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이 있다.

비석이 있다.


비석이 두 개 있다.

비석은 悲石이라 슬프다.


비석 옆에 적아가 있었다.

적막한 적아는 슬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적아는 비석을 붙잡고 흐느끼기만 했다.

하루종일 흐느끼기만 했다.



적아는 결국 쓰러졌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우리들의 새 보금자리에서도 적아는 산에서의 일을 기억하다 쓰러졌다.


나와 동화, 수식은 마을에서 약재를 구하러 찾아가던 중 소식을 들었다.


"최근 들어 무림 사람들의 횡포가 심각하구려..."
"맞네! 그 사람들 맨날 호금(護金)이라면서 돈이나 걷어가고!"

"관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무림? 

그 때 만났던 그 사람도 무림...


"수련. 아마 너도 똑같은 생각일 거다."


"응."


보금자리의 위치를 아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절대. 절대로 적아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선 안 돼."
"알았다가는 앓다가 죽을 거야."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기로 하였다. 

하지만 적아의 몸이 다 나은 뒤, 우리는 적아가 그 사실을 듣게 되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다.


"수식 오빠."

"왜?"

"그 때 언니를 죽인 사람들... '무림' 사람들 맞아?"

"..."
"어떻게 안 거야...?"

"길 가다가 들었어. 동네 한 도령이 사라졌는데 '무림'의 소행일 거라고."
"우리 보금자리 위치도, 그 때 무림에서 왔다는 남자가...!"



"그 사람들을 쫓을 거야."
"그리고, 꼭 복수할 거야."

말을 가르쳐준 것은 나였다.

최소한 마을에서 살기 위해선 알아야 할 말들이지만...


복수까지 가르쳐준 것도 나였지.


"적아야... 제발 진정해."

동화 언니는 적아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적아는 이미 슬픔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그 녀석들 흉악하다고 이미 소문이 쫙 퍼져있어... 너무 위험해!"
"나도 복수하고 싶지! 근데 위험하다고!!"


세전은 적아의 주먹을 쥔 손을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도 분노를 삭히고 있었다.


하지만 적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신의 부채를 쥐고, 문 밖으로 나섰다.

더 이상 붙잡을 수도 없는 적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식은 입을 열었다.


"만약 복수를 한다면... 우린 떠나야 해."

"그 녀석들이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너도 모르게."

"즉,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적아는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밖으로 향했다.



불안해서 그랬을까, 나는 적아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 검은 연기가 솟는 것을 보았다.


제발 죽지만 않았으면.

아니, 애초에 거기에 없고 다른 곳에 있으면.


그러는 마음에 달려가자 기대는 사라졌다.


"..."

적아는 결국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적아야!"


그 앞, 중앙에는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있었다.


"심장을 뽑아오도록."


"네!"

말을 듣고 당황한 나는 앞을 가로막았다.


"물러서! 너희들이 명선 언니를 죽인 거지!"

그러자 노인은 흥미로운듯이 입을 열더니,


"명선? 아. 그 '용인' 말하는 건가?"

"맞네. 우리가 죽였지."


"... 너네 사람. 우리가 구한 거 잊었어? 은혜를 칼로 갚아?!"
"대체 왜 언니를 죽였어! 왜!!"


나또한 그들의 얼굴을 보니 분노가 차올랐다.

분명 자살 행위라는 생각은 함께.


"용인은 영원히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어."


"그래서, 영생을 쫓다 보니 어느 순간 영원히 사는 생명에 대한 전승을 전해들었지."


"간단하다. 난 용인의 심장으로 영생을 얻어, 무림제일인이 될 거다."
"영생은 곧 무한한 내공. 난 생사경에 다다를 것이다."


그 말이 끝나자 적아는 피투성이로 일어나 물었다.


"그래서... 언니를 죽였어...?"

"그래. 죽였다. 그래도, 그녀 덕분이니 내 '명선'이라는 이름은 길이길이 기억하리다."


"너희 때문이야..."
"다 너희 때문이야..."

"명선 언니가 심장이 뽑혀 죽은 것도!"
"영지 언니가 죽은 것도!"
"길을 가며 보이던 사람들이 한탄하던 것도!"


"다... 너희 때문이야!!!!"


붉은색의 기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적아는 눈을 빛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굉음이 울려퍼지며 나무에 앉은 새들은 일사분란하게 날아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적아야."

떠나기 전, 나는 붙잡으며 적아에게 말했다.


"복수를 하더라도, 부디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얀 옷에 뭍은 피는 잘 안 씻겨지거든."


실없는 농담이지만, 바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마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았다.




"저게... 뭐야!!!"

"장문인!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마교인가... 무림맹의 수장이자 임월(林月)파의 장문인으로서 놔둘 수 없겠군."

노인은 칼을 든 뒤 엄청난 속도로 적아의 뒤를 잡았다.


"사라져라... 마교!!!"


그 순간.


*콰장창!*


큰 소리와 함께 먼지가 치솟았다.


먼지가 치워지자 있던 것은... 눈 한쪽이 찢어지고, 검이 부러져 쓰러진 노인과...

눈에서 미친 빛을 내뿜으며 멀쩡히 서있는 적아였다.


"장문인!!!"


수많은 이들이 경악을 하였다.

더 이상 자신들의 수장이 처참히 패배한 모습을 보고서도 덤빌 순 없었다.


그러고 적아는 내 옆을 지나 앞으로 향했고, 이내... 날개를 펼쳐 하늘로 떠올랐다.


날개를 펼치는 순간 적아의 뒤에는 그림자가 지기 시작하며 용을 닮았지만 이질적인 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천마... 천마다!!!!"


그 외침과 함께 그들의 건물에는 적아의 발톱 자국이 남기 시작했다.


*쾅!*

*와자작!*


"아하하... 하..."


적아는 건물을 모두 무너뜨리고 웃으며 그 때 봤었던 한 남성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줘! 제발!"

남성은 뒤로 빠지며 자비를 구했지만... 귀에 닿지는 않았다.


"흐아아아아악!!!!!"

"적아야!"


적아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이름을 불렀다.

손이 멈칫 하더니 끌어안은 내 팔에 손을 올렸다.


"언니..."


"돌아가자... 적아야... 이제 됐어..."


적아의 눈에서 피어오르던 불빛은 꺼지고, 이성을 되찾은 적아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언니..."
"내가 미안해..."

적아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나를 끌어안으며 울었다.


"제발 떠나지 마... 내가 잘할게..."

"아무도 안 죽였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적아는 두려웠던 것 같다.

혼자가 되는 것이 말이다.




나는 힘을 다해 잠든 적아를 업고 저 높은 산에 있는 보금자리로 향했다.

업은 등에 어째 습기가 느껴지는 것이 아련하다.


나도 떠나버린 이상, 다시 가족에게 돌아갈 순 없으니.


"적아야."

잠든 적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만약 복수를 하고 싶다면... 나랑 같이 가자."
"대신, 손에 피를 묻히지 말자. 알겠지?"

"..."




그렇게 나는 적아의 복수를 도왔다.


적아는 내 말을 듣고 오로지 사람이 아닌 문파를 없애는 데에만 집중했다.

한번은 자신들을 신자라고 지칭하는 이들을 만났었다.


적아는 자신을 '천마'라고 칭하는 이들을 쫓아내었다.

천마라는 칭호가 맘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다.


부채를 대장간에 맡겨 개조해 무기로 만들기도 했다.

추억이 담긴 물건이니, 자신의 길에 함께하고 싶다고 말하며 맡겼다.


그렇게 몇백년의 시간이 흘러, 적아는 무림의 모든 문파를 없앴다.

나또한 문파를 없애고 남은 서적들을 통해 수련하며 적아에게 비할 수준은 아니지만 많이 강해졌다.

책에는 반로환동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아마 젊어지면서 내공이 약화되는 것이 싫어서 그랬던 건가 싶다.


서적들은 다 읽고 나면 기록해둔 뒤 책 상인에게 팔았다.


듣기로는 한 문파가 더 있었지만

우리가 없애기도 전에 사라졌다.


복수를 마친 적아에게 남은 것은 허무감이였다.

목표를 잃은 영원한 삶의 용...?은 벼랑 끝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수평선 끝에는 뭐가 있어?"

"... 벽이 있대."


"벽?"

"응. 별처럼 빛나는 벽."

"그럼 그 벽 너머에는?"

"... 거기도 사람이 사는 땅이 있을까?"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면 어떡해..."

"... 나도 잘 모르겠어."

"..."
"고마워. 언니."

"왜?"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잖아."
"그래서."

적아는 고마우면서도 슬픈 얼굴을 했다.


"...적아야."
"무슨 생각해?"

"... 저 벽을 뚫으면... 넘어갈 수 있겠지."
그 말과 함께 적아는 날개를 펼쳤다.


"적아야?!"

"컸으니까 자립해야지. 언니."

"그동안 고마웠어. 방에 돈 남겨뒀어. 안 남기면 불안해서."

"뭐?!"

그렇게 적아는 날아 사라졌다.




...


침대에서 일어나자 익숙한 방이 펼쳐져 있다.

비록 복수는 끝났지만 이별과 죽음의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꿈이 여기서 끊긴 것은 좋은 징조다.

나는 약을 삼키고 코코아를 데워 마셨다.


적아, 루티아나는 그 순간 마음속의 무저갱을 열어버린 것 같다.

아직도 닫히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닫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