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未來戰 Awaken Chinatsu Please 🥺 - YoRururu의 일러스트 - pix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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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희망, 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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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주신의 전사여.


세계라는 바다에 뛰어들어 몸을 흠뻑 적시라.


그리하면 그 세계 전체가 널 감싸 안을지니.


싸워라. 그대가 가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리는 세계로부터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나,


세계는 우리를 결코 져버리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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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롤리 딜레마라는 난제가 있다.


목숨이 걸린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묻는, 인간의 이성에게 고뇌를 종용하는 문제.


세상을 지키기 위해선 마왕의 숙주가 되어버린 주시윤을 베야 한다.


하지만 이전의 그녀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녀에겐 그럴 용기도, 의지도 없었다.


소중한 인연들이 남기고 간 사랑의 증거, 세상만큼이나 지킬 가치가 충만한 이의 목숨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고?


양극단의 딜레마 사이에서 힐데는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었다.



"....."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 채 힐데는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금빛 눈동자를 적시고 흘러내렸다.


주시윤을 향한 참회의 눈물일까, 아니면 잔혹한 선택이 강요되는 운명에 대한 비관일까.


그 처량하리만치 쓸쓸한 모습은 그녀가 이번 세계에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나약한 일면이었다.


주시윤은 붉은빛의 눈을 부라린 채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주변에 스멀스멀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인제 와서 울고불고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이 아이의 몸은 이미 내 것이니 말이야. 너희 벌레들이 정성 들여 만들어놓은 이 봉인지라는 곳 또한 매한가지이고. 크흐흐흐!!"



온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강한 침식파가 봉인지 전체에 연기처럼 퍼져나갔다. 대기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저택에서 봤던 기괴한 모습을 한 침식체들이 검은 안개를 해치고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갇혀있는 동안 내가 놀고 먹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막아놨으니 됐다고 생각했느냐? 안일하고, 또 안일하구나. 


상성이 안 좋았다곤 하나, 필멸자 놈들의 능력이 어디 나의 발치에나 닿기야 하겠느냐?


약해져 가는 봉인을 나의 세계로 침식시켜 갈 동안,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동안에도, 너희는 순간의 평화에 취하여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지."



그랬던 건가. 힐데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갔다.


봉인지 내부임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말을 걸어오고, 이렇게 침식체들을 소환해대는 것.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이 없어진 주시윤에게 일부러 그 기억을 되살려 혼동시킨 것.


말싸움을 벌이게 만들어 자신에게서 주시윤을 분리한 끝에 몸을 차지하기까지.


놈은 이 봉인지 일대를 이면세계화한 것도 모자라 봉인 너머의 영역에까지 수를 두고 있었다.


이래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놀아나고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역겹고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식체의 군집이 이 거대한 공동 내부를 빼곡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침식체들의 몰골은 차마 언어로 묘사하기 힘들 정도로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었다. 


놈들은 모두 뱀의 하체를 하고 있었으며, 팔이 여러 개 달린 것부터 얼굴이 이상한 곳에 달려 있는 등, 신체 부위가 제 위치에 붙어있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침식체들이 발산하는 정신파가 힐데의 머릿속에 돌림노래처럼 울려댔다.


그것들은 전부 뱀에게 정신을 빼앗긴 채 하수인으로 전락한 존재들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볼 장 못 볼 장을 다 봐온 힐데라면 눈 때 중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힐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발뭉을 잡고 있는 왼손에 본능적으로 힘을 주었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용혈의 독, 정보오염이 몸을 꺼림칙하게 옭아맸다.


아무리 뱀과의 싸움에서 많은 부상을 허용했다곤 하나, 그 정도에 굴할 만큼 힐데는 약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세계를 지킨다는 사명에 충실하게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스스로에게 명령만 내린다면 바로 이곳의 모든 적들을 주검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제자에게 직접 의절 선언을 듣고, 눈 앞에서 영혼을 빼앗기는 것까지 봐야 했던 힐데의 마음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나라 잃은 실향민마냥 정처 없는 공허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나마 남아있던 투지는 향할 방향을 잃은 화살처럼 힘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그럼. 잘 가시죠.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발키리 년!! 네년에게 분에 넘치는 죽음을 하사하마!!"



광기만이 가득한 붉은 눈을 하고 주시윤은 연화의 검을 힐데에게 겨누었다.


사방에서 하나가 되자, 하나가 되자 하며 뱀 형상의 침식체들이 힐데의 정신을 수렁으로 잡아끌고 내려갔다.


최후를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시윤으로부터 내뿜어지는 침식파가 더욱 진하게 이 공간 내부를 물들여간다.


사악한 뱀의 송곳니가 붉은 저주의 피를 품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 기다란 칼 몸이 들어 올려진다.



차라리.


힐데는 짧은 순간이나마 후회의 한마디를 되뇌었다.


차라리 이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더라면.


아예 남남으로 살아갔더라면.


이런 일이 발생했을지라도 망설임 하나 없이 깨끗하게 베어 넘길 수 있었을 텐데.


후회에 젖은 눈을 하고 힐데는 내리쳐지는 연화의 검을 정처 없이 바라보았다.


연화야. 한아. 갈 길을 잃은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윤이를 나 같은 놈에게 맡긴 이유가 뭐였니?


항상 혼자 세상을 떠받들고, 누구와의 인연도 맺지 못하는 내게, 너희가 존재했다는 증거이자 결실을 맡긴 이유가-






최후의 순간에 느끼는 주마등이라도 되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물살처럼 천천히 느껴졌다.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곧장 내질러지는 장검 외에, 힐데의 왼쪽 시야에서 정체불명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카앙-!!!




주시윤의 칼날은 힐데에게 닿지 못한 채, 다른 누군가의 검에 가로막혔다.









"?!!"



공격이 막힌 데다가 재차 휘둘러진 검에 의해 주시윤은 강제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요."



굳세지만 앳된 풀피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힐데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렸다.


나나하라 가문의 차녀, 당주를 지키는 제1의 호위무장, 나나하라 치후유는 고개를 뒤로 돌려 미소 지었다.



"힐데 소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어, 떻게....?"


"루시아 양이 설치해둔 결계 덕분이죠."



결계라고? 힐데는 아연실색하여 치후유의 눈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뱀의 봉인을 막는 용도의 결계가 어떻게 치후유를 불러낼 수 있다는 걸까. 의아해하던 힐데의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8봉인역에 설치된 이 결계는, 이전에 침식체 군단의 침입을 저지했던 나나하라 대저택의 결계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엄밀하게는 같은 본질의 결계를 둘로 나눈 것이라 하더군요.


그렇기에 조건만 채워진다면 결계 내에 있는 인원 전체를 전이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택 안에 있든, 봉인진 안에 있든, 따지고 보면 어차피 같은 결계 안에 있는 셈이니까요."


"사나에...!?"


"라고, 루시아 양에게 따로 전해 들었습니다. 사용할 순간이 오면 가주님께 이 사실을 전하라는 말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소릴!!!!"



사나에의 말에 힐데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주시윤이었다.


루시아는 정보오염을 통해 확실하게 무력화시켜 놓았다. 자신이 힐데를 반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동안 루시아는 단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다. 지금의 평범한 몸을 갖고 용혈의 독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아예 활동조차 하지 못하도록 흠뻑 잠식시켰을 터였다.


그런데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남아있다면, 그건 아마 시한 식의 장치 같은 조건이겠지.


주시윤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식시킨 이 공간 곳곳에 청명한 푸른 빛이 보였다.


분명 이 일대 전체를 이면세계화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루시아의 결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술자를 무력화시켰을 터인데, 어떻게 결계가 남아 있는 거지?



"걱정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 둘만 온 것은 아닙니다."


"네. 자원한 이들 전부 다. 그리고 언니도 함께 말이죠."



하늘이 열린다. 어둠으로 뒤덮인 이 공간 저 너머에서 빛의 폭발들이 일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치후유와 사나에의 뒤쪽으로 빛의 세례가 땅을 향해 내리쬈다.


한줄기, 두줄기, 수십, 아니 수백일까. 눈으로 다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수의 빛줄기가 한데 어우러져 장엄한 빛무리를 일으켰다.


빛과 땅이 닿는 순간 빛무리 속에서 입자들이 폴리곤 형태를 띤 채 3차원, 혹은 그 이상의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형체가 만들어질 때마다 색이 합쳐지고 변화가 일어났다.


검은 불꽃의 건틀릿을, 푸른 장식이 가미된 묵빛의 활을, 휘황찬란한 기모노와 푸른 빛의 검을.


다양한 빛깔들이 존재에 덧입혀지며 다른 곳에 있던 존재를 지금 이 전장에 구현한다.


발동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구비해둔 또 하나의 수단, 총력전을 전제로 하기에 발동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수.


그 조건은 루시아 자신이 전투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화 상태에 빠지는 것.


애당초, 루시아가 이 봉인지에 둘러쳤던 결계와 저택의 결계 '환상의 나라Schein•welt'는 본래 하나의 결계이다.


그렇기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내용물을 전이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양 끝단에 점을 찍은 종이를 반으로 접어 점끼리 만나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니까.


그것이 천변만화의 마법을 부리는 미궁 결계에 가미된 또 하나의 마법.


종이를 둘로 자르면 사라지지 않고 두 장의 종이가 되는 것처럼, 하나 된 개념을 둘로 나누어 같은 본질을 공유하게 하는 것.





- 적성결계 積城結界

이원세계 Doppelreich





노리고 있었던 것인가? 이 상황을?


주시윤은 증오에 찬 눈을 하고 쓰러진 루시아를 노려보았다. 


발키리까지 덤으로 제거하면서 세계 멸망의 앞 단추를 끼울 좋은 기회가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것인지. 


쓰러진 채 간헐적으로 발작하고 있는 루시아의 몸에도 푸른 빛이 닿았다.


주시윤이 보기에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넌 이제 끝났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기분 나쁜 미소가.


'난 널 최대한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서 여기 온거야.' 처음에 그녀가 말했던 것이 이런 상황을 상정한 것일까.


만일 주시윤을 자신의 정신세계로 보내는 것이 그녀가 가진 카드의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녀 자신이 쓰러지는 것이 이 상황의 트리거였다면, 처음부터 이걸 노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니.... 아니야...."



그런 상황을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어.


주시윤은 떠올렸던 가정을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세계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 자신 같은 지고한 존재가 그런 같잖은 경우의 수 하나를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 아직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멘탈에 지대한 충격을 입은 발키리 하나와 걸레짝이 된 채 널브러져 무력화된 배교자 하나에, 벌레 몇 마리가 더 추가되었을 뿐.


주시윤은 그저 애교에 불과할 이 필멸자들의 발악을 귀엽게 관망하기로 했다.


광제창생廣濟蒼生의 푸른 빛이 검은 안개와 침식파로 들끓고 있던 봉인진 일대를 눈이 부실 정도로 비추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 푸른 극광의 하늘이 자리해 있다.


하늘 아래 다른 하늘, 땅속에 떠오른 또 다른 하늘이라는 모순은 그 공허하면서도 웅장한 자태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푸른 극광을 등지고 신성할 정도로 장엄한 빛무리 속에서 나나하라 연합원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수는 어림잡아도 약 세 자릿수.


일곱 가주들과 그들이 데려온 직속 병력 중, 고등급 카운터로만 이루어진 정예 중의 최정예가 그 결연하게 다져진 모습을 선보였다.


하늘하늘한 기모노를 휘날리며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그 대열의 제일 앞으로 걸어 나섰다.


푸른 빛의 청명한 눈이 가증스럽고 추악한 침식체들을 한가득 담는다. 붉은 기운을 뿜어내며 광기로 조소하는 소년을 담는다.


일곱 가문의 인도자, 나나하라 치나츠는 기품이 가득한 얼굴로 소녀는 힐데에게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나나하라 가문연합. 부름에 응해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너희들, 모두... 어떻게..."



꿇어앉은 채로 힐데는 숨을 골랐다. 이 상황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듯 바로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네?"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거냐!!"



되묻는 치나츠에게 돌아온 것은 호통이었다. 힐데의 몸이 날숨으로 인해 한 차례 떨렸다.


화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켜야만 하는 대상들이 이렇게 전장으로 나온 것에 대한 염려, 걱정.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부모가 자식에게 그래서는 안된다며 잔소리를 하듯, 애타는 마음으로 힐데가 따지듯 물었다.



"여기 봉인되어 있는 건 마왕이야! 인간 정도는 벌레 밟듯 가볍게 죽일 수 있는 자연재해란 말이야...!! 그런데 무슨 작정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온 거지? 이런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가주!!"


"큭큭... 크흐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스승님."



거리를 벌린 주시윤이 쿡쿡 웃으며 힐데의 말을 거들었다. 노이즈가 짙게 낀 뱀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명줄도 짧으시면서 죽음을 재촉하지 못해 안달들이 났구나. 내 능력을 잊었느냐? 


너희 같은 벌레들이 몇 천, 몇 만 명이 오든간에, 말 한마디에 전부 미쳐 파멸해버릴게 뻔한데 왜 멍청한 짓을 관두지 못하는거지?"



지원군을 데려온다는 발상은 좋았다. 확실히 이 국면 하에서 나나하라 가문 전체의 참전은 주시윤의 입장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변수였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영혼의 격이 한 차원 더 높은 존재가 아니라면, 마왕으로써 갖는 권능인 극독의 정수 앞에서 생명체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세계가 그 부속물들에게 가할 수 있는 법칙 이상의 진리였고, 절대적인 선언이었다.



"소원대로라면 그리 해주마. 무가치한 벌레들의 노력에 맞는 답을 해주는 것 또한 위에 서는 자로써의 역할이지."



주시윤은 연극배우처럼 두 팔을 벌려 과장된 자세를 취했다. 


눈이 붉은 빛으로 번뜩인다. 이 봉인진 내부의 모든 존재를 뱀의 눈이 한데 담았다.



어리석은 불나방들이여.



봉인진 일대를 뒤덮고 있던 검은 빛의 안개가 소름돋을 정도의 붉은 빛을 품고 빛나간다.


달려들어 살점을 찢을 기세로 그르릉대던 침식체들의 눈이 일제히 붉은 빛을 띠었다.


입이 열린다.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추악한 저주이며 정언명령인 마왕의 권능이,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입에서 입으로, 모든 존재의 입으로, 눈에서, 귀에서, 코에서, 입에서, 귀로, 눈으로, 입으로, 코로, 거짓된 신에게 바쳐지는 노래.



축제의 여흥거리로 네놈들의 피와 내장을 바쳐 이 세계를 한없이 붉게 물들여라.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 

부모가 아이를 죽이고 아이가 부모를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연인이 서로를 죽이고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 

만인이 죽고 죽이는 끝없는 살육과 광란의 축제로 세계에 종언을 노래하라.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 

태초의 뱀의 이름을 부르짖고 심장을 꺼내 입맞추라.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 

너의 마음 문을 열어라. 그리하지 않으면 빗장을 부수겠노라.



정신을 물들이는 극독의 권능은 입을 통해 고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귀를 막아도, 마음 속에서 그것이 계속 울려퍼지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 영혼을, 마음을 가진 존재인 이상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소리. 숙명이자 근본적인 한계.


창조된 피조물이 절대자의 말에 예속되는 것 뿐.



"이, 이봐... 이내장을상한 소리가...."


"귀를 막아!! 소리를 들영혼을어선 바쳐라안돼!!"


"아, 안보여... 가주님? 다죽여들 어디 간죽여거야? 왜 아무것죽여도 보이지 않ㄴ"



뱀의 말은 정신을 타고 들어가 골수를 쪼개어 영혼에 각인시키고, 존재 자체를 말소하여 아예 새로운 것으로 바꾼다.


내로라하는 A급 카운터들이나 그들을 이끄는 여러 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침식체들을 수없이 잡아 온 백전 연마의 전사들이라지만 그들 역시 필멸자요, 극히 일반적인 생명체에 불과하다.


뱀의 권능 앞에서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무기가 땅에 떨어져 간다. 하나둘씩 정신을 놓아가고, 미쳐간다.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기괴한 비명마저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아를 완전히 먹힌 채 서로 죽고 죽이며 찢겨 먹히는 광란의 연회가 펼쳐지겠지.


이래서야 자신이 예상한 대로이지 않은가. 힐데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타계책을 찾아야만 했다.


기괴한 표정을 하고 저주의 말을 읊어대는 주시윤의 모습이 힐데의 눈에 들어왔다.


인간을 지키는 여신의 눈에 번뇌가 깃든다. 고개가 한 순간 앞으로 떨어진다.


검을 쥔 손에 책임감이라는 이름을 한 머뭇거림이 무겁게 휘감긴다.


더 큰 것을 지켜내기 위해 지금 가진 것을 스스로 쳐내는 행동은 항상 해왔던 일임에도, 왜 지금은 이렇게나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머지 힐데의 이빨이 뿌득 소리를 내며 갈린다.


역시, 지금이라도 희생을 감수한다면, 다시 잃어야만 한다면-








"잃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 무슨-"



결연한 표정을 하고, 치나츠는 장도를 역수로 들고 가슴을 향해 겨누었다. 


검을 중심으로 청록빛깔의 바람이 치나츠의 가슴께 앞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CRF를 마구 짜낸다.


치나츠와 연합원들을 중심으로 세찬 태풍이 휘몰아치며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간다. 우우우우우- 하고 바람은 울분에 찬 함성을 봉인진 전체에 내질렀다.


가슴깨에 모여들고 있던 바람의 분노는 점점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이 결계 전체에 몰아치는 힘을, CRF를, 외부가 아닌 내부로 천천히 응집시켜 나간다.


압축, 또 압축. 세상 모든 바람을 한곳에 다 모으겠다는 의지로, 더. 더.


이윽고 천천히, 치나츠는 검을 쥔 손을 몸 앞으로 끌어당겼다. 


장도의 날 부분이 천천히 치나츠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몸으로 찔러넣은 칼날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붉은 피가 아닌 푸르른 나뭇잎 모양의 빛 입자였다.


순간, 치나츠의 주변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의 세기가 급격하게 거세졌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힘이 폭풍을 만들어내어 휘몰아쳤다.


대공동을 통째로 깎아 없애버릴 것 같은 기세로 용솟음치는 바람은 주시윤과 그가 불러온 침식체들이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서 있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치나츠의 몸이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에는 에메랄드빛의 사슴뿔이 한 쌍 자라나 있었다.


치나츠는 한쪽 팔을 펼치고, 다른 쪽 팔로 가슴에 꽂힌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손에 들려있는 것은 더 이상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검은 이미 청록빛깔로 형형색색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 누구도! 죽게 두지 않을 겁니다!!"



기품과 박력이 동시에 느껴지는 고함을 내지르며, 모든 바람의 주인 된 소녀는 자신을 칼집 삼아 가슴에 꽂힌 신기神器를, 


쿠사나기의 검을 발검한다.





삼라만상에 울려 퍼져라.


순리의 바람이여.




코토아마츠카미 天津神

사슴신의 춤 シシ神の舞





-그것은 문자 그대로, 에메랄드 빛의 폭발이었다.


모든 방향으로 자애로운 바람이 퍼져나갔다. 바람은 비단으로 피부를 감싸듯이 부드럽게, 그러나 모든 악의 기운을 척결할 것처럼 격렬하게 폭발했다.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깨끗한 물과 같이, 치나츠가 뿜어낸 바람의 힘은 정신을 뒤덮는 극독의 권능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분명 클리포트의 마왕으로서 갖는 권능은 절대적이다.


단, 그것에 대응하는 상극의 힘 앞에서만큼은 예외.


멸망을 피하기 위해 세계가 탄생시킨 대적자의 혈통과 그로부터 승계된 힘의 유전이, 지금 이 자리에서 화려하게 만개한다.



네 눈을 ㅃ아 저ㅣㄷ에 바ㅕ-

노래ㅎㅏㄹ! 이ㄽㅓㄹ ㅌㅗㅊ뱀ㅔ-



모든 저주는 바람 앞에 말끔히 깨어져 부숴진다.



ㅈㅏ을 ㄲㄴㅐ ㅂㅐㅁㅇㅔ 바ㅊ-

ㅇ라주ㄱㅕㅏㅈㄱㅏㄹ-

ㄴ장ㄹ고 피ㄹ ㅗㅇㅁ-



영혼에 뿌리 깊게 깃든 독은 흔적도 없이 씻겨져 사라진다.


휘몰아치는 바람의 한 가운데에 서서 치나츠는 뻗은 양 손을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관현악단을 연주하는 듯 우아하게 흘러가는 손동작.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허공을 긋고, 바람을 악기 삼아 온 세상 만방에 화음을 수놓는다.


쏟아지는 저주를 향해, 정신을 중독시키는 권능을 향해, 모든 연합원 각자의 마음 속에.


울려라, 울려라, 울려라, 하고.


바람을 일으켜 희망과 치유의 노래를 연주한다.


정신이 나가기 직전까지 몰리며 횡설수설하던 연합원들은 그 우아하고 기품 있는 소녀의 모습에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잃었다. 


그저 인간의 마음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눈으로는 담을 수 있다는 듯이, 퍼져가는 바람의 힘을 목도하기에 바빴다.


숨을 들이마시자 꽃향기가 입 안에서 느껴진다.


몰아치는 바람의 세례 앞에, 자신들을 감싸고 도는 격정적이며 은은한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힐데를 비롯해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그 바람결은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바람은 몸과 마음을 감싸는 부드러운 이불이었고, 위로를 건네는 치유자였으며, 어린 시절의 웃음이자, 수줍은 사랑 고백이었다.


더 이상 어떤 저주도, 폭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합원들은 대신 각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저주 대신 울려 퍼지는 화음을 느꼈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화음에 귀를 기울이자 무너져가던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각자가 하나의 선율이 되어 마음속의 화음에 자신을 내맡겼다. 광란과 피 냄새 대신 웃음과 풀 냄새가 이 공간을 감쌌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무섭지 않았다. 치후유, 사나에, 미나토, 마사키, 가문연합의 모든 이들은 자신들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님을 자각했다.


공중에 떠 있던 치나츠는 사뿐하게 내려앉아 대지를 밟았다.


그녀의 발을 중심으로 푸르른 풀밭이 펼쳐지며, 연합원들의 발치에까지 산천초목이 드리워졌다.



"......"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대 절경 앞에서, 악의 기운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이 신들의 싸움 가운데, 누구도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되찾았고,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구현한 존재를 모두가 눈에 담았다.


치나츠의 모습은 더 이상 그들이 알고 있던 가녀린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 명의 요정왕이었고, 자연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이자, 바람 속의 목소리이고, 별의 미소이며, 진실한 분노이고, 모든 거짓된 악의 반대였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무엇일까? 연합원들 각자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화음이 아름다운 선율로 말을 걸었다.


우리들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의문을 갖거나 지체하는 나나하라 가문연합의 사람들은 없었다.


우리는 신을 보좌하는 군세. 천군天軍.


우리의 앞길에 생명과 정결함 가득하리.


연합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풍채와 기개는 각자의 삶을 통틀어 가장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음과 선율 아래 하나되어, 모두가 같은 마음을 품는다.


그들의 곁에 부는 것은 축복이었고,


그녀의 곁에 부는 것은 영광이었다.



치나츠는 고고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길다란 장도를 든 그녀의 팔이 주시윤을 겨냥했다.


영험함이 깃들어 있는 에메랄드 빛깔의 눈은 승리를 확신하듯이 청명하게 빛났다.




"전 연합원,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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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글귀는 옛날에 봤던 팬픽 만화에서 따옴.


사람이 어떻게 1달 연재 ㅋㅋㅋ  원래 지난주에 올라올 거였는데 나나하라 너무 병풍으로 냅두면 글이 이상해질거 같아서 플롯 틀어갖고 ㅈㄹ하느라 이제 써버림....


현생 때문이라고는 해도 손이 느린 것은 창작자의 죄다. 이놈을 매우 쳐라.


아직도 이런 똥글을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임.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