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친 저녁시간, 무료하게 티비를 보고 있던 주피터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당신, 다음주 어린이날 회사 행사 있는 거 알고있지?"

"알아요. 요 며칠 메티스가 거기 데려가달라고 얼마나 보챘는데요."

"메티스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 안하고 당신한테만 한 거야?"

"......"

남편의 볼멘소리에 에르제베트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 알겠어. 그럼 세 명이서 가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되지?"

"네. 참, 저번에 봤던 그 모아라는 분도 오시나요?"

"그럼. 우리 회사 직원인데 오지. 기대 된다면서 난리도 아니더라고."

"아, 그래요?"

싸늘한 에르제베트의 눈빛에 남편은 뭔가 말을 잘못했나 생각하면서 슬금슬금 방으로 도망쳤다.





"메티스. 얘, 어서 일어나렴."

"으응... 5분만 더 잘래."

이불과 함께 끌려오는 딸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본 에르제베트는 딸의 등을 탁탁 쳤다.

"벌써 30분째야. 9시에는 나가야 되니까 빨리 잠 깨."

"나가...? 아 맞다!"

그제서야 메티스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준비는 다 했어? 이제 곧 나갈 시간인데."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금방 준비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런데 당신, 이러고 갈 거예요?"

"이게 어때서? 다들 편하게 입고 온댔는데."

한숨을 내쉰 에르제베트는 옷장을 열어 옷 몇개를 집어보더니 마음에 드는 것을 꺼내 건냈다.

"이거 입어요. 회사 행사인데 그렇게 입고 가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으, 응."



"다 갈아입었어."

"그것 봐요. 얼마나 보기 좋아?"

"당신 말이 맞아. 이게 훨씬 낫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고르던 에르제베트는 퍼뜩 생각난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참, 오늘 저녁에 지바씨가 밖에서 저녁 대접하고싶다 했는데 괜찮죠?"

"지, 지바 씨? 어. 응. 괜찮지."

주피터는 괜히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척 하며 대답했다.

"옷 다 입었으면 나가서 메티스 뭐 좀 먹여요."

"어차피 가면 점심 먹을 건데?"

"아직 점심 되려면 멀었잖아요. 안 먹여두면 가는 길에 간식 사달라고 조른단 말이에요."

"알았어. 그럼 당신도 옷 갈아입고 나와."

문을 닫고 거실로 간 주피터의 눈에 들어온 건 멜빵에 흰 티를 입고 있는 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딸과의 거리감에 마음속으로만 한 주피터는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걸었다.

"메티스, 배 안 고파?"

"응."

"엄마가 너 뭐 좀 먹이라던데."

"가면서 사먹으면 안 돼?"

"그 말 하면 엄마가 화 낼 것 같던데..."

안 된다는 말을 애둘러서 하는 아빠의 모습에 메티스는 입을 조금 삐쭉거렸지만 이내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럼 나 식빵에 쨈 발라 먹을래. 아빠도 먹을 거야?"

"어? 그럼 고맙고."

간단하지만 딸이 해주는 토스트를 얻어먹다는 기쁨에 먹다가 목이 막혀 딸이 건내주는  우유를 급하게 마시고 있을 때 쯤

안방의 문이 열리고 에르제베트가 나왔다.

"뭐 하고 있어요? 옷에 우유 다 흐른 것 좀 봐."

흰 블라우스에 새카만 치마를 입고 남색 외투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모님의 모습이었다.

평소엔 보기 힘든 그 모습에 감탄할 새도 없이 쏟아지는 잔소리에 메티스는 자리를 피했고 주피터는 결국 우유가 틘 옷을 갈아입었다.




회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메티스네 가족은 행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도착했다.

"주차하고 갈 테니까 내려서 기다리고 있어."

"네. 메티스, 내리자."

신이 잔뜩 난 메티스는 폴짝하며 차에서 내렸고 에르제베트는 백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렇게 주피터가 주차를 마치는 걸 기다리던 에르제베트의 귀에 어디선가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피터 부장님~!!"

하며 달려오는 여셩을 슬쩍 막은 에르제베트는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우리 저번에도 봤죠? 모아 경리, 라고 했던가?"

"아, 사모님도 오셨네요? 오래간만에 뵈니 좋네요. 메티스도 안녕?"

"......"

"아직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모양이네요."

서운한 표정을 짓는 모아를 보고 메티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 들어올릴 뿐이었다.

"회사생활은 좀 어때요?"

간단한 안부를 묻는 에르제베트의 물음에 모아는 눈빛을 빛내며 대답했다.

"부장님이 너무 잘해주셔서 회사생활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그래요? 우리 그 이가 아무한테나 다 친절해서요. 오해를 몇 번이나 사서 그러지 말라고 말해뒀는데 그 이도 참."

아무나라는 말과 벽을 치는듯한 에르제베트의 목소리에 모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이내 진정한 그녀는 호호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이라니, 아직도 금슬이 좋으신가 봐요. 그 나잇대에 그러기 쉽지 않으실텐데."

가소롭다는듯이 팔짱을 끼며 가슴을 들어올리는 모아의 모습에 에르제베트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렇게 입으로만 웃고 눈은 상대를 찢어죽일듯이 바라보는 둘의 기싸움에 메티스는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왜 혼자예요?"

그 말에 평온을 가장하던 모아의 표정이 무너져내렸다.

"아, 아줌마?"

"네. 모아 아줌마는 왜 혼자 오셨어요? 오늘은 가족동반 행사인 걸로 알고 왔는데."

노골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내며 말하는 메티스의 당돌한 모습에 모아는 이를 악물며 간신히 대답했다.

"아직 결...혼을...못 해서 그렇단다? 그리고 아줌마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주련? 언니 아직 20대거든?"

메티스를 잡아먹을 듯한 모아의 표정에 에르제베트가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죄송해요. 저희 딸아이가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 메티스, 빨리 아줌마한테 사과드려."

"...죄송합니다."

에르제베트의 비꼼과 국어책을 읽듯 말하는 메티스의 모습에 모아의 이성이 날아가려 하는 순간, 주피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아 경리, 일찍 왔네?"

그 목소리에 간신히 표정을 푸는 모아의 모습에 둘은 콧방귀를 흥 내뱉었다.

"오늘 행사진행 도우미를 맡아서요. 주피터 부장님도 일찍 오셨네요?"

"아내가 늦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 참 인사는 했어?"

"네. 방금전까지 안부 나누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벨소리에 모아는 핫 하고서는 손을 휘저었다.

"대리님이 부르셔서 가보겠습니다. 이따가 봬요!"

모아가 뛰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에르제베트는 기특하다는 듯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역시 우리 딸밖에 없어."

"당신 또 모아 경리랑 싸운... 건 아니지?"

"싸우긴요. 그보다 모아씨가 당신이 그렇게 잘해준다던데, 뭘 했길래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생슬생글 웃는 그 모습에 불안함을 느낀 남편은 대충 둘러대고선 몰래 딸에게 물었다.

'엄마랑 모아 경리랑 무슨 일 있었어?'

'왜 그걸 나한테 물어? 그 아줌마한테 물어보든지.'

평소보다 냉랭한 태도로 쏘아붙인 메티스는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손을 잡았고

주피터는 별 수 없이 머릿속으로 변명거리를 생각하며 힘없이 터덜터덜 둘을 따라갔다.




"이 국수 되게 맛있다. 배고파서 그런가?"

"엄마가 한 것보다?"

"아니, 엄마가 해 준 것보다는 별로야."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아내와 딸의 앞에서 주피터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른 채  국수를 먹고있었다.

평화로운 가족 나들이가 되었어야 하는데 혼자만 쓸쓸하다는 생각에 주피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왜 한숨을 쉬고 그래?"

"응? 아무것도 아니야."

"이거 다 먹고나면 영화 보러 가자. 로미오와 줄리엣 상영해준대."

'어린이날에 웬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 선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아내가 그걸 놓치지 않고 말했다.

"네 아빠는 안 보고 싶은가보다. 엄마랑 둘이서 보러 가자."

"아, 아니야. 딸이 보러 가자는데 가야지."

그 말에 아내가 웃는 걸 보고 마음이 가벼워진 주피터는 남은 국수를 모조리 해치웠다.




"로미오 배우 엄청 멋있지 않았어?"

영화를 보고 신이 난 메티스는 엄마의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조잘조잘댔다.

"어, 저거 금붕어 아니야? 아빠, 나 저거 해볼래!"

금붕어를 잡아보기도 하고 뽑기로 잉어도 뽑고 물풍선을 던져 아빠의 얼굴을 잔뜩 적시기도 한 메티스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최근 사춘기에 접어들어 폭탄 같은 딸아이가 저런 모습을 보여주니 주피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나 배고파."

"신나게 놀더니 이제 배고픈가보네?"

"응. 아까 팝콘도 먹었는데 벌써 배고프네. 참, 오늘 지바 언니랑 같이 밥 먹는다고 했지?"

"그래. 너 또 지바 씨한테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된다?"

"안 그러거든. 어? 엄마, 전화 왔어."

메티스가 자신의 핸드백을 가리키는 걸 보고 에르제베트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네 지바 씨. 여기 메티스 아빠네 회사에요. 여기로 오신다고요? 아, 그럼 금방 갈게요. 네, 이따 봬요."

"지바 씨, 여기로 오신대?"

"네. 개인 촬영 끝나고 오는 길이래요. 회사 입구에서 기다린다니까 우리도 슬슬 갈 준비 해요."

"그럼 언니랑 밥 먹고 집도 같이 가는 거야?"

"그렇겠지?"

에르제베트의 대답에 메티스는 방방 뛰어다녔지만 주피터는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내와 딸은 지바가 산다는 저녁이 무엇일지에 대해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있었다.

"나 차 끌고 나올테니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네. 천천히 가있을게요. 메티스, 가자."



엄마의 팔짱을 끼고 한 손에 풍선을 든 메티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오늘 그렇게 재밌었어?"

"응. 엄마아빠랑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이것저것 많이 해서 좋았어."

"언제는 엄마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더니?"

"그,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잖아."

"그럼 세상에서 엄마아빠가 제일 좋아?"

"응. 근데 엄마가 좀 더 좋아."

그 깜찍한 대답에 에르제베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 지바 언니다! 언니!"

"메티스!"

지바를 보고 달려가는 메티스를 바라보던 에르제베트는 갑자기 인상을 팍 구겼다.

"벌써 돌아가시려구요, 사모님?"

"네,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따님이랑 놀아주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나봐요?"

피식거리며 말하는 모아의 말에 안 그래도 지친 에르제베트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 하고서 속으로 화를 삭히고 있었다.

그 때, 메티스와 인사를 나눈 지바가 둘에게 다가왔다.

"메티스 어머님, 이 분은...?"

"아, 그 이 부하직원이에요."

"어머, 메티스 아버님 부하직원이시구나. 안녕하세요?"

모아는 사근사근한 태도로 자신에게 악수를 건내는 지바를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모아 경리에요. 그 쪽은...?"

"아, 제 소개를 안 드렸네요. 모델 일을 하는 지바라고 해요."

자신의 외관에는 어느정도 자신감이 있고, 그걸 믿고 에르제베트에게 시비를 걸던 모아였지만 눈 앞의 지바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외관을 가꾸는 데 전력을 다하는 모델과 일반 직장인의 격차는 자신감으로 메꿀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저는 행사 마무리 해야해서 그만 가볼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메티스도 잘 들어가."

"네. 다음에 또 봐요 아줌마."

기세를 잃은 모아는 메티스의 말에 대꾸도 하지 못 하고 쓸쓸하게 돌아섰다.

눈엣가시가 없어져서인지 기분이 좋아진 에르제베트는 지바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지바 씨,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려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했는데 근처길래 바로 온 거예요."

"그러셨구나. 혹시 휴일인데 괜히 부담되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저야말로 어린이날에 오붓한 식사 방해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걸요."





"아파트 앞 사거리로 내비 찍으시면 돼요."

"그런데 이런 가게는 어떻게 안 거예요?"

잠시 머뭇거리던 지바는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요즘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에요. 그런데 혼자서는 못 가는 곳이라서요. 친구들도 다 바쁘고..."

"그럼 나한테 진작 말하지!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철없는 메티스의 말에 지바는 검연쩍게 웃었다.

"메티스 말이 맞아요. 같이 밥 먹는 거 힘든 일도 아닌데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말 해도 돼요."

"메티스 어머님..."

지바의 촉촉한 목소리에 에르제베트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건내주었다.





"으... 너무 많이 먹었어."

지바는 의자 위에 늘어진 메티스의 배를 톡톡 쳤다.

"숙녀가 이러고 있어도 돼?"

"나, 나 숙녀 아닌데."

그러면서도 자세를 바로잡는 메티스의 모습에 셋은 다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 해서 얼마지?"

주문표를 집어드는 주피터의 모습에 지바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지 마세요, 메티스 아버님. 제가 낼게요."

"지바 씨, 안 그래도 돼요. 정 그러면 이 다음에 메티스 맛있는 거라도 한 번 사줘요."

다정한 에르제베트의 말투에 지바는 내민 손을 접었다.

"네, 감사합니다..."




에르제베트와 주피터보다 먼저 나온 둘은 벤치에 앉았다.

"메티스. 아까 그 분이 네가 말한 그 분 맞지?"

"응. 우리 엄마만 보면 못 살게 군다니까. 아까 언니 보고 도망치는데 얼마나 속 시원했는지 알아?"

"그러면 안 돼. 사이좋게 지내야지."

"언니 아까 가슴 내미는 거 다 봤거든?"

"얘, 얘가!"

에르제베트와 주피터는 계산을 마치고 나와 까르르 웃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고 있으니까 꼭 자매같지 않아요?"

"그럼 나한텐 큰 딸이 생긴 건가?"

남편의 농담에 작게 미소지은 에르제베트는 그 미소 그대로 그에게 말했다.

"집에 가면 모아 경리한테 어떤 식으로 잘해줬는지 다 들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응."






만약 사춘기메티스 팬픽 또 쓴다면
다음내용은 엘제지바 불륜보빔이 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