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임승차자(Freedom Riders)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자유라는 이름의 방만에 취해 검을 놓은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일하지 않을 자유, 무위도식을 향한 집념,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난데없이 시작된 클리포트 게임. 이제까지 누린 번영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 급속도로 몰락하기 시작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검을 잡아야 했다.

 

소녀 역시 제 평안을 방해하는 세상에 맞서 힘껏 싸웠다. 잠깐 숨 돌릴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던 과거의 나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져도, 지금 추레하고 처량한 자신의 꼴이 시체보다는 낫다는 걸 알기에 멈추지 않았다.

 

피딱지가 올라 너덜거리는 손, 침식체의 피를 잔뜩 머금고 무뎌진 검. 가쁜 숨, 이미 오래 전에 한계에 치달은 육신.

 

그럼에도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뭐, 그것도 이제는 무리겠지만.

 

“가요······.”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숨소리. 피가 울컥울컥 배어 나오는 상처를 향해 손을 뻗지만, 당연히 그런다고 출혈이 멈출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손 또한 피로 물들어갈 뿐.

 

과거의 활기와 반짝임은 모두 잃어버린 채, 소녀는 또 다른 소녀를 텅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어 뒤엉킨 자줏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봐도 그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뜰 기색이 없었다.

 

그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숨을 붙든 채로, 그녀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저는 짐짝이니까······. 얼른, 당신만이라도.”

 

소녀에게 치유 능력 따위는 없었지만, 사선의 경계를 몇 번이고 넘어오며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 기초적인 의학 지식 정도는 있었다.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우러나온 경험이 자연스럽게 판단하다.

 

상대는 곧 죽을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이고, 달리 응급 처치를 받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며, 무엇보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으니까.

 

“전 가지 않아요.”

 

“지금, 제 곁에 있는 게 누구죠······? 에이미 양은, 이미 떠났나요?”

 

소녀는 이미 이면세계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검붉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다.

 

“네.”

 

“에이미 양은 떠났어요. 그녀는 우리랑은 다르니까. 육익. 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서, 그녀만은 특별한 역할을 부여받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클리포트, 마왕, 대적자, 얼터니움······. 지극히 평범한 소녀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 거창한 것들 사이에 낑겨 허우적거리에게는 그녀는 지나치게 소시민적이었다.

 

그렇지만 잔혹한 현실은 그런 소시민에게도 무기를 들 것을 종용한다. 괴물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네 목을 넘보고 있으니, 죽지 않기 위해서는 쳐 죽일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검을 들었다. 더 이상 한가로운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적어도 그런 시간들을 함께 보냈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네요······.”

 

조금씩, 숨결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2회차란 게 있으면, 절대 카운터는 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애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울음소리, 발걸음소리.

놈들이 가까워진다.

 

“맞아요, 민서 양. 당신 말버릇대로 현실에는 자동저장이 없으니까.”

 

사방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침식체, 침식체, 침식체. 그리고 침식체.

 

다른 이들은 너무 죽었나. 이미 슬픔이 쌓일 대로 쌓여 둔중해진 가슴에 또 한 번 먹먹한 울림이 울려퍼진다. 소녀는 더 이상 숨쉬지 않는 제 친구를 어깨에 둘러매고, 다른 손으로 검을 쥐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격전 또한 닳을 대로 닳아버려 이제는 검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운 형상. 온갖 침식체의 피와 살점이 묻어 기괴한 꼴이지만, 이것이 지금 소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궁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저도 그랬어요. 싸움이 싫었고, 차나 마시면서 대화로 해결하고 싶었는데······.”

 

제 몸집만한 대검을 들어올린다. 무겁다, 너무나도 무거워, 당장이라도 내팽개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렇지만 그 대검보다도, 지금 제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아직 식지 않은 온기가 몇 배는 무거웠다.

 

“······이제야 알았네요. 세상에는 티타임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단 걸.”

 

어느덧 소녀 하나만을 노리고 일대를 둘러싼 침식체들은 하이애나처럼 주변을 빙빙 돌며 위협하고 있었다. 소녀가 쉽지 않은 사냥감임을 아는 것처럼.

 

기묘한 대치. 그러다 어느 순간, 성질 급한 침식체 하나가 소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저 먹잇감은 제 몸집만한 걸 두 개나 짊어지고 있었고, 몸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상처투성이에 빈틈투성이. 그것은 승리를 자신하며 아가리를 들이밀었고.

 

콱.

 

다음 순간, 압도적인 중량에 짓눌려 그대로 핏덩이로 화했다.

 

“그르르르.”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싸우기 싫었고, 이왕이면 모든 것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세상은 잘못이라고는 조금 게으른 게 전부일 뿐인 소녀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침식체들이 달려든다. 소녀는 이를 악문 채 검을 휘둘렀다. 침식체들의 피로 뒤덮인 칼날이 부우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섬뜩한 궤적을 그릴 때마다 그 안에 걸린 것들이 공평하게 갈려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베어넘겨도 끝이 없다. 금세 이상함을 눈치챌 정도로. 집요할 정도로, 침식체들은 제 목숨마저 도외시하며 소녀에게 덤벼들었다. 마치 발목을 묶어두려는 것처럼.

 

위기감을 느끼고 발을 빼려 할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갑작스레 고요해진 전장, 그 위를 뒤덮으며 퍼져나가는 압도적인 위엄.

 

[찾았다······.] 

 

소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싸움에도 능하지 않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기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물건.

 

관리국 테크 레벨 1. 보급형 무장 대검. 이제까지 수많은 침식체들을 베어 넘기고도 용케 부러지지 않은 든든한 친구였으나.

 

콰강!

 

공격이 날아든 순간, 그리하여 소녀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그것을 막아낸 순간. 이제껏 소녀가 무수한 위기를 돌파할 수 있게 했던 대검이 허망하게 부러졌다.

 

부러진 대검과 친구의 시체를 짊어진 채로 소녀는 망연한 얼굴로 제게 가까워지는 형상을 올려다보았다. 평범한 인간의 시야로는 제대로 인식할 수도 없는, 같은 생명체라는 게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압도적인 무언가. 

 

부르나니 클리포트의 마왕. 이 세상에 절대적인 종극을 가져오는 존재.

 

평범한 일반인일 뿐인 소녀도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마왕에게는 상처를 입힐 수 없다는 걸. 대적자니 클리포트 인자니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없는 이상은. 그리고 소녀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는 부러졌고, 친구는 잃었다. 그녀를 둘러싼 침식체들은 마치 경배하듯 엎드리고, 그 나약한 육신을 아작내며 마왕은 그녀를 향해 걸어온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틀림없이 죽겠지. 그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기정사실.

 

그렇지만, 비록 마왕을 죽일 수는 없더라도.

 

[싸울 셈인가······?]

 

도망칠 생각은 버린다. 소녀는 잠든 친구를 부드럽게 내려놓고, 그 앞을 막아서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부러진 날에는 여전히 침식체의 피가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말라붙어 있다.

 

그 얄랑한 발버둥.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악적으로 덤벼드는 절망에 찬 얼굴. 지긋지긋하도록 보아 온 것들이었다. 

 

[맞서려 하는구나. 가엾게도, 그 길의 끝에 파멸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못 지나가.”

 

마왕의 말을 끊어내며 소녀는 으르렁거렸다. 이제까지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린다.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버린다. 그저 순간의 쾌락만을 좇았던 나약함을 버린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며 지레 포기했던 좌절을 버린다.

 

전부 버리고 나니 단 한 가지의 감정만이 마음에 남았다. 소녀는 부러진 검을 높이 들어올렸다가, 그대로 대지에 꽂았다. 

 

“네놈들이, 내 친구를.”

 

우리가 함께 웃고 떠들고 즐거워했던, 때로는 슬퍼하고 상처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랑했던 이 세상을.

 

“더럽히도록 두지 않겠어.”

 

쩌저저저저저저적.

 

내리꽂힌 검으로부터, 균열이 시작된다. 그것은 어떠한 신비도 초능도 아니다. 단지 압도적인 질량. 대지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공간마저 비명을 지르며 휘말려 붕괴하는.

 

워치는 죽음을 앞두고 나타나는 강한 생존 의지나 그에 준하는 집념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소녀는 카운터였다.

 

그녀의 시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째각이고 있었다. 스스로의 생명줄을 모조리 태워서라도, 이 빌어먹을 현실을 개변하기 위해.

 

[너······!]

 

그녀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자신의 의지만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이기도 하다. 대재앙이 도시를 덮치고 무수히 죽어 나갔을 사람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한 번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고 그렇게 덧없이 시들어 꺾였을 꽃잎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으로써, 소녀는 그들의 의지를 대변한다. 하나로는 세상을 대변하기에 부족했을 의지가, 으스러지도록 대검 손잡이를 움켜쥔 손 위로 하나둘씩 쌓인다.

 

검의 무게는, 곧 마음의 무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검을, 소녀는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대적자도, 클리포트 인자도, 하다못해 관리국 테크 레벨 5 무장도 없는. 특별함이라고는 두 눈을 씻고 봐도 찾아봐도 없는 소녀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의지.

 

소녀, 히로세 아키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 궤적을 따라 세상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