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글: 스포+스압)코스믹 호러 장르로 본 에델 마이트너 및 학회- https://arca.live/b/counterside/44797671



-이건 엑소시즘인가 아닌가


 이번 이벤트 에피소드인 '그레모리의 바'. 이 에피소드는 대부분 그래도 만족스러워 한 것 같아. 귀염귀염한 캐릭터와 아기자기한 사건들이 보는 맛이 있었지.

 하지만 이것을 곱씹어볼수록 섬뜩함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어. 사건과 과정 자체는 평범했지만, 결말을 사실 잘 생각해보면 무언가 끝이 이상하거든. 결론적으로 스스로 마왕이라고 말하는 존재를, 엑소시스트(퇴마사)가 방치한 꼴이 되었으니까.  


-만에 하나 이게 팩트였다면?


 현재로써는 정보가 많이 없지만, 일단 내 의견을 말해볼게.

 나는 모모가 마왕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무서운 일은 아닐 수도 있다고 봐.

 왜냐면 여긴 카운터사이드- 수많은 세계가 현실에 희석되어 가는 쓰까 세계관이거든.


-있는 세계관 다 쓰까묵는 세계


 이번 에피소드도 사실 여러가지가 짬뽕되어 있어. 하나는 구마 의식 내지 악마 제령을 하는 오컬트 계통의 엑소시즘 세계관. 다른 하나는 일반적인 판타지 계통이 섞여 있어. 뭐 정확히 말하면 아주 오컬트 계통은 아니지만, 적당히 넘어가자고.

 내가 왜 이런 소리를 하냐면, 이번 에피소드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레모리를 제외하고는 이 장르들의 법칙에서 한참 벗어난 인물들이라는 거야.


 의외로 저 오컬트 계통 내지 퇴마 계통 세계관은 인정사정없기로 유명한 동네거든. 어떤 의미로는 지난번 설명한 '코스믹 호러'세계관보다 더한 면도 있어. 이제부터 차차 설명할게.



 1. 엑소시즘(퇴마/구마) 및 오컬트 계통의 공식


-영화 '검은 사제들':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를 든 사제


 엑소시즘 장르는 기본적으로 악마와 악령 같은 악의 존재들에게 대항하는 존재들을 그려낸 작품들이야. 악과 선, 신과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고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이지.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비롯한 사제들이 이런 구마(퇴마) 활동을 하게 돼.

 이런 장르에 등장하는 교회나 등장인물들이 늘 하는 소리들이 있어. 바로 이거지.


-악의 존재들을 없애라


 이게 좀 위험하고 정신나간 것 같은 말들이지만, 사실 구마의식을 해야 할 사제들에게는 당연한 소리야.

 이들은 사람의 마음을 꾀어내는 존재인 악마와 직접 대면해야 할 존재들이야. 마음 속의 욕망과 약점을 숨 쉬듯 찾아내고 그곳으로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는 이들이 악마지.


 그런데 스스로에게 확고한 신념과 의무, 믿음이라도 있지 않으면 악마에게 속아넘어가기가 너무 쉬워. 동정이나 자비- 그런 어설픈 감정 따윈 버려야만 해. 악마는 악이야. 그리고 그렇게 악마의 구슬림에 넘어간 이들의 결말은 언제나 비참하지. 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버린 이들의 영혼은 이미 악마의 손아귀에 넘어간 거야.




 이 세계는 비정한 동네야.

 선과 악, 신과 악마, 생과 사, 천국과 지옥이 명확한 세계인지라 악마와 사제들, 사람들은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 구마의식은 언제나 처절하기 짝이 없는 혈투지.

악마들 역시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어.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사탄의 자식들은 언제나 피와 살에 목말라 있지. 영악하고 사악한, 하지만 너무나 감미로운 목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해서 가지고 놀아. 그러니 이 세계관은 어지간해서는 '적당히'라는 개념이 없어. 당연히 '선한 악마' 같은 로맨틱한 존재도 없지. 착한 악마는 뒤진 악마야.


 사제, 일반인, 악마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서로를 물고 늘어지는게 이쪽 세계의 관습이야. 생과 사, 선과 악- 그 사이에 중간 따윈 없으니까. 게다가 악마에게 죽는 특성상 결코 곱게 가는 법이 없지. 대부분 비참하고 끔찍한 형태의 죽음을 맞게 돼.


 그런 이유로 보통 등장하는 퇴마사들은 하나같이 인정사정 없는 하드보일드한 인간들이야. 


-영화 '존 콘스탄틴'


 어설픈 자는 살아남지 못하고, 마음이 약한 자는 자신의 욕망에 잡아먹히지. 싸우는 자도 어느새 자신의 마음이 악마에게 넘어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고, 방심하던 악마는 자신의 이름을 털려 조져지진 않을까 조심해.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칼을 들고 싸우는 혈투전이지. 뭐 계통에 따라서 진짜 총칼 들고 맞다이 하는 동네도 많아. 위 영화도 그런 쪽이지.

 물리적인 악마가 작정하고 나타나는 경우는 더 끔찍하게 싸워. 둘 중 하나가 사라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처절한 혈전이야.


-둠 시리즈의 '둠 슬레이어', 워해머 40K에 등장하는 퇴마사(그레이 나이트)


 따라서 이런 세계의 사람들은 결코 '착한 사람' 수준에 머물러선 안돼. 이들은 착한 사람 따위가 되어서는 안 돼.

 인간다운 게 아니라, 어지간한 악마보다 더한 자가 되어야만 하는 거야.


-Warhammer 40K: "연민과 동정 따윈 버려라. 증오만이 악마에게 대항할 무기일지니."


 악마에게 있어서 이들은 그 누구보다 끔찍하고 잔인한 선의 사자가 되어야 할 자들이야.

 사랑과 자비, 동정 따위의 그런 뜨뜻미지근하고 물러터진 연약한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악과 맞서 싸울 수가 없어. 반드시 악을 조져버리겠다는 의무로 총과 성서를 들고, 그 속의 말씀으로 마음을 단단히 감싼 채 나아가야만 해. 적의 먹이가 될 어설픈 자비심과 동정 따위는 일찌감치 버려둬야 할 필요가 있어.



 따라서 이들은 타인(악마)의 말에 결코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악마와 악령을 조지는 성기사가 되어가지. 신의 말씀이라는 형태를 띈 한 자루의 칼이 되어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무기가 되어가는 삶이지. 그리고 이 악마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활동은 대부분이 그늘 속에 가려져. 그래서 이런 구마사제가 되는 이들에게 꼭 묻는 말이 있어. 이번에도 니콜에게 묻는 형태로 나오지.


-아무도 몰라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인 구마사제는 악마를 찌를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는 거야.

 이런 사람 형태를 한 칼이 서로를 휘두르며 혈투가 벌어지는 것이 바로 이 엑소시즘의 세계지.




 2. 선악의 구분과 상징성



-어둠과 빛, 그 중간 어딘가


 그런데 이번 에피소드의 인물들은 전혀 그런 느낌들이 아냐. 분명 시작은 엑소시즘인데 과정이 전혀 아냐.

 이 에피소드의 중점이 되는 저 보라빛 네온사인부터 그 특색이 명확하게 나타나. 저건 어두운 건가, 밝은 것인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곳, 그늘 속에 있는 한 술집. 어두운 곳에 있지만, 촛불처럼 빛나며 사람들을 맞아주는 곳. 이곳 술집은 모든 것이 명확함을 잃어버리고 모호하게 되어버린 채, 헤메이게 만드는 장소지. 당연히 선과 악도 마찬가지야. 니콜은 여기서 자신의 명확해던 선의 관념을 잃어버리고 헤메이기 시작해.


-지친 이들의 도피처


 주인공인 니콜은 오로지 빛과 말씀만이 있던 교회에서 처음으로 벗어나 이런 속세를 만나게 돼.

 그리고 벌어지는 일은 전혀 이런 엑소시즘이 아냐.



 말랑말랑하고 어설픈 악마와,



 모자라고 나사빠진 퇴마사의-



 어리고 앳된 좌충우돌 속세 적응기야. 전혀 이쪽 공식을 사용하는 애들이 아니라고.


 얘들은 이런 공식을 사용하는 애들이 아냐. 오히려 굳이 따지면 하드보일드 아저씨들의 구출 클리셰에 가까운 공식을 사용했어.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 각성하는, 참 영화 주인공스러운 장르를 선택한 거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제 와서 이 둘이 갑자기 드리프트를 틀면서 오컬트로 돌아올 것 같진 않다는 거지.

 이 둘은 이미 이 공식을 떠난 애들이야. 얘들은 인정사정이 너무 많아. 사람도, 악마도 서로 너무 어리고 어설프기 짝이 없어. 




 모모가 마왕인가?-라는 문제는 솔직히 지금으로써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밝혀진 게 없잖아. 아직은 알 수 있는 방법도 스토리도 없어. 다만 앞으로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는 있지.



 모모가 보여준 능력은 그냥 '우니까 와장창' 정도 밖에 없어. 마왕이라기에는 어째 좀 많이 어설픈 능력이지.

 하지만 문제는 어설프긴 해도 엄연히 '사제'라는 직책을 가진 이가 '악마'라는 종족에게 정을 느낀 게 사실이니 섬뜩해지는 거지. 위에 세계관이었다면 바로 '이단' 판정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ㄹㅇ 빼박


 악마가 이기고, 불쌍한 제물과 먹잇감이 한명 더 늘어난 셈이지. 하지만 내가 말했듯, 이 둘은 이 세계관에서 벗어난 존재야.

 간단히 말해서, 모모는 아직 악이 아니라는 거지.


-사실은 정석 그 자체


 전자의 엑소시즘의 세계관(선악)에서는 '아직'이라는 단어는 없어.

 악마는 존재 자체로 악이고 지옥의 죄를 가득 담고 온 저주의 바람이야. 이것들은 무조건적으로 악행을 하고, 인간측은 무조건적으로 제거해야만 하지. 여기서는 머뭇거리는 자가 이단이야. 그는 이미 악마의 속삭임에 흔들린 자니까. 일말의 고민조차도 흔들림이고 약점이야. 이들은 철의 각오로 이 악을 몰아내야만 해.  


-정의의 여신은 앞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선악이란 두루뭉술해.

 무조건적인 선과 악이 있냐고 물어보면, 사실 아니다-라는 답이 정답이지. 현실에서는 신도 악마도 보이지 않으니까. 우리는 스스로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할 수 밖에 없어.


-영화 '사바하' 中 박 목사: "어디에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울고만 계시나이까."


 악과 선은 존재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이루지는 것이니까.

 우리는 여러 역사적 사건으로 선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고 제멋대로이며, 그걸 존재에 가져다 붙인다는 게 끔찍하게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어. 우리가 사는 세계에 선악이란 없으니까.


 우리에게는 신도 악마도 명확하지 않아. 신의 인도도, 악의 속삭임도 우리가 결정하지.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가 직접 정하고 행해야 하는- 무심하고 냉정한 세계에서 살아가. 그래서 우리는 이 선악을 행동으로 증명해야만 해.



-영화 '사바하' 中 해인 스님: "불교에는 선악이 없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뱀과 악마는 그저 인간의 집착과 욕망의 표현일 뿐."



 그런 의미에서 모모는 악의 존재가 아냐. 아직은 말야.

 설령 뿔이 달리고 꼬리가 있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모모가 악행을 저지를 적은 없어.

 오히려 현재 에피소드에서 모모는 악행의 피해자야. 악을 행해야 할 악마가 얌전히 있고, 선을 지켜야 할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지.



-악의 행사자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인 니콜은 고뇌에 빠지지.

 자신이 알고 있던, 그리고 배워왔던 퇴마(엑소시즘)의 세계관현실의 세계관의 기준 속에서 방황하는 거야. 그리고 니콜은 결국 현실의 선택을 골랐지.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악마의 곁에서 지켜보는 선택을 해. 이 아이가 결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말야.



 

그래서 나는 얘가 설령 마왕이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걱정이 될 것 같지는 않아.

 저 아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모를 말리고 안아줄 테니까. 너는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말야.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평범하게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훼이크다 병신들아


 물론 이 모든 가정은 이 모모가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기만하지 않았을 때 할 수 있는 거야.

 얘가 정말 처음부터 작정한 채 이 악물고 연기를 했다면, 뭐 이건 당할 수 밖에 없는 거지. 원래 인정사정없는 동네니까.

어수룩한 퇴마사가 잔인한 악마에게 속아넘어간 안타깝고 끔찍한 사태가 일어난 거겠지. 악마를 벨 잔인한 검이 되지 못한 채 흔들린 이단자가 일으킨- 끔찍한 사태인 거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과연 이 꼬마 마왕이 저 따스한 품을 찢어발기면서까지 악행을 저지를까? 아마도 나는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퇴마사가 악마에게 붙잡힌 게 아니라, 악마가 퇴마사에게 붙잡힌 상황일 수도 있는 거지.

 퇴마사가 악마에게 홀린 것이 아니라- 악마가 퇴마사에게 종속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는 거야. 이 둘은 결국 서로 묶여버린 거지. 결과적으로는 꽤 나쁘지 않은 결말이야. 말랑말랑한 악마와 퇴마사는 결국 서로 붙어버리고 말았어.



 뭐 이렇게 아기자기한 퇴마사와 악마의 투닥거림으로 이 에피소드는 끝이 났어.

 오히려 진정한 악마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존재는 따로 있었지.

 물론 이 악마도 스스로 술을 마시며 인간 사회에 물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말야. 그런 의미에서 이 그레모리의 바에는 아직 '악'이라고 할 존재는 없는 거야.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선악을 묻는 것 만큼 잔인한 행동도 없지. 



-그레모리조차 아직 악마가 아니다



 3. 결론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결론은 뭐 아마도 그리 끔찍하게 큰 일은 안 일어날 것 같다- 는게 내 생각이야. 

 무슨 일이 생겨서 모모가 변하더라도, 니콜이 막아서겠지. 그리고 모모 역시 그런 니콜을 함부러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 같아.

 물론 추측이고 뇌피셜이지.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핸들을 180도 돌려 드리프트를 타고 다시 엑소시즘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림 모양 상 안 어울릴 것 같아. 이미 그쪽 루트는 글러먹었지 싶어. 


-설마 이꼴 나지는 않겠지?



 지난번 글이 꽤 반응들이 좋아서 같은 컨셉으로 써 봤어. 다른 의견, 리플 언제나 환영이니까 많이 적어줘요. 늘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