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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추락하는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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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잘도 그런 개소리를 하게 됐군. 모든 분쟁은 선의를 내세우며 희생을 용인하지. 


봐. 각각의 선의들이 만든 이 악의의 지옥을."


- 레니, 나이트런 another episode '네가 있는 마을' 89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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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봉인역 입구

p.m.10:45




나나하라 가문을 뒤로 하고, 힐데는 앞뒤 안가리고 미친듯이 달린 끝에 제8봉인역에 도착했다.


드래곤 버스터의 출력은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 수 십 배는 빠르게 힐데를 움직이게 해줬다.


힐데는 드래곤 버스터의 점화를 끄고 동굴 너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굴 입구에 놓여있는 도리이가 오늘따라 더욱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바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힐데는 검을 들어 제8봉인역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갖다대었다.


파지직- 하고 푸른 빛 스파크가 튀었다. 강대한 물리력이 동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역시나 결계로 진입을 차단해놓았는가. 힐데는 혀를 찼다. 


주시윤과 함께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힐데는 루시아를 줄곧 의심해왔다만, 마음 속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봉인역에 설치한 모든 결계는 루시아의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막혀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추측컨데, 루시아가 저 결계 너머에서 하고 있을 무언가는 주시윤을 데려간 이유와 직결될 터였다.


주한과 연화가 죽었던 날의 진실을 알려달라며 한바탕 언쟁을 벌인 주시윤.


매몰차게 거절하고 나니 감쪽같이 사라진 주시윤.


그런 주시윤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루시아.


평소에는 열려 있었으나 지금은 닫혀있는 8봉인역의 입구.


뻔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루시아가 주시윤을 회유했을 것이다.


가령, 옆에서 도와줄 테니 네 스스로의 힘으로 진실을 쟁취하라. 라던가.


모든 근거들이 힐데의 의심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뱀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치나츠의 예지를 듣고 빠르게 뛰어왔다곤 하나, 힐데의 발걸음을 부채질한 것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란 것이, 힐데가 한사코 주시윤에게 밝히려 들지 않았던 주한과 연화의 죽음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



힐데는 두 자루의 검을 쥔 양 손에 힘을 강하게 쥐었다. 장갑이 말려들어가며 가죽이 구겨지는 소리를 내었다.


좋은 친구가 생겼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뒤에서는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사뭇 진지하게 주시윤을 위한답시고 소신있는 발언을 아끼지 않던 그 모습은, 다 거짓이었던 건가?


절대 주시윤이 그 날의 진실을 알아서는 안됐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듯,  그 날에 있었던 일은 세상에 단 하나. 힐데 자신만이 기억해야만 했다.


아이는 아이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어른은 어른과 아이의 시선을 모두 가진 채 아이를 지켜야만 한다.


루시아도 주시윤도 그것을 모르니 치기 어린 모습으로 진실에 목을 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시윤을 과거로부터 지켜내야만 했다. 그것이 스승으로서 그녀가 지켜야 할 의무였다.


시간이 없었다.



"드래곤 버스터, 기동-"



힐데는 나지막히 한 마디만을 고했다.


양 어깨 옆에 떠 있는 길다란 강철 가방과도 같은 출력장치가 기계음을 내며 전개되어갔다.


드래곤 버스터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시끄러운 기동음을 발산하며 기체를 달구었다. 


정제된 클리포트 인자가 힐데의 몸을 감싸고 흐른다. 


전개된 장치의 상단부로부터 한 쌍의 금빛 헤일로가 그 찬란한 위광을 드러내었다.


힐데의 양 눈이 헤일로의 색처럼 금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으로 이형의 파동이 힐데를 휘감는다. 피를 마신 흡혈귀가 활력을 얻듯, 신선하면서도 역겨운 힘이 힐데의 몸을 채워간다.


황금의 눈을 한 여신은 몸을 낮추어 도약 자세를 취했다.


단번에 끝내겠다는 생각과 함께-



"점화-!!"



힐데는 몸을 앞으로 날렸다.


뒤이어 들려온 것은 땅이 무너지는 소리.


바깥 세상에까지 들리고도 남을 만한 굉음이 이 일대에 울려댔다.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을 두르고 있던 결계는 보기 좋게 어그러지며 부숴졌다.


뒤이어 이중, 삼중, 그 너머에 있는 결계들도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았다.


드래곤 버스터를 대동한 힐데의 돌진은 루시아가 설치해뒀던 결계를 종잇장처럼 구겨버리며 동굴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들어갔다.


최후의 발키리가 간다. 그녀를 막아서는 모든 것들은 파괴를 면치 못하리라.


어떤 벽도, 요새도, 그녀의 전진을 막을 수 없으리라.








봉인결계 최심부

제8봉인역

p.m.10:50



루시아는 브류나크의 빛줄기와 연결되어 있는 주시윤의 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선에 들어간 부처의 자세처럼 주시윤의 몸은 가부좌를 튼 채 움직이지 않았다. 


저 멀리에 있는 브류나크가 쏘아낸 빛이 광륜처럼 주시윤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젊은 부처와도 같았다.


저런 불상과 같은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저 너머의 영혼세계에서는 살벌한 싸움을 하고 있겠지.


끊임없이 속삭여대던 뱀의 목소리도 이젠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주시윤의 영혼과 설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리라.


희미한 미소가 루시아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길 수 있다.


주시윤이 용혈을 덜 깨워서 미숙하고, 제아무리 뱀의 권능이 압도적이라곤 하나, 자신이 함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브류나크의 연산기능을 이용해서 주시윤의 영혼 너머로 결계를 씌운 이상 그가 뱀에게 정신을 먹혀버릴 염려는 없다.


물론 루시아 본인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은 크게 모잘랐다. 아드라멜렉을 자신의 심장부에 봉인하고, 저택과 봉인역에 대단위의 결계를 또 쌓아올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클리파 차원이 봉인되어있는 뱀도 마찬가지. 그것의 정신 장악은 자신의 능력을 증폭시킴으로써 막아낼 수 있다.


놈의 권능만 봉쇄할 수 있다면 전투능력보다 정신계열 능력에 치중된 뱀은 취약해지게 될 터. 시간이 아무리 걸린다 한들 주시윤이라면 꼭 그것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아는 살짝 긴장을 풀었다. 얼마만에 찾아온 정적 속에서 한숨이 한 줄기 흘러나왔다.




쿠구구궁-



"?!"



쭉 잠잠했던 동굴 속의 정적이 한순간 무너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공동 내부까지 무언가 무너지는 듯한 진동이 울려왔다.


느껴지는 뭣모를 위화감에 루시아는 다시금 긴장의 끈을 잡았다.


이건 단순히 바위가 떨어지는 등의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강한 힘으로 뭔가가 부숴지는 소리였다.


도대체 누가? 루시아는 생각했다. 


지금 당장 이 상황 속에 개입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뱀은 주시윤과 있느라 신경을 못쓸테고, 나나하라 가문은 내부에서 향후 행동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유일하게 단독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라면 주시윤의 스승인 힐데 뿐이라지만, 힐데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8봉인역의 중심부로 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주시윤을 여기로 데려오고 나서 루시아는 봉인역으로 통하는 모든 결계를 닫아버렸다.


본래라면 결계에 온갖 기교를 부려놓아서 접근조차 불허했을테지만, 저택의 대결계와 주시윤의 영혼결계에 모든 노력을 쏟고 있는 지금은 불가능.


그럼에도 루시아의 결계는 방어력만 놓고 봐도 어지간한 관리국 중심도시의 격벽 수준을 따위로 만들어버릴 만큼 단단했다.


결계를 부수고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벌어놓은 시간은 충분했다.



쿠구구구궁-



다시 동굴 내부가 울렸다. 대공동을 뒤흔드는 진동은 그 주기가 갈수록 잦아졌다. 


한 번, 두 번. 철거 현장에서 라이노가 거대한 공성추를 목표에 들이받듯이, 진동이 계속 울려댔다.


루시아는 그제서야 확신했다. 바깥의 누군가가 자신이 깔아둔 결계를 부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아무리 힘이 모자라다지만 어지간한 물리력으론 결계를 깨는 것조차 버거울 터-



"....!! 설마!!"



단 하나.


단 하나의 가능성이 루시아의 뇌리를 강타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나하라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강자'는 힐데 뿐이다.


혹, 자신이 힐데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혹, 클리포트 인자라면 학을 떼는 그녀가 클리포트의 힘을 사용한다면?


애초에 힘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의 근거는 뭐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냉혹하기 짝이 없는 펜릴의 성격 지X맞은 소대장.


그리고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자.



"냉혹해 보이는건, 그저 말 뿐이었나?!"



당했다. 시종일관 평온했던 루시아의 눈동자가 당황스럽다는 듯 흔들렸다.


바보 같으니. 루시아는 스스로에게 자책을 일삼았다.


이 계획을 세우면서 대부분의 사항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동선을 짜올렸다.


그것을 위한 결계고, 그것을 위한 개구멍이었고, 그것을 위한 친분이었다.


그런데 바보같이 딱 하나를 간과하다니.


루시아의 계획은 전부 힐데가 정공법으로 결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짜여졌다.


클리포트 인자를 혐오한다는 힐데의 단편적인 성격만을 놓고 계획을 짠 것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힘을 개방하고 결계를 뚫고 들어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젠장...!!"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지로 무시한 채 루시아는 재빨리 결계를 짜올리기 시작했다. 


여기라도 막아야 한다. 힐데를 마주한다면 그녀가 어떤 돌발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힐데의 고유무장, 드래곤 버스터.


어마어마한 출력을 바탕으로 소유자의 신체를 강화시켜 '움직이는 요새'와도 같은 강대함으로 적을 분쇄하는 장비.


관리자에게 들은 바가 있어 루시아 또한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무장을 사용한 힐데가 얼마나 강해지는지도.


이 동굴에 설치해둔 결계는 나나하라 대저택의 대결계 이상으로 장대하고 단단한 사양이다.


하지만 드래곤 버스터를 사용한다면, 힐데가 이 8봉인역 동굴 전체에 짜여진 결계를 모조리 부수는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해야 3분.


아무리 자신의 결계가 관리국 요새의 격벽 정도는 따위로 치부해버릴 만큼 단단하다지만, 힐데는 아예 논외였다.


드래곤 버스터를 개방한 힐데의 앞에서 그녀를 막을 수 있는 방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요새'를 앞에 두고, 그 어떤 벽이 감히 요새를 칭하겠는가?



쿠구구구구궁-!!!

콰아아앙-!!!!!



"?!!"



굉음과 함께 동굴 외벽이 무너져내렸다. 외벽이 사라진 대공동은 벽 너머의 공간과 합쳐지며 아예 하나의 큰 동굴이 되었다.


화들짝 놀라 루시아는 굉음의 발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역력했다.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몸의 양 날개쪽에 거대한 기계장치를 날개처럼 두르고, 황금빛 눈을 한 파멸의 여신이 거기에 있었다.


여신의 눈은 루시아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초.


분노가 서린 황금빛 눈은 빛무리에 감싸여 공중에 떠 있는 주시윤의 몸과, 빛을 뿜어내고 있는 브류나크의 광경을 담았다.


당황이 역력한 푸른빛 눈 역시 자신의 고유무장 브류나크의 모습을 담았다.


창을 지켜야 한다.               /               창을 부숴야 한다.


힐데와 루시아, 두 사람의 눈이 브류나크에게로 쏠렸다.



"안 돼!!!!!"



루시아는 절박하게 소리치며 브류나크를 지키기 위해 결계를 뻗었다.


그러나 힐데의 행동이 한 차례 더 빨랐다.



키이이이잉-!!!



힐데의 몸이 드래곤 버스터의 힘으로 투포환처럼 쏘아진다. 양 손에 쥐고 있는 검이 흉악한 송곳니처럼 살벌하게 빛난다.


루시아의 결계가 닿기도 전에, 힐데의 검 한 자루가 빛을 뿜어내고 있는 브류나크 동체의 코어 부분에 꽂힌다.


뒤이어 나머지 한 자루가, 나뭇가지처럼 전개된 브류나크의 창날들을 모조리 베어낸다.


마지막으로 코어에 꽂은 검에 힘을 주어 아래에서 위로 찢어 벤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브류나크는 찬란히 빛나던 그 광휘를 잃었다. 


검이 꽂혀 고철이 된 기계장치처럼 브류나크는 반파된 채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더는 빛나지 않았다.



주시윤을 비추고 있던 브류나크의 광륜이 사라지자, 대신 짙은 어둠이 주시윤의 몸을 서서히 덮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 대공동에 침묵이 무서울 정도로 내려앉았다. 어둠이 스멀스멀 퍼져가며 소리가 없어진 이 공간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어둠 속에서 힐데는 매서운 눈을 한 채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다 끝났다."


"......"



칼날처럼 차가운 집행자의 말투가 루시아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루시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이 한 순간에 박살이 난 나머지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서, 너무나도 화가 나서, 어이가 없어서.


루시아는 부숴진 브류나크와 힐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시시각각으로 루시아의 표정이 어두워져만 갔다.


지금 그녀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주시윤을 지켜주고 있던 유일한 동앗줄을, 스스로 부순거야?


도대체 왜? 어떻게 그런?


그렇게 앞뒤 안가리고 과격하게 뛰어들었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저 여자에게는 애제자의 목숨보다 주시윤의 과거를 둘러싼 진실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얼굴을 잠식해가던 어둠 너머로 푸른 빛의 눈동자가 소름돋는 기색을 뿜어내었다.


공황에 빠졌던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억지로 이어붙이는 것에 가까웠다.


박살나버린 자신의 무장 브류나크처럼, 자신의 마음을 분노로, 당혹감으로, 접합해간다.


영혼결계가 없다면 주시윤은 뱀에게 꼼짝없이 잡아먹히고 만다. 이 여자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질렀다.


이딴게 스승이라고?


제정신을 차렸을 때, 루시아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공허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고-



힐데는 주시윤이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가부좌를 튼 채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던 찰나, 힐데의 발치에 결계로 짜여진 검 세 자루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꽂혀들었다.






"...뭐하는 짓이야."


"너야말로 뭐하는 짓이지? 시윤이를 넘겨라. 지금 당장-"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동굴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함성을 내지르듯 루시아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인간의 것이 아닌 양 노이즈가 깔리고, 동시에 그녀의 발치로부터 짙은 살기가 형체를 갖고 힐데를 향해 쏘아졌다.



"?!"



힐데는 깜짝 놀랐다. 루시아에게서 진한 침식파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4종급의 그림자를 만난 것처럼 흉흉한 침식파가 대공동 전체를 에워쌌다. 침식파의 발산에도 침식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성을 잃은 사냥개처럼,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루시아는 눈을 부라렸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미쳤어!!? 제정신이야?! 지금 시윤이한테 무슨 짓을 한건지 알기나 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시윤이를 데려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던 거냐!!!"


"난 그저 시윤이를 도와 이 파편을 처리하려고 했을 뿐이야. 용혈의 유일한 계승자만이 뱀을 무릎 꿇리고 제어할 수 있으니까!"



힐데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침식파를 뿜어대는 루시아. 


주시윤을 데려간 이유.


뱀을 무릎 꿇리고 제어하겠다는 말.


카운터 아카데미 학생, 아니. '그림자 침식체' 루시아의 목적은 주시윤을 제물로 삼아 더 강한 힘을 손에 넣는 것.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힐데의 황금빛 눈이 무자비한 빛을 머금었다.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싸늘한 시선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히 반대되는 이해였다.



"뱀을 시윤이에게 흡수시키려 했다고?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시윤이가 깨어났던 그 날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했더니, 세상을 무너뜨리기라도 할 속셈이었나?"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너, 지금 시윤이가 가진 힘이 뭔지 알고서나 그런 소릴 하는거야?"

 

"알지. 너무나도 잘. 마왕을 제어할 수 있느니, 더 강해질 수 있느니, 그딴 것들은 클리포트 인자에 취해서 명줄을 재촉하는 것들의 순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걸.


내가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한 네 수작질이 성공할 일은 없을 거다. 침식체. 이제 말해. 시윤이에게 뭘 하고 있었던 거냐!"



루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힐데에게 이죽거렸다.



"헛소리는 그쪽이 하고 있는거 같은데? 용혈의 진짜 가치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과분한 힘이라고 터부시하며 다짜고짜 막으려 든다?


세상을 무너뜨리긴, 용혈의 각성으로 마왕 하나를 없애버릴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세상의 존속에 더 보탬이 되는거 아니야?"


"궤변을...!!"


"그걸 위해서 난 내 능력을 이용해 뱀으로부터 그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어. 시윤이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었는데,


그걸 네가 부숴버리고 말았다고. 너야말로 지금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지른 건지 알아? 아냐고!!"

 

"보호? 아이를 사지로 밀어넣고서 하는 말이 보호라고?"



뿌드득. 하고 이가 부숴질 것처럼 갈린다.


루시아도, 힐데도, 서로를 시선만으로 꿰뚫어 죽일 것 같이 노려보며 분노를 짜낸다.


마음 속 화산에 난 상처가 끊임없이 증오라는 마그마를 뱉어댄다.


의뢰 대상이자 친구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들처럼 키워왔던 애제자가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애제자의 목숨을 단번에 날려버린 힐데의 몰인간성에 대한 분노

애제자를 악의 구렁텅이로 꼬드겨 데려간 루시아의 추악함에 대한 분노


한 소년을 둘러싼 두 여자의 감정은 그 날을 서로에게 겨누고 가차없이 휘둘러졌다.



"미쳤군.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놈 앞에서 보호 같은게 소용이 있을거라고?그런 물러터진 생각만 갖고 이런 미친 짓을 벌였다는 거냐?


마왕 하나를 없앤다고? 그 하나의 마왕을 없애기 위한 행동이, 게임이 얼마나 앞당겨지는지 알고서나 그딴 말을 입에 담는건가?


고작 하나 없어진다고 클리포트 게임이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느냐!!!"


"게임은 얼어 죽을 놈의 게임!! 모든게 잘 되고 있었어. 시간만 있었다면 시윤이를 지켜낼 수 있었다고. 그런데 네가-"



힐데는 용서 없이 루시아를 향해 철퇴를 휘두르는 것처럼 마구 몰아붙였다.



"들을 것도 없다!! 이렇게 진한 침식파를 내뿜고 있는 주제에 세상의 존속이 어쩌고 어째? 네가 하는 짓거리는 파멸을 불러왔을 뿐이야!


언제부터 인간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 거냐? 누구의 끄나풀이지? 아스모데우스가 그리 하라고 시키더냐? 아니면 타기리온이냐?"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 하고 있는게 시윤이를 돕기 위해서라고 몇 번을 말해?!"



루시아의 앙칼진 목소리가 공기를 찢어 가르듯 이 공간 전체에 메아리쳤다.



"시윤이의 힘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어. 내 보조가 없다면 뱀이 영혼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시윤이가 뱀을 제압한다면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겠지만, 뱀이 시윤이를 잡아먹게 된다면 네가 말한 대로 마왕이 새롭게 각성하겠지.


"너야말로 아직도 모르는거냐!! 마왕의 제어건 뭐건, 마왕과 엮이는 모든 것이 세상의 멸망을 앞당길 뿐이라는 걸!!


그딴 되도 않는 헛짓거리를 위해 잘도 내 제자의 목숨을 실험체로 삼았겠다? 애먼 사람 목숨을 도구 삼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그걸 막기 위해 내 고유무장 중 하나를 가져왔고, 클리파의 힘이 새어 나가는걸 막으려고 이 8봉인역에 결계를 쳐뒀어. 승산이 있는 계획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누구 씨가 방금 전에 거하게 부숴주셨지! 아직도 모르겠어? 바로 그 파멸. 지금 네가 불러온거야."


"아니!! 네가 주제넘게 마왕을 어찌 해보겠다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시윤이에게 위험이 닥쳐오지는 않았을 거다. 원인을 제공한건 네놈이겠지!!"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서로에게 쏟아내는 언어의 칼날은 갈수록 첨예해져만 갔다.


자신의 실책이 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저 남을 탓한다.


애초부터 설명조차 하지 않고 주시윤을 데리고 갔던 루시아가 나쁜 거다.


애초부터 주시윤을 품어주지 않고 매몰차게 대하기만 했던 힐데가 나쁜 거다.


그래. 맞아.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너 때문이라고. 반복해서, 그저 남 탓만을 한다.


루시아는 주시윤을 도와줄 생각으로 일을 벌였지만, 힐데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힐데는 주시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드로부터 주시윤의 눈을 가렸지만, 그가 스스로 뱀에게 찾아가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와 주시윤을 향해 갖고 있는 마음은 결코 악의 따위가 아니었다.


그를 지켜주려는, 그를 도와주려는 선의일 뿐이었다.



""살인자 년...!!""



하지만 선의라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엇나가고 만다.


평행선을 달리던 선의가 다른 방향을 가진 선의와 충돌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거기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전쟁이 벌어지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죽고 망가졌다.


총부리를 눈 앞에 겨누고 서로를 향해 쏘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겨져가는 서로의 얼굴을 보는 순간까지도,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집단을, 나라를, 민족을 지키겠다는 그 '선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모든 가치들을 배제해야 할 것으로 만들고 만다.


조금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했었다면,


조금만 여유를 갖고 서로를 알아갈 시간을 가졌다면,


이런 최악의 사태로 부딪힐 일도 없었을 텐데.



"하.... 예상보다 훨씬 꽉 막혀있는 년이었네. 더러운 위선자 같으니."

 

"뭐?"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셈이야. 언제까지 모른척하고, 진실을 속이고! 언제까지 숙명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이야? 


도망치고 도망치다 못해 이젠 스스로의 시야까지 가려버린거야? 내 탓? 아니, 이건 순전히 네 탓이야. 최후의 발키리."



침식파를 뿜고 있는 거짓된 존재가 위선자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부조리함에 힐데의 눈초리가 굉장히 불쾌하게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가 잔뜩 난 루시아는 불규칙해졌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다시금 분노를 쏟아내었다.



"스승이라면서? 제 눈을 가려버린 널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네가 시윤이에게 더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면 굳이 이런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었고, 이런 리스크 있는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었어. 그런데 이제와서 뭐?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떼버린 주제에 지금 누가 누굴 탓해-!!!"



서슬퍼런 눈을 하고 루시아는 거세게 화를 냈다. 항상 생글생글 웃던 그녀에게서 절대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침식파가 다시금 발산되며 공간을 좀먹어간다.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살풍경한 목소리가 힐데의 귀 뿐만 아니라 대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끝까지 뻔뻔한 년..! 뱀이 시윤이를 원하는걸 알고 있었으면서, 위험 속으로 시윤이를 인도한 네가 할 소리냐!! 


클리포트 인자를 각성시킨다고? 역겨운 그림자나 생각할 법한 역겨운 발상이군. 인간 흉내나 내면서 내 제자를 뱀에게 산 제물로 갖다 바쳐? 감히!!!"



힐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결여된 것 같은 황금빛 눈을 부라리며 루시아를 향해 일갈을 멈추지 않았다.


그 뻔뻔하리만치 오만한 모습이, 오히려 루시아의 화를 더욱 부추겼다.



"궤변은 집어치워라. 난 시윤이가 자신의 힘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했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던 것도, 그게 세상과 그 아이 모두를 위하는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랬는데-"


"그건 고결하신 네 생각이겠지. 시윤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정말 시윤이를 지켜주고 싶었으면 올바른 길로 인도했어야지. 


용혈이 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최소한 그런 것들은 알려줬어야지. 적어도 눈을 틀어막고 맘대로 방향을 바꾸는 그딴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그랬으면 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평화라는 환상 속에 빠진 채 현실을 바라보지 않은 네 잘못이야! 알아?!!"



빠드득.


욱한 나머지 처음으로 힐데도 목이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 입 닥쳐!!!!"








어떤 모욕이라도, 어떤 수치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일만 하고 살아왔으니까. 그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러나 지금껏 주시윤을 뒷바라지해온 시간을 갖고 꼬집는 것은, 스승으로써의 오점을 꾸짖는 것은, 힐데의 역린과도 같았다.


주시윤은 이 세계에서 깊은 인연을 맺어왔던 두 제자가 남긴 유일한 혈육이다. 


힐데에게 주시윤은 자신에게 맡겨진 또다른 사명이자, 세계였다.


루시아의 지적은 그런 주시윤을 지켜왔던 힐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한 순간에 부정하는 것으로, 있을 수 없는 불경과도 같았다.



"네 년이... 네 년 따위가 뭘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 시윤이가 이 힘 때문에 무슨 일을 겪어야 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큰 상처를 갖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딴 말을 입에 담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양, 허영심에 절은 채 올바른 길을 논하느냐? 그 아이를 곁에서 줄곧 봐왔기에 내린 결정이야. 목적에 눈이 돌아가 타인을 도구로 이용할 생각만 하고 떠들어대는 너같은 놈들이, 뭘 안다고 큰소릴 치느냐!!!"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 손이 부르르 떨렸다. 공허했던 황금빛 눈에 분노의 화염이 이글거렸다.


정말 오랜만에, 힐데는 몸을 타고 흐르는 격렬한 분노에 자신을 맡긴 채 되는 대로 언어의 칼날을 휘둘렀다.



"시윤이와 뱀이 같은 힘을 갖고 있다는 걸 내가 모를줄 알았더냐?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숨겨야만 했다!! 


뱀이 시윤이를 만나는 것은 시윤이에게 죽음과도 같다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 알고 있으셨다? 그런 년이 지금 이딴 짓을-"


"애초에 네가 시윤이를 여기로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자신의 힘에 대해 자각하지 않은 채로, 누구도 죽이지 않은 채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하!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내 탓이라고 쳐. 근데 알고 있었다고 해서 너한테 면죄부가 주어지진 않아. 뱀을 찾아간다는 선택으로 시윤이를 내몰은건 너고, 안전장치를 박살내버린 것도 너야!


너의 성급함 때문에, 내가 지키고 싶었던 시윤이가 위험해진 거라고! 알아들어? 응? 그래놓고 너 때문에 시윤이 죽게 생긴걸 나에게 뒤집어 씌워? 양심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드래곤 부스터를 가동시킨 힐데의 몸 전체가 격발된 총알처럼 번개같이 쏘아진다.


언어의 칼날 대신 진짜 칼날이 날아들었다.


루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회로의 형상을 한 푸르른 결계가 자신과 힐데 사이를 가로막았다.


칼날과 경계가 맞부딪히기까지, 단 1초.



콰아아앙-!!!!



칼날과 결계가 충돌하자 쇳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음이 두 사람의 귀를 강타했다.


금안의 여신과 청안의 소녀는 증오로 뒤집힌 눈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두 여자 모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이상의 대화는 없고, 오로지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쳐 부술 뿐이라고.



"해보려고?"



싸늘하면서도 비릿하게, 루시아는 어딘가 엇나간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장 시윤이를 데려와라. 그림자 찌꺼기. 아니면 지옥문을 열은 그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까!"


"너만 화난 줄 아나본데, 화가 치밀어 오르는건 네가 아니라 나야!!!!"



양 손에 결계들이 모여들며 검의 형상으로 재조립된다. 


루시아는 있는 힘껏 결계로 만든 검을 휘둘러 힐데를 쳐 날려보냈다. 호쾌한 소리가 귀를 가득 징하게 울려댄다.


날아간 힐데를 향해 도약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허공과 땅에서 그물망처럼 결계들이 솟아올라 힐데를 향해 날아들었다.



-드래곤 버스터

점화 Ignite

레긴의 분노



클리포트 인자가 정제된다. 눈의 황금색이 더 진해지고, 힘이 몸을 새롭게 채워간다.


이 정도의 해방만 해도 루시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짓뭉갤 수 있다.


주변에 감도는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양 손에 들린 검날 부분에 집속시켰다. 검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몸을 꿰뚫기 위해 날아드는 결계들을 힐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날아가서, 들이받았다. 


마치 성난 황소같이. 투우사를 뿔로 들이받아 죽일 듯한 살기를 띄고, 몸 전체가 검처럼 휘둘러진다.


일격, 측면에서 내리꽂히는 결계들이 전부 보기좋게 두동강난다.


이격, 정면에서 쏘아진 결계들이 종잇조각처럼 바스라진다.


결계가 조각나는 것을 보고 루시아는 눈을 찌푸렸다. 늑대 특유의 성가신 검술이었다.


루시아의 주변에서 결계들이 짜맞춰지며 구조를 형성한다. 날카로운 형상의 거대한 결계 구조체들이 힐데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압도적인 물리량으로 눌러버릴 심산이었다.


이번에도 힐데는 피하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그녀에게 돌진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머릿속에 없었다.



"그딴 결계 따위로는-!!"



내게 상처조차 낼 수 없어.


그녀는 최후의 발키리. 최강의 전사.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분쇄해온 심판자.


금빛 눈이 흉흉하게 번득인다. 힐데의 양 팔이 살기를 잔뜩 담은 채 무자비하게 내리쳐진다.


베고, 올려치고, 내려찍고, 꿰뚫어 찢고, 그저 짐승처럼 몸을 들이받는다.


검에 닿은 구조체들은 무참히 부숴진 채 잔해가 되었고, 몸을 덮치는 구조체는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한 채 그저 무력하게 으스러진다.


고도로 압축 코팅된 클리포트 인자의 칼날을 양 손으로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여신이라기보다는 황금빛 사신과도 같았다.



"작작 좀 하라고!!!!"



루시아는 분노어린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고쳐잡고 힐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대저택의 결계와 8봉인역의 결계에 힘을 쏟느라 사용할 수 있는 잔량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자기 제자마저 잔혹하게 담궈버리는 저 스승이란 작자를 타도하기 위해 아끼지 않는다.


남은 결계의 대부분이 양 손에 쥔 검에 응축되어간다. 결계를 집속시킨 검은 한 쌍의 푸른 빛의 날개가 되었다.


루시아는 왼 팔, 힐데는 오른 팔.


발키리의 검과 빛의 검이, 상대방을 베어 죽이리라는 각오를 담고 휘둘러졌다.


인류를 위하는 두 거대한 힘이, 주시윤을 향한 두 사람의 선의가, 서로 섞이며 비극적인 하모니를 자아낸다.


두 여자는 어느 한 쪽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검을 맞부딪혔다.


기량은 힐데가 훨씬 앞선다. 평생을 검사로써 세계의 적들을 베어온 그녀다.


하지만 루시아도 만만치 않았다. 평생을 싸워온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런데 네가 그걸 부수고, 시윤이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어 놓고!! 네가 그러고도 스승이야!?"


"그 아이가 다신 상처받을 일 없도록 지킬 뿐이야!! 네년처럼 시윤이를 위험하게 만드는 놈들로부터!!"


"네가 제대로 알려주기만 했어도!! 최소한 앞 뒤 안가리고 칼부터 들고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시윤이가 위험해질 일 따윈 없었어! 전부-"


"닥쳐라!! 친구라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을 이용할 생각만 하는 주제에! 그런 년이 그 아이의 친구를 자처해!? 시윤이가 위험해진건 전부-"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을 텐데.


진실을 알려주고 성장시키라는 의뢰가 있었는데.


진실을 감추고 행복하게 살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드래곤 버스터

점화 Ignite-


결계연금 結界鍊金-



드래곤 버스터의 구동부로부터 힘의 격류가 몰아친다.


푸른 선들이 한데 모여들어 거대한 검 형상의 술식을 자아낸다.


힐데도 루시아도 순간 마음 한 켠에 주시윤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미 없어진 소중한 사람을 향한 감정은, 그 원흉을 눈 앞에 마주한 즉시 분노의 기폭제가 된다.


저 여자를 용서해선 안 된다며, 마그마와도 같이 마음이 요동치고 몸이 덜덜 떨린다.


그리고 둘 다, 눈에 더 지독한 독기를 품은 채 사납게 소리쳤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전부, 모든 것이.


전부 다.



파프닐의 강림


학살의 춤 Schreddern



""너 때문이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거룡의 심판.


주변의 모든 것을 잘라내는 죽음의 무도.


두 기술이 격돌한다. 두 여자의 분노가 부딪힌다. 서로를 부숴 깨트리기 위해.


싸우리라. 서로가 꺾여 스러지는 그 순간까지.




......


............




전투가 끝났다.


대공동 이곳 저곳은 깨어지고 부숴진 바위더미와 크레이터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루시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베이고 찢긴 상처가 온 몸에 가득했다.


호신용 결계로 어느 정도 상쇄했다곤 하나, 클리포트 인자를 집속해 휘두르는 힐데의 공격은 결계로 온전히 상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아의 패배였다.


황금의 눈을 한 여신은 쓰러진 루시아의 가슴팍을 무자비하게 발로 짓밟았다. 고통어린 비명이 공기와 섞여서 힘없이 터져나왔다.



"크, 하윽....!!"


"남길 말 따윈 받지 않으마. 인간 흉내나 내는 그림자 찌꺼기."



증오심을 가득 담아 힐데는 구둣발을 굴렀다.


서슬퍼런 검날이 쓰러진 루시아의 목을 향해 겨누어졌다.


고통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며 루시아는 힐데를 꼿꼿이 노려보았다.


몸은 패배해 널브러졌음에도 여전히 얼굴은 화산과도 같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음은 더 싸우라며 몸에 자꾸만 긴장을 불어넣는다.


분하지도 않냐고, 시윤이를 성장시키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틀어진 것이 원통하지 않냐고, 싸우라고.



"미친 년.... 넌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할거야....!!"


"이제 와서?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이 후회요, 가시밭길인 것을."



밟힌 가슴으로부터 느껴지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루시아는 저주를 쏟아냈다.



"그렇, 게나 지켜온... 시윤이를... 네 스스로 져버린거니까 말야!!!!"


"그래. 널 진작에 쳐죽이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 너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하는 힐데의 얼굴 역시 엇나가 있었다.


주시윤을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 주시윤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마음을 얽어메어 옥죄었다. 복수의 화염이 눈에서 이글거렸다.


힐데의 검이 치켜올려진다.


힐데를 향한 분노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도 루시아는 활로를 찾으려고 애썼다.


자신이 검에 베인다고 죽을 리도 없겠지만, 이 검을 점연으로 맞았다간 무력화되는 것은 분명하다.


아직 그녀에게는 시윤이를 지켜야 한다는 임무가 남아 있었다. 뱀과 독대한 시윤이를 내버려두고 재기불능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 뱀에게 몸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몸을 뺏은 뱀을 퇴치하는 것 역시,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임무였다.



"큿....!!"



이미 상황은 관리자와 상의한 계획으로부터 한참 벗어나있었다.


최악의 시나리오 역시 상정해두었으나, 이렇게 힐데와 관계가 틀어진 이상 그 시나리오가 원활히 흘러갈지도 미지수다.


지금이라도 관리자와의 연결을 폭로하고 활로를 구축해야 하는걸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지?


운명이 결정지어질 일촉즉발의 순간.


갑자기 봉인지 내부에 거센 대바람이 휘몰아쳤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힐데와 루시아를 휘감았다.


소름이 끼칠 것만 같은 꺼림찍함이 공간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대공동 일대의 어둠이 한 단계 더 짙어졌다.



"뱀이로군. 이제서야... 읏?!"



힐데는 말을 하다 말고 크게 놀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방금 가만히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던 주시윤의 몸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주시윤이 깨어나기라도 했다는 걸까? 뱀과 대면했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면,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아를 밟고 있던 발을 떼어내고 힐데는 주시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에 싸인 주시윤의 몸은 마치 한밤중에 음산한 절 내부에 있는 불상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서, 어딘가 모르게 보는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움찔.


한 차례, 두 차례, 주시윤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힐데는 주시윤이 살아있으리라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주시윤의 몸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시윤아...! 돌아온 게냐....?"



부드러운 말투로 힐데가 나지막이 주시윤에게 말했다.


주시윤의 몸이 또 다시 꿈틀거렸다. 그 정도가 보다 선명해졌다.


어깨가 씰룩거린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는 밑으로 쳐져 있었다.



크흐흐흐, 흐흐흐흐흐흐-!!!



뱀의 소름끼치고 기분나쁜 웃음소리에 맞춰서, 한 차례, 두 차례. 움찔, 움찔


푸른 색이 아닌 붉은 빛의 눈동자가 주시윤의 몸을 감싸고 있던 자욱한 어둠을 뚫고 흉흉하게 빛났다.



"?!"



마치 재앙의 전조처럼.


세상을 가득 물들일 붉은 피처럼.


그저 빨갛게. 빨갛게.


푸른 눈은 사라지고, 붉은 눈이 인세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자리의 세 사람에게 찾아온 것은 최악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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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남츙 의뢰로)주시윤을 성장시키겠다는, 주시윤을 지키겠다는 두 여자의 선의가 엇나가버린 결과물은 참으로 안타까운거 같다.


영혼결계가 중간에 없어진 것은 루시아가 배신한게 아니라 힐데가 "어 저 십련 저거 이상한 무장으로 시윤이를 뱀한테 제물로 바칠라 하나? 파괴한다!!!" 하고 달려든 결과물이었음.


자기가 용혈에 취해서 부모님을 둘 다 썰어 죽였다는 사실을 시윤이가 알면 안됐기 때문에 힐데로써는 자꾸만 심리 상태가 극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급발진을 이끌어낸거지.... 잘 썼으면 씁슬하게 다가왔을텐데 작중 묘사가 부족한거 같아서 덧붙임.


결국 루시아가 (의뢰였다지만) 호감으로 주시윤을 도와주려고 한 것은 힐데가 급발진을 하게 만드는 계기와 뱀에게 먹히는 결과를 낳았고, 


힐데가 진실을 숨기고 시윤이 지켜주려고 했던 것은 주시윤이 상처받는 계기와 루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해 스스로 뱀에게 걸어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음.


항상 봐주고 댓글 남겨줘서 너무 고맙다. 앞으로 힐데가 어떻게 멘탈이 작살나는지 기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