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은 챙겼고... 시간도 지금쯤이면 괜찮겠죠."

어린 차일드들은 낮잠을 자고, 악마는 아르바이트를 나가있는 오후의 시간.

집중이 안 됐지만 억지로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옆자리에 내려둔 판은 3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옷이 사락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선 그녀는 미리 주머니에 챙겨둔 카드지갑을 꺼내 바라보았다.

악마가 더 이상 쓰지 않은 것을 받은 것인 지갑 안에 연두색 카드가 곱게 들어있는 것을 본 판은 혹시 잃어버리기라도 할 새라 손에 그것을 꽉 쥐었다.

"...악마. 집에 없는 거죠?"

악마가 밤은 되어야 돌아온다는 것도 알고, 자신의 목소리가 지금 있는 거실에서도 듣기 힘들만큼 작다는 것도 알았지만 판은 악마가 없는 걸 굳이 그렇게 확인하고난 뒤에야 현관으로 향했다.

손에 지갑을 꼭 쥔 채 신발을 신고서 조용히 문을 나선 판은 지난 산책 때 봐두었던 가게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바람도 불지 않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거리.

판은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나무 아래의 그늘을 따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자동차의 소리가 간간히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가까이서 들리는 새소리에 마음이 즐거워진 판은 작게 콧노래를 불렀다.

혼자서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 부끄러운 마음도 여전히 있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즐거움 쪽이 더 다가왔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가게까지의 산책을 즐기며 도착한 판은 가게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는 길은 즐거웠지만 막상 혼자 들어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그녀는 한참동안 가게와 주변 도로를 두리번거리다가 결심을 한듯 지갑을 쥔 손을 꽉 쥐었다.

드르륵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연 판은 손님들이 듬성듬성 있는 가게 안을 슬쩍 살펴보았다.

"그러니까, 이 부위가 말이지..."

"고기냄새 다 배일거 같은데, 외투는 놓고 올 걸 그랬어."

고소한 고기 냄새가 가득한 가게의 사람들은 판이 들어온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가게로 천천히 들어간 판은 최대한 근처에 사람들이 없는 테이블로 가 의자를 꺼내 앉았다.

엉덩이가 푹신한 쿠션 위에 닿고서야 휴 하며 안도하는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가지런히 모은 다리 위로 손을 차분히 올리고선 탈탈거리는 선풍기의 옆, 낡은 메뉴판을 바라보았다.

여러 종류의 메뉴가 있었지만 판은 가게에 오기 전부터 이미 무얼 먹을지 정해두었었다.

다만 혹시 있을지도 모를 다음 기회엔 뭘 먹어볼지 고민하고 있자 종업원이 물과 컵, 주문표를 가져다주었다.

"혼자 오셨나요?"

"아, 네. 1인 식사도 된다고 들어서 왔어요."

그 말을 하는 게 부끄럽긴 했지만 종업원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드릴까요?"

"삼겹살 1인분이랑 공기밥 하나 주세요. 아, 그리고 사이다도 하나 부탁드릴게요."

마음이 콩닥거렸지만 주문을 마친 판은 주문표를 가지고 돌아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면서도 주문을 잘 마친 뿌듯함에 그 등을 보는 판의 입가는 살짝 올라가있었다.

"휴우..."

그제서야 여유가 생긴 판은 물을 컵에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한 물이 입을 적시고, 곳곳에서 풍기는 고기냄새에 점심을 먹지 않아 주린 배가 꼬르륵하고 울릴 때 쯤, 주방으로 갔던 종업원커다란 쟁반을 들고 돌아와 불판의 불을 켜주었다.

그러고선 김치, 쌈장, 쌈채소, 깍두기부터 해 고기와 먹기 좋은 밑반찬들을 올려둔 뒤 공기밥과 사이다를 판의 앞에 놓아주고 마지막으로 고기와 집게, 가위를 내려놓은 종업원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초벌하고 나온 거라 금방 익을 거에요. 그럼 식사 즐겁게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살짝 구워져있는 고기가 들어있는 하얀 그릇을 집어든 판은 집게를 들어 고기를 하나씩 불판 위로 옮겼다.

1인분이어서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먹기 좋게 썰어져있는 삼겹살이 불판 위로 올라가자 판은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고기가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판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치이익 하는 소리를 내가며 고기는 조금씩 익어갔다.

처음엔 집게로 고기를 괜히 건드려보던 판은 혹시 그 행동이 이상해보이진 않을까 생각해 집게를 내려두고서 공기밥에 손을 올렸다.

꽤 뜨거운 온도였지만 큰 상관이 없었던 판은 양 손으로 공기를 싸고선 가끔씩 튀어오르는 고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고기를 한 번 뒤집어보자 노랗고 먹음직하게 익은 한쪽 면이 판의 눈에 들어왔다.

"아..."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침이 흐를 뻔한 판은 누가 보지는 않았나 싶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사에 바쁜 것을 본 그녀는 입술까지 나온 침을 삼키며 나머지 고기를 뒤집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위에서 어느새 다 익어가는 걸 본 판은 불을 끄고서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아까부터 참느라 침이 잔뜩 고인 것을 한 번 꿀꺽 삼킨 그녀는 먼저 쌈채소 쪽으로 손을 뻗어 상추를 하나 손바닥에 올렸다.

상추 위에 가장 먼저 고기를 올리고 쌈장, 작은 마늘, 파절임따지 올린 판은 예쁘게 쌈을 싸 입으로 가져갔다.

혹시나 너무 크게 벌리지는 않을까싶어  조심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녀는 주먹보다 작은 쌈을 입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우물우물..."

옆에 있는 사람도 없이 혼자 먹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주위를 연신 둘러보면서도 입 안에서 퍼지는 쌈 재료들의 알싸한 맛과 씹히는 느낌이 일품인 삼겹살의 고소함에 판은 작은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입을 우물거리자 뱃속으로 사라져버린 쌈에 판은 쉬지 않고 다음 쌈을 준비했다.

이번엔 상추 위에 깻잎을 얹고 마늘 대신 김치와 밥을 올린 풍성한 쌈을 만든 그녀는 두 손으로 그걸 먹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

마침 눈 앞에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걸 본 판은 잠시 우물거리는 걸 멈추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자신을 이상한 눈길로 보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가는 것을 보고 판은 마저 쌈을 먹었다.

그러자 어쩐지 용기가 생긴 판은 사이다 캔으로 손을 가져갔다.

치이익!

듣기만 해도 시원한 소리가 들리자 너무 큰 것은 아니었나 싶었던 판은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음료수용으로 가저다준 컵에 사이다를 부어 크게 한 모금을 마셨다.

기름이 지나간 목으로 톡 쏘는 사이다가 지나가자 판은  행복감까지 느끼며 눈을 살짝 감았다.

'하아... 그럼 다시 먹어볼까요.'

속으로 혼잣말을 한 그녀는 그 뒤로 쌈을 싸기도 하고 기름장에 찍어 고기만 먹기도 하며 여러 방법으로 혼자만의 식사를 즐겼다.

끝까지 부끄러운 걸 참지 못 해 주변을 힐끔거리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가게를 나오는 판의 발그레해진 뺨에는 만족감이 그대로 묻어나고있었다.

너무나 잘 먹어 살짝 나온 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 판은 멈칫 하고 멈춰서더니 가게를 뒤돌아보았다.

악마와 함께 먹는 시간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좋다 생각하며 판은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띄고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참, 판. 오늘 점심 맛있게 먹었어?"

"점심... 말인가요?"

"응."

"네. 콩나물국이 맛있었어요."

"아니, 그거 말고 고기 먹은 거 말이야."

"푸웁!!"

"오, 왜 그래?"

"미, 미안해요. 그, 그런데 악마. 고기 먹은 건 어떻게 알았나요?"

"응? 그거야 휴대폰에 찍히니까."

"......그랬군요. 저기, 악마. ...내일 점심은... 같이 먹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