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생각하지만경치는 참 좋단 말이지.”

 

바위산에 즐비한 기암괴석의 절단면이 달빛을 반사해 사방으로 흩뿌린다.

 

사위에 드리운 어둠과 밤하늘에 뜬 보랏빛 달그리고 그 주변을 감싼 반짝이는 별 무리는 흡사 우주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듯한 착각까지 불러온다.

 

재능이 뛰어난 화가가 실력을 십분 드러낸 수채화와도 같은 풍경.

 

이곳이 미술관이었다면 두고두고 눈에 담아두고만 싶은 광경이지만 그걸 보며 담배를 태우는 여성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야이런 건 셀 수도 없이 봐 왔으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미녀라도 매일 보면 질리는 것과 같다.

 

입 밖으로 내뱉는 감상이 단지 으레 늘어놓는 빈말일 뿐이라는 건 그녀의 표정을 보는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 감명을 받기에는 너무 새삼스럽지.

 

한동안 그렇게 시간이나 죽이고 있자니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스승님저희 쪽도 다 끝났어요!”

 

연화냐.”

 

고개를 돌리자 검정 단색 바지 위로 회색 셔츠와 잘 무두질 된 가죽조끼를 걸친 장발의 여성이 있었다.

 

등 뒤로 자기 몸집만큼이나 큰 검집을 멘 그녀의 전신은 육감적이면서도 날렵해 보였고서글서글한 생김새와 대조되는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잔해는 의뢰주인 회사 쪽에서 처리한다고 하니까 철수 준비하면 될스승님또 담배!”

 

대번에 눈썹을 찌푸리며 연화가 성큼 걸어왔다.

 

.”

 

저희랑 있을 때는 안 피우기로 약속하셨잖아요!”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다네가 멋대로 정한 거겠지.”

 

간접흡연이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아세요?”

 

그럼 너도 피던가.”

 

어이가 없어서 말 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상황이려나

 

말을 잇지 못하고 온몸으로 스승님지금 제정신이세요?’를 표현하려 애쓰는 연화의 뒤로 갈색 전투복에 방탄조끼를 덧댄 남자가 따라붙었다.

 

무슨 얘기 해요?”

 

당신 왔어?”

 

곁눈질로 주한이 온 걸 확인한 힐데는 조용히 담배를 구두 밑창으로 비벼 껐다.

 

잔소리꾼이 하나 더 늘었구만.

 

코코아를 하나씩 나누어주던 주한이 코를 킁킁대더니 머그컵을 건네던 손을 멈추고 웃으며 힐데를 불렀다.

 

스승님?”

 

.”

 

스승님?”

 

.”

 

스승님?”

 

이 녀석은 웃는 게 제일 무섭단 말이야애초에 저게 웃는 거 맞긴 해입꼬리만 올라가고 눈은 번들거리는데.

 

결국잘못이 있는 쪽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시선을 피하며 힐데가 입술을 비죽였다.

 

연화 오자마자 껐어.”

 

거짓말 마세요스승님주한 씨 온 다음에야 껐으면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던데 저건 말리는 것도 아니고 옆에서 부추기는 거야 뭐야.

 

대충 넘어가려고 코코아로 손을 뻗는 힐데를 피해서 주한이 컵을 등 뒤로 숨겼다.

 

담배 연기는 몸이나 옷에 밴다는 거 아시죠스승님?”

 

그래안다.”

 

저희 같은 비흡연자들이 담배 냄새 얼마나 싫어하는지 말씀드린 것도 기억하시죠?”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그럼 너희가 떨어져 앉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차마 말은 못 꺼냈다.

 

알았어안 피울게안 피운다고.”

 

언제부터 사제지간이 이렇게 거꾸로 돌아갔는지 원.

 

겨우 받아든 코코아를 홀짝이며 화제를 돌려본다.

 

이번 작전이 마지막이라면서그만둔다고?”

 

스승님연화 씨랑 같이 은퇴하려고요.”

 

옷깃 사이로 목에 건 은색 체인이 눈에 띈다.

 

손가락에 낄 수는 없으니 대신 줄에 걸어 목걸이처럼 단 약혼반지.

 

둘은 서로의 얘기를 할 때면 항상 옷 너머로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이 만난 지도 몇 년째더라.

 

그동안 식도 안 올린 것이 유별났지.

 

맞다스승님도 같이 가실 거죠?”

 

뭐를?

 

고개만 모로 기울이는데 주한이 설명을 덧붙였다.

 

여행이요저희 은퇴 기념으로 캠핑 가기로 했는데연화 씨한테 얘기 못 들으셨어요?”

 

처음 듣는데.”

 

추궁하는 주한의 시선에 연화는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말 하려고 했는데에스승님이 담배 태우고 있어서.’

 

다음 주말에 출발할 거에요스승님 그 날 약속 없으시죠?”

 

이것들이 뭐 당연한 것처럼 물어보네.

 

여행은 무슨 여행이야귀찮게.

 

컵을 다시 기울이며 힐데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나 다음 주에 친구랑 약속 있.”

 

거짓말인 거 다 알아요스승님스승님이 친구가 어디 있다고.”

 

째릿 노려보자 연화가 주한의 등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저게 웬수지웬수야.

 

애초에 애인끼리 둘이서 떠나는 여행에 내가 따라가 뭘 하라고.

 

그냥 자기들끼리만 가면 될 것을 왜 날 끼워넣질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네.

 

애먼 사람 붙잡지 말고 그냥 너희끼리 가라내가 너희 둘 사이에 끼어서 무슨 재미를 본다고주한이 너도 둘이서만 있는 쪽이 더 편할 거 아니야.”

 

엉뚱한 소리를 다 한다는 표정으로 주한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연화 씨한테 먼저 얘기 꺼냈는데요스승님도 데려가자고.”

 

그러니까 대체 왜.

 

저희 은퇴하고 나면 스승님 뵐 일도 잘 없을 것 아녜요마지막으로 추억이라도 쌓고 싶어서 그래요.”

 

낯간지럽게 이제 와 추억은 무슨.

 

언제부터 그렇게 화목한 사이였다고.

 

아무튼난 생각 없다너희끼리.”

 

휘휘 손을 내저으며 남은 코코아를 삼키는 힐데의 뒤로 연화가 달려와 안겼다.

 

같이 가요스승니임~! 소원이에요오!”

 

푸흡콜록콜록.”

 

스승님한 번만딱 한 번만이제 마지막인데 진짜 진짜 딱 한 번마안~.”

 

일단 좀 떨어져콜록앵기지 말고.”

 

너 때문에 사레들렸잖아.

 

하지만 연화는 힐데의 입에서 승낙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안은 팔을 놓을 기미가 없었다.

 

찰거머리라도 된 양 등에 찰싹 달라붙은 연화를 견디다 못한 힐데가 끝끝내 항복을 선언했다.

 

아잇알았어알았다고갈 테니까 이것 좀 놔!”

 

진짜죠약속하신 거예요말 바꾸기 없기?”

 

여전히 등 뒤에 매달린 연화의 얼굴을 한 손으로 밀어내며 힐데가 툴툴거렸다.

 

그래이제 만날 일도 거의 없을 테고.

 

소원이라는데 뭐한 번쯤이야.

 

 

 

어둠이 드리운 울창한 침엽수림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짜르르 울린다.

 

숲 가운데 공터에 나무로 지지대를 세워 냄비를 건 주한은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스튜를 조금 떠서 맛을 보고 있었다.

 

등 뒤로 구두 소리가 가까워진다.

 

장작은 이 정도면 되겠냐더 도와줄 건 없고?”

 

스승님수고많으셨어요간 좀 봐주실래요?”

 

조금 떨어진 곳에 장작을 쌓아둔 힐데가 다가와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을 건네받았다.

 

맛있긴 한데.

 

조금 싱거운 거 아니냐?”

 

짜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요스승님.”

 

옆에 소금이며 후추 등조미료가 종류별로 다 준비되어 있건만 주한은 손도 뻗지 않았다.

 

그럴 거면 왜 물어봤는데.

 

눈치 없이 기어이 따라왔다고 엿 먹이는 거냐?

 

~. 냄새 좋다.”

 

반대편 공터에서 텐트를 다 친 연화가 걸어왔다.

 

양손에 턱을 괴고 앉은 연화가 힐데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우리 주한 씨가 요리는 참 잘한다니까그쵸스승님?”

 

주한이 요리 솜씨가 좋긴 하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다.”

 

아니왜 또 사족을 덧붙이시는데요제 요리가 뭐 어때서?”

 

딱히 너라고는 안 했는데.

 

그래도 힐데 역시 할 말은 있었다.

 

이참에 확실히 말하겠는데냄비에 보존 식량 때려 넣고 끓이기만 하는 걸 요리라고 부르진 않는다.”

 

작전 나가서 그거 먹는데 옆에 다른 용병들이 우릴 얼마나 불쌍하게 봤는지 기억이나 하려나 몰라.

 

그 이후로 셋이 다닐 때의 식사는 주한이가 다 도맡겠다고 선언했었지.

 

연화는 기가 차는지 입만 벌리고 헛숨을 들이켜다가 간신히 반박할 거리를 찾아냈다.

 

그러는 스승님도 도찐개찐이죠냉장고에서 식재료 꺼내다 늘어놓기만 하는 게 무슨 요리라고!”

 

내 건 그래도 먹을 순 있어.”

 

두 도토리가 서로 내가 크네네가 크네싸우는 걸 들은 주한은 둘 다 똑같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두 쌍의 눈동자가 자길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걸 보곤 황망히 고개만 숙였다.

 

내일 아침으로 승부를 내자며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주한이 다급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 끓었으니까 밥이나 먹죠.”

 

그래서 주한 씨는 누구 편이야!”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연화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주한은 조용히 둘 몫의 스튜를 떠서 내밀었다.

 

그릇을 받으며 숲을 한 번 휘 둘러본다.

 

그나저나 왜 하필 이 숲으로 온 거냐침식지대잖아여기.”

 

정확히는 정화가 끝난 침식지대죠스승님.”

 

주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명목상으로는 침식 오염이 모두 정화되어 인체에 해를 미치지 않는 토양을 정화가 끝났다.’ 말하지만사람인 이상 찝찝함은 남기 마련이다.

 

때문에관리국에서 아무리 안전을 보장하고 도시 차원에서 이주를 장려하더라도 한 번 침식이 진행되었던 땅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만다.

 

그래서 한적하고 좋잖아요?”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주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운터인 세 사람은 물론 워치를 통해 이 근방에는 침식파가 전혀 감지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미신이나 소문 같은 건 그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소용이 없으니까.

 

범죄 조직이나 불량배들이 숨어든다는 얘기도 있긴 하던데저희한테야 뭐.”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

 

기분이 찝찝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기에 힐데도 더 묻지 않았다.

 

사람 발길이 끊긴 지 한참 된 땅.

 

경치 하나는 좋으니 눈이 심심하지도 않고.

 

조용히 수저를 움직이던 연화의 입술 사이로 느릿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셋이서 이러고 있으니 꼭 처음 만난 날 생각나네.”

 

그때.”

 

주한이 피식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힐데를 만나기 이전부터 둘은 용병으로함께 팀을 짜 움직였다.

 

하루는 어느 중소 태스크포스의 의뢰를 받아 다이브 작전을 나갔는데목표 심도를 고의로 속인 회사 측의 과실로 침식체 무리의 습격을 받아 소대가 뿔뿔이 와해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관리국에 구조 요청을 넣고 숨어서 지원을 기다리는데 숲 맞은편에서 침식체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마리의 침식체가 요란스레 울어댄다면 분명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뜻.

 

생존자가 남아있다는 판단에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간 두 사람이 발견한 건 산처럼 쌓인 침식체의 시체 한가운데 선쌍검을 든 은발의 소녀였다.

 

그리고 둘을 본 소녀는 오른손의 검을 겨누며,

 

여기서 죽을지말지 선택하라고 하셨죠분명?”

 

힐데가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아니그건.”

 

난 우릴 그림자로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전 시비 거는 건 줄 알았어요스승님.”

 

키득거리며 놀려대는 둘을 향해 힐데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을 돌렸다.

 

됐고은퇴한 뒤에 뭐 먹고 살지는 정했냐?”

 

으음~. 그게.”

 

주한이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이렇다 할 계획은 없네요모아둔 돈도 많으니까일단 쉬면서 천천히 고민해보려고 했는데.”

 

휴식도 좋지그럼 느긋하게 찾아봐라.”

 

스승님은요저희 떠나고 계속 혼자 활동하려면 번거롭지 않으시겠어요?”

 

글쎄.”

 

그러고 보니 수연이 녀석이 회사를 차렸다고 연락했던데거기나 한번 찾아가 볼까.

 

말리진 않으시네요.”

 

불쑥 내뱉는 주한을 본 힐데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안 말린단 걸까.

 

생각도 없이 은퇴하는 것?

 

물론 아니겠지.

 

너희 선택이니까내가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지.”

 

그래요스승님은 그런 분이셨죠.”

 

왜 은퇴하는지는묻지 않으시네요.”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은 연화도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가 이유를 물어야 하나?”

 

둘을 번갈아 보며 다시 운을 뗐다.

 

그때도 말했지만너희 인생이야너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너흴 존중한다.”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 그릇을 걷은 주한이 커피를 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은 둘 사이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벽공기에 센치 해졌다기에는 평소완 지나치게 다른 모습.

 

할 얘기가 있다면 아마 지금이겠지.

 

역시나 한참을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던 연화가 나지막이 힐데를 불렀다.

 

스승님.”

 

조용히 고개만 들자 시선을 느낀 연화도 눈을 맞춰왔다.

 

두 손을 배 위로 포개며.

 

아이가 생겼어요.”

 

팔짱을 끼고 연화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임신했다고그래서 은퇴한단 건가.

 

잠깐만그럼 아기 밴 몸으로 그동안 이면세계에서 칼질하고 다녔다는 거야뭐 이런 대책 없는 녀석이.

 

아니그보다는 일단.

 

그래축하한다.”

 

두 달 조금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두 달?

 

그럼 임신한 몸으로 다이브를 한 거냐용병 노릇 하던 녀석이 제 몸 귀한 줄을 몰라.”

 

이미 계약이 잡혀있던 걸 어떻게 해요파기하면 위약금 물어내야 하는데스승님이 대신 내줄 것도 아니면서.”

 

됐다.”

 

그깟 돈 몇 푼이 중요한가제 몸이랑 아이가 더 중요하지.

 

이렇게 철이 없다니까.

 

그래서 말인데요스승님스승님께서 이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주셨으면 하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후견인은 무슨남에게 떠넘길 생각 말고 네가 잘 키워야지.”

 

아시잖아요스승님.”

 

연화가 슬피 미소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힐데의 눈빛은 차게 식어만 갔다.

 

결말이 이미 정해진 이 셋의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한 암묵적인 합의를.

 

그 약속을 연화가 먼저 어겼으니까.

 

못 들은 것으로 하마.”

 

점점 절 부르는 목소리가 커져만 가요.”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은퇴하는 이유에는 물론 아이도 있지만그보다는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어져서 그래요스승님께서 그러셨잖아요용혈의 광기는 늦출 수는 있어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고.”

 

힘을 쓸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손을 뻗어온다.

 

목이 탄다.

 

갈증이 치밀어 올라.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용이 되어야 해.

 

맞잡은 그녀의 두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이 피는 유전될 확률이 높다고 하셨잖아요언젠가 제가 미쳐버려서남편으로도 모자라 아이마저 해치게 된다면그러면.”

 

연화야.”

 

아니차라리 그걸로 끝나면 다행이겠죠아이마저도 이 저주에 사로잡혀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면 입에 침이 마르는 것만 같아요그러니 차라리아이만큼은 저희랑 멀리 떨어진 채로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도록스승님께서.”

 

어깨에 와닿는 손길에 연화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은빛 눈동자가 그녀를 올곧게 직시하고 있었다.

 

기억하냐연화야우리가 처음 만나 용혈에 대해 들려준 날네가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용혈의 저주에 대해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하냐며 세상을 향해 울분을 터트리거나.

 

난 죽고 싶지 않다고 울고 불며 매달리는 이도 있었고.

 

또 누군가는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차라리 지금 고통 없이 끝내 달라며 전부 포기하는 한편죽는 순간까지도 그녀를 피해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오직 너희뿐이었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오늘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정해진 운명이라도 발이 닿는 데까지 있는 힘껏 살아갈 거라고.

 

그러니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아라.

 

그래서 너희를 죽이지 않은 거야어쩌면너희라면이 굴레를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연화의 어깨를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 약해지지 마라네 결심이 흔들릴수록 유혹은 커져만 갈 거다.”

 

고행 끝에 신을 만난 신도처럼 연화가 그녀의 가슴팍을 부여잡고 얼굴을 묻었다.

 

앞섶이 눈물로 젖는 걸 느끼며힐데는 말없이 연화의 머리를 안아주었다.

 

살아야지발 닿는 데까지힘껏주한이를 위해서라도네 아이를 위해서라도.”

 

맞은편 나무에는 주한이 컵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와 등을 기대고 있었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던 그의 눈에도 물기가 차올랐다.

 

 

 

불이 꺼진 사무실 안희미한 모니터 불빛에 의지해 문서를 작성하던 힐데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나도 나이를 먹었나.”

 

새벽 감성이라지만야근 하다말고 불쑥 옛 생각이 떠오르는 걸 보니.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숨을 깊이 내쉬는데 별안간 복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둑이나 강도인가아니태스크포스 사무실을 터는 간 큰 도둑이 있을 리 없다.

 

사실 이렇게 추리할 필요도 없겠지만.

 

숨을 생각 말고 나와라주시윤.”

 

희미한 유도등 불빛만이 비추는 복도에서 갓 꼬마 티를 벗은 남자아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걸어 들어왔다.

 

이야보지도 않고 알다니 역시 귀신같으시네요.”

 

여기서 뭐 하고 있었지퇴근 시간은 진즉 지났는데.”

 

시윤이 오른손 검지를 세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야하늘 같은 스승님께서 혼자 남아 일을 하고 계시는데 제자 된 도리로서 어찌 먼저 들어가겠습니까?”

 

일도 안 도와주면서 개소리는 아주 청산유수야그놈의 혓바닥은 매일 기름칠이라도 하나?”

 

화술(話術)도 하나의 무기인데 단련해서 나쁠 것 없지 않겠어요?”

 

저 녀석은 어째 날이 갈수록 뻔뻔해지기만 하나.

 

이 시간에 회사에 남아있던 이유야 뭐뻔하지.

 

수연이야 애가 워낙 덤벙대서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슬슬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시윤의 얼굴이 살짝 굳더니 금방 다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를 떼시겠다?

 

몰래 회사 데이터베이스를 뜯어보고 다니는 거내가 모를 줄 알았나설마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게 네 뒤처리가 완벽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거냐?”

 

걸리지나 말던가어설프기 짝이 없기는.

 

시윤은 정곡을 찔려 헤픈 웃음만 연신 흘렸다.

 

아하하이거 부끄럽네요나름 흔적을 지운다고 하긴 한 건데그나저나 알고 계셨으면 진작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그럼 저도 스승님 귀찮을 일 없도록 더 조심했을 텐데.”

 

호기심에 손댄 거라면 한두 번 건드리고 그만둘 줄 알았지이제 와 보니 그런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문을 등지고 선 시윤을 노려보는 힐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말했을 텐데주시윤네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는.”

 

파헤치지 마라궁금해하지도 마라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나보다 더 강해져서 힘으로 알아내라였죠?”

 

허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시윤의 목소리에 힐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잘 기억하고 있군그새 잊어버렸나 싶었는데 말이지.”

 

어떻게 잊겠어요누가 하신 말씀인데그렇지만요스승님.”

 

사무실을 가로지른 시윤이 책상을 짚고 눈을 맞춰왔다.

 

자식이 자기 부모가 죽은 이유를 궁금해하는 건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손에 쥔 장난감이 위험한지 아닌지 정도는 알 만큼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쥔 장난감이 왜 위험한지 정도는 알아도 될 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같네요하하.”

 

한동안 이어진 눈싸움에서 먼저 시선을 피한 건 힐데였다.

 

알 것 없다.”

 

늘 그렇듯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답변에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실망감과 반항기의구심이 뒤섞여 복잡한 감정이 흘러나왔지만 힐데는 모른 체했다.

 

별안간 방긋하고 입꼬리를 올린 시윤이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번 주말에 시간 되실까요?”

 

그건 왜 묻지?”

 

조만간 제 부모님 기일이기도 한데스승님만 괜찮다면 같이 성묘라도 갈까 해서 말이죠?”

 

주시윤!”

 

노성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시윤은 이미 문까지 멀찍이 떨어진 뒤였다.

 

어이쿠그럼 거절하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휑하니 시윤이 문밖으로 도망치자 사무실 안에는 쌀쌀한 냉기만이 흘렀다.

 

간신히 분을 삭인 힐데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앙다문 입술에서 막말을 씹어뱉었다.

 

지 살리려고 제 부모랑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시키면 좀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지대가리 좀 굵어졌다고 못된 것만 배워선.

 

어렸을 땐 조그마하니 귀여웠는데 걔는 어디로 사라지고 저런 놈이 튀어나왔는지.

 

목 받침에 고개를 기대자 어두운 천장이 눈에 비쳤다.

 

연화 너는 대체 왜 저 녀석을 내게 맡긴 거냐.”

 

자기 부모를 죽인 사람을 순순히 따를 리가 없음에도.

 

당장 지금도 이렇게 삐걱대기만 하는걸앞으로는 얼마나 더 할까.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 그런 거냐?

 

아니면 너희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내가 시윤이를 저버리지는 못할 거란 계산이었느냐?

 

그것도 아니면너희를 죽이러 온 그 순간마저도 너는 나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부탁을 한 걸까.

 

어두운 천장 타일을 보는 두 눈이 깊어만 간다.

 

너무 오래 정을 붙였어적당한 선에서 끊어내야 했는데.

 

관리 실패 이후로 목적을 잃고 헤매던 차에 처음으로 만난 그들이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부끄럽게도 마음이 흔들려버렸다.

 

()은 책임이란 칼날을 무뎌지게 한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오랜 시간을 서성이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검은오두막 속 온기를 쬐며 그 예리함을 잃고 말았다.

 

이대론 나 자신이 무너지고 말 거란 걸 알면서도오랜만에 느끼는 햇빛이 너무나도 따듯해서.

 

조금만 더조금만 더 이 아이들 옆에 머물자.

 

멍청하게도.

 

이래서는 안 된다흔들려선 안 된다.

 

되뇌고 다짐해봐도 머릿속에는 같은 의문만이 맴돈다.

 

너희는너희를 죽인 나를 원망할까.

 

아니면 아직도 나를 스승이라고 생각해줄까.

 

천천히 눈을 감으며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흘린다.

 

어렵다.”

 

그저 언젠가시윤이 앞에 선 내가.

 

약속과 의무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너희가 나를 너무 미워하진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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