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티타노마키아 당시 가이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크로노스에 의해 저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유폐된 티탄 삼형제를 구출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제우스에게 벼락을, 포세이돈에게 삼지창을, 하데스에게 투구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벼락을 아스트라페, 또는 케라우노스라고 부른다.****




반발은 거셌지만 결국 모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절망적인 조건 속에서 4종을 처치할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그건 역시 정면 승부를 피하는 방법뿐이었다.

 

차원 통로로 놈을 유인하는 것뿐이라면,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뿐이라면 남은 병력을 모두 쏟아부어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른다.

 

작전이 입안된 이후엔 일사천리였다.

 

지옥과도 같은 2년 속에 살아남은 이들이다.

 

현실적인 방안이 없었기에 어찌할 줄을 몰랐을 뿐이지 이들은 절대 무능하지 않았다.

 

작전의 큰 틀이 정해지자 지휘관들은 머리를 맞대고 빠르게 세부계획을 채워나갔다.

 

남은 물자를 정비하고 부대를 재편하고, 보급 계획을 다시 세우며 장비를 점검했다.

 

역시 이런 일은 일선에서 몇 년 동안이나 부대를 운영해온 그들이 훨씬 능숙한 것이다.

 

카린이 세운 작전 안에 덧대 금세 최종 계획이 수립되었다.

 

결행 일은 정확히 7일 뒤.

 

참모부에서 분석한 데드라인과 일치했다.

 

작전 날짜가 정해졌으니 4종의 유인 및 고심도 다이브를 맡을 현장 요원을 선발해야 했다.

 

델타세븐의 카운터 전력이라고는 둘밖에 남지 않은 상황.

 

전력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임시로 델타세븐에 합류할 용병을 물색하고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전 사령관님의 사망 소식을 알리자 카린은 잠시 슬퍼했지만,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털어낸 것이 아니다.

 

죽은 자를 기리는 걸 잠시 뒤로 미뤘을 뿐.

 

마음 놓고 슬퍼할 여유조차 없는 세상이라니. 참 거지 같다고 제이크는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있다간 전사할 확률만 올라갈 뿐이니까.

 

용병의 합류에 반발하는 걸 봤을 때는 조금쯤은 얽매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작전 당일이 다가왔다.

 

 

 

사령부의 방어선을 따라 대군이 늘어서 있었다.

 

각 대피소와 생산 플랜트의 최소 방어병력을 제외한 모두를 끌어모은, 말 그대로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전력이었다.

 

그나마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리라.

 

작전이 실패한다면 어차피 인류는 그걸로 끝이다.

 

대오를 갖춰 선 병사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령부로 병력이 집결하는 지난 며칠간 침식체의 습격은 없었다.

 

행군으로 대열이 길게 늘어선 동안 공격을 받는 것을 우려한 지휘관들은 적의 동태(動態)를 파악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놈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위성사진을 확인했을 때였다.

 

4종을 촬영한 화상에는 평원 가득 들어찬 침식체 무리가 찍혀있었다.

 

아군의 집결에 맞서 침식체 측도 주변의 병력을 불러들인 것이다.

 

그동안 밤마다 쳐들어 왔던 것이 애교로 보일 만큼 압도적인 숫자.

 

조금 뒤에 저 무수히 많은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입에서 침이 마를 지경이다.

 

사령실의 대형 스크린 한쪽에서 스톱워치가 반짝였다.

 

작전 개시까지 15.

 

참모가 다가와 제이크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사령관님.”

 

.”

 

제이크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마이크를 쥐었다.

 

제군. 우리는 지금부터 남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4종 침식체를 쓰러트리러 간다. 이것은 대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작전이며 또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다.”

 

무전망을 통해 제이크의 목소리가 부대 전체에 퍼졌다.

 

이번 작전은 비단 우리의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구조요청조차 보내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 숨어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생존자를 위한 싸움 이기도 하다. 저 악마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인류에게 더 이상의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령실 안의 모두가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 거짓으로 제군을 기만하진 않겠다. 알다시피 세계 곳곳엔 여전히 2천 개가 넘는 4종 침식체의 알이 존재하며,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가 쟁취할 미래란 완전한 승리가 아니다. 나와 제군 모두의 목숨을 건 이 도박에서 승리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따낼 판돈은 단지 멸망까지의 20년이란 유예뿐이다.”

 

제이크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나, 제군! 우린 조국을 수호하는 방패이자 검이다. 우리 뒤에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아침 부대가 출전할 당시 대피소에 남은 시민들이 모여 손을 흔들어 주던 게 떠올랐다.

 

비록 그 끝에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맞닥뜨릴지라도,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는 한 우린 싸워야만 한다! 그것이 우릴 믿어주는 국민에 대한 책임이며 먼저 죽어간 전우들이 다한 의무이다!”

 

그래. 두 분이 목숨을 바쳐 다한 의무를.

 

우리의 마지막 투쟁은 모두의 가슴속에 새겨질 것이며, 죽음 앞에 떳떳한 정의(正義)로 남을 것이다! 긍지를 거머쥐고, 용맹하게 전진하라! 저항하여, 사명을 다하라!”

 

병사들의 눈에서 투지가 피어올랐다.

 

폭풍전야의 고요 속에 스톱워치가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마침내 7시 정각.

 

작전 개시.”

 

최후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모조리 퍼부어! 진흙탕을 기어 다니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 귀염둥이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거다!”

 

가자, 자식들아! 뒤에 숨어서 대포나 만지는 겁쟁이들에게 전쟁은 우리의 몫이라는 걸 보여 줘라!”

 

포병의 일제 포격 이후 전차를 앞세운 총돌격이 이어졌다.

 

포탄이 작렬해 진형이 흐트러진 침식체 무리를 전차가 짓밟고 지나간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지원 포격을 등에 업은 보병부대가 전진하고, 하늘에선 전투기와 자율 전투함이 비행형 침식체를 견제하며 지상을 폭격했다.

 

무식하리만치 우직한 정면 승부.

 

하지만 더는 시간이 없었다.

 

애초부터 쪼들리는 쪽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전사들의 기세는 꺾일 줄을 몰랐다.

 

“3종이다! 전방에 3종 침식체 출현!”

 

카운터 소대는 3종을 포위한다! 기갑부대, 주변을 봉쇄해!”

 

그간 인류를 짓밟아 온 3종조차도 목숨을 도외시한 병사들의 공격 아래 하나둘 쓰러졌다.

 

무수한 시체를 쌓아가며 피의 전진이 계속되었다.

 

 

 

사령실에서 작전의 경과를 지켜보는 제이크의 안색은 어두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전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전의 개요는 간단합니다. 전 병력을 투입해 4종의 호위 병력을 뚫고 진입로를 확보합니다. 이후 차원 통로로 놈을 유인해 밀어 넣으면 끝입니다.’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소만.’

 

. 어디까지나 개요이니까요. 이번 작전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4종 침식체 입니다.’

 

놈을 누가 유인하는지가 중요하겠군. 남은 특수부대 소속 카운터들을 선별하고 용병들의 지원을 받는다면.’

 

어지간한 전력으론 놈의 시선조차 끌지 못할 겁니다. 우리 역시 최강의 전력을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사령관님이지요.’

 

으음, 그건.’

 

아니, 내가 맡겠다. 작전참모의 말대로야. 애초에 내가 아니라면 놈을 상대로 시간조차 벌 수 없을 거다. 참모, 두 번째는 뭐지?’

 

, 두 번째는 놈을 밀어 넣을 차원 통로입니다. 현재 우리의 이터니움 공학 기술로는 4종이 자력으로 복귀할 수 없을 정도의 고심도로 향하는 통로를 개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이미 열린 균열의 좌표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뉴 오하이오의 엔진을 활용한다면 가능하지요. 문제는.’

 

이미 열린 균열을 쓰는 것이라면, 4종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균열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말씀이군요?’

 

, 다행히 사령부 가까이에 대 균열 하나가 관측되었습니다. 4종이 통과하기에도 충분한 크기입니다. 다만, 균열 인근에 대규모 침식체 무리도 함께 포착됩니다.’

 

차원 통로를 미리 연결하고 대기 할 순 없겠지요. 본대가 4종을 유인할 때까지 뉴 오하이오가 버틸 수 없을 테니. 그렇다고 병력을 차출 하면 4종의 호위를 뚫을 수가 없고. 진퇴양난이로군.’

 

, 그러니 통로 연결과 4종의 유인을 동시에 진행합니다. 본대가 4종의 호위 병력을 타격해 주변 침식체를 끌어내면 사령관님이 진입. 동시에 뉴 오하이오가 출격하여 균열의 좌표를 수정하고 다이브해 통로 연결 작업을 수행합니다. 이후 사령관님이 4종의 유인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본대는 주변 침식체와 교전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니, 사령관님.’

 

말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진입로가 열리기 전까지 나서시면 안 됩니다. 이번 작전은 전적으로 사령관님의 무력에 기대는 기획입니다. 사령관님이 다른 적에게 힘을 뺐다가 정작 4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신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4종과의 전투에 대비해 힘을 아껴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정작 제이크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화면에 적과 아군의 전투 현황이 실시간으로 떠오른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수치로만 표시되는 아군의 죽음.

 

당장 뛰어나가 구할 수 있는 목숨을 작전에 따라 희생시켜야만 한다.

 

사령관님은 이런 부담감을 항상 감내해오셨던 건가.

 

제이크는 무릎을 부여잡고서 호흡을 골랐다.

 

똑똑히 지켜보고 가슴에 새기자.

 

내가 희생시킨 이들을.

 

그게 나의 역할이다.

 

 

 

서로의 살을 깎아 먹는 소모전이 한참을 계속된 끝에, 드디어 전황에 변화가 생겼다.

 

4종의 호위 병력이 본대에 이끌려 일부 이탈한 것이다.

 

사령부 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4종 호위 병력의 이탈을 확인. 작전 2단계로 진입하겠습니다. 패스파인더 팀, 출격해 주십시오.”

 

여기는 카린 웡 소령. 뉴 오하이오, 이륙하겠습니다.”

 

제이크가 무전기를 켜고 말했다.

 

소령. 주의하도록. 경로상에 다수의 침식체가 관측된다.”

 

. 대령님도 몸조심하십시오.”

 

통신을 종료하고 제이크도 의자에서 일어섰다.

 

부 사령관직을 맡은 장군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럼 장군님.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 사령관님.”

 

막 사령실을 빠져나가려던 제이크를 장군이 불렀다.

 

사령관님.”

 

제이크가 뒤를 돌아보자 사령실 안의 모두가 기립했다.

 

무운을 빕니다, 사령관님.”

 

제이크가 사령실 안을 휘둘러보고서는 덤덤히 인사했다.

 

이기고 돌아오지.”

 

 

 

음속을 뛰어넘는 속도로 전투기 하나가 전장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제이크가 탑승한 기체였다.

 

하늘과 땅에서 여러 침식체가 전투기를 노리고 공격해왔지만, 조종사는 감속과 가속을 반복하며 능숙한 솜씨로 모두 피해냈다.

 

그가 자못 재미있다는 듯이 농담을 건넸다.

 

이거, 저놈들이 귀한 분을 몰라보고 가시는 길을 방해하는군요.”

 

제이크가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군,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무슨 말입니까, 사령관님. 사령관님을 모시게 된 게 얼마나 큰 영광인데요. 제 부모님도 분명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글쎄, 아들이 군인인 걸 생각하면 걱정이 앞서실 것 같은데.”

 

조종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확실히 부모님 뵐 낯이 없긴 합니다. 저 위에서 아직도 걱정하고 계시겠지요.”

 

제이크가 화물칸 쪽창 너머로 조종석 옆에 붙여둔 가족사진을 곁눈질했다.

 

이 병사도 가족을 잃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저 밑에 있는 모두가 그렇다.

 

지옥과도 같은 2년 속에서 생존만을 생각해온 사람들이, 지금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마지막 희망이다.

 

전투기는 순식간에 4종 침식체에게 다가갔다.

 

4종의 거체(巨體)가 빠른 속도로 커졌다.

 

그럼, 사령관님. 무운을!”

 

조종사의 외침과 동시에 화물칸의 문이 열렸다.

 

제이크가 아래에 있는 4종을 향해 뛰어내렸다.

 

어이, 괴물. 이번이 세 번째였던가?”

 

놈이 제이크를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캬오오오!

 

, 너도 지겨웠나? 걱정하지 마.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다시 한번, 뇌신(雷神)이 벼락과 함께 전장에 강림했다.

 

 

 

하늘에서 수많은 광구(光球)가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건물쯤은 우습게 날려 버릴만한 위력.

 

아무리 제이크라고 해도 정통으로 맞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제이크는 4종을 중심으로 빠르게 반원을 그리며 공격을 피했다.

 

놈의 시선이 제이크를 뒤쫓았다.

 

이번에는 주변의 대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물속에서 걷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감각.

 

상대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4종의 육중한 팔이 그를 향해 휘둘러졌다.

 

제이크가 힘을 끌어모아 허공에 짧게 주먹을 갈겼다.

 

퍼엉!

 

포대 자루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압박감이 사라지자, 제이크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곳에 대들보만 한 팔뚝이 내리꽂혔다.

 

터져 나오는 흙더미 속에 몸을 숨긴 제이크가 4종의 뒤를 향해 접근한다.

 

놈의 사각으로 파고든 절호의 기회.

 

그러나 채찍처럼 날아드는 꼬리에 그는 다시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나야 했다.

 

4종이 몸을 돌려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가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이 짓도 세 번째니 슬슬 익숙해지는걸.”

 

허공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여럿 생겨나서 중심부로 조여든다.

 

그에 반해 넌 변하게 없고 말이야!”

 

자세를 유지하기도 힘든 강풍.

 

회오리가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기 직전,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한 제이크가 바람의 감옥을 뚫고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드는 4종의 팔.

 

피하기엔 타이밍이 안 맞는다.

 

급히 자세를 잡고 팔 아래를 노려 어퍼컷을 날렸다.

 

정면에서 받아치기엔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니 공격의 궤도를 비트는 걸 선택한 것이다,

 

콰앙!

 

가까스로 막아냈으나 미처 흘리지 못한 충격에 오른팔이 떨렸다.

 

쉴 틈도 없이 다음 공세가 이어졌다.

 

하늘에서 빛과 화염이 떨어진다.

 

땅에서는 바위와 어둠이 솟아오른다.

 

제이크는 번개와도 같은 움직임으로 4종의 주위를 쏘다녔다.

 

회피가 가능한 건 피해내고, 불가능한 공격은 최대한 비껴내 충격을 최소화한다.

 

철저하게 방어 위주로 나서는 전략.

 

그래도 힘의 차이는 역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이크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전신에 상처가 늘어갔다.

 

지반이 뒤엎어져 암반층이 드러나고 갈라진 땅 사이로 용암이 솟구쳤다.

 

잠깐 사이에 전장은 완전히 지옥도로 변해있었다.

 

싸움에 휘말린 인간과 침식체가 구분 없이 죽어 나갔다.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서 청광(淸光)이 꿋꿋이 악마에 맞섰다.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고, 날아가고, 땅에 처박혀도 다시 일어섰다.

 

뼈에 금이 가고, 몸에 구멍이 뚫리고, 근육이 끊어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알이 나간 선글라스 너머로 비치는 푸른 눈에서 전광(電光)이 튀었다.

 

으아아!”

 

 

 

다리가 후들거린다.

 

폐가 쪼그라들어 산소를 애타게 찾는다.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의지만으로 지탱하며 제이크가 뒤를 흘끔거렸다.

 

뉴 오하이오가 있는 방향이었다.

 

교전과 후퇴를 반복해가며 4종을 작전 지점까지 유인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차원 통로가 연결되기만 하면 작전 종료.

 

하긴, 통로 연결에 쓸 이터니움을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계획이었으니.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겠지.’

 

제이크가 다시 각오를 굳혔다.

 

쩌엉!

 

그때 두꺼운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뚫린 균열에 변화가 발생했다.

 

곧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며 커다란 차원 통로가 생성되었다.

 

제이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성공했군, 카린!”

 

제이크가 엄지로 등 뒤의 통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이, 괴물. 저기로 얌전히 걸어 들어가 주면 고맙겠는데.”

 

크아아아!

 

또 한 번 허공에서 빛의 탄환이 날아들었다.

 

하긴, 기대도 안 했어!”

 

왼손으로 손목을 쥐고 허리를 굽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기합과 함께 주먹으로 온몸의 힘을 끌어모은다.

 

하아압!”

 

제이크의 오른 주먹에 어른 머리통만 한 푸른 구체가 맺혔다.

 

그대로 침식체를 향해 돌진해 놈의 몸통에 일격을 먹인다.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개 줄기에 제이크를 향해 쏘아진 탄환이 모두 녹아내렸다.

 

콰앙!

 

주먹 끝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제이크는 멈추지 않고 4종의 몸을 밟아가며 놈의 허리춤까지 올라갔다.

 

이어지는 장대한 돌려차기.

 

수백 배는 큰 몸집의 침식체가 사람의 발에 걷어차여 수십 미터를 미끄러졌다.

 

이제 4종과 통로 사이에 남은 거리는 십여 미터.

 

그대로 마지막 공격을 가하려던 참이었다.

 

4종의 눈가로 붉은 섬광이 모여들었다.

 

젠장, 저건.”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집어삼킨 불꽃.

 

숱한 도시와 거점이 저 붉은 섬광 아래 녹아내렸다.

 

제이크가 다급히 놈에게 달려갔다.

 

저건 막을 수 없다.

 

공격하기 전에 저지해야 한다.

 

제이크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4종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있는 것은.

 

. 뉴 오하이오인가!”

 

이미 연결된 차원 통로는 뉴 오하이오가 파괴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이브에는 좌표를 잡아주는 워프 마커가 필수적이다.

 

함선이 파괴된다면 이면세계로 건너간 카린이 이쪽으로 돌아올 방법이 사라진다!

 

제이크가 다급히 함선을 향해 내달렸다.

 

검붉은 불꽃이 푸른 번개를 집어삼켰다.

 

 

 

. 커억.”

 

땅에 쓰러진 제이크가 연신 피를 토했다.

 

온몸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폭압으로 두 팔에도 금이 갔다.

 

부상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게 작열통(灼熱痛)이라고 했던가.

 

통증 덕분에 정신을 잃을 일은 없단 것이 불행 중 다행이겠지.

 

하지만.’

 

팔로 상체를 받쳐 억지로 일으켜보려 하지만 힘에 부쳐 다시 넘어졌다.

 

4종은 천천히 함선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대로 놈을 보낸다면 작전은 실패다.

 

팔을 뻗어 놈의 다리를 감쌌다.

 

못 보낸다절대로.”

 

4종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빛의 화살이 제이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온몸이 난도질당하면서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차라리 여기서 네놈과 함께 죽을지언정, 두 눈 멀쩡히 뜨고 보내줄 것 같냐!”

 

악에 받친 외침을 내뱉으며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일어섰다.

 

팔뚝에 선명한 힘줄이 새겨진다.

 

하아압!”

 

그대로 4종을 들어 올려 등 뒤로 던져 넘겼다.

 

수십 톤을 넘는 침식체가 땅에 떨어지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일대가 흔들렸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살기가 제이크에게 퍼부어졌다.

 

그래, 여길 봐라.”

 

제이크의 어깨너머로 푸른 기류가 넘실거렸다.

 

고압 전류에 주위의 흙더미가 터져나가고 바위가 녹아내린다.

 

제이크의 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혈관이 찢어진다.

 

자신의 몸조차 상처입히는 한계를 넘어선 출력.

 

들판에 떨어진 불덩이처럼 날뛰는 전격이 제이크의 통제 아래 전신을 감싸고 대해와 같이 흐른다.

 

지상에 파란 태양이 자리 잡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4종 침식체가 처음으로 두려움에 차 울부짖었다.

 

캬아아아!

 

땅이 물결처럼 출렁이며 바위로 이루어진 파도가 제이크를 덮쳤다.

 

더는 네놈에게.”

 

제이크는 그대로 파도를 뚫고 돌진했다.

 

어둠으로 만들어진 채찍이 사방에서 휘둘러졌다.

 

가족도.”

 

채찍은 태양을 뚫지 못하고 겉면에서 모두 불탔다.

 

거대한 빛의 검이 제이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동료도.”

 

오른팔에 진청색 빛줄기가 맺히고 휘둘려 광검(光劍)을 깨부쉈다.

 

시커먼 불길이 모여들어 땅을 향해 내리꽂힌다.

 

이 나라도!”

 

청색 태양이 그 몸집을 부풀려 검은 불길을 집어삼켰다.

 

그 항성 안에는 4종 침식체도 있었다.

 

무엇 하나 내주지 않을 테다!”

 

가공할만한 열기가 4종의 피부를 태우고 살을 녹였다.

 

놈은 이 태양 안에서 버티기만도 벅찬지 더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제이크가 천천히 주먹을 쥐고서.

 

이제, 그만 우리 세계에서 꺼져!”

 

4종의 몸통 한가운데를 향해 있는 힘껏 휘둘렀다.

 

이야아압!”

 

전력을 다한 펀치가 그대로 4종을 통로 너머로 밀어냈다.

 

심연처럼 깊은 보라색 원으로 침식체가 빨려들어갔.

 

 

 

잿더미가 흩날리는 땅 위에 만신창이가 된 제이크가 쓰러져 있었다.

 

이젠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일 힘도 없었다,

 

4종을 물리친 대가는 처참한 상흔으로 남아 그의 몸 위에 새겨졌다.

 

피부뿐만 아니라 내부 장기까지 온통 엉망이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살아있던 게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중상.

 

. 마지막인데 담배라도 하나 가져올 걸 그랬나.”

 

, 있더라도 팔도 안 움직이는데 입에 물지도 못하겠지만.

 

분명히 부사령관님이 들었다면 또 불호령이 떨어졌겠지.

 

제이크가 힘없이 키득거리다 마른 기침을 토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숨쉬기도 힘들다.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에 꽂은 통신기에서 무전이 들렸다.

 

적이 후퇴대열정비.”

 

사령관님께 지원정찰시급.”

 

잡음이 섞인 무전 너머로 기쁨에 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본대도 무사한 것 같았다.

 

4종이 사라지고 침식체도 물러난 건가.

 

불행 중 다행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제이크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통신기를 조작했다.

 

거리가 조금 멀긴 하지만 뉴 오하이오의 범위 내라면, 연결이 가능하다.

 

제이크 워커 대령이역전(歷戰)의 용사들에게알린다. 우리가승리했다.”

 

멀리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온다.

 

하늘 저편에서 작은 헬리콥터 하나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사령관님. 부사령관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소령.

 

분명 힘든 작전이지만, 너라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뒷일은 맡기마.

 

두 분께 저는부끄럽지 않은 군인이었을까요.”

 

아직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쪽에서 만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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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 분량 조절 개같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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