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죽은 발레리가 나옵니다.

※ 개달달한 미래의 이야기가 보고 싶으면 이쪽으로.




                                                                                        



"혼자 살 때 가장 서글픈게 뭔지 알아?


덜컥 아프게 됐는데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홀로 그 아픔의 시간을 고독하게 이겨내야 하는 거.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라는 생각마저 들게 되거든."



                                                                                        








"......으...."



의식이 돌아온다. 서서히 눈이 떠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지끈거리는 두통에 크리스는 잔뜩 표정을 찡그렸다.


굉장히 독한 감기에 걸린지 어느덧 이틀 차.


솟구치는 열과 극심한 피로감 때문에 몸에 힘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카운터인 크리스는 어지간한 질병에 면역이었겠지만, 그것이 독감과 같은 지독한 질병으로부터도 안전을 보장해주진 않았다.


몸살에 겹쳐 방금 전까지 악몽을 꾼 터라 지금 크리스의 기분은 최저점을 찍다 못해 바닥을 뚫고 내려간 상태였다.


악몽이라 해봐야 전장의 참상을 리와인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성이 들리고, 살려달라며 울부짖고,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튀기는, 그런 생지옥 속에서 혼자만 살아남는 부류의 꿈.


떠올리기만 해도 역겨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거기에 몸살로 인한 현기증이 얽히며 몸을 갉아먹었다.



"물...."



물이라도 마셔보려고 물잔을 찾았지만, 간밤 사이에 다 마셔버렸는지 침대 맡에 올려놓은 물잔은 텅 비어 있다.


어쩔 수 없지. 냉장고는 침대 맞은편 저 너머에 있으니, 힘들더라도 가져오는 수밖에.


크리스는 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흐, 으....."



힘겹게 침대로부터 일어났지만 크리스의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천천히 냉장고를 향해 현기증을 참으며 걸어나간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흡사 용광로에서 뜨겁게 달군 철덩이를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냉장고 쪽으로 걸어갈수록 크리스의 등골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콰당탕-!



"아윽... 아야야...."



불안감이 느껴진 직후, 크리스의 몸이 붕 뜨더니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지고 말았다.


아무래도 어질러진 물건 같은 것에 걸려 넘어졌나보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걸음걸이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 수월하게 일어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기껏해야 몸을 똑바로 눕히는 것이 전부.


바닥의 한기가 직접적으로 엄습해오자 안그래도 아픔으로 덜덜 떨리는 몸이 더 심하게 요동쳤다.



"...하...."



아파 죽겠는데,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이 방에는 나 혼자. 그야말로 좌절스러운 분위기였다.


병문안 좀 와달라고 연락을 하고 싶어도 크리스의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는 없다시피 했다.


사람과 엮일 여지를 만들지 않고 거리를 두려 하는 그녀의 성격 탓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어둠과 몸살기운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냥 서러워서, 크리스의 눈에 한 방울 눈물이 고인다.



"상상친구 씨.... 저....."



아니다.


그만하자.


방 안의 음울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항상 그랬듯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잖아.


아무리 불러도, 외쳐도, 언제나 혼자였으니까.



"아.... 하으....."



상상 친구를 제아무리 찾아도, 결국 언제나와 같이 스스로 이겨내야만 했다.


줄곧 그래왔다.


오빠 대신 군에 징집될 때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에도.


전장에서 사람을 아무리 구해내도 나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독한 감기로 골골대고 있는 지금도.



"....상상 친구, 씨... 저... 진짜 힘들어요.... 저..."




눈물이 흘러나와 크리스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이대로 차가운 바닥에 널브러진 채, 울다가 다시 힘이 생기면 일어나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축 쳐져있을 때-





끼익-




"아."


"어?"



눈물젖은 눈으로 상상친구를 힘겹게 부르짖던 소녀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방패병 한 명과 시선이 맞았다.


그대로 세계가 적막함 가운데 멈춰버렸다.


오로지 크리스의 심장 소리만이 방을 고요하게 울려댔다.


크나큰 당혹감에 어찌 할 줄도 모른 채로,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ㅈ됐구나.















"그랬었군요. 알렉스 씨가 보내서 오셨구나..."


"본의 아니게 놀래켜드린 점.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콜록, 콜록!"



말을 하다 말고 크리스는 갑자기 몰려온 기침에 골골거렸다.


하으. 하고 힘겨운 한숨이 내쉬어졌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많이 나쁘신거 같군요."


"카운터니까, 웬만해선 안걸리는데.... 보시다시피."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는 아픔이 역력한 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오후 2시를 가리켰다. 증상을 보아하니 아직 끼니도 제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다.


약을 먹어야 좀 나아질텐데, 약조차 먹지 않았겠지.



"밥은? 드셨나요?"



도리도리. 하고 크리스는 고개를 흔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발레리는 함께 들고 온 쇼핑백에서 보온용기를 꺼냈다.



"그건...?"


"죽이요. 오는 길에 사온겁니다. 드실 수 있겠어요?"



크리스는 발레리의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쌀을 끓여서 수프처럼 만든 음식이었던가.


발레리의 말에 따르면 그라운드원에서는 아픈 사람들이 즐겨 찾는 메뉴라 했다.


한번도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감기 걸린 사람을 찾아와서 못 먹을 음식을 줄 리는 없겠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발레리는 크리스의 등 뒤로 손을 넣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적잖게 아픈 모양인지 땀에 젖은 옷자락이 손에 만져졌다.


그리고는 숟가락을 크리스에게 쥐여주고 죽이 담긴 용기의 뚜껑을 열어 건넸다.



"....으읏..."



크리스는 숟가락을 들어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숟가락을 잡은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숟가락질을 해보려는 시도도 어언 세번째. 그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


어쩔 수 없지.


잠자코 있던 발레리는 손을 내밀어 크리스에게서 숟가락과 죽이 담긴 용기를 받아들었다.



"아. 하세요."


"에....?"



얼빠진 소리를 내는 크리스에게 발레리는 죽을 숟가락에 떠서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자. 아~"


"아, 아....?"



크리스는 숟가락을 머금고는 죽을 오물오물거렸다.



"....!!"



맛있다.


시종일관 찌푸려져 있던 크리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확 바뀌었다.


꿀꺽. 하고 삼키자 담백한 맛이 입 안에 퍼지며 몸이 따뜻해진다.


온도도 먹기에 딱 알맞았는지 물을 삼키듯 부드럽게 넘어갔다.


군에 있을 적 아침식사로 먹었던 오트밀 전투식량과 비슷했지만, 그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기운만 좀 있었다면 바로 달려들어 허겁지겁 먹었을 텐데.


팔을 움직일 기운조차 없다는 것이 원통할 따름이었다.



"......."



삼키고 나서 크리스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와도 같이 물끄러미 죽을 바라봤다.


더 먹고 싶은데, 뭔가 묘한 상황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발레리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피한다.


그런 귀여운 모습을 발레리는 그냥 좌시하지 않고 잡아챘다.



"더 먹을래요?"



끄덕끄덕.


별안간 크리스의 눈빛이 번쩍 하고 빛난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기대감에 찬 눈으로 아무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이자, 발레리는 다시 죽을 한 숟갈 퍼서 크리스에게 가져갔다.


다시 죽을 입에 머금었다. 입에 감도는 맛에 크리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또 다시 한 입. 먹으면 먹을수록 크리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무리하지 않도록 씹는 속도에 맞춰 발레리는 죽을 떠서 먹여줬다.


오물거리는 작은 입으로 열심히 죽을 먹는 모습이 발레리에게는 마치 작은 동물처럼 보였다.


이래서 부전대장님이 크리스를 래서판다라고 불렀구나. 발레리는 다시금 그 호칭이 붙은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배가 생각보다 많이 고팠던 것인지 크리스는 몸살기운을 안고 있음에도 용기에 담긴 죽을 절반이나 먹었다.



"다 드셨나요?"



다시 끄덕끄덕.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슬쩍 피한다.



"네. 그..... 맛있었어요."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서 발레리로 하여금 웃음을 띄게 만들었다.


쓰고 있는 헬멧의 바이저 부분에 드러난 9 숫자가 웃음짓는 눈 모양으로 바뀌었다.



"다행입니다. 입맛에 안맞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했었는데."


"웃고 계신 거에요?"


"아. 네. 구관리국 전투복에는 착용자의 감정을 표시하는 기능도 있답니다. 시종일관 헬멧만 쓰고 다니면 삭막해지니까요."


"아.... 아하하...."



새삼 참 신기한 전투복이구나 싶어 크리스는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발레리의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건 그녀도 처음이었다.


바이저에 이모티콘마냥 웃는 눈 하나가 드러나 있는 것이 언틋 보니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약. 드셔야죠?"


"아 맞다. 약 저기 서랍장에 보시면...."


"그것도 하나 사왔습니다."



발레리는 준비해뒀던 감기약과 물컵을 내밀었다.


몸 관리도 못하는 어수룩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냥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할까.


크리스는 발레리에게서 감기약을 받아 입 안에 넣고 물을 마셔 삼켰다.



"발레리 씨도 참. 아무리 제가 아파도 상비약 챙겨놓는 정도는 할 줄 안다구요?"


"혹시나 했습니다. 아, 아니 물론 크리스 중사님을 약도 못챙기는 사람으로 본건 결단코...."


"알고 있어요. 걱정해주신 거겠죠 뭐."



허기를 채우고 약까지 먹은 덕분일까. 크리스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는 확실히 밝아져 있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던 아까 전과는 달리 몸에 힘도 어느정도 돌아왔는지, 아픔으로 떨던 증상도 이젠 찾아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의 풋풋한 모습이 점점 적막함을 몰아낸다.


음울한 어둠에 가려져 있던 방의 분위기도 사람의 온기가 스며들며 따뜻해져갔다.



---------------------------------------------


크리스가 아프면 어떨까 싶어서 예전에 썼던 연애글 과거 시점 뇌절로 써봄


크리스떃 사랑해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