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정보 오염 감지.

잔여 동력 0.3퍼센트 사고 회로 보호를 위해 재기동 절차가 필요합니다. ' 


동력이 점점 줄고 있었다. 셰나의 공격은 4종 침식체치곤 날카로웠지만 호라이즌의 전투용 프레임을 관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왕의 보물을 훔쳐 쓰는 주제에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실망인걸." 


문제는 셰나의 침식파 공격이다. 호라이즌의 AI는 정신 공격 내성이 갖춰진 강인공지능이지만 셰나의 침식파를 무시할 정도로 튼튼하진 않다. 


"시끄럽습니다. 침식체. 제가 지금부터 바이올린을 배워도 당신보단 잘 하겠군요." 


"하, 기계 따위가 내 연주를 이해할 수나 있고?" 


게다가, 관리자를 지키며 싸워야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싸움이다. 침식파에 대한 방책은 있는지 셰나의 침식파에 어이없이 쓰러지진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데다, 셰나가 직접 관리자의 심장을 찌른다면 침식파와 관련 없이 관리자는 죽고 말 것이다. 


"호라이즌! 힘내게! 자네에게 인류의 미래가 걸려있어!" 


목숨이 위험한 것치곤 지나치게 경쾌한 관리자의 목소리 톤은 둘째치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를 지킨다고 해서 인류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죽는다면 인류는 그 즉시 멸망할 것이다. 


호라이즌은 오래전 엠버에게서 콜드케이스를 넘겨 받았을 때를 떠올린다. 호라이즌은 그때 엠버에게 콜드케이스로 인류를 몰살시키리라 말했었다. 엠버는 그때 뭐라고 말했었지? 


'잊지 마, 호라이즌. 우리가, 내가 너를 만든 건' 


호라이즌의 기억은 해마가 아닌 메모리칩에 저장된다. 그녀의 기억엔 아직도 엠버 소장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하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도 못해 배에 감아놓기만 한 붕대. 그 위로 배어나오는 피. 인간에게 배신당하고도 인류를 지키라던 목소리.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호라이즌은 인류를 증오한다. 엠버 소장을 이용한 인간들. 대쉬와 리타를 죽인 윌버. 모두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이제껏 콜드케이스의 커넥터를 해제해 인류를 학살하지 않은 건. 


"이제 한계인 것 같은데. 슬슬 포기하는 게 어때? 단조로운 연주는 질리기 마련이거든." 


호라이즌이 조용히 뇌까린다.


"저는 인간들을 대신해 침식체와 싸우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셰냐에게 건네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의 생각을 출력하는 것에 가깝다. 


"제 형제자매들은 자신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싸우지 않을 것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망가지고 부서졌습니다."

"저는 인류를 증오합니다. 자신들을 위해 저희들을 만들고 희생시킨 인류를 증오합니다." 


전투 데이터가 쌓일수록 호라이즌의 공격은 효율적으로 변한다. 맨손으로 침식체의 턱을 뜯고 쇠파이프로 척추를 부러뜨리는 호라이즌의 모습에서 패배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셰나도 호라이즌 본인도 이것만으론 예정된 패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간들을 처벌하기 위해 죄 없는 이까지 희생시킬 순 없습니다." 


인간은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는. 호라이즌은 타협하지 않는다.

죽인다면 모든 인간을 살린다면 그 역시 모든 인간을. 애매모호한 주관적 기준에 따라 살릴 사람과 죽일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호라이즌에게 불가능하다.

이제서야 호라이즌은 선택했다. 어쩌면 엠버 소장이 죽었을 때, 혹은 엠버 소장이 죽기 전에 선택했어야 했을 지도 모르지만. 


"혼자서 중얼거리지 말아 줄래? 합주가 망가지잖아." 


호라이즌은 빙글거리며 조롱하는 셰나의 얼굴을 직시한다. 


"셰나. 당신의 연주는 여기서 끝입니다." 


'잔여 동력 0.06%. 재기동이 필요합니다.'

"재기동하겠습니다." 


"하핫, 결국 쓰긴 하는구나." 


셰나의 중얼거림은 재기동 중인 호라이즌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커넥터 강제 분리. 의사 모듈 직결 탑재 완료.

교전 형태로의 기동 목적을 입력하십시오.' 


"기동 목적은... 인류 수호" 


교전 형태로 전환된 호라이즌은 찰나의 순간 공간을 도약했다. 이어지는 참격. 5종 침식체도 대응하기 힘든 공격을 고작 4종 침식체가 반응할 수 있을 리 없다. 호라이즌의 공간도약조차 인지하지도 못한 채 셰나의 머리가 떨어졌다. 


"이야~ 호라이즌양. 덕분에 살았네. 처음 봤을 때도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더욱 믿음직스럽군." 


호라이즌의 인공지능은 교전 형태의 과부하를 장기간 버틸 수 없다. 기존의 비전투 모드로 돌아온 호라이즌은 관리자에게 겨누었다. 


"갑, 갑자기 왜 이러나? 호라이즌양." 


"대답하십시오. 관리자. 대답 여하에 따라 당신은 이 자리에서 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