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89945004


“이 재수없는 기집애, 관심 없는 척한게 첨부터 다 설계였나?”


옆자리 친구가 질투섞인 목소리로 미리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일마 이거 아주 지능적이구마, 내도 니처럼 도도하게 굴걸 그랬다 아이가. 저렇게 잘 생긴 쌤이 관심 못 받은 건 첨이라 ’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전략으로 접근한기가? 와, 이거 완전 불여시가 따로 없네. 꼬리 어따 숨깃노?“

“놔라 마! 꼬리는 무신 꼬리가? 그, 그런거 아니거든?”


그래봤자 어른일 뿐이다.

게임으로 밤을 새고 학교에서 자고 있으면 못 마땅해 할 어른.

어차피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공부, 공부 못을 박아 댈 어른.

오늘도 첫 만남부터 학생들 말 다 씹고 수업을 강행할 정도로 기가 쎈 어른.


지금껏 그녀가 만난 어른들은 모두 그랬었다.


게임에서 나온 여자주인공 머리색이 아름다워서 머리를 금색으로 물들였을 뿐인데 반항하냐느니, 딱 봐도 문제아라느니 하며 사람의 취향조차 무시하고, 멋대로 자신이 판단한 유형으로 사람을 몰아 세우는 어른들을 지겹도록 마주했던 미리네는 더 이상 어른들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마, 또 관심없는 척 하나? 와, 극한의 컨셉질 윽수로 독하네.”

“그런거 아니니까 제발 주디 좀 닥치라..”


미리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간 밤에 3시간밖에 못 잔 터라 곧 잠기운이 몰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몽롱함과 함께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수업이 끝나고 쉬는시간이 됐다는 종소리가 들려서 눈을 뜬 미리네는 옆 자리 친구가 꼴 같잖게

방실방실 웃고 있는 것을 마주하고는 속이 메슥거리는 것만 같았다.


“아 씨.. 인나서 첨 보는게 재수없구로.. 와 그리 쪼개는데?“

”리네 니 진짜 디지고 싶.. 아니다, 내가 참는다. 어쨌든 니 덕분에 쌤이랑 단둘이 얘기했다아이가.“

”뭐고, 니 내 팔았나?“


미리네는 기지개를 키며 하품과 동시에 말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섭섭하디. 별건 아이고, 쌤이 수업 다 끝나고 좀 오란다.“

”내를?“


눈이 휘둥그레진 미리네가 싸한 느낌이 들어 재차 물었으나 친구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부럽다는 눈빛만을 보내며 고갤 끄덕였다.


”아이 씨.. 수업좀 열심히 들으라고 잔소리 할라는 갑네.“

”화나신건 아인것 같던데, 하튼 내는 분명히 전했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게임을 하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미리네가 잔뜩 불만스러윤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주변 친구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이, 첫날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영 고까운가 보다.

한숨을 푹 내쉰 미리네는 진짜 자퇴라도 해야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다섯시, 교무실 앞을 서성거리던 미리네가 각오를 다진 듯 심호흡을 한 후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쌤, 저 불렀어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교무실엔 새로온 선생 한명 밖에 없었고 

한창 바쁘게 문서더미에 집중하다 미리네를 확인한 선생은 또 다시 여심을 흔드는 미소를 싱긋 지어보였다. 


“어서 와요, 리네 양.”


’리네 양‘이라니, 이런 낯뜨거운 호칭을 하는 스윗가이가 현실속에 존재했구나하는 생각이 든 미리네가 선생의 눈을 자연스레 피했다.


“진지하게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는데 말이죠.“


아아, 또 시작이다.

넌 앞으로 뭐가 될거냐, 꿈은 없냐 로 시동거는 어른의 오지랖.

미리네는 언짢은걸 티내지 않으려 애써 웃으며 선생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 너무 이상하게 듣진 말고..“


대체 얼마나 거창하고 장황한 얘기를 하려고, 이리도 뜸을 들일까.

미리네는 괜히 애꿎은 손톱만 바라보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 머리 말인데, 혹시 스트리트 카운터의 넬리 머리색 아닌가요?“


처음 ‘머리’ 얘기가 나왔을때는 움찔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른인 선생의 입에서 ‘스트리트 카운터‘ 가, 거기에 그녀 머리색의 

모티브가 된 ’넬리‘ 의 이름이 튀어나올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미리네가 하품할때보다 더 크게 입을 쩍 벌리고 경악했다. 


“쌔,쌤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모양 빠지게 말을 더듬었지만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주변 친구들조차 모르는 게임을 알고 있는 어른을 마주했으니.


“넬리 맞지? 하, 그 붉은머리칼이 군데군데 섞인 금발머리가 달리 또 있나 해서 물어볼까 말까 고민했는데 다행이군.“

”쌤이 그걸 어떻게 아셨냐니까요?!“


미리네는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큰 소리를 빽 내지르고는 당황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 게임, 저도 참 좋아하거든요.“

”쌤이 게임도 해요?“

”물론이죠. 리네 양은 그 게임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말해 뭐해요, 제 인생겜! 격겜이라 진입장벽이 쪼매 높긴 해도요, 원래 초보는 맞으면서 배우는거 아니겠어요? 캐릭들도 매력적이고 

게임성도 좋고, 맨날 최소 3판씩은 한다 아입니까.”


너무 신나서 빠르게 말해버렸다. 

미리네는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고 선생의 눈치를 살폈다. 

대화를 위해 던진 미끼를 너무 보기좋게 물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선생은 왠지 기쁜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네 양, 좋아하는 걸 얘기할땐 별빛처럼 반짝이는군요. 아름다운 미소에요.“

“아아니, 쌤은 그.. 어휘나 호칭선택이..“


..사람 참 남사시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마.


미리네는 느슨하게 입은 스카쟌 소매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아무리 그녀라 할지라도 이상적으로 잘 생긴 남성과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느끼한 멘트를 듣는 것은 버티기가 어려웠다.


“흠. 리네 양, 일단 면담.. 이걸 면담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까진데, 끝나고 오락실 가시나요?”

“네? 고작 그런거 물어보려고 부르신거에요?“

”하하하, 제가 원체 궁금한건 못참는 성격이라서, 그리고 좋아하는 것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알고 있으니까 

그 감정을 리네 양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대체 이 선생님은 뭐 하는 사람일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봤을때 이 선생님은 평범한 어른과 달랐다.


그렇다고 경계심이 누그러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다 안다는 듯, 이해한다는 듯 접근해서 조금 마음을 열었다 판단되면 ‘인생의 선배’ 로서 ‘진로를 위한 조언’ 을 늘어놓던 이가 

여태까지 얼마나 많았던가.


“쌤, 저 진짜 면담 끝났어요?”

”속고만 살았나 보군요, 리네 양은.“


미리네는 석연찮다는 듯이 주섬주섬 가방과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선생님도 일어나서 문서더미를 검정색 가죽 가방에 되는대로 쑤셔넣기 시작했다. 


“쌤도 퇴근 하세요?“

“네. 안내하시죠, 리네 양.“

”어, 어딜?“

”오락실.“





- 다음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89945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