말을 걸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심정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수 킬로미터가 넘는 규모의 제 16 실험 기지가 파괴되어 있었다.

 

“......”

 

가까이서 본 광경은 더욱 참혹했다. 부서진 건물에선 매캐한 매연이 피어올랐다.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었던 것들이 곳곳에 전시된 모습은 마치 행위예술을 연상시켰다.

 

사방에 널린 파괴 현장과는 다르게 전투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군인의 시체는 많았다. 그것들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공포, 절망, 경악. 이들이 싸워볼 생각도 못 한 채 도망치게 만든 적이 무엇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함께 진입하던 모두가 긴장을 숨기지 못했다.

 

한 군인이 엎어진 시체를 뒤집었다. 시체는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잘려있었다. 자상이라기엔 너무 거칠고 조상이라기엔 깔끔한 상처. 뾰족한 창으로 베어낸 것처럼 보였다. 다른 시체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이 이 많은 사람들을 냉병기로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카운터 능력자, 개중에서도 고등급 신체강화계 카운터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걸론 부족했다. 무언가가 발톱으로 후려친 것처럼 내부가 훤히 드러난 건물은 검이나 창 따위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일까.

  

“적은 고등급 강화계 카운터 여러 명을 포함한 카운터들-또는 특수부대 수준의 군인들로 추정된다. 이에 주의하도록. 브라보 팀은 통신망을 복구하고 베타 팀과 실비아는 생존자를 수색해라. 카일은 알파 팀을 이끌고 적을 찾는다. 찰리 팀은 나를 따라오도록.”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거대한 시설은 마치 처형장 같았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 감지 못한 시체들이 보였다. 철퍽거리는 웅덩이는 무엇이 고여서 생겼을지 싫어도 알 수 있었다.

 

“.... 이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탄흔이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전부 뭔가에 베여서 죽은 거야.”

“적이 카운터들로만 구성된 거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기엔 능력을 사용한 흔적도 거의 없어. 오면서 본 흔적들 모두 죽은 카운터들이 저항한 흔적인데... 전원 정지!”

 

계속 전진하던 그들이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제이크가 급히 정지했다.

 

“왜 그러십니까?”

“.. 저걸 봐라.”

 

정면으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바닥에 붉은빛이 맴도는 구조물이 꽂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괴기한 구조물은 피를 잔뜩 머금은 상태였다. 생긴 것도 그렇고, 피해자들을 학살한 무기가 이것인 거 같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이 “검”은 무기로 쓰기엔 적합한 형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 십자가 같군요. 제기랄, 붉은 십자가라니.. 존나 불길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때 허리춤에서 달아놓은 무전기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음성은 노이즈가 잔뜩 끼어 있어 기계 고장인지 무전이 방해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른 무전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은데. 밖으로 나가봐야 할거 같군.”

“이건 그냥 두고 갑니까? 척 봐도 평범한 재질이 아닙니다. 확보할 수 있을 때 확보해두는 게..”

 

그때였다. 제이크의 직감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렸다. 강력한 무언가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눈치챘을 땐 이미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제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챙길 수 있을지-”

“다들 엎드려!”

 

번개가 공간을 장악했다. 제이크는 순식간에 너클에 능력을 실어 접근하던 물체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근처에 깔린 잔해들은 충격만으로 소멸했다. 충돌 직전 제이크는 초인적인 반사 신경으로 적을 확인했다. 검붉은 옷, 창백한 피부, 가슴에 박힌 보석... 지성 있는 고위 침식체들의 특징이었다. 

 

 

주먹이 놈과 맞닿은 순간...

 

제이크는 눈을 떴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이 보였다. 입안은 온통 모래로 버석거렸다. 주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군인들과 실비아가 보였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주먹을 내질렀던 왼팔은 피범벅이었다. 머리가 지독하게 지끈거렸다. 제이크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실비아.”

“당장 대원들 철수시키고 포격 태세로 전환해! 상부에서 지원이 오기 전까지... 버터남! 깨어난 거야?”

“큭,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난 왜 여기 있는 거고? 같이 있던 대원들은?”

“네가 들어갔던 건물 주위에서 이상 현상이 관측되더니 고위 침식체로 보이는 괴물이 나타났어. 놈의 공격을 맞은 네가 여기까지 튕겨 나오길래 급한 대로 응급처치를 해둔 상태고. 같이 있던 대원들은..”

 

실비아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간 곳엔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어림잡아 수백 미터는 떨어진 거리였다. 자신조차 단 한 번의 충돌로 죽을 뻔했다. 함께 있던 대원들의 생사는 보나 마나였다.

 

“하.”

 

짧은 감상이었다.

 

제이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걸 본 실비아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아직 지혈도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카일과 다른 대원들이 저곳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모두 죽을 목숨이었다.

 

“한시적으로 부대 지휘권을 네게 위임하마. 이 순간부로 총지휘관은 실비아 너다. 내가 저 괴물을 잡아두는 사이 카일과 합류해서 퇴각해.”

“.. 뭐라는 거야 진짜! 누구 맘대로 혼자서 싸우겠대? 다 같이 싸우고 다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

 

제이크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실비아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곤 뒤로 돌아서서 뛰었다. 뒤에서 실비아가 악쓰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단 한 번의 충돌이지만 알 수 있었다. 놈은 지금까지 싸웠던 적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벽을 느끼게 했던 리플레이서 퀸보다 최소한 두 수는 윗줄이었다. 실비아도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후퇴하란 말 자체를 반박하지 않은 게 증거였다.

 

교전 중인 알파팀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그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있었다. 카일이 필사적으로 침식체를 저지하고 있었다. 

 

침식체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놈의 뒤에 떠있는 검이 스스로 움직여 주변을 난도질했다. 생김새가 이상하다 했더니 애초에 들고 휘두르는 용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네 상대는 나다, 침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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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올릴까 말까 존나 고민하다가 큰맘 먹고 올림


총 3편까지 있음 바로바로 올릴 거임


재밌게 봐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