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요청하신 검성 치후유짤 - 카운터사이드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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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믿음의 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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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선생님, 당신은 여전히 낙원을 믿을 뿐이라는 건가요?


증명할 필요도 없이, 맹목적으로, 그저 믿기만 한다는 건가요?


낙원에 도달한 사람의 말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사실, 낙원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믿음에 대한 화두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건가요?"



- 유리조노 세이아, 블루 아카이브 메인스토리 #3 에덴 조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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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봉인역 입구

p.m.12:24

개전 직후, 6분 경과







첫 충돌이 시작된 지 5분이 넘도록 전투의 열기는 봉인지 전체를 휘감아 격렬하게 타올랐다.


폭발음과 함성, 무기의 충돌음이 온 공간 내부를 빼곡하게 수놓았고, 그칠 줄을 몰랐다.


독을 다루는 마왕의 수하, 뱀 형태를 띤 침식체들은 끝도 없이 검은 안개로부터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숨 쉬는 것만으로 독을 뿜어댔다. 놈들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침식체들은 어림잡아도 2종 이상의 강한 개체들이었지만, 쉽게 가문 연합의 포진을 붕괴시키지는 못했다.


그것들은 필사적으로 달려들었으나 연이어 무너졌다. 죽어 널브러진 침식체들의 시체가 허다하게 바닥에 쌓여갔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문 연합의 카운터들은 생기가 넘쳐 있었다. 그들이 정예라는 사실은 이어지는 전투 가운데 여실히 증명되었다.


전근대의 백병전이라면 숫자의 열세는 곧 치명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와 있는 이들은 전부 카운터다.


그것도 숱한 전투를 거치며 도쿄 에어리어, 나아가 일본 열도 전체를 지켜왔던 일당백의 전사들이다.


그런 전사들이 사기백배인 채로 덤벼오는 것을 맞서 싸워야 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군단이 필요하겠는가?


번개가 침식체들을 토막 냈고, 검붉은 화염이 닿는 것들을 불태웠다.


강철의 검이 적을 꿰뚫는다. 화살이 쏘아져 하늘로부터 거대한 태양을 떨어트렸다.


부상을 당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치나츠가 발현하고 있는 시조의 힘으로 금세 회복되었다.


더욱이 그 시조의 힘은 뱀의 상징인 정신을 물들이는 권능까지 틀어막고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자아를 빼앗기는 저주의 목소리는 더 이상 효력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치나츠의 주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자연의 멜로디가 이 자리 사람들의 마음에서 화음을 자아냈다.



"마사키! 그런 식으로 놈들의 본진을 공격하지 마! 대단위 공격은 내게 맡기고, 튀어나오는 놈만 노려!"


"그러냐? 나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대열을 지켜! 천천히 몰아낸다!!"


"""라져!!"""



점에는 점으로, 면에는 면으로. 대인공격 위주의 카운터들은 덤벼드는 침식체들을 요격했고, 다수를 공격할 수 있는 카운터들은 뒷줄을 주로 노리고 공격에 나섰다.


매우 유기적인 수비진형과 정교한 용병술, 시조의 힘이 제공하는 정신간섭 면역과 치유력이 종합된 결과는 놀라웠다.


가문연합의 병단들 가운데 성난 파도와 같은 연계가 펼쳐지며 사각을 없애고 있었다. 


만일 충분한 규모의 지원군을 데리고 있었다면 모든 것이 가문 연합에 유리했을 정도로, 치나츠의 비호 아래 싸우는 카운터들은 필요 이상으로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나나하라 가문이 보여준 예상외의 활약에도 주시윤은 벌어지는 전투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의외의 선전을 하곤 있다지만 카운터는 자신의 영혼을 연료 삼아 움직이는 자들. 


지금, 이 순간까지도 클리파 차원 저 너머에서는 자신이 포식해왔던 영혼들을 기워서 침식체들을 양산되고 있다. 저들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저 증오스러운 기운을 흩뿌리는 소녀였다.


주시윤의 붉은 눈은 오로지 가주인 치나츠에게만 쏠려 있었다.


제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나나하라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힘과 극상성이라곤 하나, 사람의 정신을 절여버리는 것 정도는 큰 힘을 쓰지 않고도 가능하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않은 시조의 힘을 갖고도 이 정신 지배를 막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어째서지? 정신의 독은 이런 미물들 따위가 극복할 수 있는게 아닐 터!!"


"네. 우리 인간은 당신의 권능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당신에게 대적할 수 있는 건 시조의 힘 정도.


그나마도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지라, 전력으로 개방한다 한들 권능으로부터 이 정도의 인원수를 보호하는 것은 힘듭니다만."



다만?


어조가 꺾인다. 반전을 암시하는 말투가 주시윤의 사고를 괜히 괴롭힌다.


별안간 치나츠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바뀌었다.



"그러니, 보호할 대상을 줄인다. 모든 의지를 하나로 묶어 그 연결만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한다면, 당신의 권능에 대항할 수 있으리라고."


"-지금 뭐라고?"


"저희의 영혼은 현재 이 결계에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아무리 시윤 씨의 몸을 입어 현실에 돌아다니고 있다 해도, 지금 당장 당신을 봉인하는 이 결계 전체를 부술 수는 없을 터. 결과적으론 성공한 것 같네요."



뱀의 사고가 잠시 멎어버릴 정도로, 들려온 사실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었다.


갑자기 등장하여 힐데를 죽이려 하던걸 방해받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람의 권능은 미래를 예지하는 힘을 내포하니, 그것으로 얼추 추측하여 때맞춰 달려온 것일 테니까.


비록 미물에 불과한 필멸자들이라곤 하나, 분명 자신을 제압하기 위해 연구와 고민을 거듭했을 테고, 그것이 지금의 이 판세겠지.


문제는 그 결론이었다. 현재 세계의 수준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을 대답이라고 내놓는다고?


기가 막힌다는 듯 주시윤은 치나츠를 향해 소리쳤다.



"무슨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 영혼을 하나로 묶어? 지금 네 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하는 것이냐?! 이 세계의 필멸자들에게 그런 지식이 존재할 리가 없....?!!"



치나츠는 뱀의 일갈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정곡을 찔렀다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살포시 띄웠다.


없지 않나? 내가 틀린 것인가? 만약 내가 틀렸다고 한다면?



"?!!"



주시윤과 치나츠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쏠렸다.



-있다.


단 한 명,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그런 마법과도 같은 조화를 부릴 수 있는 존재가.


오사카에 강림하여 대절멸을 일으킨 마왕, 물질을 물들이는 극독의 화신이자 자신의 반신, 아드라멜렉을 봉인한 자.


이 결계의 주인인 금발의 소녀. 루시아 테일러.


지금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을 뿐, 그녀가 가진 권능이라면 분명 가능하다.


결계를 둘로 나누어 이만한 규모의 나나하라 가문 인원을 끌어오기까지 한 녀석이다. 결계에 모든 영혼들을 묶는 것 정도는 사전에 조작해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발목을 잡겠다, 그 말인가.


주시윤의 주먹이 피가 맺힐 정도로 꽉 쥐어졌다.


주시윤의 몸을 입고 현실 공기를 쐰 이래로 이 정도로 격한 분노를 느꼈던 적이 없을 만큼, 몸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세차게 떨렸다.


분노를 반영이라도 하듯 침식파가 급격하게 짙어졌다. 주시윤은 도저히 화를 참지 못하고 악에 받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설마설마설마설마아아아!!! 또, 또 네년이냐!! 나의 반신을 걸어 잠궈놓은 것도 모자라, 이렇게 또 나를 걸고넘어진단 말이냐 이 죽어 마땅한 배신자 주제에!!!!"


"당신의 그 잘난 권능도 이 순간만큼은 무의미합니다. 남은 것이라곤 본래 남의 것이었던 그 육신 하나뿐이죠. 자신의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모습, 가엾기 짝이 없군요."


"그 입 닥쳐라!!!! 간악한 바람잡이 년, 버러지 같은 년!! 네년도 특별히 흔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찢고, 가$%르고, 토막^낸 다(&음 다시 찢!#어주마!! 이 몸의 모든 용혈을 짜내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만큼은 그 어떤 세계보다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해주리라!!!"



공기가 불안하게 끼이익 소리를 내며 뒤틀린다. 뒤틀림은 곧 공간의 일그러짐으로 나타났다.


치나츠의 주변에 바람이 몰아치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기세로 짙은 붉은색의 기운이 형체를 이루어 주시윤의 몸을 둘러쌌다.


안 그래도 인간의 것으로는 도저히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더더욱 기괴하게 찢어진다.


광기로 타오르는 붉은 눈에서 검은 핏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연화의 검을 중심축으로 붉은 피의 아우라가 사람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끔찍한 비명소리를 내며, 끼아아아아아아- 하고 응집되어 갔다.


용혈이란 것은 단순히 정신을 장악하는 힘만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 용이 되지 못하여 광기에 물들게 된 저주를 형상화한 힘. 물질세계에도 파괴적인 물리력과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었다.


본래 주인이었던 주시윤이 그 방식을 쓰지 않았고, 그런 힘인지조차 몰랐던 것뿐.


잠재되어있던 순수한 힘의 폭류가 타의에 의해 강제로 개방되어 둑이 무너지듯이 터져 나왔다. 폭주하는 피의 폭풍 가운데 기괴하게 찢어진 얼굴로 미소 짓는 주시윤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의 주시윤은 인간의 형체만 갖고 있을 뿐, 그야말로 완벽히 악귀에게 빙의되어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주시윤을 보는 치나츠의 낯빛 역시 점점 연민과 걱정으로 어두워져 갔다.



"블러핑 실력이 늘었구나."


"....알아채셨나요?"



몸을 일으킨 힐데가 치나츠의 옆으로 다가왔다.


뱀은 몰라도 나는 속일 수 없다. 금빛 눈이 영롱하게 빛나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영혼을 한데 묶는다? 그게 멀티탭에 전기 코드를 연결하는 정도로 간단한 것일 리가 없지. 널브러진 저 결계사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진 몰라도 그런 건 어떤 관리국 기술로도 불가능해.


어쩐 영문인지 뱀에게는 좋은 블러핑으로 먹혀든 것 같지만,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없다는 것 정도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어. 지금 연합원들의 정신을 보호하고, 상처까지 계속 회복시키는 것도 충분히 무리하고 있는 거 아닌가?"


"들키고 말았네요. 후후..."


"그래. 결국.... 결국 또 내가 마무리를 지을 수밖에 없겠지."



한숨이 내쉬어졌다. 힐데의 황금빛 눈에 다시금 깊은 수심이 자리했다.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곤 하나, 용혈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게 된 뱀의 힘은 이수연 정도의 에이스가 아니라면 그 발 끝에조차 닿을 수 없다.


그나마 상성이 발군인 치나츠는 뱀의 속삭임으로부터 나나하라 가문의 군세를 보호하느라 놈을 대적할 여력이 없다.


이대로 시간이 끌려 치나츠의 힘이 다하기라도 하는 순간, 그 때는 전원 몰살이다.


결국 결정타를 내야 하는 것은 또 힐데였다. 어느 세계에서나 그래왔듯, 항상 이렇게 다시.


또 다시 제자를 죽이느냐, 세계를 구하느냐 하는 딜레마로 빠져들고 만다.



"아뇨. 혼자가 아닙니다."



딜레마에 빠진 힐데를 끌어올린 것은 여름의 아이에게서 불어오는 구원의 바람.


힐데의 눈이 치나츠와 마주한다. 강한 의지가 아이의 눈동자 속에 들어차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니...?"


"소대장님. 이전에, 뱀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셨죠?"


"그래. 그랬지."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거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평화에 익숙해져 버린 저희는 놈으로부터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게 되겠죠."



치나츠가 차분하면서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녹색 빛 눈동자가 힐데를 마주했다.



"그렇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치후유와, 하야미 시종장님과 일곱 가문의 모든 이들과 함께 고민하고 이 순간을 대비했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우리 손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더는 누군가가 희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힘쓰는 누군가가 혼자되는 일 없도록 곁에서 싸워주기 위해서요."



타이르는 듯한 치나츠의 고운 목소리가 힐데의 귓가에 맴돈다. 그러나 말투에서 느껴지는 힘은 비판이라기보다는 격려를 연상케 했다.


벚꽃잎과 선선한 바람이 힐데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노랫소리가 가져다주는 상쾌한 느낌에 한껏 어둡기만 했던 힐데의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이젠 혼자 싸우려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어둠이 찾아왔을 때, 당신만의 불을 켜지 마세요. 그저 믿으세요. 


당신의 이성이나 감정이 무슨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에게 희망이 있다는 걸 믿어주세요."


"하지만, 치나츠-"


"만일 스스로에게서 공허함을 느끼신다면, 동료에 대한 신뢰로 심장을 가득 채워 주세요. 저희 나나하라의 이름이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요."



치나츠가 한 마디씩 할 때마다 힐데는 그녀를 조이고 있던 차가운 얼음 사슬이 헐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라면 그녀의 말을 부정했을 것이다. 세상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지, 이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서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노랫소리가 바람과 함께 은은하게 몸을 타고 흘렀다.


이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이렇게 어린 아이들이.


그러나 치나츠가 하는 말에서 느껴지는 힘만큼은 힐데도 부정할 수 없었다. 치나츠의 이야기가 그녀의 차갑게 식은 심장 가운데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래. 이 아이는 항상 그래왔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주어진 책임을 기꺼이 받아들여온 아이다.


그런 족쇄를 차고 있음에도 모든 이들을 아울러 따뜻하게 품어주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나조차도 품어주려 한다면.


이렇게까지 도움을 원한다면, 어른으로써 뜻을 접고 도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쉽지만은 않을거다."



봄바람이 불어오자 돌처럼 굳어있던 마음 위에 작은 씨앗이 피어올랐다. 황금빛 눈에 깃들어 있던 수심이 서서히 걷혀갔다. 얼굴에 내리깔린 짙은 어둠의 베일이 바람에 날려 사라졌다.


힐데와 치나츠의 시선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맞닿는다.



"너희가 오기 전에 놈과 질리도록 검을 맞대었다. 지금 용혈을 사용하는 수준만 놓고 보면 이미 영혼을 완전히 먹힌 거나 다름없어. 저 상태의 놈과 육탄전으로 맞상대할 수 있는 것은 나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해."


"외부에서 방법이 없다면 내부에서 뭔가를 일으켜야겠죠."


"먹혀버린 영혼을 깨우려면 그만한 기폭제가 있어야 하지. 우리 쪽에서 터뜨릴 무언가가 있는가? 당주 그대 역시 놈의 속삭임을 막느라 여력이 없을 텐데."


"검입니다."


"뭐?"



뜬금없는 대답에 힐데가 되물었다.



"저 길다란 장검. 저 곳에서 유일하게 다른 무언가가 느껴져요. 시윤 씨가 본래 쓰던 무기가 아니로군요."


"그래. 시윤이의 어머니였던 아이가 생전에 쓰던 검이었다. 용혈의 작용을 억제해주는 힘을 갖고 있었어."



말하던 도중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힐데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저 검에 얽혀 있는 사연과 시간들이, 연화와 주한이 죽어야 했던 그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아이가 지금 하려는 것은 설마?


본능적으로 힐데는 치나츠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는 듯, 힐데를 보는 치나츠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말씀드렸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믿으시라고."



치나츠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확신에 찬 웃음을 지으며 치나츠가 말했다.



"시윤 씨의 몸은 뱀의 사념으로 가득 차 있지만, 저 검에서만 다른 존재의 사념이 느껴집니다. 검에 타격을 입힐 수만 있다면 제 힘으로 내부에 잠들어 있는 사념을 깨워낼 수 있을 거에요."


"....의도는 알겠지만, 그걸로는 뱀에게 감금당한 주시윤을 깨워내기엔 부족할 거다."



치나츠와는 달리 힐데의 표정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놈이 시윤이의 몸을 차지한 것은 단순한 세뇌공작의 결과물이 아니야. 영혼의 유폐, 그리고 철저히 조작된 육체로의 의태이지. 검을 부순다고 해서 마왕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면 내 진작에 몇번이고 더 부쉈을 것이다."


"자신 있습니다. 혹여나 일이 틀어진다면,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시윤 씨를 잠재우겠어요."


"그 목숨 타령은 그만둬라! 목숨은 한낱 내기의 판돈 따위가 아니라는걸 가장 잘 알면서-"


"그리고,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다면 뭐든 걸어봐야죠. 그렇지 않니, 치후유?"



치나츠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둔탁한 발걸음과 함께 치후유가 검 손잡이를 쥐고 앞으로 나섰다.



"네. 언니의 말대로, 그동안 저희도 나름의 카드를 준비해왔으니까요."


"치후유...?!"



때 아닌 치후유의 등장에 힐데의 표정이 걱정으로 굳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치후유는 카운터 적성이 D급이다.


아예 일반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가장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소녀에게 저 흉악한 용혈과 마왕을 상대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가혹하지 않은가.


누군가가 허락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허락하지 못한다. 아직 어린 아이를 죽음의 운명으로 내몰 순 없다.


치후유가 전투에 나서는 것이 탐탁치 않은데엔 이런저런 이유야 많았지만 힐데에게 그런 것들은 전부 부차적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무언가를 지키는 것의 근원이 되는 감정.


'누군가가 떠나가는 것을 더는 볼 수 없다'는 마음.



"두려워하고 계시는군요. 저는 죽고, 시윤 군은 돌아오지 못할까봐."


"....!!"



핵심을 찌르는 치후유의 말에 힐데의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그녀의 말이 맞다. 힐데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주시윤을 되찾지 못할까봐, 자신의 선택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까봐.


두려워서 신중해지고, 두려워서 선택을 유보한다. 주시윤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보다 되찾지 못한다면 어쩌냐는 걱정이 여전히 그녀를 옭아메고 있었다.


단지 숱한 싸움으로 다져진 투신의 가면 뒤에 그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



"시윤 군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도 분명, 저 안에서 싸우고 있겠죠. 먹혔다느니, 깨어나지 못한다느니 하며 여기서 포기해 버리실 순 없잖습니까?


소대장님께서 여전히 시윤 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시다면, 여전히 사랑하신다면, 비록 저 모습일지라도.... 시윤 군을 믿어주셔야죠."


"...그래. 너희 말대로,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희가 제안한 방법이 시윤이를 돌려낼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을 뿐더러,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순간 시윤이는 물론이고 여기의 모든 이들이 죽을 거다. 그 모든 것들을 책임질 수 있겠나?


지키는 자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 선택으로 누군가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너희는 아직 몰라."


"네. 그 두려움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 당장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최선이 정말 확실한지를 어떻게-"


"언제부터 믿음이 증명을 전제로 하게 됐습니까?"


"?!"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저 믿는겁니다. 언니도, 소대장님도. 믿지 않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똑같은 말이 언니에 이어 동생의 입에서도 들려왔다.


치나츠는 그저 믿으라고 했다. 하지만 힐데에게 그것은 아직 어려운 과제와도 같았다.


억겁의 세월을 홀로 싸워왔다. 누군가를 믿을수록 깎여나가는건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와서 순수히 누군가를 믿기엔, 그녀는 너무 돌아서 있었다.


나나하라 가문과 봉인 문제로 엮이며 치후유는 처음으로 힐데를 만났다. 그리고 같은 전사로써, 어른으로써,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뭔가를 지키는데에는, 믿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용기야말로 모든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


치후유는 힐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편린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힐데를 절대 그냥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행동으로 그걸 알려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힐데였기 때문에.


치후유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앞에 서서 가문을 지켜왔던 이의 뒷모습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치후유.... 너...."



그렇기에 겨울의 상냥함을 가진 아이는, 식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함박눈으로 덮어주고 싶었다.


항상 고독하게 서 있었던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목표까지 길을 열겠습니다. 검을 부수고 난 뒤에 제자를 혼내주는 것은 소대장님께서 해주십시오."


"안 돼. 말했을 터다. 카운터 적성이 D인 너로썬 저 놈을 이길 수 없어. 차라리 내가 나가겠다. 넌 옆에서 가주를 지켜."


"후훗.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만' 싸운다면 그리 되겠죠."



바로 튀어나가는 대신, 치후유는 치나츠의 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이전에 검을 배우면서 사범님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검은 기사를 지키며, 기사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검이 먼저 부러져야 한다고.


처음에는 언니를 위해 무작정 희생하라는 의미인줄 알았습니다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죠.


제가 언니를 지키는 검이라면, 동시에 언니 또한 절 지키는 검이 될 수 있는 것인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치후유와 치나츠는 서로를 마주본다.


뜨거운 것이 두 소녀의 가슴속에서 솟아난다.


같은 시간을, 같은 추억을 살아온 것을 매개로 두 자매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진다.



"또한 언니는 동생의 검이니. 서로가 하나되어 맞대면 막지 못할 것이 없고, 교차하면 베지 못할 것이 없나니,


그것이 검과 기사의 유대이며 너희 자매간의 우애이다.


그런 말씀이셨지? 치후유."


"네. 그러니, 혼자 싸우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싱긋 웃으며, 치후유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언제까지나 어린 채로 남을 것 같던 아이는 성장하여 어른이 된다.


겨울의 따스함을 간직한 아이가 고개를 돌린 그 뒷모습에서는 더 이상 어린이의 면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한 명의 어엿한 수호자이자, 전사의 기백이 느껴졌다.



"지켜봐주세요. 당신이 지켜온 이 땅의 아이들과, 당신의 제자가 어떤 기적을 불러 일으키는지."



치나츠는 손을 뻗는다. 치후유는 그 손을 맞잡았다.


찬란한 빛과 함께 사방으로 바람이 터져나갔다. 폭풍이 몰아치고, 태풍이 용솟음치며, 바람이 맹렬하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불었다.


하나로 이어진 마음에 화답하듯,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둘을 축복하는 것처럼 휘몰아치며 치후유를 중심으로 응집되어간다.


아직 미약하지만 의지만큼은 누구보다 숭고한 꽃이, 비로소 겨울이 지나 봄바람을 맞으며 그 봉오리를 활짝 열어젖힌다.


노래가 들려온다.


생명을 찬미하는 노래, 자연의 아름다움을 속삭이는 노래, 사랑을 부르짖는 노래, 구원을 앙망하는 노래.


오직 단 한사람. 겨울의 따스함을 간직한 아이를 위한 노래가 이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바람의 성가대가 자아내는 화음과 선율들이 갈래바람의 형태로 치후유의 주변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장엄한 기세로 용솟음치던 바람들은 그 강함을 유지한 채 점점 작은 크기로 압축되어갔다.


치후유의 양 어깨로, 양 다리로, 그녀가 쥐고 있는 검으로 영혼이 깃들듯이 바람의 힘이 새겨져간다.


선녀의 날개옷과도 같이 신체 곳곳으로 압축된 바람의 힘이 치후유를 휘감아 둘러쌌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조의 힘이 파장을 발산하며 바람을 흩뿌린다.


아무 능력도 갖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분에 넘칠 정도로 바람의 사랑을 받아온 아이.


그녀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바람의 축복 그 자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더 이상 D급 카운터 따위가 아니었다.


바람의 CRF가 응축되고 모여들며 공명과 증폭을 반복하는 자연 현상과도 같은 무언가가 거기에 있었다.



"검은 바람과 같이, 늘 내 곁에 있나니-"




폭풍의 신이 아이의 몸을 빌어 나타난다.


거대한  단죄하기 위해서.






나나하라 류 七原 流 

쌍생합절기 雙生合絶技

스사노오 スサノオ


- 능력 유효시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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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길어져서 짜름.


원래 여기까지가 딱 지난주에 썼던거고 오늘 전투씬까지 싹 써서 보여주려고 했지만???? 마음이 바꼈슴 ㅅㄱ


18000자짜리를 읽어달라고 하는건 그거대로 독자 학대같아서.... 대신 다음화는 좀 빨리 올라올수도 있을?듯


분명 주시윤이 각성하는 글임에도 주시윤의 비중이 저세상으로 가버린 이런 똥글을 항상 끝까지 봐주는 사람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댓글 남겨줄 때마다 너무 행복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