째깍, 째깍.

 시계바늘이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그 것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형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보지 않거나 듣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무슨 수를 쓰든 쓰지 않든 결코 시간이 사라지고 있음을 막을 수는 없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황혼이 지고 있었다.

천천히 세상은 붉게 물들고 있었고 땅은 태양을 받쳐 뉘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밖에서 가끔씩 들려오는 아이들의 인사 소리는 서로에게 아쉬움과 

내일 만날 시간에 대한 기대에 부푼 기쁨이 반절 씩 섞여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겉옷을 입었다. 나 또한 마중 나가야 할 상대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스스로 돌아왔을 텐지만, 뭔가 일이 있는지, 혹은 아쉬움이 있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그 동안 돌아오지 않았을 때에도 찾으러 나섰던 적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자유로웠고, 그 것은 내가 조금 더 그랬다. 가끔 상대를 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나는 그 시간만큼 다른 것을 했었고 색다른 즐거움과 열기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 모든게 식어가면 또 다시 녀석을 작은 목소리로 부르곤 했다.

그 때마다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 내 품안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안기곤 했다.

물론 그 보다 더 많은 횟수로 내 배에 박치기를 먹이곤 했지만 말이다.

 

 문을 열고 길을 나서자 이제는 완전히 세상이 불에 타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정이었다.

해가 하루의 마지막에 쏘아내는 빛은 너무나 강렬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뒤에 드러날 어둠을 생각하면

괜시레 가슴 한 쪽이 먹먹해지곤 하는 것이다.


 내 머리 위로 솟은 전봇대에서 뻗어나가는 전선의 그림자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 어차피 또 형제를 만나러 갔겠지.

 내 발길을 따라 거리는 모습을 바꿔가고 있다. 늘 보던 풍경이고 그래서 마음 놓이는 동네였다.

새벽과 아침, 정오와 저녘, 밤에 이르기 까지 변함없던 경치는 단조롭지만 견고한 성과 같았다.

눈을 뜨고 생활하고 잠에 든다. 풍족함 없이 모자람 없이 소소하게.

 

 언제나 그랬듯.

 

 걷는다는 단순한 작업의 반복된 과정은 곧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지막한 뒷산의 가장 커다란 나무 아래. 두 녀석이 있었다. 짧달막하고 통통한 몸은 사실 꽤나 귀여웠지만 

그걸 입박으로 낼 수는 없지. 둘은 뭐가 즐거운지 서로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이 거의 풍지박산이 난 것으로 보아 대화하기 전에는 보다 전투적인 교류를 했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훤하다. 

신나게 뛰어놀 때마다 주변이 박살나다니 주변 분들에게 또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 나라고, 이 녀석들아.

 

 나는 이제 집에가자고 말했다. 한 녀석이 쪼르르 달려온다. 혹시 박치기를 하려나 배에 은근 힘을 주었지만 

그런 일없이 품에 쏙 들어왔다. 그러고도 한참을 고개를 부비적대고 있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창피하다고 밀어냈겠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잠시 있었다.

 

 조금 뒤 내 품에서 벗어난 녀석이 과장된 몸짓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녀석이 웃으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크게 웃고, 크게 말했다.

 

 “안녕, 잘가. 또 보자.”

 

 나는 내 옆에 있는 녀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래도 아프지는 않게 잡았다. 잡은 손에 작은 떨림이 전해져 왔다. 

녀석은 곧장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상관없다. 뭐든지 상관없다. 아무래도 좋다. 

조급해지지 않았고,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안녕, 잘 지내.”

 

 내 손을 꼭 잡은 녀석이 마침내 웃으며 답해주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웃으주었고 잠시 내 손을 놓고 서로 안아주었다. 

다시 몸을 돌려 내 손을 잡은 녀석은 웃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우리 둘 뒤로 다른 녀석은 계속 손을 흔들고 격려해주고 인사를 건네 주었다. 

우리는 그 때마다 답을 해주었다. 가는 길이 늦어졌지만 상관없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정말 상관없는 일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녀석을 찾으러 오는 길보다 조금 더 어두었다. 

산 뒤로 넘어가는 해에 우리 둘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고 곧 하나로 겹쳐질 것만 같았다. 

내 손을 꼭 잡은 녀석은 아무렇게나 떠들고 있었다. 

아주 옛날 일부터 시시콜콜한 일까지, 내가 기억하는 일, 기억하지 못하는 일, 잘못 알고 있던 일 그 모든 것을.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뿐이었다. 그 일에 대해 옳고 그르거나 손해보거나 그랬던 일에 대해서는 모두 지난 일이었다. 

함께 해서 일어났던 일이고 이제는 추억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좋았고 고마웠고 마음 한 켠에 그렇게 자리 잡은 것 뿐이다.

 

 집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려고 했다. 해는 이제 거의 마지막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는 한계까지 길어졌다. 

이제 녀석과 내 그림자는 거의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 순간 녀석은 한번 내 손을 힘차게 잡았다. 

나도 순간적으로 힘을 주어 마주잡으려 한순간 녀석이 손을 놓았다. 

 아주 찰나였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괜찮지 않나.

 

 아직 괜찮지 않나,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래도 괜찮지 않나. 

더 이상 풍족해질 필요도 없고 뭔가 달라질 이유도 없지 않나. 

그냥 새벽이, 아침이, 정오가, 낮이, 저녁이, 밤이 그랬던 것처럼 계속 변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내 곁에 있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얼굴을 물들이고 있는게 황혼의 마지막 빛인지 다가오는 밤의 어둠인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눈물일 뿐인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녀석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내 손에 붙잡아 둘 수도 없었다. 

가슴 한 켠이 뚫린 곳으로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건 내 흐느낌이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만큼 그냥 울고 있었다. 누가와서 ‘이 새끼 우는데요?’ 라면서 낄낄거려도 상관 없을 만큼 

나는 그냥 울었다. ‘이 시발 내가 우는 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그냥 길바닥에서 쳐울고 있는 동안 녀석은 아무것도 안했다. 

말을 걸어주지도 않고 위로해 주지도 않고 손을 잡아주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 이 개시발 새끼, 좆같은 새끼 넌 진짜 개시발좆같은 새끼야.

 

 울 만큼 울고 나니 마음이 좀 풀렸다. 코를 풀고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도 울고 있었나 보다. 얼굴에 눈물콧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끄윽끄윽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얼굴을 대충 스윽 닦고는 웃어주었다. 아주 밝은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순간보다 이 멍청한 얼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시 차오르는 뭔가가 있었지만, 그래봐야 이 녀석 얼굴만 안 보인다는 사실에 애써 참았다.

우리는 서로 웃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천천히, 내가 생각하는 한 가장 침착하고 냉정한 마음을 담아서 한 음절씩 뱉기로 했다.


 “잘가.”

 “잘 있어.”

 

 무언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찢어지는 소리였을까. 파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주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소리는 내 마음에서 났다. 

짧은 음절 하나하나가 폭발하는 것처럼 귀를 통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다시 눈물이 났다. 녀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녀석의 모습이 잘 보였다. 우리는 그렇게 울면서 서로를 마음에 새겼다.

 

언제인지 모르지. 어디일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예측하지도 못할 거야.

 

그래도 분명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믿기로 했다. 

 

 ““또 보자.””

 

우리는 분명 웃으면서 이 말을 서로에게 남긴 거다.

 

 해가 지평선을 넘어가는 바로 그 마지막 순간, 밤의 어둠이 드리워지기 전, 

마지막 빛줄기에 우리의 발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가장 길어졌다. 

한없이 뻗어나간 그림자는 계속해서 길쭉하게 겹쳐졌다. 둘의 마지막 순간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리고 그림자는 하나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