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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집












팬드래건의 가주는 언제 언제 어디서나 평정을 유지해야 하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된다

기관장으로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어야하며 기관원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아니된다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느껴지고 있는 이 감정은 무엇인가


"이해하기 힘들군요."


아직 절반 넘게 남은 홍차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슬픈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이 비춰지고 있었다

잔을 살짝 흔들자 파문이 일어 여성의 얼굴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전부터 느껴왔던 이 감정은 대체 무엇인가

애정도 분노도 아닌 이 무언가는 말로서 형용할 수가 없었다

방금전 그에게 했던 말을 되돌아본다

기관의 요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건 당연한 일이며 의심하지 않아야 된다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날선 반응을 보인걸까

알 수 없다

가치관이 다르다. 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게 아니다

내가 봤던 그에게는 죽음을 각오조차 있었다

이번 임무가 문제였던걸까

그렇다면 이건 기관장으로서의 실책이다

이번 학회장의 행보는 예측 하기가 너무나도 까다로웠다

전대의 학회장 안나 맥크레디는 솔직히 말해 쉬운 상대였다

자존심을 이용한 도발은 효과적이었으며 "관측소"들의 활성화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의 학회장은 완전히 전대와 궤를 달리하고 있다

얼마 전 맥크레디 포인트에서 일어난 사건과의 연관성마저 보인다

만약 '탐식자'가 깨어나버렸다면....


불길한 상상을 애써 떨쳐낸다


아직 격리구역에서 별다른 보고는 들려오지 않았다

탐식자가 일어났다면 분명 자신의 파편들을 먹어치우려고 움직일터

그렇다면 아직은 아니다


"후우..."


얕은 한숨 후 이미 식어버린 홍차를 마신다



"식었네요."


지금이라면 그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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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레이드


과거 어떤 끔찍한 재앙이 이 땅을 덮친 뒤 여러 테스크포스들의 노력으로 이 땅은 활기찬 기회의 땅이 되었다

라고 다른 외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그건 어디까지나 팜플렛에도 써져있을 설명이다


내게 있어 이곳은 지긋지긋한 고향이자 집이었으니까


그라운드 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겨나는 오해가 있다. 테스크포스가 침식체를 격퇴하는 정의의 집단이라는 환상이다

그야 그들의 관점에서는 침식재난이 벌어졌을때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주니까 그런 오해를 할법도 하다


하지만 테스크포스와 용병의 차이는 관리국 공인 면허의 유무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곳은 사실상 용병집합소나 다름없다는것이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이곳의 치안은 최악을 달리고 있다

사람이 많은 관리국 지부 근방은 관리국의 눈치를 봐야하니 다들 법을 준수하지만 거기서 조금만 그곳에서 멀어지면 법보다는 주먹이 주먹보다는 카운터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주먹을 써야할때가 내게 찾아왔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을 어두운 건물사이의 골목길

거기에서 낯익은 얼굴을 가진 녀석이 큰 덩치 여럿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하고 있었다


체인을 팔에 감는다

내게 뒤를 보인채 밟고 있는 녀석에 등짝에 주먹을 내질렀다


한놈이 밀가루 포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벽에 처박히자 그제서야 녀석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쳐다봤다


"안녕. 망할 자식들아."


수는 벽에 박혀있는놈까지 포함해서 넷

이제 세명이 되었으니 조금은 겁을 먹었을거다



"카운터다! 갈겨!"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버렸다


리더로 보이는 녀석의 신호가 떨어지자 녀석들은 다같이 자동소총의 탄환을 내게 선물해줬다


"하..씨."


나는 다급하게 사슬을 앞으로 뻗어 중력장을 펼쳤다

그러자 총알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중력장에 막혀 공중에 떠있게 되었다

"위험하게시리."

"미...미친..."

중력장을 풀자 총알들이 힘없이 땅을 굴렀다


"이건 정당방위다?"


뭐 내가 먼저 때리긴 했는데 그건 큰 문제가 안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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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선물을 주려던 녀석들은 사이좋게 쓰레기통에 처박아줬다

그러니 선물을 주려면 상대의 취향을 알아봐야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렇게 험한꼴을 당할테니



"야. 여기서 왜 처맞고 있냐."


아까 집단구타를 당하던 녀석은 루터스라는 동네친구 녀석이다

친구 맞나?


"고마워 로이.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내가 쓰레기통에 처박혀있었겠네."

루터스는 구타를 심하게 당했는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래서, 무슨일이야? 아니면 이유없이 그냥 처맞은거야?"

남이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서는 심심해서 길가다가 갑자기 패는 놈들이 간혹 있다

제재를 가해야 할 경찰은 수도 적고 할 의욕도 힘도 없으니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내 말을 들은 루터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형이 돈을 빌렸거든...그리고 나는 그 돈을 갚지 못했고."

루터스에게는 나보다 3살 많은 형이 있던걸로 기억한다

몇번 보지는 못했지만 꽤 성실한 경찰로 기억하는데 대출이라니?

"너네형이 돈을 빌렸다고? 대체 왜?"

질문이 이어질수록 루터스의 표정이 굳어간다

"......짝퉁 엘릭서에 중독되었어. 그것도 오랫동안."


"하..."


엘릭서

용병들 사이에서는 기적의 약물이라며 칭송받는 물건이다

효능은 초재생능력으로 이 능력으로 살았다는 용병들의 증언은 이미 업계에서는 유명하다

오죽하면 죽은사람까지 살린다고 할까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완제 엘릭서를 가지는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복제품이 탄생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복제품도 원본과 비교해서 질이 높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리플레이서 신디케이트 사건 이후 엘릭서는 물론 그나마 효능이 있는 복제품조차 대부분이 시장에서 흔적을 감춰버렸다

블랙네트워크의 누군가는 이 일이 관리국과 경찰청의 합작이라고 말했지만 진상을 아는건 본인들밖에 없겠지


그래서 현재 유통되고 있는 가짜 엘릭서는 효능은 없고 부작용과 환각작용만 남아있는 마약이다


"형은...어머니가 의문의 사고로 돌아가시고서 사람이 바뀌어버렸어. 평소에 자주 웃던 형이 그 이후로 한번도 웃지 않았을정도로."

"후..."

경찰의 가족들이 노려지는건 이 지역에서는 흔한일이었다

오죽하면 고아출신 경찰이 오래버틴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까

루터스는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압수물품에있던 엘릭서를 사용한게 계기였나봐. 형은 그 짝퉁 엘릭서를 쓰고서 어머니의 사고를 실행한 녀석들의 패밀리를 말 그대로 쓸어버렸어."

"하지만 중독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형은 있는돈 없는돈을 끌어다쓰다가 결국 부작용으로...죽었어."

녀석의 말에는 슬픔이 묻어져나왔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뱉는게 힘들정도로 말이다

"야."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루터스를 안아주었다

"울어도 돼."

내 품에 안긴 녀석은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많았는지 한동안 정말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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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노을이 비치는 카페에 앉아있었다

루터스는 진짜 서러웠는지 한 10분은 넘게 울었던거 같다

아메리카노 향이 코를타고 기도로 넘어간다

"이제 대책을 세워야지."

아메리카노가 목에 들어가자 쓴맛이 압안에 가득찼다

"미안해. 하지만 빚이 너무 큰걸. 이 돈은 내가 평생을 벌어도 다 못갚을거야."

어차피 사채업을 하는 놈들 수법이야 뻔하다

1000크레딧을 빌려갔으면 1달뒤에는 10만 크레딧으로 불리는 억지를 부린다

그렇다면 답은 명확하다

"야. 원금이 얼마였어?"


이럴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써야지


"어...원금만?"

"그래 원금. 어차피 네 빚의 대부분은 이자일거 아니야?"

루터스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금세 대답했다

"9000크레딧이야."

"좋아. 지금 갚아야할건?"

".....19만 크레딧."

"...갚은 돈은?"

"3만 크레딧...에서 조금 더 갚았지."

내 말을 들은 친구녀석은 내가 무슨짓을 벌일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말리려했고

"로이. 아무리 너라고해도 그녀석들을 전부 상대하는건 자살행위야. 도와준건 고맙지만 더이상 끼어들었다가는 돌이키지 못해."

 "왜 멋대로 생각하는거야?"

루터스의 눈이 커진다

"난 내 근처에 쓰레기가 있는걸 못참는 성격이거든. 그래서 치우러 가는거야."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다

"위치는 말해줄거지?"

"내가 말 안해준다면?"

나는 어금니가 보이게 씨익 웃어줬다


"아까 쓰레기통에 들어간 놈들에게 물어봐야겠지. 내가 뚜껑을 조금 손봐둬서 말이야. 아마 지금도 거기있을거다."

내 말을 들은 루터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위치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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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 도마뱀꼬리의 두목 펠라굿은 오늘이 여태까지 살아왔던 인생중에서 가장 최악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정말 재수없게도 등쳐먹던 놈들중 하나가 미친 상또라이를 불러왔기에

한때 동네를 주름잡던 갱단의 본부는 이미 공사현장과 크게 다른게 없었다

부하녀석들중 대다수는 팔다리중 최소 두군데는 박살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두목인 자신도 목에 사슬이 감긴채 죽음의 문답을 진행하고 있었다

"야. 내가 없으니까 동네가 참 잘 돌아간다. 그치?"

그에게도 이 또라이는 구면이었다

과거 거액을 들여 용병들을 고용해 이 지역을 정리하고서 다시 시작하려 했을때 이 녀석이 끼어드는탓에 고용한 용병들 대부분이 불구가 되어 치료비까지 자신이 부담했어야했다

목에 감긴 사슬이 점점 조여온다

"말 한마디만 하라니까? 너한테 빌린놈들의 빚의 완전변제 이거 말하면 다 끝나."

"컥...컥..."

두목은 말을 하지 못한채 바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말이야. 너같은 쓰레기들을 증오해."

로이의 눈이 차가워진다

"이 동네는 말이야. 소매치는 일상이고 거짓말도 밥먹듯이하지만 그딴식으로 어이없게 등처먹는 새끼들은 없었어."

바둥거림은 점점 심해져 테이블의 물건을 밀쳐 떨어트렸다


"그런데 보니까 가짜 엘릭서까지 니 짓인거 같더라. 그러니 내가 10초를 줄테니까 빚 변제하겠다는 말이랑 니가 살아야될 이유까지 말해봐."


두목은 컥컥거리며 어떻게든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는 사슬에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숨이 막혀 정신을 잃기전 목을 감고 있던 사슬의 압박이 풀렸다

"컥...컥...우..우웩.."


구속이 풀리자, 두목은 목을 붙잡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10"


그때 로이의 차가운 음성이 두목의 귀에 차갑게 박혀왔다

죽음의 텐카운트

저 카운트가 끝난다면 링에서 내려오는게 아니라 이승에서 내려와 지옥으로 떨어질게 자명했다


두목은 다급하게 말했다


"빚 전부 없었던걸로 할게! 이건 이 갱단의 이름을 걸고서 약속할게!"

다행히도 로이는 두목의 말을 듣고서 짧게 고개를 끄떡였다

"다음."

"다음? 그 다음이 뭐가 있다고..."

하지만 두목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컥!...커..흡...흡..."

방금보다 2배는 강하게 조여오는 사슬을 보면서 두목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10초 지났다. 살아야할 이유가 없다면 죽어야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렸지만 두목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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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가 끝난뒤 나는 불쌍한 친구녀석에게 가서 빚변제가 완료되었다는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고맙다고 말하며 정말 괜찮냐고 다시 물어보길래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못을 박아줬다

그런데 친구녀석은 꼭 빚을 갚겠다며 나를 따라다니며 도와주겠다고 하며 날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녀석을 떨어트려 놓기위해  도움이 되고 싶다면 여기로 와서 일하라고 말한뒤 기관의 연락처를 쥐어줬다

기관이라고 무조건 비밀리에 인원을 뽑는건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그 넓은 기관들을 비밀리에 선발된 인원만으로 어떻게 전부 관리하겠는가

오히려 기관은 완전한 시설관리를 위해서 비밀서약서를 쓰는 조건으로 민간인을 채용한다


따라서 친구놈도 운이 좋다면 기관에 취직할 수 있겠지


"뭐 알아서 하겠지."


친구녀석의 문제를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그리고서 나는 집으로 향했다


내게 있어 집이란 몇없는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아닌가? 맞고 또 맞은거 같은데


일단 하루를 친구 도와주는데 사용했으니 나머지 휴가는 진짜로 쉴거다



그랬는데



"일기...인가?"


오랜만에 와서 할배의 방을 정리하던 도중 할배가 쓰던 책상에서 낡은 읽기장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래서 책을 열자




나는 할배의 과거 한복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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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편이 너무 재밌어서 폭주해버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