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시선이 집중되는 앞자리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뒷자리를 선호하는 학생, 하지만 교실에 들어서는 모든사람의 주목을 받을 만큼 화려한 붉은 머리가 얼깃설깃 섞인 금발 미소녀, 

미리네는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학업에 그리 큰 뜻이 있는 학생도 아니었다. 


미리네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색채는 지루한 수업을 강제로 듣는 낮보다 그녀가 푹 빠져 있는 게임을 할 수 있는 밤에 더 선명해졌다.


그런 미리네에게 학교란 장소가 게임에 밀려 부족해진 수면시간을 보충하는 곳이 되는건 당연했다. 마치 rpg게임 속에서의 여관처럼. 


그 날도 그녀는 평소와 같이 꾸벅꾸벅 졸면서 어제 못 다 깬 게임의 보스를 깨기위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거기선 패링말고 구르기를 했어야 했는데.

..좀 더 리치가 긴 무기를 들고 트라이 해야 하나?


어쩐지 오늘따라 주변이 시끄러운 것 같다.

미리네는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 베개대용으로 뭉쳐둔 담요 속으로 얼굴을 더 깊게 파묻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새로운 기간제 선생님이 온다고 했던가.


잘생긴 남자선생님이면 좋겠다고 떠들어대던 친구녀석들의 주접이 재차 떠오른 미리네는 피식, 하고 웃었다. 


‘쌤이 잘 생기믄 지가 우짤긴데, 꼬시기라도 할기가.’


어차피 선생은 어른이고, 어른은 다 똑같았다.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틀렸다, 나쁘다라고 말하며 이 길만이 옳다고 함부로 말한다.


하물며 그녀의 부모님마저 그녀가 게임하는 것을 마땅찮게 보는데, 

‘교육자’ 라는 명목으로 체벌과 폭언을 허락받은 교사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미리네의 오늘 목표는 그냥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 hp만 회복하고 갈 수 있게끔 새로 올 교사에게 자신이 건드려서 좋을 일하나 없는 학생이라는 이미지를 일찌감치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담요의 부드러운 촉감과 포근하고 익숙한 냄새, 서서히 백색소음이 되어가는 교실의 웅성거림에 취한 미리네가 슬슬 꿈나라에 입국하려던 쯤, 막 적응되어 적당한 수준으로 술렁이던 교실이 쥐죽은듯 조용해지더니 이내 폭발적인 탄성이 터져나와 그녀의 입국심사를 

훼방놓았다. 


“..가스나들 윽수로 시끄럽네. 아이돌이라도 왔나?”


미리네가 투덜거리면서 담요에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헝클었다. 


”야, 야, 리네야. 인나봐라. 새로온쌤 미칬다.”


얼빠로 소문난 미리네의 옆자리 친구가 말했다.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듯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 조용히좀 해 봐라, 잠좀 자구로...”

“니 지금 디비 잘때가 아니다! 첫인상 조질끼가?”


그게 바로 미리네가 원하는 것이었다만, 친구도 나름 그녀를 신경써준답시고 꺼낸 말인 것을 알고 있기에 미리네는 마지못해 고개를 슬쩍 들고 새로 온 교사가 서 있는 교탁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학업으로 팍팍해진 여고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만큼 잘생긴 외모,

두세걸음이 멀다하고 스카웃제의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비율과 완벽에 가까운 수트핏을 자랑하는 연예인급, 아니 연예인 이상으로 놔도 손색없는 미청년이 칠판에 그의 이름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왐마..”

“봐라, 내 말이 맞제? 미친거 아이가? 와, 이 촌구석에 조각상이..“


흰색 분필을 쥔 손엔 딱 보기 좋을 만큼의 핏줄이 도드라져 적당한 남성미가 느껴졌고, 조각같은 얼굴에 언뜻언뜻 번지는 미소는 뭇 소녀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남성보다 게임에서 공략해야 하는 남쪽 마왕성에 관심이 더 많은 미리네마저 잠시나마 혹하게 만들 정도로, 새로 온 교사의 외모는 특이점에 가까웠다. 


하지만 미리네에겐 그 관심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이제와서 굳이 잘 보일 생각도 없을뿐더러, 괜시리 어줍잖게 선생 눈에 들었다가는 향후 hp회복에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까. 


미리네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며 호들갑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옆 자리 친구의 야단법석에 건성으로 호응하면서 다시 책상위에 엎드리려 했다. 


“-거기, 예쁜 금발머리 학생.”


왁자지껄 시장바닥같던 교실은 선생의 차분하게 내뱉은 한 마디에  눈동자 약 80여개가 미리네에게 집중되었다. 


“저, 저요?”


어리석은 질문이란걸 미리네도 잘 알았다.

이 교실에 금발머리는 그녀 혼자였으니까. 


“그래요. 이 교실에서 유일하게 나랑 눈을 마주치지 않은 학생.”


선생이 미소지었다.

선선한 가을바람같은 미소가 미리네의 가슴 안을 파고드는듯 했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할까요?“


학생들의 원성이 빗발쳤지만, 선생은 뚝심있게 판서를 시작했다. 

다들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혹 선생 눈 밖에 날세라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교과서를 펼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미리네는 그 광경을 제대로 감상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계속해서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뭐라고 캤더라?

예쁜 금발머리 학생? 금발머리 예쁜 학생?

..후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 내, 지금 찍힌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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