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윽.


눈앞의 소녀에게 티켓 두장을 건넨다.


"오? 이게 뭐에요, 쌤?...영화티켓?"


"정답이에요, 미리네 양."


"...두 장? 그렇다면...쌤?! 이거 설마 데이트?! 벌써 그렇게 진도를...!"


"하하, 맞아요. 커플석이랍니다."


"꺅! 쌤도 참! 전 아직 학생인데, 이렇게 침 발라두시긴!"


"하하하, 잘 봐주세요. 미리네 양. 커플석... 으로, 두 장인거에요. 총 네 좌석입니다."


[나이트 퀘스트 H열 12커플]

[나이트 퀘스트 H열  34커플]


배배 꼬던 몸을 멈추고 손에 쥔 티켓을 펼쳐 보니 티켓마다 커플석 좌석으로, 거진 4인석이라 봐도 무방했다.


"에? 아..."


"이번에 새로 개봉한 만화영화인데, 기대작이라고들 하던데요? 보니까 평점이랑 평론가들도 좋은 반응이었어요."


"미리네 양에, 정다인 양, 진보라 양, 김철수 군까지 하면 네 명이잖아요? 분명 즐거운 경험이 될 거에요."


"잉? 그럼 쌤은요? 쌤은 안보셔요?"


"저는 이미 시사회에서 봤답니다. 과연 흥미롭더군요. 거기서 주인공이..."


"아아아아, 쌤요! 스포일러는 안돼요!"


소녀가 달려들려 들자 바로 입을 멈춘다.


"하하하,알겠어요. 하지만 빨리 영화 얘기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한데요? 빨리 보고 오지 않으면 스포일러 하고 싶어질 거에요."


"알겠어요! 빨리 얘들이랑 보고 올게요. 그리고..."


"그리고요?"


"...그, 쌤이랑 데이트한다고 오두방정 떨었던 거는, 비밀로...해주세요..."


얼굴을 티켓으로 가리는 소녀의 귓볼은 붉었다.


하하하.


***




"...크으-! 완전 쥑잇다! 안카냐, 철수야?!"


"흔들지 마세요... 그래도 재밌긴 했어요. 러닝타임이 두시간이 조금 안될텐데 기승전결이 깔끔하던데요?"


...솔직히 진짜 재밌었지. 퀄리티도 좋았고..


"'재밌긴 했어요'~? 이건 그냥 재밌는기 아이다! 그야말로 킹! 왕! 짱인기라?!"


"아,아,아,아, 알겠어요. 진짜, 정말, 재밌었어요. 주인공이 기사 한명뿐이라 단조로울줄 알았는데, 동료들과 주변인들로 주인공의 다른 면모들을 잘 보여줬네요."


그제서야 만족했는지 흔들던 팔을 풀어 주는 미리네 누나는 금방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기사찬양을 시작했다.


"그래! 그기 다~ 대박인기라! 검술 천재라고 하지만 그 뒤에 숨은 노력과, 동료들과의 여정 중에도 자신의 정의를 갈고닦으며, 공주와의 맹세를 잊지 않고 마침내 구하는 기사도! 크으~쥑인다 안카나 증말!"


"...응, 죽였어."


엣?


"보라 누나? 누가 진짜 죽었어요?!"


"..음악. 출정식 때의 BGM이랑 최후의 전투에서의 BGM이 같은 BPM이랑 베이스를 써서 출정식을 연상시킨 점, 인상 깊었어."


"그 외에도 탐험 중에도 평화로운 멜로디 안에 점점 빨라지는 비트로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듯한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 점이라든가. 좋았어. 여러모로."


"...보라 니 설마 음악만 신경 쓴 기가? 기사님은?! 정의의 싸움은?! 설마 음악만 듣고 안 본 기가?!"


"...잘 들었어."


"진보라 니! 봤다고 말해! 봤다고 말하는기다! 보고도 안 보는기는 그, 그, 안 되는기라!"


미리네 누나의 오열은 보라 누나한테는 들리지 않나 보다...



"하하...미리네 누나는 되게 인상 깊었나 보다. 다인이 누나는 재밌게 봤어요?"


"후훗,  나도 좋았어. 몬스터 디자인들이 참 멋지던데?"


"...아. 몬,스터요.."


"그럼~아무래도 전체이용가라 그로테스크한 연출이나 유혈은 거의 없었지만 관절설계나 텍스쳐에서 인상깊은 첫인상을 심어주던데?"


"근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그 느낌을 살려주면서 세계관에서 튀지 않는 디자인이 제일 좋았어. 같이 봤으니 기억나지? 그 초반지역에 애벌레 보스? 꿈틀꿈틀 움직면서도 강화됐다며 단단한 느낌이 드는 질감표현이 대단하지 않았어?"


"아, 으...닭살 돋았어요..."


"그치? 걔 하나만이 아닌, 중간중간 스켈레톤이나, 움직이는 나무라거나, 움직이지 않는 물체가 움직이는 점에서 오는 불쾌감을 적절히 조절한 게 노련함이 보이지 않아?"


"아, 아하..."


"철수! 이리 와본나!"


"아! 미리네 누나? 왜요?"


...미리네 누나가 불러줘서 살았다. 보라 누나랑 이야기는 끝난건가?


"음...일케? 아니,  이릏게...던가? 철수 니 기사 서임식 장면 기억나나?"


"처음에요? 아니면 공주님을 구하고 나서요? 뭐...둘다 같은 행동이었죠. 기사가 무릎 꿇고, 공주가 칼을 어깨에 올리고, 대사가..."


아, 기억났다.


"그대는 앞으로 왕국의 수호기사로서, 왕국의 하나뿐인 공주인 저를 수호하며 왕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겠습니까? 하고, 그러면 기사가 '네, 맹세합니다.' 하면 칼로 어깨를 가볍게 치며 '이제부터 그대는 나의 수호기사입니다.' 했었죠."


"이열~철수! 점잖은척~ 하면서, 다 봤네! 이 누나는 기쁘다!"


아잇, 괜히 부끄럽게, 그렇게 쳐다봐요...

"...그래서 이건 왜요?"


"아, 그래. 철수! 요 앉아봐라! 잠깐이면 된다!"


드르륵.

내가 가볍게 앉자 미리네 누나가 평소 들던 빗자루 솔 부분을 들이미려다 한바퀴 돌려 손잡이 부분을 내 어깨에 대었다.


"흠, 흠! 어... 철수 니는, 왕...음...에이."


두어번 더 헛기침을 하더니, 


"철수, 그대는 세계의 수호기사로서,  눈앞의 불의를 모른체하지 않고, 우는 사람을 지나치지 않으며, 정의를 위해 싸우고 악을 물리치고 온 세상에 평화가 올 때까지 헌신하는 기사가 될 것을 맹세합니까?"


응?


"틀렸어...대사. 개사한거야?"


"보라 니가 맞다. 내는, 그리 생각한다. 영화니까 왕국만 지키던거지,  왕국만 지키기에는 세상이 쪼까 많이 넓다 아이가? 왕국만 지키면, 왕국 밖은 누가 지키나? 쪼잔하이 공주만 지키지 말고, 제2,제3의 공주들도 지키는 왈드-클라스 기사가 되는게 좋지 않긋나! 내는 그리 생각한다!"


"후후, 미리네는 생각이 깊네. 역시 귀여워."


"이기 머가 귀엽다꼬! 내는 하나도 안 귀엽다! 멋지지!"


"응. 멋진 말이었어. 미리네는 귀엽고."


"악!안 귀엽다꼬!"


세계를 지키는 기사.

불의를 지나치지 않는 기사.

권선징악의 기사.

...멋진 것 같기도.


"에이,  분위기 깨지구로! 자,  철수! 여기 올려다본나! 눈 마주보고! 네에-해야지 서임식이 완성 아이가!"


"아, 네. 누나."


누나를 쳐다보려 고개를 올리자,

...어? 역광인가?


왜...


미리네 누나 얼굴이...


안보이지?


끼익.


끼이익.


덜커덩.


"윽?!"


옆구리가 쑤시다. 어? 미리네 누나는?


덜 깬 눈을 비비며 주변을 돌아보니 깨지고 부서지고, 점등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사무실이 보였다.


"...미리네 누ㄴ..?"


굵다. 중후한 목소리가 내 목을 긁으며 나왔다.


튀어나온 배. 두꺼운 팔뚝. 금 간 안경 너머로 보이는 풍경.


"...꿈이었구나."


에구구, 허리야.


"이건...침식체가 지나간건가?"


운 좋게 침식체가 보지 못하고 지나쳐간 것일까. 다행이군.


"윽, 어서 나도 대피해야..."


쿠와아아악-!


"침식체?! 어어...서둘러야..."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짐승소리에 서둘러 잔해를 딛고 일어선다.


문을 찾아 둘러본 시선의 끝에는 깨진 청소도구함이 보였다.


더 정확히는, 틈으로 주황색 빗자루 손잡이가 보였다.


...꿈에서 본, 미리네 누나가 애용하던 것과 똑 닮은.


-눈앞의 불의를 모른체 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싸우고

-평화가 올때까지 헌신하는

-기사가 될 것을 맹세합니까?


"...허."

왜 조금 전에 꾼 꿈이 떠오르느 걸까.

기사라니, 그런 걸 꿈꾸기엔 늙고, 살쪘는데.


-자! 네에-해야지!


점점 빗자루가 가까워진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벌어진 틈에서 꺼낸 빗자루를,


가볍게 솔 부분의 목을 쥐고 어깨를 두드린다.


툭.


"..네,에."


"옳지! 니는 앞으로 세계의 수호기사인기라!"


화들짝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허어.


"..."


다시 빗자루를 청소도구함 걸이에 잘 꽂아 걸고, 발을 돌린다.


크와아악-!!


침식체의 소리가 멀어지는 쪽이 아닌,


더 가까이 들리는 곳으로.


등뒤로 휘날린 정장은,


틀림없이, 기사의 샛푸른 망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