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

 

시끄러운 소리에 눈이 떠졌다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굳은 허리를 두드리며 창문을 여니 온 동네 사람들이 줄지어 떠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던 찰나 못 보던 자동차에 달린 확성기가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근처 도시에서 발생한 침식 재난의 여파를 대비해 이곳 주민들께서는 인근 방공호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근처 도시에서 발생한...”

 

침식 재난이라.

 

원래 같으면 가진 옷이나마 싸 들고 허둥지둥 대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침식체야 오든 말든이대로 콱 죽어도 억울할 거 없겠다 싶었다.

늙어서 죽지언제 죽나...”

 

대충 리모컨이나 들어 TV를 틀었다방송국도 대피했는지 연결되는 채널이 하나도 없었다냅다 리모컨을 던지고 냉장고를 열어 든 걸 모조리 꺼냈다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쾅쾅.

 

아저씨문 좀 열어 보십쇼.”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보나마나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수법이다 싶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쾅쾅쾅.

 

안에 계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대피인원 명부에 아저씨 이름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러나 생각보다 더 철저한 놈들인 모양이었다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고민했다지금이라도 대꾸해야 할지아니면 끝까지 모른체해야 할지.

 

셋 셀 때까지 안 나오시면 문 부수고 들어갑니다하나...”

 

콰앙!

 

내 쓸데없는 고민을 박살내듯 문이 시원하게 부서졌다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얼어 있는 내 눈에 온몸을 강화복으로 무장한 덩치들이 집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

 

이놈들남의 집에 이렇게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냐?!”

 

불리할 땐 일단 큰소리부터 치면 반쯤은 먹고 들어가는 법일부러 목소리를 높였지만 저 녀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게 좋게 말할 때 나오셨으면 이럴 일 없었잖습니까.”

문짝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별 상관없을 겁니다어차피 침식체들하고 싸우다 보면 멀쩡한 집이 남아나지 않을 거거든.”

이것들이....”

 

내 눈이 옆에 세워진 봉을 향했다순식간에 잡아들고 낮게 뻗으며 자세를 잡았다타구봉법봉도라견개를 올려 때리는 자세.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시끄럽다이놈들아남에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죄는 달게 받아야 할 것이야!”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저희들은...”

뭣들 하고 있는 거냐?”

 

막 뭔가를 설명하려던 남자를 제치고 다른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척 보기에도 덩치가 앞선 놈들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만만치 않아 보이는 녀석의 등장에 내가 침을 삼키는 사이사정을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피시키려고 했는데 다짜고짜 봉을 들었다는 거군이해했다.”

누구 맘대로 대피시킨다고 하는 거냐?”

거 영감님우리가 죽을 곳으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사람 살린다고 하는 일인데 왜 그렇게 까칠하시오?”

내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제발 그냥 나가거라.”

 

내 필사적인 호소에도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안될 말이오.”

“...이 악독한 놈들이 늙은이의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는 거냐!”

아니사람 살리는 게 뭐가 악독하다고...”

 

투덜대던 남자가 땅을 박찼다내가 급히 봉을 들어 후려치려 했지만 늙은 팔은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았다뒤늦게 휘둘러진 봉이 손에 막히고내 목덜미를 집어 든 남자가 그대로 홀랑 들어 움직였다.

 

이대로 나가십시다영감쓸데없는 저항하지 마시오.”

이거 놔라이놈들아!”

가만히 있으라니까...”

 

버둥대던 내가 허리춤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너무 지독해 정말 급한 상황이 아니면 쓰지 않으려 했건만결국 쓰게 될 줄은 몰랐던 비기.

 

사천당문 비장의 오의만천화우!”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고춧가루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그러나 덩치들은 아무 변화 없이 무덤덤했다강화복을 입고 있는 걸 깜빡한 것이다나는 낭패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그리고 힘껏 재채기했다.

 

에엣취!”

아우야거기 휴지 좀 줘봐라.”

여깄습니다형님.”

 

건네받은 휴지로 급히 얼굴을 감쌌다몇 번 크게 재채기하고 나니 좀 정신이 돌아온 느낌이다

 

쿨쩍이며 코를 풀고 있자니 어느새 밖이었다대피하는 사람들을 지나 빈자리에 나를 내려놓은 덩치가 자리에 쪼그려앉았다내가 눈물을 닦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의문점을 입에 담았다.

 

왜 그렇게 집에 남아 있으려고 한 거요?”

그걸알아서엣취! ...뭣 하려고이놈아.”

비싼 척하지 말고 일단 말해 보시오혹시 모르지 않습니까내가 도움이 될지.”

 

어차피 기력도 떨어진 참이었다나는 있었던 일을 짧게 간추려서 이야기했다괴물들이 나타나고무협에 빠지고이곳에 오게 된 경위까지.

 

내 이야기가 끝난 뒤 남자가 내놓은 평가는 담백했다.

 

뭐 그런 걸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소남자가 대범하지 못하게.”

뭬야이놈아?”

 

남의 고민이라고 막말하기는원망 실어 노려보니 녀석이 손을 내젓는다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미심쩍지만 잠자코 들어보기로 하니 바이저 너머에서 털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면 목숨 한 번 구해줬다고 그 사람이 평생 성인군자처럼 마냥 착하게 살 줄 아셨소이 일하면서 느낀 건데사람 본성이란 게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오죽을 각오로 살려놓은 사람이 제 버릇 못 고치고 남의 주머니나 터는 모습을 내가 몇 번이나 봤는지 아시오?”

“...그러면 뭐구해준 놈이 뭔 짓을 하던 신경도 쓰지 말란 소리냐?”

 

아니꼬운 마음에 퉁명스레 해 본 말이었지만 오히려 남자가 그거라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비슷하지막말로 곧 죽을 사람한테 일일이 착한 사람인지 따져 물으면서 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그러니 일단 구하시오악인이건 선인이건 사람을 살리는 게 어찌 나쁜 행동이겠소?”

“......”

그리고 혹시 모르지진짜 못돼 처먹은 놈이 있었는데 영감 도움에 감동받고 개과천선이라도 할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일어나시오.

 

 

그리 말하며 남자가 일어섰다마침 부하 하나가 남자를 찾아다니던 참이었다급하게 가져온 태블릿을 받아 읽던 그가 부하에게 뭐라고 지시하곤 다시 되돌아왔다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제법 익살스러웠다.

 

정신 차렸으면 어서 일어나시오곧 침식체들이 몰려올 겁니다.”

“...자네는 왜 사람들을 구하는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남자는 퍽 신선한 질문이라 여긴 듯했다하긴 감사를 표하는 사람은 있어도 이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겠는가잠시 턱을 매만지던 그가 내놓은 대답은 이러했다.

 

글쎄꼭 이유가 있어야 구하는 거요그냥 할 줄 아는 일이 이것뿐이라 하는 거지.”

 

그리 말하며 바이저를 벗고 바닥에 가래를 칵 뱉었다달빛 사이로 얼핏 보인 그의 얼굴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아마 심하게 화상이라도 입은 모양이었다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씨익 웃어 보였다그 웃음에는 한 치의 그늘도 없었다.

 

소방관으로 일할 때 입은 상처요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죽다 살아났지멋지지 않소?”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피난 트럭에 실려가면서 생각했다

 

살려준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찌른 걸 보고 충격을 먹었다내가 구하는 사람이 악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레 겁먹고 도망쳤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이치에 맞는 행동이었을까.

 

곰곰이 고민하니 답은 아니올시다였다.

 

막말로 곧 죽을 사람한테 일일이 착한 사람인지 따져 물으면서 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오.’

 

과연 그 말대로다죽어가는 사람에게 일일이 따져 물으며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러니 일단 살릴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는가

 

내가 살린 사람이 엄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건 그때 가서 막으면 될 일이다

 

내가 협객을 자처한 이유는 이 땅에 법도를 다시 세우기 위함이었다메마른 현실에 희망을 가져오기 위함이었고 사람들 내면의 선함을 다시 꽃피우기 위함이었다.

 

내게 도움 받은 이들이 다시 베풀어 세상이 좋아지기를 바랐다한 송이의 민들레에서 꽃씨가 퍼져 나가 주변을 물들이듯이.

 

그러나 단 한 번의 실패로 지레 겁먹어 도망치다니이래서야 협객은 실격이겠구나나는 쓰게 웃었다

 

악인이건 선인이건 사람을 살리는 게 어찌 나쁜 행동이겠소.’

 

곰곰이 생각하니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때 트럭 운전사가 뭐라고 소리치니 호위하러 따라온 군인 몇 명이 급히 총을 들어 올렸다그 끝을 따라가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괴물 몇 놈이 이리로 질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엔진이 터져라 밟는데도 안에 워낙 탄 사람이 많아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총을 쏴대도 수가 제법 많았다죽어 나자빠지면서도 괴물들은 끝내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사람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렸다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군인이 결국 비장하게 소리쳤다.

 

브라보 팀 전부 하차우리가 시간을 끈다!”

 

누가 봐도 자살 임무였다그러나 군인들은 모두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을 내린 군인이 운전사에게 절대 멈추지 말고 달리라고 당부하곤 뛰어내렸다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린 것이니 보통 사람이면 그대로 반죽음이었겠지만 강화복을 입은 덕분인지 그저 한 번 구르고 일어날 뿐이다.

 

나머지 군인들도 차례대로 뛰어내렸다중장형 강화복 6벌 이상으로 가벼워진 트럭이 속도를 올렸다멀어지는 뒤꽁무니를 보며 내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고 있으니 한 놈이 기겁해선 이리로 달려왔다.

 

아니할배가 왜 여깄습니까설마 뛰어내리기라도 한 거요?”

 

남자가 급히 트럭을 쳐다봤지만 이 상황에서 다시 유턴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선 머리를 벅벅 긁다가 곧 골치 아프단 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미친 노인네 다 보겠네혹시 카운텁니까?”

아니었으면 못 일어나고 뒤졌겠지욘석아.”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오달릴 힘은 있을 테니저 방향으로 쭉 달려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그리곤 생각했다.

 

 

 

 

 

세상에는 무도 없고 협도 없다

 

그리고 그건 세상이 한 번 뒤집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심심하면 괴물들이 튀어나오고 인심은 팍팍하고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누구 한 번 등쳐먹어 보려는 양아치들이 들끓는 세상어릴 적 낭만은 사토에 묻혀 죽어버리고 남은 건 꼬장꼬장한 늙은이와 늦바람으로 배운 소설 몇 줄.

 

그러나 보라배라먹을 세상에도 아직 의는 남아 있노라.

 

쪼그라든 심장에 피가 뛴다아침에 일어나기도 버겁던 허리가 곧게 펴졌다어쩌면 화광반조일까소설에서 이런 묘사가 나오면 꼭 한 명 정도는 죽었던 거 같은데.

 

그러나 상관없다오늘이 마지막이라면 그걸로 좋다백지 같은 세상에 활자로 된 색채가 찾아왔으니이런 멍청이들을 볼 때마다 무심코 세상은 아직 살 만하구나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비켜라애송이들아젊은 것들 두고 내뺄쏘냐?”

 

앞으로 나서니 기겁하며 말리려 든다뒤통수를 한 대 쳐주니 그제서야 조용해진다제법 아플 게다왕년에 괴물 놈들 때려잡던 주먹이니

 

“...시발난 분명히 말렸소싸우다 뒤져도 책임 안 질 거요.”

예의 없는 새끼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침식체 떼들이 몰려온다팔팔할 때도 상대해 본 적 없는 숫자오히려 좋다여기서 막아내는 만큼 다른 곳에서 부담은 적어질 테니무릇 협객이라면 이 정도는 상대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래와라얼마든지 상대해 주마.

 

오늘의 주인공은 이 몸이니내 뒤로는 아무도 지나갈 수 없다.

 

설령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그러니,

 

멋지게 죽어보자고.”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마쇼재수 없으니까.”

“...망할 놈그래멋지게 죽여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