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죽은 발레리가 나옵니다.

※ 피폐요소 있음

※ 그냥 개달달한게 보고 싶으면 이쪽으로.





                                                                                        



"아아. 누가 품어줄 수 있을까.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가진 나머지


그로 인해 고통에 찌들은 이 망가진 마음을."



                                                                                        




1편






식사 시간이 일단락되자 잠시 방 안에 침묵이 자리했다.


발레리가 그릇을 정리하느라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곤 크리스도, 발레리도, 아무도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크리스가 입을 열었다.



"....발레리 씨."


"네?"


"아까 보셨던 그건..... 그, 이상하게 보이셨겠지만요. 그게, 그러니까...."



내가 상상 친구를 찾는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먼저 말을 꺼낸 용기가 무색할 정도로 크리스는 주저하고 있었다.


이뤄지지 않은 말의 응어리들이 목울대에서 울렁거린다.


단순한 망설임은 아니었다.


상상 친구라는건 크리스가 살기 위해 절박하게 매달려왔던 상처였다.


단 한번도 말해본 적 없는 주제였고, 타인 앞에서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속된 말로 정신병의 영역. 그런걸 쉽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입을 떼려고 할 때마다 마음 속 상처가 벌어져서 울컥울컥 피를 토해낸다.


생각을 담는 것조차 괴로워서, 마음 속의 거대한 돌에 짓눌린 것처럼 크리스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



발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바이저 쪽으로 가져가 버튼을 눌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줄곧 쓰고 있던 헬멧이 벗겨졌다.


헬멧 너머로부터 은발의 머리칼과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메이즈 전대의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헬멧 너머의 얼굴에 크리스는 아연실색했다.



"발레리 씨...? 지금 무슨-"


"말 안하셔도 됩니다. 지금은."



검은 눈동자가 지긋이 황갈색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은근슬쩍 눈을 피하는 크리스와는 달리 발레리는 눈을 피하지 않고 크리스를 바라봤다.



"왜 저희가 항상 헬멧을 쓰고 다니는지 아십니까?"


"......"


"저희가 클론이라서입니다. 다 똑같이 생겼거든요."


"클론....이요?"


"클론들은 보통 사람들과 달리 그 존재에 구분이 없습니다. 애초에 그런걸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그저 목적만을 위해 존재할 뿐."



헬멧을 벗고 대뜸 꺼낸 이야기는 클론에 대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발레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크리스는 발레리가 '저희' 라고 지칭한 것에서 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전대장님께선 저희들에게도 하나씩 이름을 붙혀줘 구분하시곤 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별할 순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뚜껑을 까고 보면 어차피 전부 똑같이 생긴 녀석들이니까요. 발레리도, 이반도, 세묘노프도, 그레고리도.


그게 저희가 헬멧을 벗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름을 받았다 한들, 그 역시 헬멧을 벗으면 클론이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의미가 없어지니까."


"......"


"말하고 있는 지금도 이렇게 헬멧 벗는게 영 내키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전 제 외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을 내리지 못했어요.


이런 고민, 어디가서 쉽게 털어놓을 만한 주제는 아니죠."


"왜 이런 얘기를.... 해주세요?"



발레리는 소탈하게 웃어보였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하나 쯤 있잖아요. 그냥 그렇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크리스 중사님께서 무슨 비밀을 품고 있건, 너무 무거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으셨으면 해서."


"비밀.... 이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자 크리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비밀을 품고 있건?


비밀이라는 말과 함께 아까 꿨던 악몽이 뱀처럼 스멀스멀 크리스의 몸을 타고 오른다.


포탄구멍에 고여있는 빗물이 보인다. 땅에 널브러진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총알과 포탄이 터지는 소리, 타들어가는 소리, 사람의 비명소리, 삶을 갈구하는 소리,


'비밀' 속 세계에 갇혀 있던 죽음의 소리가. 들려오고 또 들려온다.



"우읍....!! 우으윽...."


"중사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크리스는 심한 메스꺼움과 함께 갑자기 구토를 쏟아냈다.


발레리는 재빨리 죽을 싸들고 왔던 봉투를 펼쳐 크리스가 토해내는 것을 받아냈다.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번 등을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크리스에게 발레리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헉.... 허억.... 웁...!"



비밀. 악몽. 전쟁. 지옥.


이런 소리들의 틈바구니에서 구더기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악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그 꽁꽁 숨겨야 겨우 견딜 수 있던 참혹한 경험들이,


단순히 '비밀' 정도로 가볍게 가릴 수 없는 상처자국들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세계를 덧씌우고 크리스의 눈을 가린다.



"중사님....?"




.....





....에?


어라?


눈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이야.


이게 누구에요?


항상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세상 모든 것이 차갑게 굴어도 언제나 같이 있어줬던.


아아.


거기 있었군요.


상상 친구 씨.


아깐 그렇게 찾아 헤멨었는데 이제 모습을 드러내주는 건가요?


상상 친구 씨.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한다고요?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요?


저. 처음으로 상상 친구 씨에게 실망할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죽음의 순간들을 지켜봤는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떠내려 보냈는지,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그 지옥같은 죽음의 수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쳤는지.


다 알면서. 다 같이 봐왔으면서. 그 모든 것들을 그저 '비밀' 정도로 치부한다고?


무거워하지 말아달라고?


그건 절 기만하는 말이잖아요.


당신이 이럴 순 없어요. 이래선 안되는 거에요.


항상 나와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위급할 때마다 내 말동무가 되어줬던 당신이기에, 더욱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는 거잖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시간들을 갖고 그렇게 어줍잖게 기만이나 할거면, 어정쩡한 선의로 다가올거면,



......



.........





"아뇨..... 그런 말 할 바엔 그냥, 모른체 해주세요. 모른체하면... 되는거잖아요...? 상상 친구 씨? 그냥 나만 힘든거 뿐인데?"


"....네?"



아무리 당신이라도 차라리 오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독기를 담아 억지로 쥐어 짜내듯이 쏟아붓는다.



"같이 고민하는 처지니까, 라고요? 그렇게 자기 치부 털어놓는다고 해서 뭔가 바뀔 거였으면....


제가 이렇게 상상 친구 씨 불러가면서 아득바득 버틸 일도 없었겠죠."


"중사님."


"망가진 사람 둘이 붙여놔봤자, 그건 망가진 사람 둘일 뿐이에요.


상처난 이들끼리 서로 핥아줘봤자, 한순간의 위안에 불과하단걸... 왜 모르는 걸까요? 항상 내 곁에 있었으면서."


"크리스 중사님."


"그러니까 그냥 뻔뻔하게 모른체 해주실래요. 아무것도 안봤다는 듯, 애초에 모르는 사이인 듯.


이런 망가지고 헤져버린 꼬맹이한테 괜히 주제 넘게 관심 갖지 마시고. 이전처럼 제 말만 그냥-"



엇나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저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정처없는 눈을 하고,


정제되지 않은 말들을 그저 되는대로 마구 토해낸다.


마음이 피를 쏟으며, 주인과 함께 연신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그냥.... 그냥.....?!!"



에?


잠깐만.


내가 지금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거야?


그걸 알아챈 순간, 눈 앞의 사람 형상에 노이즈가 꼈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 에.....?!"



눈 앞에 있는건 상상 친구 같은게 아니었다. 발레리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알아채자 가시돋힌 말은 갈 곳 잃은 배처럼 정처없이 떠돌았다.



"에.... 죄, 죄송해요....! 그러니까 이건, 그...."



이미 엎질러진 물에 크리스는 말도 제대로 이어가질 못했다.


어찌나 크게 당황했는지, 나아졌던 몸살기운이 다시 도지는 듯 했다. 현기증까지 나니 사실상 제정신으로 있기 힘들었다.


마음 속은 자신이 저질러버린 최악의 실수로 인해 유래없는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사람이랑 대화하는 와중에 상대를 상상 친구로 착각해서 횡설수설하다니. 진짜 제정신이야? 크리스?


그것도 상상 친구 찾다가 걸린걸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던 와중에 그 상대를 상상 친구로 착각하다니.


미친게 분명했다. 어떻게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대체 어떻게? 그냥 정신병에 걸려 있어서 그런다고 둘러대야 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마음 속을 진흙탕처럼 어지럽힌다. 과중해진 생각의 부담으로 아픈 몸이 덜덜 떨린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꼬옥-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크리스의 자그마한 어깨를 발레리는 양 팔로 잡았다.


두 갈래의 굳센 따스함이 떨리는 크리스의 몸을 부드럽지만 단단하게 붙들었다.


차마 안아주는 것은 겁이 많아서 할 수 없었고 어깨를 잡는게 최선이었다.


시선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던 소녀는 그제서야 발레리를 다시 바라봤다.


다시 마주한 소녀의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로 말한건 아니었는데."



자신이 경솔했다. 발레리의 얼굴에 미안한 감정과 숙연함이 자리했다.


그저 속마음을 먼저 털어놓으면 상대도 함께 털어놓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 가벼운 생각이 트리거가 되어 크리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았다. 너무나 경솔한 행동이었다.



"중사님이 살아온 시간을 과소평가하는건 아니었습니다. 힘이 되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제가 지나쳤어요."


".....네?"



크리스는 때 아닌 사과에 당황하며 발레리를 쳐다봤다.


아니야. 사과해야 하는건 난데.


왜 당신이 사과하고 있는거야.



"하지만 모른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힘들다고. 망가졌다고."


".....!!"


"그렇게 힘들다고 말을 하는데, 그걸 어떻게 모른체 하고 넘깁니까?"



어깨를 잡은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덩이 같은 몸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열기와는 다른 따스함이 떨리던 몸을 잦아들게 한다.



".....저는, 그치만...."


"전 중사님이 상상 친구를 찾건, 어느 날의 시간에 갇혀 밤마다 횡설수설하건,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지쳤다고,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그건 절대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 게요...? 발레리 씨가 뭔데요....? 그게 될 리가-"


"전 대단한 힘도, 카운터 능력도 뭣 하나 없는, 그냥 평범한 방패병이지만... 얘기를 들어줄 수는 있거든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발레리도 모른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힘이 되어줄 수는 있다.


전우들을 위해 방패를 들어올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겁쟁이는,


눈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아까 중사님 말대로, 단지 얘기를 나누고 털어놓는 것만으론 아무것도 안바뀔지도 모릅니다. 나눈다고 해서 그 상처가 바로 낫지도 않겠죠.


하지만 얘기하는게 상처를 치료해주진 않아도 가볍게 만들수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음에 싸매고 있는 무거운 기억들을 누군가가 옆에서 들어주고 힘이 되어준다면, 점점 숨통이 트일 수도 있으니까."


"......"



인간은 나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끼리끼리 모여 서로를 위하는 것으로 약함을 보강한다.


그것이 설령 순간의 위안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사람이 숨을 돌리고 회복하는건 충분히 가능하다.


나아갈 수 있게 서로의 힘이 되어줄 것. 발레리가 메이즈 전대에서 지내며 배운 것이었다.



"들어주는 것. 그것이 제가 클론으로 태어나서 배운 '인간다움' 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거산과도 같은 눈동자가 두려움에 흔들리는 눈동자를 담았다.


부디. 입에 담은 말이 그녀에게 힘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기를.


또한 자신이 배운 것이 그녀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이만 말을 마무리짓는다.


다시 방에는 적막감이 자리했다.




-------------------------------------------------------------


피폐요소는 처음 다뤄봐갖고 좀 뇌절같이 느껴질 수도 있음.


크리스떃 애껴줘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