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연말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날씨가 따뜻했다.
머플러는 너무 과했나.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어 간만에 쇼핑을 좀 했는데, 이렇게
차려입어본게 얼마만인지 너무 어색해서 가게 창가에 비치는
내 모습이 내가 아닌 것 같다.
와인색 롱코트에 검정 터틀넥 원피스, 스타킹에 부츠까지.
사실 꽤 오래 전에 선배에게 옷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터라 신경을
좀 썼다. 오늘은 정말 예뻐보이고 싶기도 했고.
하지만 나 혼자서 지나치게 의식하나? 싶은 걱정도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자꾸 발끝만 쳐다보게 된다.
대체 날 얼마나 기다리게 하려고 이렇게 늦는거야!
시계를 살펴보니 아직 약속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역시 내가 너무 의식하고 있는게 맞나보다. 적당히 시간 맞춰
나왔어야 했는데 괜히 들떠선...
"미나 양?"
"으악? 선배?"
"하하, 그렇게 놀라실 건 없는데, 저 상처 받아요."
코트에 흰색 니트를 깔끔하게 갖춰 입은 선배가 내눈에만 눈부셔
보이는 거겠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이면 곤란하다.
"미나 양, 못 알아볼 뻔 했어요. 옷이 날개라는 말이 맞네요."
"선배도 마찬가지거든? 단벌 신사라더니 쫙 빼입고 말야."
"하하, 여자친구에게 부끄럽지 않게 한 벌 샀죠. 잘 어울리나요?"
"뭐.. 봐 줄 만은 하네."
아마 눈치 빠른 선배라면, 귀가 지나치게 밝은 선배라면 내 표정이
코트 핏이 끝장나는 남자친구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홱 고개를
돌린 나를 간파했을 것이고, 선배를 처음 보자마자 헉, 하고 삼킨
내 숨소리를 들었을 거니까 굳이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을래.
어쩌면 지금 내 얼굴은 코트색보다도 더 빨개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 갈 거야?"
"추천 받은 곳이 하나 있어요. 하나 씨한테.."
"흐응, 하나 씨..."
아니, 나는 왜 관리부장님한테 질투하고 있는 거야?
사람 맘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지만, 고작 다른 여자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고 마음이 찌릿하게 아픈 건 너무 못난 여자같지 않나?
"일단 가시죠, 미나 양. 제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으,으응."
손, 오늘은 안 잡아 주려나.
뭐가 그리 기대되는지 선배는 벌써 저만치 앞서있다.
이게 개뿔이 에스코트야?
난 내 손을 잠깐 바라본 후 주먹을 불끈 쥐고 성큼성큼 선배를 향해
걸었다.
덥썩.
선배가 안 잡으면 내가 잡으면 되는 거지.
굳이 기다리고 있을 필요없잖아?
선배가 걸음을 멈추고 날 바라보았다. 뭐, 뭘 봐?
"미나 양, 정말 너무 귀여우신거 아닌가요."
선배는 내 손을 깍지끼며 미소지었다.
귀엽다니.. 그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선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일러주기 전까지의 기억이 싹 사라졌으니까 말이다.
"그레모리.. 바? 선배, 나 미성년자거든? 술 못마셔."
술 멕이고 무슨 짓을 하려고, 대낮부터.. 이미 단계 자체는 첫날에
건너뛰긴 했지만, 그래도 나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게끔
선을 긋는 것은 필요할 것 같았다.
"하하, 술 마시려고 온 것 아니에요. 하나.. 아니 관리부장님이
꼭 여기 주인이랑 얘기해보라고 해서."
선배는 깍지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나를 이끌었다.
바의 내부는 퇴폐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들어가자마자 뭔가 업되는 느낌. 칵테일 바, 나쁘지 않을지도?
"오, 이 몸에게 공물을 바칠 손님이 왔구나!"
머리에 뿔이 달린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방방뛰며 우리를 맞았다.
"사탕, 쿠키, 단 것은 뭐든 받아주마!"
"하하, 귀여운 분이시네요. 바나나 우유라도 받으시나요?"
"빠나나! 좋다, 좋아! 저번에도 여자손님에게 받았는데, 만족스러웠느니라!"
선배는 능숙하게 아이를 다뤘다. 가정적인 모습에 맘이 뭉클..
아니 이런거에 점수 매기기는 좀 이르지 않나 우리?
"혹시 그레모리 씨는 안계신가요?"
"나 찾았니?"
"어이쿠!" / "으악!"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선배 뒤에서 아주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육감적인 미녀가 회색 긴머리를
찰랑이며 말을 걸어왔다. 으음 복장이.. 선배가 저런 거에
눈독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살짝 선배의 동태를 살폈지만, 실눈이라 캐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킁킁, 순애 냄새가 나는데."
그레모리 씨는 코를 킁킁거리며 우리 주변의 냄새를 맡는 척하더니
눈에 띄게 밝아진 표정과 하이텐션으로 방방뛰어댔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이렇게 농도 짙은 순애 오랜만이다 얘!
너희 사귀지? 며칠 됐니? 누가 먼저 고백했니? 응, 응?"
"하하.. 진정하세요. 저흰 김하나 관리부장님께 추천을 받고 왔는데.."
선배가 관리부장님의 명함을 내밀었다. 잠깐 그레모리 씨의 눈썹이
움찔 한 건 기분 탓일까? 명함을 받아 든 그레모리 씨는 테이블에
앉아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고, 이번에도 역시 선배의 실눈에서는
어떠한 동태조차 느낄 수 없어 나는 답답함만 쌓였다.
"연애 운을 점치고 싶다구?"
"네, 관리부장님이 꼭 해보라고 하셔서."
"연애 운이란건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데가 많지만, 난 안 그런데
괜찮겠니?"
나는 걱정스레 선배쪽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을 보면 나도 덩달아 안심이 된다.
우린 벌써 몇번이나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들과 싸워왔다.
연애 운이 어떻든 선배가 저렇게 든든한 이상 나도 두렵지 않아.
그레모리 씨는 눈을 감고 수정구를 몇 차례 어루만지며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눈을 번쩍 뜨고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누군가 너희의 연애를 관여하려고 했는데, 그 이상으로 너희가
끈끈하네. 인위적으로 엮으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 엮인 느낌?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강해, 둘중 누군가 위험해져도 서로가 있어서
헤쳐나갈 수 있을 운이야. 최상이네. 아아~ 나도 이런 연애하고
싶다아~"
나는 그때까지도 붙잡고 있던 선배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선배도 기분 좋게 미소지으며 내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아, 더 해줬으면 좋겠다.
"더 해줘."
아, 실수로 입 밖으로 나온 것 같은데.
"푸흡, 물론이죠, 미나 양."
알게 뭐야, 이렇게 기분 좋은데. 나는 살며시 눈을 감고 선배의
손길을 만끽했다. 사랑받는 느낌이라는 게 이렇게 나를 충만하게
해주는구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어.
한껏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바 밖으로 나와 그냥 손을 잡고
걸었다. 걷기만 하는데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나 싶었다.
목적지가 있는 것도,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산책은 그리 오래지 않아 방해를 받고 말았다.
"어, 선배, 나 비 맞은 것 같은데?"
"어이쿠, 저도요. 오늘 비온다고 했던가.."
후두둑 쏟아지는 빗방울이 우리 몸을 적셨다.
겨울이면 겨울 답게 눈이나 올 것이지, 눈이면 맞아도 낭만으로
여길 수 있었을텐데 비는 무리다. 첫 데이트를 성대하게 망쳐주는
비가 원망스러웠다. 어쩐지 오늘은 괴상하게 따뜻하더라니.
"미나 양, 다행히 제 집이 이 근천데 몸이라도 말리고 가실래요?"
"응? 정말? 완전 다행이다!"
정말 우연인지 운명인지 선배의 자취방이 바로 근처에 있었다.
나, 남자 방에 들어가는 건 처음인데.. 조금 긴장 되는 것 같다.
선배 방은 뭐랄까, 선배답달까. 내 방보다 깔끔했다.
"너무 두리번거리시는 거 아닌가요, 미나 양?"
"아, 아하하.. 별다른 의미는 없었는데.."
"갈아 입으실 옷이랑 수건 여기 둘테니 먼저 씻으세요. 감기걸리면
안 되니까."
"응, 고마워. 그럼 먼저 씻을게. 훔쳐보면 안 돼?"
"하하, 안 걸리면 세이프, 아닌가요?"
나는 짐짓 화내는 척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뭐, 선배라면 훔쳐보지도 않겠지만, 훔쳐봐도 넘어가 줄 수 있다.
난 샴푸와 바디워시로 온 몸에 하얀 거품을 냈다.
향긋한 냄새, 선배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내 몸을 휘감았다.
선배가 온통 내 몸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아 괜히 아찔해져서
얼른 뜨거운 물로 씻어내렸는데 왠지 조금 아쉽기도 했다.
선배가 기다릴테니 얼른 나가야지.
선배가 갈아입으라고 내게 준 옷은 와이셔츠 한 벌이었다.
응큼한 남자 같으니라고. 후후.
하긴 크리스마스에 먼저 대담하게 유혹한 것도 나고, 선배가
초대한 자취방에 발을 들인 것도 나다. 사실 어느정도 예상했고.
나는 몸에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셔츠 한벌만 걸친 채로 욕실을 나섰다.
선배는 핸드폰으로 배달 어플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레모리 씨를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그 결과, 선배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오늘 보여준 반응 중 가장 격하고, 가장 기쁜 반응.
뭐하러 신경써서 옷을 골라입고 차려입었을까, 달랑 흰색 와이셔츠
한 벌만 걸친 반응만 못 한데. 헤헤.
"미나 양, 우리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나네요."
"킁킁, 선배한테서 나는 냄새는 좀 은은해지긴 했는데.."
"그럼 씻고 올때까지 기다려주시겠어요?"
"아니, 못 참아."
선배는 내가 본 선배의 모습 중에서 가장 과감하게 내 입술을 덮쳤다.
선배의 향기가 내 몸에 스며들어 배어간다.
우리 몸에선 같은 향기거 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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