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이것도 아니야..."


야심한 밤


한 소녀가 자신의 키보다도 큰 창을 올려놓고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 래시포드


비비안이 있는 곳은 노르드나빅 재건단의 개인 숙소였다


"창날의 이터니움 분배율은 완벽했어...철의 재질이 문제인건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름만 숙소일뿐 비비안의 숙소에는 온갖 기계장치가 가득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이 이 풍경을 본다면 숙소가 아니라 공방을 떠올렸으리라

"그러면 합성 탄강을 써봐야겠네. 내가 그걸 어디다가 뒀더라?"

비비안은 자신의 정리능력에 깊은 후회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방의 구석에서 물건을 찾고 있던 그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비비안은 다급하게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이 야심한 밤에 방에 누군가가 찾아오는 경우는 단 한가지.

비비안이 만들어내는 소음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정리..."

비비안이 문을 열려던 그때, 그녀가 문을 여는것보다 먼저 문이 열렸다

"이거,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기술장교님?"

숙소의 문을 연것은 다름아닌 비비안이 속해있는 왕실 재건단의 기술장교였다

그는 비비안의 숙소를 슥 훑어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먼저,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온것에 대해 사과하겠네. 혹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무..물론입니다!"


"고맙네. 그렇다면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네!"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비비안은 다급하게 환복을 시작했다


"으으..."

그렇게 급하게 환복을 마친 비비안은 서둘러 기숙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걷겠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자, 은은한 미소를 띄운 기술장교가 있었다


"네. 기술장교님."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따로 문책을 하려고 부른건 아니니까."

"네."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먼저 말을 꺼낸것은 기술장교였다


"이번에 자네가 제출한 쐐기 대포의 개선점들을 보니, 옛 생각이 떠오르더군."


쐐기 대포

오래전 왕립 최고 기술자들이 설계한 병기이다. 거대한 쐐기창을 투사구에 장전 한 뒤 발사하는 간단한 원리의 무기지만 그 파괴력은 간단하게 볼 수 없었다

비비안은 뭐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장교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그때도 지금처럼 걸으면서 얘기를 했었지."


마치 회한에 찬 그의 눈동자는 과거를 비추고 있었다


"네?"


"아니, 그냥 헛소리라네. 잊어버리도록."



생각을 멈춘 그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비비안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네."




자연스럽게 장교의 발걸음이 멈추자, 비비안의 발걸음도 그에 맞춰서 멈췄다



"며칠 후 나는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장교님."


"그리고 나의 후임으로 자네를 추천했지."


비비안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눈빛으로 장교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하. 너무 놀라지는 말게나. 원래 사는게 다 그런거 아니겠나?"


"...네?"



"그래서, 이렇게 자네를 찾아오게 되었다네. 한번쯤은 자네와 진솔한 대화가 필요할거 같아서 말이야."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아까까지의 당황은 어디갔는지, 비비안은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보도록."


"저보다 뛰어난 분들도 많을텐데 어째서 저 입니까?"


아까까지의 가벼운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얼마전, '열쇠'의 탐지기를 만들었다고 들었네. 사실인가?"


"미완성입니다. 손봐야될 부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자네를 장교로 추천한 이유가 바로 그걸세."


장교의 대답을 들은 비비안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우리들은 흔히들 말하지. 열쇠를 찾아, 낙원문을 재건하고 왕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말이야."


"부끄럽지만 우리들은 열쇠의 수색을 포기했었네."


"...."


"20년의 세월은 우리들이 내세운 기치는 어느새 빛이바래, 보는것조차 부끄러워졌어."


회한

장교의 눈안에 들어있는건 오직 회한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의미없이 보내던 그때, 자네가 우리 늙은이들에게 보여줬다네."


얼굴에 새겨진 회한은 어느새 은은한 미소로 바뀌어져있었다


"아직 선조들이 남긴 희망은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저는..."


비비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어떤가. 답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영원같은 찰나가 흐르고


"앞서 쓰러져간 이들의 희생이 헛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무리한 제안을 받아들여줘서 고맙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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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님!"



머리속으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다



"장교님이라고 부르면 일어나시지 않을까요?"


의식이 부상하는것과 동시에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으으...."


지끈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눈꺼풀을 열자,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큐리안, 그리고 북을 들고 있는 병사.


....북?


"...일어났으니 북은 치우도록."


"죄송합니다."


찌릿하고 노려보자, 북을 들고 있던 병사는 시무룩한 얼굴로 북을 들고 나갔다

이름이 피터였던가?

좋아. 기억해뒀다



"괜찮으십니까? 거의 하루를 꼬박 주무시던데."


"하루라고?"


"네. 혹시 기억이 안나십니까?"

정중하게 물어보는 큐리안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 분명 어제 신병들의 환영식이 있었지


그리고 그곳에서 꼬맹이가 왜 여기있냐는 신병녀석의 말을 들은 나는 홧김에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에일을 들고서...


"하하...."


바로 병나발을 불었구나


두통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자괴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같잖은 도발을 못참아서 신병들 앞에서 병나발을 불었다고? 내가?


"신병들은?"


"방금 숙소 배정을 끝냈습니다. 아마도 내일부터는 여기도 시끌법적하겠군요."

다행스럽게도 신병 환영회는 무사히 마친듯 하다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럴때가 아니면 언제 마시겠습니까."


"일어나셨네요."


그렇게 큐리안과 얘기를 하던 그때, 엘라 부관이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감자스프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폐를 끼쳤군."


"속이 쓰리실텐데 어서 드세요."


이 부관의 감자스프를 보면 어째서인지 어렸을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감자스프가 떠오르게된다


...맛있네


"그건 그렇고 어제 진짜 대단하시던데요?"


"뭐?"


엘라 부관의 입이 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 '나는 꼬맹이가 아니라 어른이다! 망할 신병들아!' "


저 모습은 장난기 넘치는 악마 그 자체였다


"아으..."


"처음에 푸하!가 빠졌습니다. 대장."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피터가 추임새를 넣으며 말했다



...너는 내가 반드시 곡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주겠다



"어제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



"장교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들어드려야죠."


"장교가 아니라 교관이다. 큐리안."


저녀석은 아까부터 마치 어린 딸을 바라보는 아빠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군


...딸?


"용건이 끝났으면 나가봐라. 쉬는데 방해가 된다."


"혹시 모르니 대장이 여기 남아있어줘. 가능하지 대장?"


"나야 상관 없다만. 교관님은 어떠십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이제 장교가 아니라 기술교관이다. 군인이라면 명령에 따르는것이 당연해."


"그렇다고 하시는군."


"그러면 내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가자. 피터."


"넵."


"아 그리고, 어제 이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건데."


밖으로 나가려던 엘라와 피터가 멈칫하고 섰다


"누군가가 흥얼거리며 사슴고기를 가져가더군. 꽤나 즐거워 보였어."


"아니 그걸 어떻게...대장?"


그 순간 방안의 온도가 10도는 내려간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머, 그런일이 있었다니 저는 처음 알았네요."


"대...대장 이건 오해가..."


"그러면 우리 밖에서 '오해'를 풀어볼까 피터?"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을거다


아마



"이렇게 단 둘이 마주하는것도 오랜만이군."


"어제도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러고보니 어제 이녀석이 내 팬던트를 고쳐줬었..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왜 그러십니까? 안색이 안좋은데."



"큐리안. 너 때문이다."


덮어져있는 이불을 걷어내, 옆으로 치웠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됐으니까 나와라. 네 덕분에 숙취까지 싹 날아갔으니까."


"부관이 알면 저를 죽이려 들겁니다."


"안걸리면 되잖냐. 안걸리면."


나는 그대로 옷걸이에 걸려있던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동이 트기전 새벽의 하늘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교관님이 그런말을 할줄은 몰랐습니다만."


뒤를 돌아보니, 묵빛 기계마가 큐리안의 옆에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거냐?"


"마침 근처를 어슬렁거리길래 데려왔습니다."


"우연치고는 지독하군."


큐리안은 대답대신 허밋의 등에 올라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이래서야, 내가 공주가 된 느낌이군."


맞잡은 그의 손은 더없이 두껍고 강인했다


내가 등에 안착하자, 허밋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걸어서 보는 외성과 말 위에서 보는 외성의 풍경은 어째서인지 같은 풍경임에도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런 표정은 처음 보는군요."


"응?"

큐리안이 내게 말을 걸고 나서야 우리가 어느새 성문에 도착한것을 인지했다.

처음보는 풍경에 잠시나마 한눈을 팔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성벽 위에서 야간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큐리안이 성문으로 더 가까이 가자, 병사들 사이에서 "진짜 이래도 됩니까?" "어휴. 이래서 낭만도 모르는 녀석이랑은 근무서기가 싫다니까." 같은 이상한 이야기가 들린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조금 시간이 지나자,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이윽고, 사람 한명이 겨우 지나갈 공간이 열리자, 허밋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이른 아침햇살을 받은 초원의 풀들이 자아나는 풍경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의외로 소녀같은 면모도 존재하시군요."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이동하죠."


큐리안은 무언가 말을 삼킨 후 출발했다.


또 다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새 허밋은 숲 한복판에 멈춰섰다


"여기 기억나십니까?"


"...기억하고 있다. 내가 개망신을 당한 곳이군."


국경수비대와의 협력을 구하지도 않은채 머저리처럼 행동해서 죽을뻔 했었지


"교관님이 나무위에 올라간 모습은 꽤 볼만 했습...윽!"


또 헛소리를 지껄이길래 군홧발로 녀석의 다리를 힘껏 걷어차줬다



"...이동하죠."



"하아..."


다음에 도착한곳은 셔우드 외성의 하나밖에 없는 정비소였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그러지."


어째서인지 허밋은 같이 들어오는 대신, 가만히 서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허밋은 왜 안들어오는거지?"


"혹시나 해서 망을 보게 했습니다. 혹시 허밋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그런건 아냐. 들어가지."


정비소로 들어가자, 기름과 철 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나는 말없이 걸어가는 큐리안을 따라 정비소의 중앙 작업대에 도착했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프로포즈라면 거절하겠다만."


"그런건 아니니 일단 감아보시죠."


눈커풀을 닫자, 불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 후 손 위로 묵직한 느낌이 느껴졌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그리고 눈을 뜬 그 순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팬던트?"


정확히는 하트모양의 로켓 팬던트가 손 위에 올려져있었다


"교관님이 착용하고 계신 팬던트의 설계를 참조해 만든 침식파 교란장치입니다. 원본에 비해 교란범위, 내구도, 사용횟수등이 두배 늘어났다는 점이겠군요."

"........"


"교관님?"


"...실례했군."


어렸을적 아버지가 남기고 간 팬던트를 보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었다


한때는 원망을

한때는 그리움을

한때는 존경을


"큐리안. 혹시나 해서 묻는거다만. 아직도...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나?"


큐리안은 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기억이 돌아온다고 해도."


결의에 가득찬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저는 큐리안입니다."


앞서 떠난 이들의 의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교관님. 혹시 우는겁...윽."


나도 모르게 아까 걷어찬 부분을 또 걷어 차버렸다


"...매너가 없어 매너가."


"좀 기분이 풀리셨습니까?"


어째서인지 그 대답을 듣자, 속이 후련해졌다


"돌아가자. 지금쯤이면 엘라 부관이 화살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좀 무섭군요."





새벽이 지나가고 맑은 아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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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줘서 댕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