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89945293


얼굴이 저녁노을보다도 붉게 물든 미리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평소 활달하고 선머슴같은 그녀라고 하기엔 이질적인 행동이었다.


“리네 양, 그럼 가시죠. 집까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아,아니 괜찮아예! 혼자 갈수 있..”

“선생님은 학생을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선생님은 미소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고 한사코 거부하던 미리네는 결국 선생님의 고집을 꺾지 못해 그의 뒤를 따랐다. 


미리네의 집을 향해 걷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점차 잦아들고, 이따금씩 들리는 풀벌레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무슨 말을 할때 깊이 생각하지 않던 평소의 미리네와 다르게 지금 그녀는 숨을 코로쉬어야 하는지 입으로 쉬어야 하는지, 가만히 있을때 

혀를 어디에 두어야하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옆자리 친구에게 얼빠니, 금사빠니 하고 놀려대던 자신이 이렇게 순식간에 마음을 뺏길줄은, 미리네는 소리없이 ‘쌤’ 이라고 입술로만 

불러보아도 가슴속에 번지는 따뜻한 설레임이 낯설지만 어딘가 기분 좋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기만 해도 즐겁다던 선생님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 

미리네는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이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야노, 내 진짜 쌤 좋아하게 됐나보다.’


“..네 양.”


목소리도 멋있다. 내 진짜 우야노..


”리네 양!“

“힉, 네!”


미리네는 처음으로 듣는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왜 그런 어조로 그녀를 불렀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익숙했던 귀갓길에 불청객들이 스멀스멀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개? 

들개라기엔 개와 비슷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구의 이형체가 네마리, 크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미리네와 선생님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리네 양, 제가 여길 막는동안 전력으로 달릴 수 있겠어요?”


미리네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또래 남자애한테도 지지 않는 달리기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선생님을, 이제 막 연모하게 된 선생님을 두고 도망가긴 싫었다.


”괜찮습니다, 리네 양. 학생을 지키는건 선생님의 의무에요.“


선생님은 미리네를 안심시키려는듯 싱긋 웃으면서도 기분나쁘게 생긴 물체들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우욱..!”

“리네 양, 더 늦기 전에 빨리 도망가세요!”


속이 메스꺼워진 미리네가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가 빙빙돌고 주변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하지만 왜일까, 여기서 달아나면, 다시는 선생님을 볼 수 없을것만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미리네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리고 그녀와 선생님을 독대하게 해준 넬리라는 캐릭터는 위험이 닥쳤을때 도망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리고 미식거림이 잦아든 미리네가 당장이라도 덤벼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들개새끼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을때, 

그녀의 손목에 찬란한 빛이 둘러졌다. 





“야.. 이 문디들아.. 당장 쌤한테서 안 꺼지나!”


다 죽어가던 미리네가 크게 고함지르자, 놀란 것은 이형체들만이 아니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던 선생님도 미리네를,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보고 놀라움을 표했다. 


“리네 양, 손목에..”

“내도 잘 모르겠는데, 갑자기 윽수로 번쩍번쩍해가, 지금이라모 어떤 문디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네예.”


그렇게 호언장담한 미리네는 땅바닥에 놓여 있던 길다란 나무막대를 주워들었다. 


할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미리네가 나무막대를 쥔 손에 힘을 주자, 나무막대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왐마.. 내가 했지만 윽수로 까리하네.”


이형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존재가 성인 남성에서 금발머리 여고생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깨닫고 일제히 덤벼들었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와 나무막대에 서린 빛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머리칼, 

얄쌍하게 드러난 발목과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볼을 물어뜯을 기세로. 


하지만 미리네에겐 그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원래부터 머리쓰는 일보단 몸쓰는 일에 능하던 그녀였지만, 이전엔 느낄 수 없던 새로운 힘이 그녀의 몸 속에서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뛰어올라 첫번째 아가리를 피해낸 그녀는 분홍색스니커즈로 그 대가리를 밟고 한번 더 높이 도약하여 

마검이 된 나무막대를 휘둘러 첫번째 희생양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클린 히트.

급소를 맞았는지 그대로 축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이형체를 바라본 미리네의 손에는 여전히 죽여주는 타격감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첫 실전 전투에 익숙해기도 전에 달려든 나머지 두개의 흉포한 이빨에 치맛자락을 희생하긴 했지만, 가볍게 굴러 순식간에 

균형을 잡은 미리네는 양손으로 나무막대를 강하게 움켜쥐고 베팅센터에서 하던 느낌대로 이형체의 다리에 풀스윙을 때려박았다.


미리네의 손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강하게 들어간 타격에 이형체는 버티지 못하고 일도양단 되었고,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마지막 한마리를 꿰뚫는 일격으로 마무리짓자마자 그녀는 긴장이 풀려 주륵, 녹듯이 주저앉았다. 


잠깐, 들개새끼는 총 네마리 아니었던가?

퍼뜩 정신이 든 미리네가 나머지 하나의 자취를 찾아 눈동자를 굴린다.

제발 선생님이 무사하기만을 바라면서.


“리네 양. 고생하셨어요.”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조급해진 미리네의 심장을 감싸안듯이 위로하고 진정시킨다.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미리네는 제일 커다란 대장격 한마리의 시체위에 걸터앉아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있는 선생님을 확인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쌔,쌤..!”

“리네 양이 도와준 덕분에 안 다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군요. 학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아채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미리네는 울다가 쿡쿡 웃었다.

엄한 곳에 털이 나도 좋다. 그녀가 선생님을 지켰으니까. 


팔다리, 손 발이 하나도 움직이지 않아서 미리네는 선생님의 품에 안긴채로 늘어져있었다.

부끄럽지만, 그만큼 행복하기도 했다. 

이미 깜깜해진 밤 하늘에 별이 보석처럼 수놓아져 빛났다. 


선생님은 미리네를 진정시키겠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손길이 그녀를 더 흥분시키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리네 양.”

“어윽? 네?”

“조금 솔직한 얘기를 해도 될까요?”

“뭐,뭔데예?”


선생님은 망설이다가 곧 각오를 다진듯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사실 리네 양과 제가 오늘 마주친 생물들은 ’침식체‘ 라는 녀석들입니다.”


들개가 아니었구나.

미리네는 그 생소한 단어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얘기라길래 괜시리 기대한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면서.


“그리고 저는, 그 침식체로부터 세상을 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풉, 쌤이요?”


미리네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선생님은 웃고 있었지만, 장난을 치고 있진 않은 눈치였기 때문이다.


“네. 그리고 침식체를 토벌하기위해서는 ‘카운터’ 의 힘이 필요하죠.”

“카운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아앗?”

“네. 스트리트 카운터의 능력자들을 총칭하던 그 카운터 맞습니다.”


선생님은 이 곳, 부산까지 카운터 모집을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전입한 학교에 카운터는 보이지 않았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며칠 안 가 다른 곳으로 떠날 예정이었다고도.


“리네 양의 손목에 워치, 보이십니까?”

“워치요?”


분홍색 스트랩, 흔들면 노란색 빨간색 파랑색으로 점등하는 팬시한 손목시계는 분명 미리네 기억에 없는 물건이었다. 


“에엑? 이기 뭐꼬?”

“카운터로 각성한 리네 양의 카운터 워치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까 말했듯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카운터를 모집한다고 했었죠.“


좋아하는거, 잘하는 거라곤 게임밖에 없던 평범한 소녀 미리네가 갑자기 이런 거짓말같은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저는 ‘클리포트 게임’ 에 대비해 최대한 많은 인원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리네 양이..“

”할게예.“


선생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리네는 비로소 움직일 수 있게 된 몸을 일으켜세우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리네 양, 이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머리가 나빠서 잘 모르겠는데, 우째도 쌤한테 제가 턱별한 사람이고, 쌤한테 제가 필요하다는 말 아입니까? 그라고.“


미리네는 좋아하는 선생님과 좋아하는 얘기를 하며 별빛처럼 반짝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클리포트 게임.. 게임을 하모 이겨야제!“




이것은 사랑에 빠진 소녀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