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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이어짐


허름한 건물.

지상 1층에 나있는 문을 열고 들어와 어두캄캄한 계단을 내려오면 있는 중간 규모의 바는 알만한 사람들이라면 모두 아는 나름의 명소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만 알아서일까, 온통 텅텅 빈 테이블과 티비 소리만이 들려오는 바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에 괘념치 않고 바텐더가 있어야 할 자리의 앞 의자에 축 늘어져 있던 금발머리의 여성은 앓는 소리를 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굴 옆, 커다란 잔 안에 들어있는 토마토 주스만 아니었다면 흔다히 흔한 취객으로 보였을 그녀는 프론트바 안에서 들려오는 구두소리에 부스스한 얼굴을 들어올렸다.

너무 오랫동안 봐서 오히려 더 얼굴이 헷갈리는 바텐더를 본 여성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잠겨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이거 제대로 갈은 거 맞아?"

"자네가 준 레시피 그대로 했네만..."

"근데 왜 물 맛이 더 많이 나는 거야? 이래서야 토마토 주스가 아니라 토마토 물이잖아. 이런 거 팔았다가 저번처럼 컴플레인 들어와."

"그래도 파는 메뉴는 아니지 않나. 애초에 자네가 억지로 요구해서 만들어줬더니 못 하는 말이 없군."

남자의 목소리는 다소 싸늘했지만 여성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불평은 했지만 토마토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그녀는 티비에서 나오는 뉴스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남자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래?"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네. 최근 이 쪽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찾는 손님이 있었다더군."

"진짜 안 중요하네. 하아... 왜 그딴 걸 우리한테 시키는 거야? 그럴 시간에 바 한 번이라도 더 청소하는 게 낫지."

투덜거리며 의자에서 내려온 여성은 허리 밑까지 닿는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하고선 상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 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자 소란스러웠던 어젯밤의 숙취로 인한 두통이 사라지는 걸 느낀 여성은 홀로그램으로 지도를 불러왔다.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해서 재판매할지도 모른다는거네. 참나, 요즘도 그런 간 부은 녀석이 있어?"

"생각해보면 그 일이 일어난 직후 1년을 빼면 오랫동안 평화로웠지. 적대하던 세력들이 모두 하나로 뭉쳐졌으니 말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오래 전 얘기 같네. 하여튼 위치랑 그 녀석 정보 알려줘. 또 한참동안 찾아다녀야 하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아도 되네. 물건을 대량으로 구매한 그 사람은 자신의 집에만 머무른다더군."

"잘 안 나온다는 거야, 아니면 아예 안 나온다는 거야?"

"내가 들은 정보로는 아예 안 나온다고 하더군. 6개월 이상 관찰했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닐 거야."

"에휴... 이번엔 또 무슨 똥을 밟은 건지."

투덜거리며 테이블 위에 벗어놓았던 양복 마이를 걸쳐 입은 여성은 방금 남자에게 받은 정보를 쭉 내려 용의자가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것 말고도 많은 정보가 적혀져있었지만 모두 무시한 여성은 검은 양복바지에 구겨진 곳은 없는지 확인한 뒤 심드렁한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보니까 여기서 걸어도 삼십분이면 가겠네."

"원한다면 내 차를 써도 좋네."

"됐어. 저번처럼 또 어디다 갖다박으려고. 그럼 나 다녀올게."

대충 인사를 해준 뒤 나온 여성은 어둑어둑한 거리로 나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었다.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 차있었지만 운동삼을 겸 걸어다녀오기로 한 여성은 얌전히 길을 따라 용의자의 집으로 향했다.

걷기 시작한지 10분이 넘어갔을 때 쯤에는 멍한 얼굴이 되어 하마터면 도중에 멈춰있는 차에 부딪힐뻔 하기도 한 여성은 어느새 도착한 건물 앞에 서서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아마도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갑자기 용의자가 달려들 상황에 대비해 몸을 풀어둔 여성은 낡은 건물의 2층으로 계단을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단화가 계단에 부딪히는 것에 맞춰 둔탁한 또각또각 소리가 잠시 울려퍼진 후.

문고리가 녹슬어있는 문 앞에 선 여성은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들겨댔다.

"물건 주문하신 분. 나오세요."

이렇게 해봐야 열에 아홉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경험상 아는 여성은 억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마이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연 그 용의자는 수척한 얼굴을 내밀며 여성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마로 빨갛게 충혈된 눈과 정리되지 않은 머리, 묘하게 기분 나쁜 냄새와 뺨까지 내려오려하는 다크서클을 보고 중독자라는 걸 단숨에 알아본 여성은 반쯤 감겨있는 그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카카. 맞지?"














"......"

몇 달만의 손님이었을까.

얼굴을 쓱 훑어보다가 안녕이라는 인삿말만을 남기고 떠나간 그녀를, 카카는 잠시동안 곱씹고있었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려 보이는 그 얼굴을 떠올리자 깊게 생각에 빠져들게 된 그녀는 소파에 팔을 걸치고 앉았다.

뭔가를 아는 표정이었던 그 얼굴에 불안감이 마음 속에서 살짝 들려 하기도 전.

잠깐 약효가 끊긴 것 뿐인데 숨이 턱 막히는듯한 기분에 카카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덜덜 떨려서 문도 제대로 열기 힘든지 신경질적으로 문을 밀친 카카는 서랍을 꺼내 작은 주사기를 자신의 팔에 가져다댔다.

파란 혈관이 그대로 드러나있는 창백한 피부 위로 아무렇게나 바늘을 꽂아넣자 곧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바다 밑에서 떠오르는 침전물 같은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카카는 선 채로 눈을 감으며 그 기억들을 되뇌이려 했다.

똑똑.

"......"

몇 달만에 찾아온 손님 이후로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찾아온 손님에 카카는 마음속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그냥 무시하고 이대로 침대에 누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움직인 몸은 이미 두터운 외투를 걸쳐입고 현관으로 가 문을 열고있었다.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이어지는 문을 열자 거기에 서 있던 건 카카에게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턱을 가린 수염이 더 자란 것 같긴 하지만 분간을 못 할 정도는 아닌 얼굴에 카카는 안경 너머로 눈을 깜빡거리며 말 없이 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카카를 보자 딱딱하던 얼굴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그 남자는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일 다시 나올 생각은 없는가 해서 말이야."

"..."

"왜. 나중에 다시 와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런데 안 보이길래 말이야."

"..."

"...무,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지?"

카카는 공사장의 인부들을 관리하던 이 반장을 쫓아내야할지, 아니면 사정을 설명해야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여러 이유에서 집 안에 이 남자를 들이는 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한 발자국 물러선 카카는 들어오라는듯 손을 까딱였다.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인 주방

정체를 알 수 없는 봉투들과 하얀 가루가 온 곳에 있는 식탁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은 남자는 카카가 냉장고에서 꺼내준 물통을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종류의 대접에 잠시 말을 잃고 있던 그는 말을 해보라며 턱을 살짝 들어올려보이는 카카의 행동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잘... 지낸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

"그러고보니까 아까부터 왜 말은 안 하는 거야? 사람 무섭게."

그런 말을 하기에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있는 남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거칠었지만, 농담이 아닌지 그의 손은 물병을 꽉 쥐고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 걸까, 초췌한 눈으로 잠시 남자를 응시하던 카카는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이내 나타난 홀로그램에 쓰여지는 글자를 보고있던 남자는 놀란 얼굴로 내용을 따라읽었다.

"말을 못 하게 됐다고?"

끄덕.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카카를 보며 남자는 미안한 건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곧이어 괜찮다는 카카의 글자에도 여전히 표정이 풀어지지 않은 남자는 아 하며 자신이 하려던 말을 전했다.

"우선... 그 일은 유감이야.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겠네. 내가 여기 온 건, 다시 공사장에 나올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러 온 것 뿐이야.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네.」

짧게 쓰이는 대답에 남자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 했지만 곧바로 그 감정을 지워버렸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잘... 있는 거 보니까 마음은 조금 놓이네. 뭐 내가 도와줄 건 없고?"

도리도리.

"그래. 더 있어봐야 방해만 되겠구만. 그, 뭐야. 건강 잘 챙기라고."

카카의 몰골에 남자는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듯 보였지만 이내 힘겹게 일어나 현관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고선 따라나오는 카카에게 인사를 하려던 찰나, 문득 한 생각이 든 남자는 얘기를 꺼내는 게 무안한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하면 이상할 것 같긴 한데 말이야. 할 거 없으면 저번에 말한 술집이나 같이 가보는 건 어때?"

"...?"

다소 뜬금없는 말에 카카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서로 다른 색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가 생기 없이 자신을 향한 것을 본 남자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랑 시간만 알려줘요.」

"그, 그래! 내가 데리러올테니까 시간만 알려줄게. 저녁 일곱시까지 집 앞에 나와있으라고."

끄덕.

힘없는 고개짓에 남자는 카카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녀와 인사를 했다.

카카가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에 있는 건 아님에 안심하며 휴 하고 한숨을 내쉰 남자는 걱정스럽게 아파트를 한 번 돌아보고선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다리를 서둘러 움직였다.




한 편, 남자가 떠난 뒤 카카는 문을 조용히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랑 얘기를 나눴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짧은 시간동안 만나는 것인데도 견딜 수가 없었던 카카는 소파까지 가지도 못 하고 쓰러져 벽에 등을 기대었다.

"하아...하아..."

머릿속에서 되살아나는 기억들은 어떤 순서도 없이 무질서하게 카카에게 찾아왔다.

기뻤던 기억, 슬펐던 기억, 서운했던 기억, 우울했던 기억, 즐거웠던 기억.

 하나하나가 마치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에 카카는 웃다가 울다가 침울해졌다가 긴장했다가 미소를 짓기도 했다.

"풉..! 흑... 흐윽... 하아... ......... ............"

너무 순식간에 바뀌어가는 감정에 몸을 추스릴 힘도 없이 바닥에 쓰러진 카카는 간만에 집을 방문한 손님들도 잊은 채 자신을 누르는 기억들에 점점 짓뭉개져갔다.

'...카카, 올해는 ......'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그 날의 기억이 살금살금 찾아오려 할 때.

다른 기억들은 항상 순서 없이 찾아오지만 항상 마지막에만 떠오르는 그 기억이 떠오르려 하는 순간, 카카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정신을 잃어갔다.






"......"

"오, 나왔구만. 혹시 안 나오는 거 아닐까 싶어서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늦지는 않았잖아요.」

"그럼 가볼까? 일터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여기서도 금방일 거라고."

몸에 맞지 않게 커다란 점퍼를 입고 있는 카카보다 먼저 걷기 시작한 남자는 혼자 중얼중얼거리며 앞서나갔다.

카카의 집 주변 지리에는 익숙하지 않은지 연신 주위를 둘러보면서도 카카가 잘 따라오는디 뒤를 흘끗흘끗 보며 걷기를 40분쯤.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한 남자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

"표정이 왜 그래?"

「아니에요. 이런 데일 줄은 몰랐거든요.」

"이, 이런 데라니?"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 카카의 시선에 괜히 헛기침을 함 남자는 변명하듯이 떠들어대며 아래로 내려갔다.

"건물만 이런 거지 아무 문제 없는 데야."

「건물 문제가 아니라 그냥 모양새가 이상하잖아요.」

"모양새가 뭐가 이상하다는..."

그제서야 자신과 카카의 모습을 떠올린 남자는 이어서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인부 복장을 하고 있는 자신과 커다란 옷에 아래는 입은 것 없이 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카.

오해를 안 하는 쪽이 더 이상할 그림에 남자는 당황하며 계단에서 멈춰섰다.

"ㅇ, 야! 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아, 마침 잘 나왔네. 이 사람을 보라고! 그냥 평범한 바텐더잖아!"

문을 열고 나온, 외눈안경에 멀끔한 양복 차림을 한 남자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장난이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먼저 문 안으로 들어가는 카카를 따라 바텐더가 들어가고, 혼자 남아있던 남자는 당황해 둘을 따라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의 가장 구석에 있는 테이블.

서로를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게 설치된 소파에 앉은 카카는 멀뚱히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이런 곳을 와 본 적 없다는 카카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남자는 작업복의 외투를 벗으며 물었다.

"마시고 싶은 건 있는가?"

「아무거나요. 이왕이면 독한 걸로.」

"애프터서비스까지 해 줄 생각은 없는데... 에이, 내가 데려왔으니까 책임져야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남자가 바텐더에게 가는 것을 본 카카는 두터운 점퍼의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을 꺼내들었다.

약효가 센 건 아니지만 적당량 정도는 되는 분량을 이로 아그작아그작 씹어 삼킨 그녀는 바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옅은 조명 아래로 고풍스러운 원목자재의 테이블과 푹신한 소파들이 있는 바는 이런 곳을 잘 모르는 카카에게도 꽤 그럴듯하게 비추어졌다.

다시 올 생각은 없었지만 한 번 와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서서하 찾아오는 나른함에 소파에 몸을 기대며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자신들 외에는 손님이 없는 바 안에서 남자와 바텐더의 목소리, 그리고 술을 제조하는듯한 소리를 듣던 카카는 잔을 내려두며 털썩 앉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거니까 남김없이 마시라고."

초록색과 빨간색. 검은색까지 있는 알 수 없는 술은 누가 봐도 독하다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카카는 별 생각 없이 그 술을 쭉 들이켰다.

입 천장과 목구멍에서 불이 난듯 뜨거운 바람이 확확 불었지만 평소 자극에 익숙해져있던 카카는 입술을 닦아내며 잔을 내려둘 뿐이었다.

얼굴보다도 큰 사이즈의 맥주잔에 황금빛 맥주를 받아온 남자는 벌써 반이나 잔을 비우고서는 그런 카카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마신 거 맞아?"

「네. 봤잖아요.」

"이야... 이거 마시고 멀쩡한 여자는 이집 사장 말고는 처음 보네."

"..."

별 관심이 없는듯 다시 술을 홀짝이는 카카의 행동에 무안해진 남자는 안주도 없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
"......"

'이걸 어쩐다...'

카카의 모습이 걱정돼 데려와놓긴 했지만 딱히 할 얘기가 없어 목이 탄 남자는 맥주만 계속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새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 맥주잔을 보며 더 주문하기 위해 일어서려던 그 때, 뒷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바에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거기로 다닐 수 있는 건 바텐더와 사장 뿐이어서, 남자는 그 누군가가 사장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옷을 털며 들어온 사장은 하나로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는 짜증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오늘 손님 안 받는다고 하지 않았어? 가게가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려고 했네만, 저 친구가 와서 열어줬네."

"참내... 무슨 동네가게 주먹구구식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술 마시려면 조용히 마시든지."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자신들에게 가시를 세우는 그 말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사장의 말을 그대로 넘겨들을 수 없었던 남자는 옆으로 지나가는 그녀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손님도 우리 뿐인데 뭐가 시끄럽다는거요?"

"뭐가 시끄럽긴. 귀 닫고 있어도 쟤 때문에 제대로 쉴 수도 없을 지경인데."

"..."

"말도 못 하는 애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아, 그래? 어쩐지. 그보다 당신, 여기 앞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인 걸로 기억하는데. 여자애 끼고 술 마시는 거 보면 그런 직업도 먹고살만한가봐?"

"뭣...!"

명백히 비꼬는듯한 사장의 말투에 남자는 무언가 말해보려 입을 열었지만, 충분히 오해를 할만한 모습이라는 걸 스스로 알았기에 아무 말도 꺼내지 못 했다.

결국 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남자는 수염에 묻은 거품을 슥 닦고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인부가 뭐 어때서?"

"뭐 어떻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아? 나는 직업에 귀천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흥. 그 쪽은 얼마나 잘나셨다고."

"후훗. 맞아. 나랑 비교하면 인부 같은 직업은 성스럽고 고귀한 직업이지."

이번에도 자신을 비꼬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목소리에 자조가 묻어 있는 걸 느낀 남자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시선을 시원하게 외면한 사장은 아무 말 없이 술을 홀짝이고 있던 카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또 보네?"

"......"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루에 두 번 보니까 좀 반가워지려 하네. 아저씨, 이 아가씨 건 내가 낼게."

"알겠네. 자네는 뭐 안 마시나?"

"나도 얘랑 똑같은 걸로 한 잔 줘. 너무 시끄러워서 뭐라도 마셔야 될 것 같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