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붕이라면 분명히 함선을 먼저 열러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렇잖아. 함선을 열기만 하면 솔레미파시도가 깨어나게 될 거고, 그러면 뭘 어떻게 해도 이 이야기는 끝이다. 지난 번처럼 필사적으로 버틴다 할지라도, 결국 관남충과 누렁이가 이 설원에 오지 않는 이상 솔레미파시도를 이길 수가 없어.


그래서 당연히 그 쪽으로 갔겠거니 했는데…!



”자… 잠깐만! 이, 이봐?… 형제들? 무슨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동굴을 빠져나와 설원. 뒤로 거뭇거뭇한 물체들이 잔뜩 보인다. 피어오르는 불길과 연기. 

한 눈에 알겠네. 저게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의 주둔지. 


그리고 그 앞으로 반원을 그리며 우리를 조준하고 있는 열 댓명의 병사들. 

헬멧의 새빨간 마크에 불이 들어오고, 구관리국 소총의 레이저 포인트가 다닐과 나를 뒤덮고 있다.


"이거... 오해야. 그치?"


다닐은 항복이라며 핸드건을 던지고서 양팔을 들고 항변하지만 우습다는 듯 방패병 하나가 걸어나온다.


도붕이 이 자식이...!




“어? 착각?오해애?"


걸어나와 방패를 눈 밭 위에 박아 넣고서 등 뒤를 가르킨다. 주둔지 근처는 아직도 불길을 잡지 못했는지

설원 위로 불이 번지고, 기분 나쁜 탄내가 검은 연기가 되어 치솟고 있다.




"누가봐도 저 지랄 할 수 있는게 너뿐인데? 안 그래? 다닐게이게이야?"



다닐 이거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그냥 탱크 몇 대 태운게 아닌 것 같은데.

폭발물 관리병이라고 했었으니 뭔가 수를 쓴 건가?

하긴 아까도 무슨 뭐시기 합금 폭발이라면서 무너진 건물 잔해를 불태웠으니까.

뭔가 있는 거겠지.



그보다… 우리보다 먼저 도플갱어 기지에 돌아와 있다니.

도붕이 이 자식, 어떻게 한 거지? 왜 함선쪽으로 안 간거지?




”아니아니아니아니!!! 여기 자기가 발레리라고 한 새끼가 있어! 이거… 이 새끼한테 속은 거라고!”



”…“



다닐은 내 어깨를 붙잡더니 마치 등뒤로 숨는 것처럼 날 내민다. 침을 꿀꺽 삼키고서 나도 양팔을 들어 올린다.

별로 믿음직한 구석은 없다 싶었지만, 곧장 팔아먹네 다닐 이거. 

날 도붕이 대신으로 착각할 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간 놈이지만, 상황 파악은 잘 하네.




나쁜 놈아!




”발레리라고…?“




내 얼굴을 뒤덮고 있던 레이저 포인터 하나가 내려간다.

겨누고 있던 소총을 내리고 나를 노려보는 소총병.

예고르인가?!



“어이 예고르? 어? 발레리는 나야. 저거 저 얼굴을 보라고. 

 부전대장이랑 똑같잖아. 이상하단 생각 안 들어?

 그리고, 다닐 저거 급하니까 막 지어내는…”



도붕이가 방패 위에서 늘어지며 돌아본다. 마치 대장이라도 되는양.

앗차, 하고 아까 다닐 때도 그랬지만. 헬멧을 쓰는 걸 잊어버린 것이 후회된다.

어쩌라고 어디갔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걸.


애초에, 도렉스한테 들킨 시점에서 아무래도 좋았고. 무엇보다 급해서. 생각 못한 게

여기까지 스노우 볼이 구를 줄이야.




”어차피 도플갱어다. 전원 헬멧 아래의 얼굴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누가 발레리인지…“


”아니, 이 자식아?! 어?  그럼 내가 발레리가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예고르는 어느새 도붕이를 지나쳐 우리 앞에 가까워진다. 

내 얼굴을 노려보듯이 빛을 뿜는 9의 숫자. 그 너머의 톱니바퀴가 붉게 비춰진다.

그 뒤로 날 뒤덮어서 눈부시게 만든 포인터들이 하나둘씩 거둬지고 있다.



빠압빠압, 눈길을 걸어오는 도플갱어 예고르.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턱을 치켜들게 된다. 


이… 이건 기회야. 그러고보니 도플갱어 예고르는 지난 번 루프 때도 도붕이가 발레리가 아닌 걸 알아챘잖아. 

그 내분 덕분에 살았어. 여기서 대답을 잘 해서


역으로 도붕이를…




“그, 그래! 예고르! 저건 가짜야! 저 자식이 날 잡아먹으려고 하는 바람에 헬멧이 박살나서…!“


”웃기고 있네, 도플갱어라는 새끼가 뭐? 헬멧?”




















“그딴 거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잖아.”




















"어...?"




뭐?


헬멧을 만들어 낸다고?










"하하, 새끼. 얼빠진 얼굴 봐라."




문득 뇌리를 스치는 것들. 도붕이는 어째서 김승현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분명히 나의 도플갱어일텐데. 지금은 어떻게 다른 모습. 

발레리를 흉내내고 있지? 그리고 다른 얼굴로 바꾼걸까의 답.


그리고,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는 어떻게 20년간 전투하면서 죽는 것 외에 다치는 일도 있었을텐데.

내 기억 속과 지금의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원들의 장비는 깔끔한거지?


설마…


두루뭉실하게 떠오른다.

원본을 따라하는 침식 현상의 일종.

그것 자체가 도플갱어의 전부.


원본을 따라했다면...

원본의 기억 속에 있는 물건… 예를 들면 구관리국 병사의 장구류라던가…

겉모습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건가? 자기 모습마저도?


전부 침식현상의 일종이니까?




”봐! 보라고. 저게 도플갱어냐? 저게 발레리야?!"


“…”


씨발. 씨발.

이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그 때, 도렉스랑 있을 때 이 녀석이 자기 얼굴을 바꾸는 걸 보여줬잖아.

이 두 눈으로 봤는데도 그걸...이제서야 깨닫다니.



“자자자자자자, 잠깐만! 이 새끼가 나쁜 거니까 난 빼주는 거 맞지?! 응??? 형제들. 우리 그 전대장 부전대장 병신년들이 좆같은 거지. 같은 어? 일반인 도플갱어잖아? 응???”



다닐이 나를 밀쳐내고서 앞으로 가 양팔을 흔든다. 

예고르는 그런 다닐을 방해된다는 식으로 밀쳐내고서 걸어온다.



”잠깐, 뭐 하려는건데 예고르? 설마 혼자 처먹으려고?“



그런 예고르를 도붕이가 따라와서 멈춰세운다. 어깨를 붙잡은 그 틈새로 도망 칠 수 있을까. 아니 안 되겠지. 

금새 소총이 날아들거다. 어떻게 하지. 으…



”…일단 우리로썬 판단할 수 없다. 우선은 붙잡은 뒤에 부전대장이 오면…“


”야 그럼 곤란하지. 어차피 기지 저 따구로 터진 이상. 부전대장이 돌아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전대장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게 우리 일이었잖아? 그걸 개판 낸 부전대장을 전대장이 가만 놔둘 거 같아? 그럼 우리는?“


”…“



예고르는 한 참을 멈춰, 도붕이를 바라보고 있다.


도붕이도 그런 예고르를 바라보고 있다. 

둘은 서로의 얼굴에 새겨진 9마크만을 붉게 점등하며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 



"야, 예고르."


“먹자. 우리가 먹어치우자. 응? 그치? 전우들?

 어차피 우린 파리 목숨이야. 여기서 재네들을 먹어치우고, 역으로 부전대장한테 협상을 하자고.”



“뭐…? 야야야야야!!! 발레리 난 그냥 저 새끼한테 속은 것뿐이라니까?!”


다닐이 도붕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지만 도붕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애절한 모습에 예고르의 붉은색 헤드라이트가 끼어든다. 



“협상이라고?”


“어차피 전대장의 계획대로 습격하기만 하면 되잖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하고 넘어 갈 수 있다니까?”


“괜히 귀찮은 일 만들어서 너네 화난 부전대장한테 화풀이로 먹히느니, 

 여기서 다닐이랑 이 정체모를 새끼를 먹어치우자고!“


”내 말 들어. 예고르! 그리고 너네들도! 어차피 부전대장은 우리 못 잘라내. 

 우리가 사고쳤어도, 이 이상 병력을 깎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전대장의 계획에는 우리도 필요하다고!“


어딘가 낯설면서 매우 익숙한 모습.

도붕이 이 새끼… 날 흡수하려고 각을 재고 있다.

죽여버리거나 도렉스가 오게되면 그 기회를 잃어버리니까. 

여기서 조금이라도 나눠먹어서 내 루프를 끝내려고 하고 있어. 그리고 저 방식은 마치…



“이대로 다닐이랑 저걸 그냥 잡아서 갖다주면 부전대장년, 백타 혼자 다 처먹는다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우리가 먹자고!

 지금 팔다리의 재생도 안 되는 자식들, 그 놈들도 있지?

 개네들도 우리가 먹자고.


"이왕, 사고 친 거 더 크게 벌리면 부전대장도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한테 뭐라고 못 한다니까?!”



“야야야야야야야!!! 사, 살려주라. 나 알잖아?! 존재 정보가 그닥 없다니까?

 혀, 형제들?! 전우… 잖아?! 우리?! 응???? 예… 예고르 야야야!!!“



"알 거 아냐? 어? 이대로 우리가 재네 잡아 가봤자 열 불난 전대장한테

 먹히거나, 혹은 부전대장이 우릴 다 먹어치울지 누가 아냐고?

 실제로 그랬잖아? 재생도 안 되는 자식들 여기에 박아 둔 이유가 뭔데?

 우리가 어떻게 20년을 버텼는데?!"



알고 있다. 저 방식.



어차피 게임 좆망한 거 별점 내려야 됨.


결사대결사대 하다가 지금 1273명인데 스비 본사 쳐들어가면 개네도 쫄아서 패치 무름. 


광고 넣으셈.


별점 1점 가즈아


갓겜충이네 ㅋㅋㅋ 스비 직원임?


솔직히 이번 패치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놈들 다 분탕임.


이 상황에서 스비 쉴드 뭐냐?


가만히 대응을 안 하니까 맨날 분탕 치는거임.






“…”



하하, 분탕이네. 분탕의 정석. 자연스레 문제에서 갈라쳐내고 있다.

도플갱어 진영이 어쩔 수 없이 도플갱어 알렉스와 도플갱어 류드밀라를 따르는 건 알고 있으니까.

결국 힘에 의해서, 그리고 원본을 흡수할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서 따르는 거다.

하지만, 그들에게 죽임 당하게 되는 게 확정 된다면 다르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도붕이한테 먹힐 바에얀...


어쩔 수 없다. 눈을 꼭 하고 감는다. 그런 뒤에 나를 둘러 싼 소총병의 반원에서 빠져나갈 곳을 찾는다.

두렵고 무서워. 하지만 저 딴 놈이 바라는대로 움직이게 두는게 더 싫어.


아프지만 여기서 내가 도망치려고 하면 분명히 소총이 날아들겠지.

한 가지 나도 안 게 있어. 도붕이는 항상 나를 흡수하려고 했지 죽이려고 들지 않았다는 거. 


그건 죽어버리면 루프하니까 내 존재를 흡수할 수 없다는 거다.


좋아, 뛰자… 양팔을 서서히 내리고 가능하면… 최대한 화려하게 뛰어서 난사를 맞고 죽는…



”알겠다. 알겠어. 어?! 자 내가 먼저 저 녀석을 흡수할테니까. 너희도…“


“어머,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네? 발레리…?"



그 곳에 끼어든 것은 차가우면서도 다정한 목소리.

주둔지에서 타오르는 검은 연기를 두른 듯, 까만 슈트. 흩날리는 땋은 은발.

눈 사이를 질질 끄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는 플라즈마 대검.


도렉스였다.



보자마자, 나는 안도인지 혹은 더 혼란스러워져서 망했는지 모를 한숨을 흘리고 만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똑같은 걸?



"아..."





아~ 알렉스 젖통 쥐고 아득바득 질싸하고 싶다~


-42


























”씨발… 다 너 때문이야.“


부전대장님이 일단 가둬두고, 너네들 하나씩 불러서 본다니까 가만히 있어.

하고 주둔지 내부에 감옥 같은 곳에 처박아지자마자 다닐은 드러누우며 날 바라보고 있다.

헬멧 아래의 얼굴... 이 있진 않겠지만 안 봐도 훤하다. 입이 삐죽 튀어나와서는 눈을 흘기고 있겠지.

그게 왜 내 탓인데.


애초에 니가 그 발레리, 그러니까 도붕이 한테 속아서 불 지른 탓이잖아.



"아, 진짜. 뭐냐고~"


이제는 누워서, 다리마저 꼬고 나를 보고 있다.

뭐야 이 새끼. 말하는 거랑 행동하는게 완전 다르잖아. 뭐 애초에 대충대충 뭔가

믿음직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응을 잘 할 수 있는건가?


"야, 그래서 넌 뭔데?"


도렉스가 등장하자마자 상황은 엄청 스무스하게 정리 되었다.

도붕이가 뭐라고 따졌던 것 같지만, 우리는 붙잡혀서 여기에 처박히느라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어.

아 그 새끼가 먼저 도렉스한테 이빨 쳤으면 이번 루프는 끝인데.


아냐. 이번 도렉스는 내 얼굴을 봤어. 그 노래도 알려 달라고 했고, 어쩌면 잘 해결 될 거 같기도 하지만

마음이 급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해.

왜 여기에 와 있지? 마치 이럴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야!"


"으악"


발길질에 정신을 차린다.



"그래서 넌 뭐냐고. 발레리야. 뭐야? 왜 부전대장이랑 똑같이 생겼어?"



다닐 이 새끼가.

누워서 발로 내 엉덩이를...?



"발레리라고 했잖아!"


내가 다닐을 향해 소리치자, 다닐이 몸을 일으킨다.


"도플갱어냐고, 뭐냐고!"


"그러니까 내가 도플갱어 발레리..."


"근데 얼굴은 왜 그런데?!"



알게 뭐야

나는 등을 돌린다.



"씨발 나도 모른다고."


"모르는 게 어딨어?"


알기야 한다. 어렴풋이지만. 지난 번 도렉스가 남겨 준 흔적 같은 거다.

가만, 그것도 이상하다. 나한테 흡수 된 거라면 왜 외형까지 바뀌었지? 언제나 고추를 안 보이게 가리던 똥배도, 축 늘어진 젖가슴도 없다. 손도 도라에몽 손이 아니라, 가느다랗잖아.


그 때는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는 일만 계속 일어나서 몰랐지만.

왜...?


"하, 씨발. 부전대장년 나 따먹겠지?"


다닐은 한숨과 함께 드러누으며 한탄처럼 소리를 내뱉는다.

감옥이라고 하지만, 그냥 무너진 건물 잔해 중에 멀쩡한 건물, 그 하나의 방이다.

바깥에 도플갱어 메이즈 전대 병사가 지키고 있는 걸 빼면.

그 탓인지 소리가 웅웅 울리며 왠지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목소리.


"뭐?"


"아까 개네들이 말하는 거 못 들었어?"


다닐은 몸을 일으킨다.

탕탕, 하고 벽을 향해 주먹으로 노크.



"여기 옆에 뭐가 있는지 몰라?"


"...뭐가 있는데."



다닐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쉰 다음에 말을 잇는다.

뭐지 이 자식 왜 아까부터 잘난 척이야? 이름도 안 나오는 엑스트라 주제에.



"우리가 어떻게 버텼게?"


"버티다니?"


뭔 소리야. 도대체.


"원본을 흡수하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존재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도플갱어들이 어떻게

 20년이나 싸웠겠냐고."


그야, 너넨 침식체니까.

침식파에서 힘을...


"전대라고 치기엔 숫자가 좀 많이 부족해보이지 않냐? 기갑전력은 이렇게나 많은데.

 막상 인원수는 적은 거 보면 몰라?"


그러고보니.

숫자가 이상하다. 아니 편제부터 이상해.

이상하게 소총병만 많아.


"옆 방에 있는 놈들. 원본이 비전투병이던가, 다친 놈들이야.

 이제 자기 몸 재생도 못하는 놈들."


"즉, 바퀴벌레를 잡는데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놈들"


설마.



"연료야."



연료...



 "저번에도 그랬지만, 가끔씩 외부에서 인간들이 오거나 하지만 결국 이면세계.

  원본을 흡수 못한 채로 20년이 흘렀다고. 우리는 결국 일시적인 현상.

  결국에는 바스라지고 침식파로 되돌아가겠지."


"운이 좋은거라면, 재네들도 함선 안에 동결 되어있는 탓에 우리가 다른 도플갱어들보다

 명줄이 길긴 하지만, 한계가 있어."



"그래서 전대장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고, 부전대장이 관리해서 모아뒀지."


"너희들이... 살기 위해서... 전대원을..."


"전대원? 뭐래.

 알게 뭐야 그딴 거."



다닐은 다시 몸을 뉘인다. 손가락으로 베개를 만든 뒤에 늘어진다.




"어차피 우린 원본의 기억을 전부 다 가지고 있지 않아.

 전대원이니 뭐니 하는 결과만 가지고 있잖아. 추억이나 사건이 빠지고 전대원이라는 이름만

 남아봐야 그게 와 닿겠어?"



아, 하고 머리 속에서 몇 개가 맞춰져 돌아간다.

도렉스는 살고 싶다고 했다. 

잊혀지는게, 아무렇지 스러지는게 무섭다고 했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뭘 희생해도 좋다고 했다.


원본과 똑 닮은 소망.

하지만 뒤틀려있고, 애정과 희생이 없다.


결과만이 있으니까.


원본과 똑 닮았지만, 원본이 아니기에 원본을 증오하고.

원본이 아니니까, 다른 길을 고를 수 밖에 없다.

붕 뜬 관계성. 붕 뜬 기억. 붕 뜬 가치관. 당연히 뒤틀릴 수 밖에.

그걸 지탱하는 추억과 기억, 사건이 없으니 당연히 전부 거짓말일 수 밖에.

그러니까 이런 짓을 태연히...


"하나도 모르는 걸 봐서는 너 도플갱어 아니지?"


"..."


"그래. 난 도플갱어가 아니야."


나는 홀린듯이 입을 연다.

하지만 딱히 숨긴다고 달라지는게 없다는 걸 알아서이기도 하다.

그야, 도붕이를 맞딱드린 시점에서 거짓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으니까.



"아, 씨발. 진짜?! 아 씨발. 좆됐네. 하... 조졌구만."


자기가 아니지라고 반쯤 확신 가진채로 말 해놓고 반응이 왜 저래.

드러누운 다닐은 천장을 향한 몸을 내게 돌린다.



"난 먹힐 거고, 너도 뭐..."


"그런 점에서는 형제로구만."


"앞으로 잘 따먹혀 보자고 친구."


"서로 신세 조진 점은 똑같네. 푸하하하"



웃을 일이야? 라고 받아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애초에 따먹힌다는 표현 쓰지 말라고. 도플갱어지만 니가 알렉스랑 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고.

그리고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나한테는 루프가 있어. 도붕이한테 먹히지만 않으면 오히려 이건 기회야.



"..."


"야, 사람이 농담을 하면 좀 반응을 해. 어?"



그래서 무시라는 반응 했잖아.




"그나저나, 너 진짜 뭐야? 이렇게 봐도 도플갱어 같은 기운이 나오는데.

 도플갱어는 아냐. 그렇다고 카운터 같지도 않아. 침식체도 아니고...

 오히려 약간 친해지고 싶은 기운 비스무리한 것도 나고."



친해지긴 뭐가 이 자식아.


...



아 그러네.

그러고보니 이상하게 '그게' 잘 먹혔지.


지난 번에도 됐으니까...





"후후... 후후후..."


"뭔데? 왜 웃어?"


"그 말대로. 나는 마왕. 타기리온의 사도. 솔라미파시도의 전령이다."







"..."


"..."



"..."



"..."




새빨간 톱니바퀴 안의 숫자 9만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뭐야...




"..."



말을 해. 이 자식아. 뭐라고 반응이라도 하라고.




"조졌구만."


"진짜라니까?!"


"거, 딴데 가서 영업하쇼. 뭐? 니가 마왕의 사도. 그 수하라고?

난 전대장이 뭐냐, 그거 만났다는 것도 미친 줄 알았는데. 아이고 잘도 수하가

 이렇게 잡혀있네."



"전령이야! 전령이라고! 힘이 없다고!"



"아. 예."




이 새끼 은근히 엄청 사람 빡 돌게 하네.

니가 이러면 지난번에 믿은 도렉스나 다른 도플갱어들은 뭐가 되냐고.



"그래서, 그 잘난 사도의 수하님. 제가 원본을 흡수 할 수 있을까요?"



다닐은 몸을 돌려서, 벽면을 향해서 눕는다.



"이 쪽 보고 말하라고!"



아, 열 받네. 이 자식.



"그 쪽 봐봤자. 좆같은 부전대장 얼굴밖에 없어서 싫네요."



뭐 이 새끼야?!

알렉스 얼굴이면 얼마나 좋아. 난 알렉스 얼굴로 하루에 5번이나 뽑았다고.

머리칼 색이나 좀, 그 여성적인 부분이 빠져서 남자스러운 느낌이 적잖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알렉스 와꾸를 모욕하는 건 못 참아!


알렉스는 공격하는 건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




"어이."




캉, 하고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흠칫하고 어깨를 떤다.

철문 너머의 병사가 소총을 들고 문을 연다.




"부전대장님이 부른다."



도렉스가?

고개를 돌리니 다닐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고 있다.

나는? 하고 물어보는 듯한 제스쳐. 그걸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는 한 손으로 휙 내저어서 쳐낸다.



"왜?!"



하고 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는 다닐.

꼴 좋다. 이 새끼야.


좋아, 날 불렀다는 건 대충 짐작이 가.

도붕이와 나. 그리고 얼굴.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거겠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를 향한 소총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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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의 성격은 원래도 오락가락했지만

지난 화를 기점으로 달라진 게 아닙니다.


다분히 오래 전부터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당신은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