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펜촉이 부드럽게 종이를 긁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급스러운 벽지를 바른 방 안, 널찍한 떡갈나무 책상 앞에 한 청년이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 뒤편에는 황궁의 전경이 오밀조밀 짜인 양모 태피스트리가, 양옆으로는 태양과 대륙이 그려진 제국 국기와 황가를 상징하는 용이 담긴 깃발이 놓였다.

 

맞은편 벽엔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그림의 주인공은 금빛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를 지닌 수려한 외모의 중년 남성이었다.


진청색 제복 위로 푸른빛 망토를 걸친 그림 속 남자의 모습은 지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청년과 판박이였다.

 

이대로 20여 년 정도가 흐르면 딱 저렇게 자라겠구나 싶은, 그래도 아직은 젊은이 특유의 치기와 호기로움이 감도는 얼굴.

 

제국 황족에게만 전해 내려온다는 고귀한 블론드 빛 머리와 에메랄드를 박아넣은 것만 같은 진녹색 눈동자.

 

아르카데나 제국의 황태자, 클라레스였다.

 

서명한 서류를 책상 옆에 쌓아둔 그가 옆에 선 총리대신을 향해 물었다.

 

그래, 다음 안건은 뭐지?”

 

베뉴드 지방의 재해 복구 건입니다. 일전에 보고드린 바와 같이 가뭄으로 곡창 지대의 피해가 심각하다고 합니다. 헤롤드 남작이 원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건네받은 종이를 살피며 클라레스가 턱을 괴었다.

 

저수량을 늘려야 한다고 내 그렇게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괘씸하기는.”

 

펜촉에 잉크를 묻힌 클라레스가 새로운 서류를 써 내려갔다.

 

헤롤드령()의 세금을 작년의 절반으로 가조정한다. 그리고 군량미로 보관 중인 밀과 보리 중 햇수가 가장 오래된 것들을 팔아주도록. 가격은 시장가의 삼 할 정도면 되겠지.”

 

오래 묵은 곡식은 알갱이가 묽어 제빵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죽을 끓여 먹인다면 주린 배를 채울 수는 있으리라.

 

군량미 보관량을 가늠하던 대신이 이내 걱정스레 되물었다.

 

양이 모자라진 않겠습니까? 헤롤드 남작이 불만을 표할 수도 있습니다만.”

 

자기 영지 하나 건사하지 못해 손을 벌리는 주제에 감히 누구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부족한 건 제 금고를 털어 먹이라지.”

 

황가는 최소한의 책임을 다했으니 나머진 영주의 몫.

 

딱 잘라 선을 긋는 황태자에게 대신이 서류 더미 속 새로운 종이 뭉치를 꺼내 건넸다.

 

다음은 국경선 마수 출몰 안건입니다. 피로스 변경백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서쪽 국경에서 2급 이상 마수의 발호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3급 마수 또한 다수 목격되었습니다.”

 

보고서를 받아든 클라레스가 표정을 굳혔다.

 

“3급 마수라면 확실히 국경에서 단독으로 대처하기엔 무리가 있겠군.”

 

이내 빈 종이를 한 장 꺼내 들어 명령서를 써 내려간다.

 

중앙군 3사단과 황실기사단 1분대에 토벌 명령을 내리겠다. 인솔은 카스티유 경이 맡는다.”

 

카스티유 경과 1분대가 국경수비대에 합세한다면 3급 마수도 큰 피해 없이 정리할 수 있을 터.

 

그나저나, 서쪽 국경이라면.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가던 펜이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우뚝 멈췄다.

 

발탄 왕국과는,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나?”

 

대신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마법 전언과 사역마, 어느 쪽도 답신이 없습니다. 해안 수비대가 조사한 바로는 대륙 전체가 반구형의 검은 에너지장에 둘러싸여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답니다.”

 

마왕 녀석, 별 능력이 다 있군.”

 

마왕.

 

약 반년 전, 마왕 속삭이는 자의 수하 중 하나가 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스스로 속삭이는 자의 심복이라 밝힌 잿빛의 전사는 음울한 빛을 내뿜는 창을 앞세워 제국의 연방국 중 하나를 휩쓸어갔다.

 

방향을 본다면 놈이 서쪽 대륙에서 넘어온 것은 분명하기에 제국은 곧바로 서 대륙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갖춘 발탄과 연락을 취했으나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홉 대륙 중 이미 일곱이 멸망하였고 남은 것은 아르카데나가 있는 중앙 대륙과 서 대륙뿐.

 

곤경에 처한 동맹을 구하고 마왕의 심복을 처치하기 위해 이번 대의 구원기사단이 창설되어 첫 출정에 나섰지만, 토벌은 실패.

 

마왕의 세력권을 크게 줄여 활동 반경을 서해안 주변으로 제한하는 데에 그쳤다.

 

재정비를 겸해 수도로 귀환한 이후 꾸준히 서 대륙의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지만.

 

아무래도 정황상 전멸했다고 보는 것이.”

 

부정하기 어려운 가능성을 입에 담는 대신을 보며 침음성을 삼킬 뿐이다.

 

그래도 관찰은 계속하도록. 혹여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인도적인 관점에서도 구조하는 것이 옳으며 운이 좋다면 마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서 대륙이 전멸한 게 사실이라면, 최소한 마왕 본인이 언제 활동을 재개할지라도 알아내야 한다.

 

놈이 대륙에 상륙하기 전에 저지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길이니까.

 

, 전하.”

 

황태자와 대신은 이후로도 줄곧 각종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국방, 인사, 법률과 복지부터 센트럴 팰리스의 토목사업과 궁전의 보수 공사까지.

 

대신의 의견을 경청하며 세심하게 결정을 내리는 그 모습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 칭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아마 백성들이 보았다면 이토록 훌륭한 군주가 계시니, 제국은 필시 작금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라.

 

소파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백성, 레이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전하께서 찾으신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왔건만, 이게 대체 뭐람?

 

출정에서 복귀한 클라레스는 얼마 뒤 레이와 루크레시아를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이번 대의 구원자와 성녀가 정해졌다 하지만 당장은 그저 새 지위를 얻은 것뿐.

 

지위에 걸맞은 능력과 품격을 갖추기까진 다난한 시간이 필요하리라.

 

어렸을 적 황태자를 가르쳤던 왕사(王師)들을 불러들여 둘에게 붙여주었다.

 

중앙 대륙을 넘어 전 세계에 그 이름과 명성을 떨친 현자들이다.

 

무릇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만나 말씀을 듣는 게 일생의 소원일 정도.

 

이리 뛰어난 학자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워 몸이 떨려야 정상이건만.

 

정작 당사자들은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전하와 조찬을 들자마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정치학, 행정학, 경제학, 예법과 같은 교양으로 하루를 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기사단원들과 함께 훈련하며 기사로서의 필수 소양인 검술, 기마술, 궁술, 전술을 익히고.

 

저녁에 호화로운 만찬을 먹고 밤이 되면 글, 그림, 건축과 조각에 이르는 예술 강의가 이어진다.

 

아무리 시골 촌놈이었던지라 견식이 짧은 레이라고 해도 자신의 스승으로 붙은 이 강사들이 대단한 사람임을 몰라보진 않았다.

 

다만, 너무 바빴다.

 

정말, 정말 숨 돌릴 틈이라곤 잠시도 없는 살인적인 일정이다.

 

수도에 올라온 지도 어느덧 반년이 다 되어가건만 시내 구경이라고는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대신전에서 가르침을 받는 루크레시아와도 저녁 만찬 때나 가끔 얼굴을 볼 뿐이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지경.

 

애써 용기를 쥐어짜 전하에게 수도 관광이라도 하며 좀 쉬고 싶다고 말을 해 보아도.

 

헛소리나 늘어놓는 걸 보아하니 여유가 넘치나 보군?”

 

라며, 팔자에도 없던 신학(神學) 공부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이대로 가다간 정말 방에 틀어박혀 글줄만 읽다가 죽겠다 싶던 어느 날.

 

시종장 할아버지께서 예법 수업을 끝내고 전하께서 부르시니 찾아가 보라 하셨다.

 

맙소사, 전하께서 찾으신다고?

 

나를 이 수업 지옥에 쑤셔 박아 말려 죽이려는 그 전하께서?

 

할아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궁전 복도를 가로질렀다.

 

등 뒤에서 구원자로서 체통을 지키라는 시종장의 외침이 어렴풋이 들려온 것도 같지만, 알게 뭐람?

 

분명 내일 예법 수업 때 불호령이 떨어지겠지만, 전하와 시종장 할아버지 둘 중 한 명에게 혼이 나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골라야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부리나케 안으로 뛰어든 게 약 30분 전쯤 되시겠다.

 

어디에 눈을 두고 시간을 죽여야 할지 몰라 방 안만 휘휘 둘러보길 수차례.

 

정작 불렀다는 전하께선 소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으시는 것 아닌가.

 

혹시나 잊어버리셨나 싶어 제발 이쪽 좀 봐달라는 뜻을 담아 전하를 불러보았지만.

 

저기, 전하.”

 

조용히 하고 기다려라. 아직 정무를 돌보는 중이지 않으냐.”

 

죄송하단 말만 주워섬기며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을 뿐이다.

 

이내 서류 몇 장을 뒤적거리던 클라레스가 안경을 벗어놓곤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나머진 행정관들끼리 논의한 후 보고해주게.”

 

서류 더미를 정리한 총리대신이 깊이 허리를 숙이고 나가자 클라레스가 소파 맞은편으로 와 앉았다.

 

그래, 땀은 좀 식혔나?”

 

?”

 

시간에 쫓겨 여유를 잃은 자와 대화를 나누는 취미는 없어서 말이다.”

 

손을 들자 문 앞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다가와 둘 앞에 차를 따라주었다.

 

들거라.”

 

꽃잎이 그려진 잔에 담긴 황금빛 액체를 보던 레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 이거 케릴 차네요.”

 

? 네가 접할 기회는 없었을 터인데.”

 

케릴 차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찻잎을 독점 유통하는 티팔 상단의 까다로운 판매 조건으로 더 유명했다.

 

손님에게 케릴 차를 대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문의 위상이 달라지는 귀한 차를 이 녀석이 알고 있다고?

 

이 평민 녀석이 뭔가를 착각한 게 아니고서야.

 

알렌의 집에 갔을 때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색깔이 워낙 특이해서 기억에 남네요.”

 

, 알렌 경이 네 친척이었지.”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같은 무게의 금화만큼 값이 나가는 차를 일개 평민에게 내주다니.

 

알렌 경이 생각보다 이 녀석을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좀 더 신경을 써주는 게 맞겠어.

 

차는 얼마나 정성을 들이느냐에 따라 그 맛이 천양지차로 달라지지. 네가 알렌 경의 집에서 맛본 것과는 사뭇 다를 게다.”

 

조심스레 찻잔을 입에 댄 레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은은한 단맛 사이로 퍼지는 향의 풍미가 입안에 남아 떫은맛을 잡아주는, 일국의 황족이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차였다.

 

, 정말 맛있네요.”

 

순수한 감탄사에 클라레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음에 든 모양이군. 원한다면 조리장에게 조금 챙겨주라고 말해두마.”

 

아니요, 비싼 차일 텐데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는.”

 

네 지위를 고려하면 사치라고 말할 정도도 못 되지. 개의치 마라.”

 

한동안 차 홀짝이는 소리만이 집무실 안을 채웠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레이가 먼저 말문을 떼었다.

 

저기,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시종장에게 들었다. 여전히 사용인들의 시중을 거부한다지?”

 

그거 때문이시구나.

 

찻잔을 내려놓은 클라레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지난번에 충분히 알아듣게 얘기했다고 생각했건만. 훈계가 부족했더냐?”

 

제국 내에서 레이와 루크레시아의 입지는 참으로 미묘했다.

 

구원자와 성녀라는 둘의 직위 자체를 부정하는 자는 없었다.

 

구원자와 관련된 전설은 오랜 시간 동안 대륙에 널리 퍼졌으니, 만백성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출된 두 사람을 부정하는 건 곧 전설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둘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

 

때문에, 귀족들은 선출 방식이 아닌 둘의 자격을 놓고 꾸준히 공세를 가했다.

 

품위가 없다느니, 아니면 능력이 부족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특히나 노예 출신에 사령술에 재능이 전혀 없던 루크레시아는 귀족들에게 있어 좋은 먹잇감이었다.

 

심지어 이 발칙한 계집애는 틈만 나면 제 성질을 못 이겨 사고를 치기 마련이었으니.

 

둘의 입지가 위태로운 것은 클라레스로서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연로한 현 황제가 칩거에 들어간 이후로 제국의 모든 대소사는 젊은 황태자의 몫이었다.

 

수년간 훌륭히 나라를 이끌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그였지만, 아직 황제가 아닌 후계자의 지위에 머무르는 상황.

 

아바마마의 건강과 선위(禪位)를 핑계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황권을 위협하는 아귀 같은 귀족들 사이에서 권력을 다지려면 구원자라는 후광이 필요했다.

 

누구도 후계자의 자격을 의심하지 못할 확고한 위치가.

 

그러나 정작 출정식에 난입한 웬 평민 하나로 인해 계획은 어그러졌고, 차선책으로 둘을 궁전에 들여 피후견인으로 삼았다.

 

황가의 권위가 구원자와 성녀를 보증하니 더는 둘을 의심하지 말라는 뜻.

 

정치적으로는 출정식에서의 패배로 인해 흔들리는 황권을 구원자의 명성을 빌려 확고히 하려는 세련된 한 수였다.

 

물론 둘이 추태를 보인다면 곧 자신의 권위도 흔들리는, 말하자면 정치적 공동체로 한데 묶인 사이이건만.

 

이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등받이에 몸을 기댄 클라레스가 팔짱을 꼈다.

 

네 성정이 그런 것이야 더이상 잔소리 않겠다만, 누군가를 이끌고 싶다면 겉으로 보이는 행실에도 신경을 쓰는 것이 좋을게다.”

 

사람이 좋은 의도로 행동한다고 해서 그 뜻이 반드시 타인에게 전해질까?

 

그렇지 않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의도가 왜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 악랄한 자들은 오히려 자신의 입맛에 맞게 결과를 포장하기 바쁘다,

 

바로 지금 이 녀석을 둘러싸고 구원자와 황자를 동시에 실각시킬 기회를 엿보는 귀족파처럼.

 

너는 스스로가 소탈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구원자가 제 방 청소와 빨래를 직접 한다는 걸 들은 귀족들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해본 적 있느냐?”

 

황제파 귀족들은 어이없어했고, 귀족파는 역시나 평민 출신은 별수 없다고 깔깔댔더란다.


사교계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갈 때 자신의 약점을 공유하는 것은 하수다.

 

서로의 진의를 숨기고 약점을 내비치지 않는 것은 중수요.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것이야말로 상책이니.

 

시작부터 물어뜯기 좋은 신분적 약점을 던져준 이 녀석의 행동은 사교계에서 닳고 닳은 귀족들에겐 어이없는 실책이나 마찬가지다.

 

백성이 네가 구원해야 할 대상이라면, 귀족은 그 행보에 보탬이 될 지지자다.”

 

아무리 강인한 자라도 가시덤불을 홀로 헤쳐나가기란 요원할 일.

 

전 세계를 위협하는 마왕의 침공 앞에 모두의 힘을 한데 모으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니 귀족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조금의 틈도 내비치지 말고 항상 강인한 면모만을 보여라. 그들이 바라는, 또 원하는 구원자의 외면(外面)을 연기해라.”

 

네가 바라는 구원의 길을 걸어갈 힘이 되어줄 자들이니.

 

멍청한 놈은 아니니 이쯤 말하면 이해했겠지.

 

묵묵히 얘기를 듣던 레이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렵네요, 정치라는 건.”

 

간단하게 생각해라. 보고 싶은 걸 보여주고, 듣고 싶은 걸 들려주면 그만이다. 정치란 곧 연기지.”

 

전하도 연기를 하시나요?”

 

그런 것 치곤 우리한테는 할 말, 못할 말 다 하시던데.

 

생략된 뒷말을 알아들은 클라레스가 삐뚜름히 웃으며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은 법이지. 내가 아니면 어느 누가 너희에게 싫은 소리까지 해가며 이끌어 주겠느냐.”

 

시종이 새로 채워준 찻잔을 들어 올리며 클라레스가 본 화제를 꺼냈다.

 

돌아오는 건국절을 맞아 궁에서 연회가 열릴 것이다. 너희도 참석하도록.”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나요?”

 

초대 황제가 제국을 세운 기념일에는 제국 전역에서 큰 축제가 열린다.

 

궁전에서도 매년 성대한 연회를 열어 귀족들을 초대하는 것이 관례.

 

마왕의 침공 소식이 전 대륙을 흔들었지만 아직은 그 피해가 서쪽에 국한되어있기도 하고, 제국에서 가장 큰 기념일을 그냥 넘길 수도 없기에 올해도 많은 귀족에게 초대장을 돌렸다.

 

수도로 올라오고 처음 나가보는 연회에 레이의 얼굴 면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너희도라면.

 

루크레시아도 함께 가는 건가요?”

 

다른 건 몰라도 루크레시아가 귀족들과 만나는 것만큼은 아주 철저히 단속하시던 전하인데.

 

대대로 무도회에서 구원자의 파트너는 당대의 성녀가 맡아왔으니 별수 없지.”

 

실은 귀족파의 압박에 더는 둘을 사교계와 단절된 채로 궁에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만, 시기적으로도 나쁘지는 않았다.

 

슬슬 다음 출정을 대비할 때인데 이쯤에서 둘의 모습을 내비쳐 귀족들의 민심을 한데 모으는 것도 필요하니까.

 

큰 소란만 없다면 좋겠는데.

 

내리뜬 눈으로 앞을 살피니 레이가 찻잔을 입에 대고 벌벌 떨고 있었다.

 

저기, 전하. 무도회라 하시면.”

 

연회에 춤과 음악이 빠져서야 쓰겠느냐?”

 

큰일 났다.

 

살아생전 춤이라고는 한 번도 춰본 적이 없는데 그 커다란 홀에서, 그 많은 귀족 앞에서 춤을 추라고?

 

그것도 여자랑 둘이서?

 

이건 안된다. 나가서 또 사고라도 쳤다간 전하에게 무슨 욕을 먹을지 몰라.

 

애써 입술을 떼 목소리를 쥐어짰다.

 

전하. 죄송하지만 저는 춤을 출 줄 모르는데.”

 

그야 그렇겠지. 연회까진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배워 익히거라. 준비도 다 해뒀으니.”

 

그게 뭐 큰일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클라레스의 모습에 레이의 속만 타들어 갔다.

 

슬쩍 눈치를 보며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을 짚었다가.

 

설마, 전하께서 가르쳐주시는. , 물론 그럴 리 없겠죠.”

 

내가 미쳤다고 네놈이랑 깍지를 끼고 샹들리에 아래에서 스탭을 밟겠냐는 클라레스의 강렬한 눈빛에 허겁지겁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시선으로 욕을 하던 클라레스가 혀를 차며 표정을 풀었다.

 

샬롯이 가르쳐 줄 거다. 조만간 루크레시아와 둘이 찾아가 시간을 맞춰두도록 해라.”

 

고개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참으로 못마땅했다.


 한숨을 삼키며 얼핏 비치는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과 마주하고 한가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던가.

 

수도로 복귀한 뒤 서로 참 바빴으니.

 

한 번쯤은 먼저 말꼬를 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지내는데 불편한 건 없느냐?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온화한 말투에 레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웬일인지 전하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길래 혹시나 해서 대뜸 본심을 꺼냈는데.

 

그럼 저 연회 안 나가면 안 될.”

 

기각이다, 멍청한 것.”

 

아무래도 아니었나 보다.

 

 

 

웅장한 음악과 말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는 영광의 홀.

 

궁전에서 가장 크고 넓은 이 홀은 오늘 연회에 초대된 귀족과 사용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귀족들의 불안감을 달래는 것 또한 황가의 역할.

 

각별하게 신경을 쓴 요리와 음악에 많은 귀족이 걱정을 덜어내고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네, 월링턴 후작. 덕분에 전선의 장병들에게 질 좋은 옷을 입힐 수 있겠어.”

 

하지만 연회라고 황족이 마음 놓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제국 전역의 유력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는 흔치 않다.

 

이 틈에 하나라도 더 많은 귀족을 만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황족의 자세일 터.

 

당치 않습니다, 전하. 제국의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앞에서 겸양은 필요 없네, 후작. 제국을 위한 그대의 헌신이 작지 않음을 내 알고 있으니.”

 

의복의 보급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한 시름 놓았군.

 

그래, 혹시 원하는 게 있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라면 내 뭐든지.”

 

말을 잇던 클라레스의 예민한 청력이 홀 저편의 소음을 잡아냈다.

 

곧 음악이 멎고 여럿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실내에 가득 퍼졌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요.”

 

건국절에 사고라니, 그것도 이 중요한 시기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클라레스가 본래 화제로 돌아가려 했지만.

 

기사들이 곧 정리하겠지.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이네만.”

 

전하, 여기 계셨군요! 말씀 도중 실례합니다.”

 

서둘러 계단을 뛰어 올라온 한 황실 기사가 둘 사이에 양해를 구하고 끼어들었다.

 

허리를 숙이고 귓속말을 하는 기사의 보고에 클라레스의 표정이 점차 구겨졌다.

 

미안하네, 후작. 일이 생겨서 내 자리를 좀 비워야겠어.”

 

분노를 참는 목소리에 후작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공사가 다망하신데 제가 그 시간을 어찌 빼앗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전하.”

 

이해해줘서 고맙군. 내 추후 따로 서신을 보내겠네.”

 

걸음을 재촉해 홀 중앙으로 내려오자 소란의 중심이 눈에 들어왔다.

 

검보라빛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소녀가 머리가 희끗하고 이마가 벗겨진 노인의 팔을 물어뜯고 있었다

 

그 옆에 어쩔 줄 몰라 둘 사이를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검은 제복의 소년 하나.

 

레이와 루크레시아를 발견한 클라레스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게 지금 무슨 추태지?”

 

으르렁거리는 황태자의 일갈을 들은 주변 모든 귀족이 행동을 멈추고 예를 표했다.

 

팔을 뜯기던 노인도 애써 성녀를 떨쳐내고 허리를 숙였고, 그 와중에도 루크레시아가 있는 힘껏 정강이를 후리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질 뻔한 그를 보고 귀족들 사이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황태자를 의식하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정말이지,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이 많은 귀족이 보는 앞에서 이따위 촌극을 벌여?

 

그리고, 제길. 하필이면.

 

클라레스가 노인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본의 아니게 고초를 겪었군, 데밀 공작.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사과라니요, 전하. 이것이 어찌 전하의 책임이겠습니까. 잘못도 없으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참으로 난처합니다.”

 

말은 잘하는군. 겉으로야 내 체면을 세워주는 것처럼 들리겠지.

 

내가 곧 구원자와 성녀의 후견인이니 이 또한 내 관리 소홀 아니겠나.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이런 일이 생겨 미안할 뿐이네.”

 

속내는 황가의 관리 책임을 들먹여 내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것일 테고.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고단수다.

 

클라레스가 뒤에 선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도 어서 사과드리거라.”

 

. 죄송합니다, 공작님.”

 

우리가 사과를 왜 해요! 저 대머리가 먼저!”

 

닥쳐라.”

 

칼에 찔릴듯한 눈빛에 그제야 루크레시아도 불만스레 고개를 숙였다.

 

흡니드.”

 

당장이라도 끌고 나가 혼쭐을 내주고 싶지만, 일단은 정리가 먼저다.

 

심지어 이자는 닳고 닳은 귀족파의 수장이니 신중히 대해야 할 상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 다소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네. 나를 봐서라도 부디 너그러이 넘어가 주면 고맙겠군.”

 

허어.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거 참.”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으니 이제 실익을 얻어낼 차례.

 

곤란하단 표정으로 셋을 번갈아 보는 공작의 눈이 요사스레 빛났다.

 

두 분 모두 아직 어리시니 그럴 수도 있지요. 다만 정무와 구원자님의 교육까지, 과도한 업무가 전하께 부담이 되는 건 아닌가 우려스러울 따름입니다.”

 

그 전부를 수행하기에는 네 능력이 모자란 듯하다.

 

실제로 이런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느냐.

 

소신들이 황가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만.”

 

너구리 같은 놈. 역시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군.

 

요컨대, 구원자와 성녀를 자기들에게 넘기라 이건가.

 

그럼 여기선 어떻게 받아친담.

 

마음은 고맙다만 발언에 유의하는 편이 좋겠네, 공작. 구원자와 성녀의 관리는 대대로 황가의 고유 권한이었거늘, 자칫하면 공작이 황가의 권위를 침범하려는 것처럼 들리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공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데밀 가()가 오랜 세월 황실을 충심으로 섬겨왔음을 온 대륙이 아는데 그런 오해가 있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오해라, 과연 어떨는지.

 

아바마마께서 쓰러지셨을 때 너희 귀족파가 섭정으로 밀던 사람이 대체 누구였더라.

 

물론 그렇겠지. 아무튼, 이해해줘서 고맙네. 그럼 난 이만 가보지.”

 

대충 정리되었으니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다.

 

이 녀석들의 잘못으로 저자세를 취해야 하는 지금, 괜히 더 설전을 주고받다가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니.


인파의 경계에 서 있던 알렌을 발견하고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 연회의 뒷정리는 맡기지. 그리고 너희는.”

 

뒤에 서 있던 레이와 루크레시아를 바라보는 클라레스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따라와라.”

 

이를 갈며 읊조린 분기 어린 중얼거림에 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