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창작물에는 서브스트림 "크로스로드" 와 "데드 엔드 로드"의 스포일러가 강하게 포함되었기 때문에 아직 해당 외전을 보지 못했다면 조용히 뒤로가기 누르면 됨. 물론 본인이 스포당해도 상관없으면 뭐...


캐릭터랑 캐릭터를 엮는 소설이므로 그게 껄끄러우면 역시 뒤로가기를 누를 것.



*시간은 Ep 10 이후로 대충 설정해두었음...


상편:  카린X제이크 "다시 만난다면, 그 때는..." -상- - 카운터사이드 채널 (arc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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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군. 내가 관리국을 세운 관리자일세. 그리고 자네들이 지난번에 본 주시윤 군과 힐데 소대장의 사장이기도 하지."


침식체 무리를 퇴치한 뒤 돌아온 패스파인더 인원들을 맞이한 사람은 그들이 그토록 찾아헤맸던 관리국을 직접 설립했다는 관리자였다. 당초 이렇게까지 높은 인물을 직접 맞이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높은 사람일수록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확률이 높았으므로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높으신 분 치고는 굉장히 젊어 보였지만...이곳도 안토노프처럼 텔로미어를 조작했을 수도 있으니 카린은 구태여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다른 세계에서 델타 세븐의 일원을 맡은 카린 웡이에요. 여기는 레베카 카트린느와 주시영 양. 둘 다 제 선원들입니다."


"음...전에 저랑 만났던 저랑 똑 닮은 오빠? 동생? 은 같이 안 왔나요?"


"아쉽지만 주시윤 군과 힐데 소대장은 일이 있어 출장 중이라 말이지. 오늘 방문한 것은 나 혼자라네."


"아쉽네요~ 이것저것 묻고싶은게 많았는데."


"뭐, 그건 그렇고...일단 자네들 전부 이것들을 하나씩 착용하는게 좋겠군."


그가 건넨 물건은 마치 카운터 워치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무언가였다. 아이기스에서도 딱히 보지 못한것으로 보아 관리국이라는 기관에서 개발한 물건인 것 같았다.


"이건...뭐죠?"


"별 건 아니고, 자네들이 몇 시간 이내로 양자단위로 분해되는걸 막아주는 그런 물건이라고 보면 되네."


"...! 뭐라구요? 그런 걸 대체 어떻게...!"


"고마워요~이제 앞으로 목숨이 몇 시간 남았는지 세지 않아도 되겠네요."


"운이 좋네! 뭐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죽는 건 사양이었는데."


"비 카운터들이 쓰는 이터니움 실드를 조금 개조하고 다른 부품을 이것저것 적당히 섞어서 만들었지. 아, 워치처럼 주기적으로 이터니움을 넣어줘야 정상적으로 기능하니 유념해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네들 세계의 기술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놀란 것은 알겠다만...나와 하고싶은 이야기는 그게 끝인가? 양자 붕괴를 막아주는 조그만 기계에 대해서 토론하는 게? 운에 몸을 맡기고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지 않나 싶은데."


카린은 싱긋 웃는 얼굴의 남자를 보자 짜증이 치밀었다. 속에 뱀을 100마리 정도는 키우는 것 같은 능구렁이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일을 위해 참고 넘기기로 했다.


"...맞아요. 저희는...멸망해가는 저희 세계를 도울 방법을 찾고있어요. 이곳이랑 다르게 저희는 불행히도 관리국이라는 기관 따위는 없었거든요. 들어보니 이곳은 6종 이상의 침식체가 침략해왔어도 결국 이겨냈다고 들었어요. 저희 세계를...구할 방법을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첫인상과는 별개로, 눈앞의 남성이 가진 능력 자체는 진짜였다. 무려 6종 이상의 침식체와 맞붙어 무사히 세계를 지켜내고, 양자 붕괴조차 간단히 막아내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의 수장이라면 분명...


"...안타깝지만, 지금의 내게 자네들을 도울 방법은 딱히 없다네."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있어야 하는데.


"...그런...6종 침식체도 물리치고, 양자 붕괴도 막아내는데, 고작 저희 세계 하나 못 돕는다고요? 4종 침식체 정도라면,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지 않나요?"


"그래, 자네들의 세계에 큰 위협이었다던 4종 침식체 정도라면 물리칠 무기 몇 개를 넘겨주거나 할 수는 있겠지. 근데, 정말 그걸로 멸망을 막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최소한 힘을 기르고 나서 생각해야죠! 일단 그것들을 척결하고 나면, 그러면..."


그녀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와 안토노프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안토노프는 본인들의 기술력을 관리국이라는 기관이 있는 세계로 전해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위해 관리국의 도움을 받으러 왔으니까. 안토노프라면 그녀의 임무는 완수되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저 시작점에 섰을 뿐이었다.


"그래, 뭐 어찌저찌 자네들의 세계에 퍼져있다는 네피림의 알들을 모조리 해치웠다고 생각해보지. 정말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나? 내 예상이 맞다면, 그때 그 네피림을 처치했다고 자네들 세계가 지금껏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나?"


"......"


"이봐, 관리자인지 나발인지...말을 꽤나 띠껍게 하네?"


"하하, 기껏 찾아왔더니 하는 말이 어차피 망했으니 포기하라니, 시간 낭비였네요~ 카린 양, 돌아가죠."


"그래, 아마 더 강력한 무언가가 위협해왔겠지. 그 모든 물리적 위협을 물리친다해도 마찬가지네. 침식으로 오염되는 땅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테고, 공간, 식량, 자원, 에너지...모든게 부족하겠지. 당장 네피림들을 절멸시킨다 한들, 나한테도 이미 침식으로 망가진 토양이나 해양을 되돌리는 방법 따위는 없네. 설령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봤자, 자네들 세계는 멸망을 피하는 것이 아닌 그저 조금 더 천천히 멸망하게 될 뿐이겠지."


"...그러면, 그냥 죽으라고요?"


카린이 입술을 짓씹었다. 또, 또 실패라니. 델타 세븐 대원들을 희생하고, 방위군들을 희생하고, 끝내 제이크까지 희생시키고 심지어는 다른 세상에서 온 안토노프까지 희생시켰음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그 안토노프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한 관리국의 가장 높은 이마저 포기를 종용한다면, 도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마치 사형 선고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 당장 그 네피림들을 싹 청소한들, 잠시 연명할 시간을 버는 것 뿐이라는 것도. 그걸 해결해도 모자라는 것 투성이고, 그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도. 그런데 어쩌라고요? 당신도 똑같이 말할 셈인가요? 어차피 저희 세계는 끝났다고, 차라리 여기서 새 삶이나 살라고. 우리 가족, 친구, 동료들은 다 거기서 죽어가는 중인데! 막다른 길이라도, 방법이 없어도, 저희는 나아가야만 한다고요!"


카린이 씩씩대며 쏘아붙였다. 화를 낸 건 그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눈에는 점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레베카는 대놓고 으르렁대는 중이었고, 주시영도 웃음을 지우고 날카롭게 관리자를 째려보았다.


"벽을 향해 무작정 나아가봤자 벽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네. 그저 부딫혀서 넘어질 뿐이지."


"이봐요, 당신-"


"뚫린 입이라고-"


"그러니, 무작정 들이받는게 아니라 방법을 찾아야지. 벽을 우회하든, 망치로 때려부수든."


그렇게 말하며 관리자는 싱긋 웃었다. 한순간 얼이 빠진 세 명은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정말로 그냥 아무런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나? 그럴 거였으면 구태여 비싼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가며 여기 오지도 않았네. 다만 나에게도 갑자기 마법처럼 자네들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방도는 없다는 말이었지."


카린이 여전히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 동안, 레베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쳐댔고, 주시영은 악취미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직접적으로 도와주긴 쉽지 않네. 몇몇 테크 레벨 4, 5 장비를 나눠줄 수는 있겠지만...함부로 그런 것들을 풀어줘봤자 침식률을 끌어올릴 뿐, 별다른 도움은 안 되겠지. 자네들 세계에 저기 워커 대령처럼 고등급 장비를 마음껏 활용할만한 강력한 카운터가 그리 많지도 않을테고.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건...일방적인 도움이 아닌, 협력 관계라네."


그 말에 아포리아를 떠올린 카린의 얼굴이 잠시 어두줘졌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협력 관계라면...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자네들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이곳은 최근에 클리포트 게임이란 것을 치뤘네. 간단하게 말해서 마왕이라는 존재들과 일종의 내기를 하는거지. 세계의 명운을 걸고 말이야. 그리고 이겼고.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야. 시작일 뿐이지."


"그 마왕...이라는 것들은..."


"자네들이 아까 말한 6종이니 뭐니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것들이지. 우리 세계로서도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그러니 내가 제안하는 협력은...자네들이 만약 이 마왕들과 싸우는 것에 협조한다면...아마 자네들의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 뿐 아니라 침식을 되돌리는것도 가능할지 모르지."


"그런...당신도 침식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면서요?"


"나는 그렇다네. 그런데 이 불합리한 게임을 주관하는 분이...어지간히도 능력이 대단하셔서 말이지."


"그런 허황된 소리를, 저희보고 믿으라고요? 저희 세계가 풍전등화나 다름없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나로서도 다른 방법은 없네. 만약 자네들이 침식률이 오르는 것을 각오하고 몇몇 장비를 챙겨가겠다면 그 정도야 지원해주겠지만."


카린은 고민했다. 당장 언제 본인들의 세계가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세계의 싸움을 도우라고? 그것도 6종 침식체보다도 강대한 적들을 상대로?


"조언해주자면...잃지 않으려고만 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네. 이 불합리함을 뒤엎으려면, 지지 않는게 아니라 이겨야지. 크게. 그리고 크게 이기기 위해선, 그만큼 크게 걸어야지."


카린은 그녀의 앞에 앉은 관리자를 노려보았지만, 그녀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다른 방법은 없었으니까. 지금 이 세계는 잠깐씩 들렀던 것이 전부인 그녀의 눈에도 명백하게 그녀 자신의 세계보다 한참은 앞서 있었다. 이곳을 떠나서 다른 방법을 찾는다 한들, 설령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곳을 찾을 확률은...한없이 작겠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저희를 이 세계에 끌어들이려고."


"나도 이렇게 말하지만 딱히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라서 말일세. 제발로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찰만큼 사정이 녹록하진 않아."


"...좋아요. 그 클리포트 게임인지 뭔지를 돕죠. 단, 이 일이 끝나면 당신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저희 세계를 돕겠다고 약속해주시죠."


"약속하지."


"그래서, 뭘 하면 되죠? 적어도 당장은 마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딱히 보이지 않는데."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자네도 델타 세븐의 일원이었다면서. 군인으로서의 생활에 딱히 문제는 크게 없으리라 보는데. 내가 잘 이야기해보지. 안토노프 중장에게 내가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자네들을 충분히 맡아줄 걸세."


"그렇게 하도록 하죠. 연락은..."


"걱정할 필요 없네. 오는 길에 잠깐 아이기스에 들러서 연락처를 추가해놓았으니. 자네는 언제든지 내 연락을 받을 수 있겠지. 이렇게."


아. 아. 잘 들리나?


"?! 당신이 그걸 어떻게?"


"예전에 본 적이 있거든. 대충 시도해봤는데 잘 되는것 같아 다행이네. 그럼 이만 실례하지. 지난번에 회사 건물이 무너져서 수습하다 급하게 온 거라서, 빨리 복귀하지 않으면 부사장이 또 잔소리를 퍼부을 예정이라."


"잠깐-"


"아 그리고, 기왕 여기에서 지내게 된 김에, 한번 잘 해보게. 자네들은 꽤 잘 어울리는 편이었거든."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리..."


"무슨 소리긴, 자네와 워커 대ㄹ..."


"꺄아아아아악?! 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거야?"


잽싸게 문 밖으로 도망간 관리자를 결국 카린은 뒤쫓지 못했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주제에 기럭지는 길어서 도망가는 건 쓸데없이 빨랐다. 그들이 대화를 나눈 시간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아, 혈압 올라...내 인생에 주시영 이 인간만큼 스트레스 받는 사람을 볼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 편두통이 또..."


"거기서 갑자기 저를 욕하다니 너무해요 카린 양."


"시끄러워요. 아, 전 좀 쉬어야겠어요. 기 빨린다 기 빨려..."


"그래서 결국 우린 어떻게 되는거야? 여기서 계속 지내는건가?"


"대체 뭘 들은 거에요? 저희는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 클리포트 게임이란 것을 돕고 대신 일이 마무리되면 이곳의 관리국으로부터 협조를 받을겁니다. 그러니까 둘 다 제발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지내요."


"음...사고는 카린 양이 치지않게 조심해야하지 않을까요?"


"또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라뇨, 저는 그냥 카린 양이 그 금발 대령님과 사고를 쳐서 아이라도 가...읍읍?!"


"제발 좀 닥쳐! 아주 입만 열면 개소리만 나오는 그 입 좀 제발 다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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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종료. 전술무장 회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카린 씨."


카린이 오른쪽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지난 몇 달간 그녀와 다른 패스파인더 요원들이 보여준 활약은 처음에 그녀들은 미심쩍게 여긴 시선들을 걷어내는데에 충분했다. 물론, 주시영과 카린 모두 델타 세븐 인원들이 익히 알아온 누구누구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 또한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했지만.


"보면 볼수록 비슷하네. 근데 난 개인적으로 언니가 더 마음에 들어. 저 깐깐한 놈은 쪼잔한데다 속도 좁아서 같이 있으면 피곤해."


"실비아 씨, 방금 그 험담은 인사평가에 반영하겠습니다."


"저 봐, 저 봐. 으. 언니까지 저랬으면 난 진작에 그냥 도망쳤을거야."


"실비아 씨는 탈영 시 즉각 수감예정일 텐데...감옥보단 군대가 낫지 않겠습니까?"


"거 무서워서 농담을 못하겠네."


"그러게요.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하는 이런 남자가 이곳의 저라니. 100점 만점에 20점. 더 떨어졌어요."


"저야말로 당신같이 겉만 멀쩡한 허당이 그쪽 세계의 저라는게 매우 불쾌하군요. 지금의 당신은 D-, 아니 F 드리겠습니다."


"허당?! 당신 지금 말 다했어요? 몇살 먹지도 않은 주제에 꼰대짓이나 하는 게!"


"꼰대? 지금 말 다했습니까? 아무래도 상관에 대한 예의에 대한 정신 교육이 필요하겠군요."


"당신은 내 상관 아니거든!"


"이런, 카린 양. 너무 화내지 마. 카일 저 친구가 하는 말은 그냥 흘려들어. 늘 하는 말이니까."


"...어, 어어...대, 대령님?"


"흘려듣다니요, 이곳에 지내는 동안 저들은 명백히 델타 세븐의 지시를 따라야..."


어느새 스톰 브링거를 해제하고 나타난 제이크가 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자, 카린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어렷품이 카일이 제이크에게 반박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카린은 벗어나지도 가만히 있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흐으음~?"


그런 카린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한건 예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물론, 다 안다는 것 같은 미소를 짓는 주시영이었다. 카린을 얼굴을 확 구기며 걸어나왔다.


"뭐죠. 그 기분나쁜 웃음은."


"아뇨, 뭐. 처음엔 카린 양이 관심을 안 줘서 섭섭했는데, 보다 보니 이게 더 재밌는 것 같기도 해서."


"...뭐가 그리 재미있는데요."


"그야 당연히 이곳의 카린 양 본인과 투닥거리시는거죠. 뭘 생각하신 거죠?"


대놓고 답변을 피하는 행동에 절로 뒷골이 당겼지만, 이 대화를 끝까지 이어나가봤자 손해보는 건 그녀였으므로 카린은 주시영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어머, 박력."


"입 다물어요.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강제로 주시영을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온 카린은 문을 잠갔다.


"어머, 다 큰 숙녀를 방으로 끌고 들어와서 문까지 잠구시다니, 저 무서워요. 무슨 짓을 하시려고..."


"헛소리 좀 그만해요. 자, 이제 말해봐요. 대체 왜그래요?"


"뭐가요?"


"자꾸 제가 대령님 근처에만 있으면 그...그, 이상한 웃음 짓는거 말이에요."


"어떤 이상한 웃음이요? 전 그냥 카린 양이 귀여워서 그런 것 뿐인데."


"그러니까 뭐가 귀엽냐고요."


주시영은 잠시 시치미를 뗄지 고민하다가 노선을 바꿨다.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도 그럴게, 카린 양 워커 대령님 좋아하잖아요."


"좋...!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그냥, 저를 제외하고 마지막까지 살아계셨던 분이라 앞에 서면 긴장하는 것 뿐이에요. 평소에 존경하던 분이기도 했으니까요. 동경하는 분이기도 했고요."


"에~이 제가 카린 양을 몇년을 봤는데. 그건 그냥 긴장하거나 그런 눈치가 아니에요. 그 대령님이랑 몸이 닿기만 하면 굳어버리시던데요? 말도 더듬고."


"아니 사람이 좀 긴장하면 말 좀 더듬을 수 있죠!"


"하하, 그럼 그때 그 관리자? 사장? 이란 분과 대화할 때는 똑 부러지게 잘 말씀하시던데요? 카린 양은 긴장하면 기계처럼 딱딱하게 말하는게 습관이지, 그냥 굳어버리는게 아니잖아요? 누가 봐도 '아, 얘 저 사람 좋아하는구나' 싶을걸요. 요즘 은근히 카린 양이랑 대령님이 같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는 거 알아요? 아, 대령님 쳐다보느라 모르시나?"


원래라면 키득거리는 주시영에게 헛소리 좀 그만하라며 머리채를 잡았겠지만...지금 카린은 정말 주변에 사람이 사라졌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정도로 주의를 뺐겼나?


"농담이에요."


"이 여자가!"


"아, 근데 그 중장님이나 몇몇 병사분들은 대충 눈치챈 것 같던데? 이건 진짜에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그리고,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상황에 연애감정 따위를 가질 리가 없잖아요. 우리 세계는 언제 망할지 모르고, 우리가 아는 사람들이 언제 소리소문 없이 죽어갈지도 모르는데."


"카린 양. 호감을 갖는 건 미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대령님...나름 미남이고, 듬직하고, 조금 껄렁거리시긴해도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외모 돼, 성격 괜찮아, 호감이 없으면 그게 이상하죠.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마왕인지 뭔지랑 한바탕 해야 우리 세계도 구하는 건데, 그 와중에 연애 좀 한다고 뭐 큰일 나는것도 아닌데요 뭘."


"그럼 시영 씨도 대령님이 좋나요?"


"아뇨, 그런 타입은 제 취향 아니라서. 제 취향은...굳이 따지면 역시 이곳의 저 자신 쪽이..."


카린이 진심으로 역겹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주시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히 농담이죠. 물론 그런 남동생이 있다거나 하면 대환영이지만?"


"...아무튼 자중할게요. 대화를 나누니까 확실해졌어요. 불필요한 오해를 막으려면 앞으로는 조금 더 행동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네요.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먼저 나가볼게요. 방 안에 믹스커피 있으니까 그거라도 마시고 나가요."


"앗, 고마워라. 그런데...정말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과감하게 고백을..."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얘기는 그만하죠."


카린은 문을 열고 나가며,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가 아는 대령님은 내 손에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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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먼저 들어가볼게요."


"아, 카린 씨. 지금 다 같이 식사하러 나갈 예정인데, 같이 가지?"


"죄송합니다, 대령님. 할 일이 있어서요. 다녀오시길."


"어? 으응, 그래. 그럼 나중에 봐."


"네, 나중에 뵙겠습니다."


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그를 지나친 카린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크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었나?"


"저 언니도 드디어 버터남의 느끼함에 질린 거 아니야?"


"실비아, 이런 건 신사의 매너라고 하는거야."


"매너 좋아하시네."


"음, 아쉽지만 식사는 우리끼리 하도록 하지. 자네들은 어찌할 예정이지? 제법 고급진 식당에 갈 예정이다만."


마리아가 권하자, 레베카는 자신도 따라가게 해달라며 다가갔다. 주시영은 카린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고맙지만~저는 우리 카린 양이랑 먹을게요~ 나중에 뵈요~"


그렇게 카린의 방으로 간 그녀는 아니나 다를까 멍하니 빛바랜 단체사진 한 장을 쳐다보는 카린을 찾을 수 있었다.


"또 그 사진만 쳐다보고 있네요. 요즘 왜그래요? 아니 뭐 자중도 정도가 있지, 다들 요즘 카린 양이 쌀쌀맞아졌다고 그러던데."


"...글쎄요."


"자주 멍 때리고. 일 끝나면 맨날 방에서 그 사진만 쳐다보고 있고. 무슨 일이에요?"


카린은 잠시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시영 씨, 왜 하필 여기일까요?"


"뭐가요?"


"관리국 말이에요. 왜 하필 이 세계에 있어야만 했을까요. 왜 우리 세계는 아니었을까요. 안토노프 말처럼, 우리 세계는 너무 나약해서 구할 가치도 없던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처음에는 그냥...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어요, 사실. 조금 들뜬 것도 사실이었어요. 제가 아는 얼굴들이, 같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다시 만날 수 있었거든요. 대령님, 사이버캣...이런 사람들은 물론이고, 천둥이 치는 날엔 잠을 잘 못 잔다던 스미스 병장. 여기서는 대령님 덕에 이젠 아예 천둥소리 ASMR을 켜고 자야 푹 잔다더라구요. 워레스터 중사는 원래 있던 곳에선 딸기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여기선 알레르기를 고치고 나서 딸기에 환장하더라고요. 지난번에 딸기가 얹어진 케이크를 하나 사다줬는데 30분만에 혼자서 다 먹어치울 땐 깜짝 놀랐어요."


"...카린 양."


"우습죠. 여기 사람들은 제가 카일 웡 소령과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들인 것처럼, 제가 알던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사람이에요. 대령님도, 제가 알던 분은 제법 긍정적인 분이었지만 거의 항상 진중한 분이었어요. 그때 우리의 상황이 상황이었으니 당연하죠. 여기 계신 분처럼 시시껄렁한 농담을 한다거나 스스럼없이 이성에게 접촉하거나 그런 분이 아니었거든요."


"카린 양."


"솔직하게 말할게요. 우리, 제법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추잡하게도, 전 카일 웡 소령을 질투해요. 여기의 제 자신에게요. 왜 하필, 모두가 살아있는 이곳의 '나'는 내가 아니었을까. 왜 하필 관리국은 내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세워진걸까. 여기도 침식재난이 있어요. 지금껏 들어본 바로는 우리 세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재앙이 수두룩하더라구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세계는 끝장나기 직전인데 이곳은 멀쩡해요. 바다도 푸르고, 침식된 땅이 없는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살기엔 충분하죠. 2종 정도의 침식체는 별 일도 아니고, 4종도 비상사태긴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에요. 스미스 병장도, 워레스터 중사도, ...그리고 대령님도, 여기에선 모두가 멀쩡히 살아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 끝까지 맞서 싸우다 침식체한테 밟혀죽은 스미스 병장과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라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지가 뜯어먹힌 워레스터 중사는 지금쯤 수다를 떨거나 체스나 두는 중일테고, 제가 알던 대령님은 죽음에서조차 편해질 수 없었는데, 이곳에선 지금쯤 즐겁게 식사중이시겠죠."


"카린 양, 조금 진정해요."


"그게 너무 부러워요. 나는 얼마 남지도 않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껏 움켜쥐어도 모래처럼 빠져나가기만 하는데, 이곳의 나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게 너무나도 부럽고 질투가 나요. 내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렸는데,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을 지키려고 발악해봐도 멍청하게 전부 잃기 직전까지 몰리고 그마저도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의 것을 빌려서 지켰는데. 카일 웡 소령은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을 지켜냈다는 게. 이런 제가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면서도 이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차라리 내가 여기서 태어났다면. 그 관리자인지 뭔지가 선택한 세계가 내 세계였다면!"


"카린 양. 정신 차리고 날 봐요. 나 친구 아니에요? 난 여기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해요."


주시영이 카린의 얼굴을 잡고 들어올리자, 흐리멍텅했던 카린의 눈이 조금이나마 빛을 되찾았다. 카린은 힘없이 웃었다.


"그러네요. 미안해요. 말을 잘못했어요. 한심하죠, 저. 꼴에 세상을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주제에, 정작 이따위 질투나 하고있다니. 하다못해...하다못해 제가 죽고 살아남은게 대령님이었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아포리아...제 그림자도 대령님보단 약했을 테니 피해가 적었을테고, 저보다 뛰어난 대령님이 살아계셨으면 피해가 훨씬 적었을테고. 제 세계의 대령님에게도 그 스톰 브링거가 쥐어졌다면, 그랬다면...!"


"카린 웡!"


짝-!


카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뺨에서 올라오는 얼얼한 느낌에 카린은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고, 그제야 제대로 바라본 주시영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화가나도 한 번도 저런 얼굴은 보여준 적 없었는데-하고, 카린은 생각했다.


"실망이에요. 카린 양. 카린 양은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게 부럽다고 했나요? 그런데 어떻게 제 앞에서 본인이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카린 양, 제 부모님은 살아있지만 제 친구들은 침식재난에 전부 죽었어요.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침식체들을 죽여 버리려고 칼을 배웠어요. 그래서 이 검 이름도 '수라'고요. 그런데, 부모님과 제 자신만을 지키는 선에서 무의미하게 돈 받고 아무거나 칼로 썰어넘기던 제 인생에서 뭔가 큰 의미를 부여해준 건 카린 양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부모님을 안전한 곳에 보낼 생각 뿐이었고, 마지막으로 어줍잖은 영웅 놀음이나 하다 죽겠지-하는 생각이었지만...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걸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을 구하려는 카린 양을 보면서 참 멋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는 영웅같은게 아니에요. 어설프게 다른 사람들을 따라했을 뿐이죠."


"알 게 뭐에요, 그딴 거. 그래서 전 지금까지 목숨 걸고 카린 양을 따라온 거에요. 그런데 그 당사자가 본인이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면, 전 죽는게 나은 인간을 따라 사지에 제발로 걸어들어간 천하의 머저리나 다름없네요."


"...미안해요, 시영 씨."


주시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뒤돌아 문을 열었다.


"...저도 흥분했네요. 이만 가볼게요. 모쪼록, 기운 차리길 바라죠."


철컥, 하고 닫힌 방문을 카린은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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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이 쓸 생각이 아니었는데 ㅅㅂ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 다음편엔 무조건 끝남. 오늘 내로 마무리 짓고싶긴한데...내일 업로드할 가능성도 있음. 처음엔 그냥 짧고 달달한 연애소설로 갈 생각이었는데 무작정 연애모드로 가니까 개연성이 개판이 되서 최소한의 개연성이라도 확보하려고 쓰다보니 길어졌네...긴 글 읽어줘서 고맙고 마지막 편에는 캐린이 행복해질 수 있을거니까 기대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