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89945049


‘이 선생이 지금 내랑 장난하나.’


오락실을 다니는 어른이라니 코웃음도 안나온다.

나는 너를 이해해- 라는 식으로 학생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친해진 후에 간섭하고 조언하려는 고리타분한 방식의 접근법이겠지.


미리네는 불신이 가득찬 눈빛으로 흘깃 선생을 처다보곤 오락실로 향했고, 

선생은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뒤따랐다. 


“여기가 요 동네서 가장 큰 오락실이다 아입니까.”

“음, 정말 꽤 크군요.”


선생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오락실을 살폈다.

또 어딘가 불량스러운 부분이 없나 스캔하는 걸까. 

결국 이 선생도 오락실이라는 거룩, 고결한 결투장을 문제아들의 아지트쯤으로 보는 많은 어른들 중 하나인걸까.


하지만 선생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은 미리네의 예상밖이었다.


“어때요, 리네 양. 스트리트 카운터 한 판 하실까요?”

“..뭐라꼬요?”

“한 수 가르쳐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하아, 쌤. 이 바닥에 오신지 얼마 안돼서 잘 모리시나본데..“


미리네는 가소롭다는듯이 손사래를 쳤다.

넬리까지 미리 공부해온 것은 어른치고 높은 점수를 줄만 하지만,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게임퀸 미리네에게 

승부를 거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지가예, 이 동네에서 1등입니다. 어쩌면 세계 1등일지도?”

”리네 양.“


선생은 손목시계를 풀어 바지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쫄?“


빠직.


”앉으이소. 쌤, 미리 말씀드리는데 제 10단 콤보엔 자비가 없어예.”


조이스틱을 움켜쥔 미리네의 몸에 생기가 돌아왔다.

캐릭터선택창부터 미소가 절로 떠오르고, 이제야 비로소 살아있단 느낌이 드는듯 했다. 


자, 어떤 아로 농락해 드릴까예, 쌤?










”이.. 이칼리가 없는데?“

”리네 양, 제법이군요. 하마터면 질 뻔 했어요. 하하.”


난생 처음으로 스트리트 카운터에서 패배를 맛본 미리네의 손발이 벌벌 떨렸다. 


’아까웠다고? 마지막 판은 거의 퍼펙트 패배였다아이가!‘


손 하나 꿈틀 하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할 것만 같은 압도적인 무력감, 그걸 선사해주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입장으로 뒤바뀐 

처지가 믿기지 않다가도 미리네는, 


“쌤! 한판 더 해요! 와, 밥 먹고 겜만 하셨나, 와 이리 잘하는데?”


불타오르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과 열을 내며.


“하하, 언제든지요. 리네 양과의 승부는 재밌어요. 정말 잘하지만.. 결국엔 제가 이기니까요.”

“이번엔 다를낀데예!“


신이 나서 호승심을 부딪혀 본 미리네였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하지만 3:0에서 3:1, 3:2까지 따라잡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낄거라곤 상상한 적도 없었다.


”히야.. 쌤 진짜 잘하시네예. 샌님인줄만 알았는데.“

”리네 양은 정말 발전이 빠르시네요. 조금만 더 했으면 졌겠어요.“


이겨보겠다고 열을 올리느라 후끈 달아오른 미리네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땀을 훔쳤다. 

체육시간때보다도 더 많은 땀을 흘린 것만 같았다. 


사실 미리네는 최근들어서 점점 그녀의 최애게임인 ‘스트리트 카운터’ 에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업적이란 업적도 전부 따낸데다 압도적인 미리네의 실력에 참패한 상대들이 퍼뜨린 명성탓에 지레 겁먹어 진심으로 

맞부딪혀 오는 호적수도 없고, 그렇다고 봐주면서 하자니 재미를 느낄 수가 없는 지겨움의 반복.


정점에 오르고 나니 곁엔 아무도 없었다.

절대자의 고독을 느끼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타임어택뿐,

하지만 1위부터 20위까지 전부 그녀의 기록으로 덧칠하고 나서는 그마저도 질려버려 예의상 오락실에 들러 3판정도 즐기던 와중에 

새롭게 등장한 도전자, 아니 공략할 가치가 있는 끝판왕의 존재는 지금껏 잊고있던 향상심과 열정을 일깨워주는 트리거가 된 것이다.


미리네는 여태까지중에 가장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리네 양. 고마워요.”

“예? 뜬금없이 무슨?“


‘내가 너무 모냥빠지게 쪼갰나?’


”제가 만든 게임을 이렇게 신나게 즐겨줘서.“


기분좋은 패배감을 만끽하던 미리네는 선생님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고, 머릿속에서 그가 말한 단어들의 나열이 무슨 뜻인지 

깨닫고 나서 펄쩍 뛰어오르며 경악했다.


“쌔, 쌤이 맹글었다꼬요? 이 게임을?”

“네. 유명하지도 않은 게임이라 아는 사람도 몇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열성팬이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만들길 잘했단 생각이 드는군요.”

“아으, 어으으..”


감격이 북받쳐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미리네의 세상의 색채가 한층 더 선명해졌다.

그녀 눈에 비친 선생님의 얼굴이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은 덤이다.


“..우,우야노..?”


역시 미리네 눈 앞의 선생은 늘 그녀를 실망시켜왔던 어른들과는 많이 달랐다. 

게임 이외에도 그녀를 이토록 가슴설레게하는 것이 있었나?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군요.”

“엑.”


창밖엔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인 노을이 커튼처럼 깔려있었다.

학교가 마치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게임삼매경에 빠진지 오래였던 미리네에게 노을이 지는 하늘은 퍽 생경한 볼거리였다.


“하늘이 이리 이뻤나..”

“아름답죠?“

”꺅? 아 쌤! 쫌!“


불쑥 그녀의 옆에 달라붙은 선생님탓에 화들짝놀란 미리네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거리를 두기위해 뒷걸음질쳤다.


어깨가 살짝 닿았지만, 그게 질색할정도로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쪽에 더 가까운 심리였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남자향수 냄새도 좋았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땀을 좀 흘린 상태였다는 것이고, 행여 자신의 몸에서 땀냄새가날까봐,

끈적거려서 선생님을 불쾌하게 할까봐서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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