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시끄럽다고 하는데. 뭐가 시끄럽다는 거야?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방금 그녀가 내뱉은 말 때문인지 남자는 약간 까칠해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든 말든 사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카카의 반대편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았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치마가 말려올라가 아래에 있는 허벅지가 드러났지만 사장은 신경쓰지도 않는 눈치로 소파에 팔을 걸치며 카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까, 입으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같네?"

"......"

"괜찮아. 말 못 해도 네 목소리 정도는 다 들리거든. 오히려 너무 잘 들려서 좀 조용히 해주면 안 될까 부탁하려던 참이야."

여전히 자신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뜻 모를 말만 늘어놓는 사장에게 반감을 느낀 남자는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느린 동작으로 팔을 들어올린 사장은 카카의 가슴을 가리키며 피식 웃었다.

"고작 그런 일로, 말을 잃은 거야?"

"......!"

그 짧은 한 마디에 카카는 고개를 홱 들더니 테이블을 사장 쪽으로 엎었다.

카카가 마시고 있던 잔과 남자의 맥주가 그대로 사장을 덮칠뻔 했지만 그녀는 잽싸게 소파 뒤로 뛰어 피했다.

불행히도 깨끗했던 소파는 순식간에 더러워졌지만 옷자락 하나 젖지 않은 사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다가온 바텐더에게 두 잔을 건네받아 하나를 카카에게 내밀었다.

약기운과 흥분으로 동공이 커질대로 커진 카카가 씩씩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바텐더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 손님은 데리고 나가줘."

"그러지. 자네, 잠시 나랑 같이 나가있지. 이 손님에게 해는 절대 끼치지 않으리라 약속하지."

"그건 나한테 달린 건데, 왜 아저씨가 약속을 해?"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바텐더의 말에 피식 웃은 사장은 남자를 향해 손을 휘적휘적 저었다.

"얘 털끝 하나 안 건드릴테니까 잠깐 나가있어. 여자끼리 대화 좀 하겠다는데 엿들을 건 아니지?"

"...괜찮겠어?"

"..."

카카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전히 걱정이 되는 모습이었지만 본인이 괜찮다고 하자 더 있을 명분이 없어 바텐더를 따라 술집을 나섰다.

그렇게 단 둘이 남게 된 테이블.

술을 홀짝인 사장은 소파에 기대앉아 다리를 꼬아앉았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한 채 그녀가 꺼낸 말은 카카의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난 메티스야. 넌?"

「카카.」

"카카. 좋은 이름이네. 우리 아침에 만났었지?"

"......"

"아아, 저 사람한텐 말 안 했는데. 난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

그 말에 카카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곧 놀라움이 분노로 바뀌는 걸 본 메티스는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가 겪은 일들까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그냥 '보고 싶다.' '내 잘못이다.' 하는 말 정도 밖에 안 들려. 영화 같은 곳에서처럼 만능인 능력은 아니거든."

'아침엔 왜 찾아왔던 거야?'

"그 때는 다른 이유 없었어. 얼마 전부터 마약을 엄청나게 찾는 손님이 있다길래. 혹시나 거래 망치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해서. 꼴을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더라고?"

'지금은 왜 시비 거는 거야.'

"시비... 거는 건 아닌데."

어깨를 으쓱이며 일어난 메티스는 잔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 홀로그램을 불렀다.

그리고 곧 거기에 자신의 얼굴이 나타나는 걸 본 카카는 눈썹을 찡그렸다.

'나를 조사한 거야?'

"원래는 그럴 생각 없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재밌는 애 같아서. 마침 일손도 하나 필요했고."

'일손?'

"그래. 조만간 해야 할 일이 하나 있거든. 나랑 아저씨만으로는 영 힘이 달릴 것 같아서."

'안 해.'

마음속으로 짧게 대답한 카카는 그대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런 카카의 뒷모습에 메티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아슈토레스라는 애, 찾고있잖아?"

"......"

"그런 눈 해도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래도 얘기할 맘 생겼으면 여기 와서 앉아봐. 쪽팔려할 필요 없으니까."

코로 길게 숨을 들이쉰 카카는 그대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약을 하나 물어 까드득 씹어먹은 카카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서 메티스를 째려보았다.

'어디까지 알고있는 거야?'

"거의 없어. 네가 아슈토레스를 찾으려 했다는 것 정도? 이유도, 지금 진행상황이 어떤지도 몰라."

'그래서. 그거 알려주려고 이러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성격 참 급하네. 약기운 돌기 전까지 그거나 한 모금 마시고 있어."

"..."

카카는 위협을 하듯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지만 메티스는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여유롭게 잔을 꺾었다.

충동이 가슴 속에서 올라오긴 했지만 그럴 때도, 장소도 아니라 생각한 카카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시계의 분침이 같은 자리로 세 번을 닿은 후.

그 사이 잔을 모두 비운 메티스가 홀로그램을 당겨오며 침묵을 깼다.

"아슈토레스를 찾는 거, 내가 도와줄게."

'...나도 연줄이 없는 게 아니야. 당신의 도움 같은 건 필요없어.'

"그 연줄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기껏 해야 어줍짢은 삼류조직. 잘 해줘봐야 이류조직이겠지. 왜, 네가 받은 의뢰들 지금 줄줄이 읊어줄까?"

'......'

"불리할때만 아무 말도 안 하네. 뭐, 괜찮아. 그러는 게 정상이니까."

메티스가 손을 펼치자 카카의 얼굴이 작아지고 아슈토레스의 얼굴이 크게 떠올랐다.

그 옆에 빼곡하게 적힌 정보들에 카카가 몸을 움찔이는 걸 놓치지 않은 메티스는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자. 그럼 나를 도울 수 있는지 확인부터 해볼까?"

'확인?'

"네가 적당히 능력 있는 건 알겠는데,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달라서 말이야. 안 그래도 준비해둔 장소가 있어. 밤이긴 한데 상관없지?"

'시간은 아무 상관 없어. ...아슈토레스라는 녀석, 찾을 수는 있는 거지?'

"그럼. 오늘 그거 알아내느라고 발품 좀 팔았거든. 네가 합격하고 나를 도와준다는 약속까지 받아낸 뒤에 알려줄게. 아, 혹시 아슈토레스랑 약속 잡는데 내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

'정보만으로 충분해. ...그런데 장비가 하나도 없는데.'

"거기다가 오랫동안 약만 해서 컨디션도 안 좋고? 그 정도로 녹슬 실력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부탁하지도 않지. 너, 남들이랑 실력 비교해본 적 있어?"

'아니. 그래야 하나?'

"괜히 좋은 말 해주는 것 같아서 짜증나는데, 여태 기록으로만 보면 솔직히 나는 너만큼 하는 애는... ...최근에는 못 봤거든. 마침 내가 해야 할 일에 딱 필요하기도 했고."

카카는 그 할 일이라는 것이 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메티스 역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는지 남은 잔을 비우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도 적당히 돌고, 움직이기 딱 좋은 상태네. 그럼 갈까?"

'......'

카카는 마지막까지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지만 천천히 일어나 메티스를 따라갔다.

나가는 길에 만난 작업반장과 주피터는 둘의 인사를 받더니 잠시 얘기를 하다가 다시 바로 돌아갔다.

이제 꽤나 어둑해진 바깥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메티스는 가장 가까운 뒷골목으로 사라지듯 들어갔다.

자신도 은밀하게 움직여야하나 싶었지만 별다른 말이 없어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가자 메티스가 코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는 행동에 경계심을 바짝 세운 카카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메티스는 표정 변화 없이 작은 이어잭을 꺼내 내밀었다.

"일 하는데 얘기는 돼야 할 거 아니야?"

'......'

"지금 쫄아있는 거야? 겁 엄청 많네. 아, 내 지시만 들으면 되니까 너는 말 안 해도 돼."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어잭을 받아든 카카는 마음속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

"이 건물. 입구는 저 쪽에 있으니까 알아서 옥상까지 잘 찾아올라가봐. 준비는 거기에 다 해뒀어."

'철저하네.'

짧게 대답한 카카는 이어잭과 메티스의 입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골목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코너를 돌아 나가려할 때 잠시 현기증이 오긴 했지만 길게 호흡하자 잠시 달아나주었다.

뒤를 돌아보자 메티스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고개를 털어낸 카카는 곧장 건물로 들어갔다.

그다지 중요한 건물은 아닌지 최고층에서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가는 카카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한 탓에 무뎌져있는 몸은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들어했지만 어떻게든 문을 열고 들어온 카카는 난간 앞에 있는 커다란 첼로 가방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일을 떠나있긴 했지만 가방에서 나온 차가운 금속 총에 손을 올리자 잠들어있던 감각들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잊고 싶었던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

이미 몇 번이나 본 기억을 고개를 터는 것으로 날려버린 카카는 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잘 올라가있네. 나 어디 있는지 알겠어?"」

'...'

「거기 말고. 그 옆 건물. 거기서 좀 뒤로.」

지시에 따라 시선을 옮기자 멀리 농구장에 서있는 메티스가 보였다.

코트 한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메티스는 카카에게 다른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보통 저격은 이 거리에서 많이들 한다지?」

대답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질문을 하는 것에 짜증이 난 카카는 눈썹을 확 찌푸렸다.

그걸 알 리 없는 메티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사과를 하나 꺼내들더니 골대 위로 가볍게 던졌다.

너무 쉽게 백보드 위에 안착한 사과를 보고 손가락을 튕긴 메티스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내가 올려둔 사과 맞춰봐.」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생각하고있던 카카는 다소 시시한 요구에 김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집중할 것도 없이 스코프에 눈을 가져가 숨을 들이마신 카카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오랜만의 사격이어서인지 반동만으로 온 몸이 울려오는 바람에 카카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동시에 사격을 하자마자 미친듯이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있자 메티스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괜찮은 솜씨네? 나는 당연히 농구대에 맞출 줄 알았는데.」

'...'

「그럼 이것도 맞출 수 있어?」

총알이 닿자마자 폭발하듯 튀어나온 사과의 파편을 집어든 메티스는 손을 까딱거리며 물었다.

말을 할 수 있었어도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카카는 다시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작은 파편이었지만 마치 농구공처럼 쥐고서 자세를 잡은 메티스는 살짝 다리를 굽혔다가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파편이 손을 떠나가는 순간 들려오는 총성과 함께 메티스는 얼굴 위에 사과즙이 팍 하고 튀는 것을 느꼈다.

두 번째 반동은 견딜 수 없었는지 카카가 사라져 있는  것을 본 메티스는 조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내 기대 이상이네. 그 꼴을 하고도 이 정도인 거야?"

「......」

"이 정도면 합격하고도 남네. 생각보다 쓸데가 많겠는걸?"

자신을 도구처럼 취급하는 말에 카카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자신이 쏜 사과가 터진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반동의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숨을 들이쉬던 카카는 다음 타겟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

'이거 맞추는 게 쉬운 건가?'

메티스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한심스러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방금 카카에게 시킨 것은 메티스가 알고있는 저격수 중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에게 말해도 손을 내저을만한 일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카카의 총구가 자신 쪽을 향했을 때 메티스는 등골이 오싹하는 것을 느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메티스는 총구에서 불이 살짝 빛나는 순간 몸을 움찔였다.

미간일까, 아니면 심장일까.

운좋게 빗맞춰서 어깨에 스치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카카가 쏜 것은 메티스의 뒤에서 다가오고 있던 검은 옷의 남자였다.

정확히 눈썹 사이의 미간에 바람구멍이 뚫린 남자는 소리도 내지 못 하고 털썩 쓰러졌다.

'나, 엄청 방심하고 있었네.'

카카 쪽이든 남자 쪽이든 메티스는 부주의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그리고 세 발째를 견디지 못 하고 뒤로 넘어가는 카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방 올라갈테니까 기다리고있어."

=★=

"다른 건 몰라도 몸은 정상 컨디션으로 만들어야겠네."

'아까 그 사람은 뭐야?'

"아. 내 뒤에 있던 그거? 설명하면 길어지니까 아슈토레스를 찾고난 뒤에 말해줄게. 그래도 괜찮지?"

'별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라 상관 없어.'

안경 밑으로 퀭한 눈을 한 카카는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약을 꺼냈다.

곧장 입으로 향하는 손을 메티스가 탁 하고 잡자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우리 파트너가 돼줘야 하는데 약쟁이처럼 굴면 곤란해."

'처럼이 아니라 약쟁이니까 당장 이 손 놔.'

"지금 내가 안 놔도 별 짓은 못 할 것 같은데?"

말과 달리 메티스는 금방 손을 놓아주었다.

잠깐 지체된 것 뿐인데 카카는 황급히 약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어댔다.

곧 파란 동공이 확장되는 것을 본 메티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저씨, 여긴 대충 끝났어. 거기는? 뭐, 술이나 계속 마시고 있다고? 씨... 나는 고생만 했는데. 나도 빨리 가서 마실래. 얘는... 카카. 너도 술 마시러 갈래?"

'됐어. 난 바로 집에 갈게.'

"얘는 집에 간대. 아. 그 사람은 안 보고 가도 되는 거야?"

'...별로 상관 없을 거야. 잘 들어갔다고만 전해줘.'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해. 나중에 필요하면 또 연락할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휴대폰을 든 채 손을 흔든 메티스는 전화상대와 열심히 얘기를 나누며 골목 저 편으로 사라졌다.

계속 말을 걸어와 정신이 없었던 메티스가 사라지자 드디어 조용해딘 골목 안.

갑자기 쏟아지는 피로와 기억들에 잠시 휘청거린 카카는 입모양만으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아슈토레스.'

긴 손톱 같은 무기에 잔뜩 발려있던 피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에 이어서 함께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카카는 눈을 질끈 감고서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

"너 이마는 왜 그래?"

'넘어졌어.'

"그러냐. 안으로 들어가게 문 좀 열어봐."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카카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처음 봤을때부터 그랬지만 메티스는 너무나 당당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모습이 일부러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마음을 읽는 능력이 들킬거라 생각한 카카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아슈토레스라는 애에 대한 정보를 주려고.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 물 한 병 가져다줘.

'...'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도 카카는 군말없이 물을 두 병 꺼내왔다.

하나는 자신의 손에 들고 까드득 뚜껑을 딴 카카는 반병을 순식간에 마셨다.

주방의 테이블 앞에 앉은 메티스는 손을 휘저으며 예의 홀로그램을 불러들였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금발을 노려보던 카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도 차분하게 메티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무섭게 안 봐도 돼. 어차피 내가 입으로 하나하나 읊어줄테니까."

'잔말 말고 빨리 보여주기나 해.'

"그렇게 급해서 지금까지는 어떻게 기다렸대?"

카카를 놀릴 생각은 없었는지 메티스는 곧장 프로필 쪽을 불러오며 입을 열었다.

"아슈토레스, 성은 모르겠네. 여자. 24살. 질문 있어?"

'...'

"너랑 똑같은 청부업자이긴 한데, 처리한 의뢰가 많지는 않아. 3건인데다가 전부 시시한 의뢰고."

'사용하는 무기는?'

"특수제작한 클로... 같은 걸 쓰는 모양이야.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진짜 있다는 게 신기하네."

'지금 살고있는 곳은?'

"윗세계에 맞붙어있는 경계선 근처. 요즘은 의뢰를 받는 대신 꽃가게 아르바이트를 한다는데. 눈에 띄는 행동은 안 하고있어."

'위치도 알려줘.'

"왜. 이대로 가서 죽이려고?"

가벼운 메티스의 질문에 카카는 이를 악 물었다.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분노를 고개를 살짝 돌려 흘려낸 메티스는 물병을 손에 쥐며 말했다.

"좌표는 알려줄테니까 너 하고싶은대로 해. 대신 하나 말해주면, 네가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걔 잡는 건 힘들걸."

'상관 없어.'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 카카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커다란 안경과 베레모를 착용하고서 커다란 가방 하나와 첼로 가방을 가져온 카카는 약병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집을 나섰다.

현관에서 부츠를 신고 있는 그녀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던 메티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물은 잘 마셨어. 다리 아픈데 집에 잠깐 있다가 가도 되지?"

'마음대로 해.'

"참내. 그렇게 화나있었으면 지금까진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대?"

'...'

그 말에 카카는 할 말을 찾지 못하겠는지 묵묵히 부츠의 끈을 묶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선 잠시 망설이는가싶더니 곧장 건물의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자연스레 혼자 남게 된 메티스는 물로 입술을 축이며 카카가 있는 것처럼 소리를 내 말했다.

"뭐. 저 정도가 딱 이용해먹기 좋긴 하지만."

=★=

집에서 나온 카카는 곧장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메티스가 보낸 메일에는 아까 보았던 정보와 그녀가 살고 있는 현재 위치가 들어있었다.

위치를 보자마자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은 카카는 운전기사가 트렁크에 짐을 넣어주려는 것도 무시하고 곧장 뒷좌석에 탔다.

좌표를 입력해 나온 주소가 적힌 화면을 보여주자 택시기사는 싹싹한 목소리로 바로 간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던 카카는 아까 가져온 약병을 손에 쥐었다.

"..."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약병을 집어넣은 카카는 문에 기대어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직 점심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어둑어둑한 창 밖의 사람들은 여느때처럼 평화롭게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그렇게 되지 못 하게 된 스스로의 처지에 작게 웃으며 카카는 아슈토레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

두 시간을 내리 달려 도착한 마을.

윗세계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인지 집이 몇십 채, 건물은 몇 채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로 카카는 조용히 숨어들었다.

혹여나 멀리서 걸어오면 아슈토레스에게 들킬까봐 일부러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사거리에서 내린 카카는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몇 개 있는 건물도 저격을 하기에는 너무나 낮았다.

'이런 곳이라면 곤란한데.'

여차하면 도망쳐야 할 루트를 확보해야 하는 카카의 입장에서 마을의 규모가 작은 것은 꽤나 부담이었다.

거기에 더해, 꽃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왔지만 작은 규모의 이 마을에 거니는 사람들의 인상은 보통이 아니었다.

시비가 걸리는 게 무섭진 않지만 눈에 띌 게 걱정이 됐던 카카는 적당한 곳에서 골목으로 빠져 잠시 숨을 돌렸다.

"으읏...!"

너무 빨리 움직인 탓일까, 가만히 서있자 갑작스럽게 현기증이 몰려왔다.

반쯤 물러난 약기운과 반쯤 되찾은 제정신 사이에서 눈 앞이 점멸하고 귓속으로 속삭이는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지 얘기를 나눈 메티스의 것부터 시작해서 술집의 남자와 작업반장의 목소리까지 들려오자 카카는 덜컥 겁이 났다.

그 전의 목소리까지 들릴까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뺨을 때리자 얼얼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목소리는 슬며시 물러갔다.

시야도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카카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확인했다.

마음에 들 정도로 높진 않지만 그 꽃집을 보기에는 충분한 높이였다.

"..."

조준경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슈토레스는 살아나살 수 없으리라.

그렇게 굳은 다짐을 한 카카는 첼로 가방을 덜그럭거리며 큰 거리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규모가 작다는 것을 제외하면 마을은 큰 특징 없이 평범한 곳이었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니지만 필요한 정보를 위해 걷는 카카의 눈에는 빵집과 잡화점, 약국, 카페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허기가 몰려왔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최소한 꽃집 근처는 확인해두자.'

아슈토레스가 일하는 꽃집은 지금 있는 곳에서 두 블럭 떨어진 사거리의 한 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들킬 것에 대비해 주변을 둘러보던 카카는 5층 규모로 있는 병원 쪽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꽃집의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그 건물에 자연스럽게 들어간 카카는 온갖 약 냄새가 나는 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원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마약을 한다는 걸 들켜도 큰 문제는 없지만 귀찮은 일은 벌어질 수 있었다.

당장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카는 사람들과 최대한 떨어져 계단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별 방해 없이 4층까지 올라간 카카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걸로 보이는 복도 쪽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쓰지 않는지 낡은 자물쇠가 걸린 창고가 있는 곳은 형광등도 켜져있지 않았다.

안쪽 복도의 희미한 빛만이 들어오는 창문 앞에 선 카카는 들고온 가방을 내려두고는 조심스레 꽃집 쪽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라 도구의 도움 없이도 꽃집에  전시된 파릇파릇한 꽃들과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말하면 자신도 들킬 수 있다는 것이어서 카카는 창문 옆으로 최대한 몸을 숨겼다.

'어두워서 들키지는 않겠지만.'

창문을 통해 훤히 보이는 꽃집은 보통의 꽃집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색이 눈에 띄는 꽃들을 창문 앞에 전시해둔 것은 카카의 눈에도 꽤나 좋아 보였다.

"..."

꽃을 바라보고 있으니 옛날의 기억들이 몰려오려 했다.

카카는 어서 아슈토레스가 모습을 드러내주기를 바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과 다르게 아슈토레스는 얼마 가지 않아 꽃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이 있었다면 반짝일 것만 같은 금발과 빛나는 눈을 한 그녀는 물과 흙이 잔뜩 묻어있는 앞치마를 입은 채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시선이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카카는 금방 숨을 수 있도록 긴장했다.

약의 기운을 받아 집중력이 올라갈대로 올라간 카카는 첼로 가방에 당장이라도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이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장 확실한 기회가 왔을 때.

그 때 해도 늦지 않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얼굴을 보자 끓어오르는 화를 누른 채 카카는 하루종일, 정확히는 저녁 여덟 시까지 꽃집을 관찰했다.

꽃집을 닫는 것은 그녀의 몫이 아닌지 안 쪽에 손을 흔들고 나온 아슈토레스는 그대로 거리로 사라졌다.

원래라면 그것까지 쫓아가 뒤를 밟아야 했겠지만 안 그래도 작은 마을이라서 눈에 띌 거라 생각한 카카는 가방을 챙기고 건물을 내려갔다.

아직 불이 그대로 켜져있는 병원 건물을 나온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묵을 숙소였다.

계획도 없이 지나치게 충동적으로 온 것이 후회되긴 했지만 아침의 시간대로 몇 번을 돌아가도 카카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거라 생각했다.

"..."

내내 자신보다 위에 있는 것처럼 잘난척을 하는 메티스의 모습에 욱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알려줬는데도 안 가?'

하고 말하는듯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카카는 그녀가 자신에게 맡길 일이 있다 한 것이 떠올랐다.

다소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만약 거절한다 해도 어떻게든 자신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애초에 아슈토레스만으로  머리가 가득차 다른 고민을 할만할 여유도 없었다.

'아슈토레스를 처리하고나면...'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카쿠스에게 가서 진실을 말해줘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아무일 없었다는듯 살아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떠올리며 카카는 숙박시설 표시가 있는 3층 높이의 건물로 들어갔다.

=★=

카카가 짐을 푼 건물은 그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반대편에 있는 곳이었다. 가장 높다고 해봐야 10층이 채 안 돼 보이는 건물이었지만.

그 이유를 인터넷으로 잠시 찾아보자 이 마을은 뒷세계 중에서 외곽에 있기도 하지만 경계선에 가까이 있는 위치의 특수성 때문에 사람들이 기피해 투자도 제대로 되고있지 않은 곳이었다.

"하아..."

하루종일 창문에 붙어있느라 몸이 지쳐있던 카카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서 소파에 몸을 맡겼다.

찢어져있는 커튼 안으로 이불이 노랗게 뜬 작은 침대와 켜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티비. 왜인지 삐걱 소리가 나는 소파뿐이었지만 카카는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에서 카카는 휴대폰을 켜 카쿠스의 sns를 살펴보았다.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던 sns였다.

매일같이 방구석에 쳐박혀 약만 하던 때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여 원래의 일에 가까운 것을 한 오늘은 너무나도 쉽게 sns 어플로 손이 향했다.

'카쿠스... 잘 지내고 있겠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않아 새로운 소식이 잔뜩 쌓여있을 것을 생각한 카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한 시간 전에 올라온 소식이었다.

거기에는 새로운 카페를 발견해 기분이 좋다는 내용과 함께 커피를 뺨에 대고 찍은 카쿠스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려보았지만 이 반년동안 카쿠스가 올린 것들은 대부분 그런 내용의 소식들이었다.

카쿠스의 소식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본 카카는 그 날 이후로 딱 일주일간 sns에 아무런 소식도 없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 카쿠스는 잘 지내고있지 못 했다.

=★=

방 안을 비추는 휴대폰을 꺼 침대에 던져둔 카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카쿠스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차 있는 걸 본 것만으로 마음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동생의 옆으로 가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

그 생각만 이 가득차 어지러워진 카카의 머리속으로 어릴 적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

"훌쩍... 언니이..."

"카쿠스! 왜 울어?"

카카가 다섯 살.

카쿠스가 네 살일 때의 일이었다.

작은 침대에서 곤히 낮잠을 자고 있던 카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4인용 식탁이 있는 주방. 키 높은 냉장고 앞에 선 카쿠스는 울먹이며 카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아 비틀거리는 걸음을 재촉한 카카는 얼른 가 카쿠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왜 그래, 카쿠스?"

"언니, 나 배고파..."

"엄마가 빵 안 꺼내주고 갔어?"

"응... 일어나서 와보니까 엄마도 없고 여기에도 없었어..."

카쿠스는 높은 식탁 아래, 낮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이른 아침 외출을 할 때면 엄마가 거기에 점심식사를 놓고 가곤 했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잊고 간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카카도 당황했지만 카쿠스가 다시 울먹일까봐 애써 침착한 얼굴을 했다.

카쿠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을 계속 움직이며, 카카는 주방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그래봐야 주방 안에서 먹을 게 있는 곳이라고는 손잡이에 팔도 닿기 힘든 냉장고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카쿠스, 잠깐만 기다려."

"응."

카카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른채 카쿠스는 힘차게 대답했다.

옆에 있는 식탁으로 다가간 카카는 의자를 가져와 냉장고 앞에 두었다.

의자도 꽤나 높은 편이었지만 낑낑대며 그 위로 올라간 카카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와, 언니 키가 엄청 커졌어!"

"언니가 금방 빵 꺼내줄게. 잠깐만 기다려."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있는 힘껏 문을 연 카카는 평소 엄마가 빵을 놓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꽤나 높은 곳에 있어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지만 배고파하는 카쿠스를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카카는 까치발을 세우고 손을 있는 힘껏 뻗었다.

"이잇..!"

"어, 언니. 괜찮아?"

"괜, 찮아..!"

닿을락말락 하는 식빵 봉투 앞에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던 카카는 마음을 크게 먹고 의자에서 뛰어올랐다.

아무리 손을 뻗어보아도 닿지 않던 봉투가 드디어 손에 닿자 카카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기쁨도 잠시, 식빵봉투가 거칠게 손에 딸려오면서 옆에 있던 딸기잼 병이 밑으로 떨어졌다.

 카쿠스 쪽으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떨어지는 충격으로 열린 뚜껑과 함께 빨간 잼이 주방에 후두둑 하고 튀었다.

그 바람에 의자에서 떨어질뻔했던 카카는 간신히 냉장고를 붙잡아 떨어지진 않았지만 주방은 빨간색 잼으로 엉망이 돼있었다.

"어, 언니... 으아아앙!!"

"카, 카쿠스. 괜찮으니까 울지 마.."

화들짝 놀란 카카는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걸레를 찾았다.

그 전에 카쿠스를 먼저 달래줘야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고작 한 살 많은 뿐인 카카에게 이 상황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벌컥!

다행히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엄마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카카의 표정은 방금보다 더 창백해져있었다.

냉장고 앞에서 놀라서 울기만하는 카쿠스를 자신의 뒤에 숨긴 카카는 방금 소리를 들었는지 곧장 주방으로 걸어오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주방에 일어난 참사가 눈에 들어온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하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고서 소리를 질렀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 뿐인데 주방을 이 꼴로 만들어놓았나는 성화에 카카는 잘못했다는 말 밖에 하지 못 했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핑계를 댈 생각도 하지 못 하고있는 카카를 바라보며 카쿠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했다.

그 이후로 집을 나올 때까지 카쿠스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

일주일.

그 기간은 카카가 택시를 타고 올 때부터 생각한 이번 일에 걸릴 시간이었다.

원래는 짧아도 한 달.

길면 반년까지도 상대를 관찰하고 최적의 포인트를 찾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어서 아슈토레스를 처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카카가 정한 것이 일주일이었다.

하지만 어제 카쿠스의 sns를 보고난 카카는 2일로 그 기간을 줄여버렸다.

어제도, 오늘도 평일인 데다가 지금 꽃집으로 출근중인 아슈토레스의 모습을 확인한 카카는 첼로가방을 쥐고서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

반쯤 고장났는지 전등이 깜빡거리는 계단을 타고오르는 카카의 머릿속에 아슈토레스의 얼굴은 거의 들어가있지 않았다.

카쿠스가 신경 쓰여 어쩔 줄을 몰라하는 카카의 얼굴에는 초조함이라는 감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있었다.

이런 기분으로 일을 진행하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카카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 저항 없이 열리는 옥상의 문을 열고 들어간 카카는 곧장 꽃집이 보이는 난간 쪽으로 향했다.

마침 유리를 닦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카카는 망설임 없이 첼로가방에서 총을 꺼내 조립했다.

수백, 어쩌면 수천번을 연습해 숨 쉬는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빠르게 조립을 끝낸 카카는 난간에 총을 거치하고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댔다.

허약해진 몸은 그것만으로 벌써 쓰러지기 직전이 되어있었지만, 총구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아슈토레스를 향했다.

5초도 걸리지 않아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마친 카카는 아슈토레스를 그대로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그 때 한 남매가 꽃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하필이면 그 남매가 다섯살배기 아이들만 아니었어도.

하필이면 그 망설임 때문에 유리창에 비친 반사광으로 위치를 들키지만 않았어도.

망설이는 실수를 한 순간 카카는 도망을 쳤어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지금 그녀의 머리는 그 날의 일과 카쿠스밖에는 생각하지 못 했다.

마치 꽉 막힌 하수구처럼 사고가 흐르지 않아 몇 초나 가만히 있던 카카는 아슈토레스가 달리기 시작했다는 것도 몇 초 뒤에야 알았다.

그제서야 상황을 눈치챈 카카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 총과 가방을 내팽겨치고선 계단으로 달려갔다.

엘레베이터, 계단.

선택지는 두 개였지만 카카는 망설임없이 엘레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사람이 많은 엘레베이터에서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리라.

병원의 특성상 엘레베이터에 자신 혼자 타게 될 가능성도 희박할 거라 판단한 카카의 생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꼭대기 층에서부터 아래까지 내려가며 반 이상이 찬 엘레베이터에서 카카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흥분을 하기 시작해서인지 몸 안을 휘젓기 시작하는 약효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몸이 무너지려 하는 걸 이를 악 물고 참은 카카는 1층까지 온 엘레베이터를 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앞치마를 입은 채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슈토레스를 보며 카카는 다시 그 숨을 들이마셨다.

=★=

카카는 자신보다 앞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가나는 것에 섞여 함께 엘레베이터를 나섰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하라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이미 아슈토레스의 눈빛은 자신을 향해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는 카카의 시선을 그대로 마주친 아슈토레스는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섰다.

마치 어제 본 친구를 다시 만나는 것처럼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아슈토레스는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네요? 그 때 이후로 처음인가?"

"......"

"왜 정 없게 아무 말도 안 하시는 건가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

자신이 말을 잃었다는 걸 알 리 없는 아슈토레스였지만 이상하게 그걸 아는 것처럼 짓고있는 사악한 미소에 카카는 등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그것 뿐만 부드럽게 쥐었다 피는 걸 반복하는 손은 언제라도 자신에게 뻗어올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엘레베이터를 나와 입구까지 걸어가는 오십 걸음.

그 중에 다섯 걸음도 걷지 않아 카카는 자신이 해야할 행동을 결정했다.

입구에 오십번째 걸음을 내딛는 순간 온 힘을 다해 아슈토레스를 몸으로 밀어버린 카카는 그대로 밖을 향해 달려갔다.

적어도 그녀가 넘어지기를 바랬지만 아주 조금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지만 카카는 계획대로 병원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카의 생각과 달랐던 건, 아슈토레스가 자신을 급하게 쫓아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도망칠 기회라 생각한 카카는 거리를 순식간에 돌아보며 택시를 찾았다.

하지만 이런 작은 마을에 돌아다니는 택시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난 대체...'

그제서야 안일하기 짝이 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그런다고 해결책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최대한 뛰어보았는데도 여유롭게 뒤에서 걸어오는 아슈토레스와 거리를 벌리지 못 한 카카는 이를 악 물고 주위를 살폈다.

큰 도로로 가봐야 아슈토레스에게 끝없이 쫓길뿐이라 판단한 그녀는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사이의 틈으로 들어갔다.

상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도망치는 쪽이 몸을 숨기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였다.

조금 뛴 것만으로 목구멍에 숨이 차 답답해져오는 걸 느꼈지만 카카는 발을 멈추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슈토레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꺾이는 골목이 보일 때마다 지체 없이 들어갔지만 그녀와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등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는 것 같은 오싹함에 카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아슈토레스를 무서워 하는거지?'

자신을 죽일 의도가 있는 사람을 무서워 하는 건 당연한 것이지만, 지금 카카가 느끼고 있는 공포는 그것과는 달랐다.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을 때가 아니었던 카카는 다음으로 보이는 골목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카카는 자신의 예상이 맞는 것과 동시에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슈토레스는 이미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그것도 카카를 가로질러 앞에 서 있을 정도로.

거리에서는 그나마 빛나고 있었지만 어두운 뒷골목으로 들어오자 탁한 색이 된 금발은 왜인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을 들게 했다.

기다란 손톱으로 천천히 머리칼을 매만지며 다가온 아슈토레스는 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곳까지 와서야 우뚝 멈춰섰다.

여기서 도망치려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 생각한 카카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카카를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듯 허점을 그대로 드러낸 아슈토레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왜 안 도망치는 거예요?"

"......"

"말이 참 없으신 분이시네요. 흐음... 아프게 해드려도 아무 말씀도 안 하실 건가요?"

한 손을 꿈틀거리며 묻는 질문에 카카의 몸이 저절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마치 손 안의 작은 동물이 겁을 먹어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듯 귀엽다는 미소를 지은 아슈토레스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 의뢰 때 당신을 관찰하는 건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죠. 의뢰대상이 사랑하는 선생님인 걸 알았을 때 표정이랑 음... 아, 가로등 아래에서 마주쳤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네요. 혹시 그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

"후훗. 말이 안 나오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제가 있는 곳까지 알아내실 줄은 몰랐어요. 이 마을에 택시를 타고 온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나요?"

아무 대답이 없는 카카를 상대로 아슈토레스는 연극을 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어라? 아직 여기에 올 때가 아닌데. 아. 저는 다시 만나는 건 당신의 동생인 카쿠스 씨가 있는 곳 앞일거라 생각했거든요. 아아, 선생님이 없어진 카쿠스 씨가 얼마나 슬퍼하고 계실지..."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얼굴을 한 채 정말 슬프다는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가증스럽게까지 보였다.

동시에 하고 싶지 않은 연기를 억지로 하는 베테랑 연기자의 모습까지 같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지금 중요한 건 아슈토레스의 입에서 카쿠스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을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자 카카의 눈이 아주 약간 꿈틀거렸다.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다른 말을 하려던 아슈토레스는 카카의 뒤쪽에서 나는 이야기 소리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뒷골목에서 다른 사람이 올 지 몰랐던 카카는 그걸 기회 삼아 도망칠 구멍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자 머릿속이 순식간에 헝클어져갔다.

마치 고양이가 엉망으로 풀어둔 실타래처럼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던 카카는 아슈토레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보니까, 아까 저한테 총구를 향하고 계셨죠. 그 때 방아쇠를 당기셨으면 저는 죽었을까요?"

"......"

"그건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면 모를 일이긴 하죠."

마치 방아쇠를 당겼어도 자신을 죽이지 못 했을 거라는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카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이유가 됐든 자신은 저격에 실패했고, 이제 그 댓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다.

머릿속은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쉼없이 찾아냈지만 카카의 몸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짝 얼어붙어 손끝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팔을 앞으로 한 채 서서히 다가오는 아슈토레스를 보며 카카는 이걸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었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해 저항을 포기하려던 순간.

카카가 들어온 골목의 입구에 깡 하는 텅 빈 깡통의 소리가 들려왔다.

카카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아슈토레스가 그 정도로 눈을 돌릴 리 없다 생각했지만 그녀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 쪽을 바라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도 그 곳을 바라본 카카는 생각지도 못 한 인물들의 모습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어쩌다가 놓친 건진 몰라도 깡통을 주우러 헐레벌떡 달려오는는 흰 머리의 어린 남자아이 뒤로 못 살겠다는듯 따라온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아까 꽃집에서 본 아이들이었다.

왜 그 아이들이 여기에 있는지 생각해볼 틈도 없이 카카는 아슈토레스를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는 그 얼굴에 냉기가 서려나오는 느낌을 받은 카카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총을 겨누고있을 때 저런 모습이겠지.'

상황에 맞지 않는 감상적인 생각을 금방 떨쳐내버린 카카는 아슈토레스가 한눈을 판 사이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 자신도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병원 건물에서 방아쇠를 당기지 못 한 것과 같은 이유로 달려간 카카는 놀라서 동그랗게 떠진 두 쌍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

도망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카카의 입술은 애타게 뻥긋거리기만 할 뿐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왜 그러는지 몰라 눈을 깜빡이던 두 아이는 카카가 자신들을 들어올려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큰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던 아이들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자 오히려 당황했지만 카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던 아슈토레스는 언제든 카카에게 달려들 수 있었지만 골목 안으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도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예상하지 못 한 전개긴 하지만, 더 재미있어진 것 같네요.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기대되는걸요?"

아무도 없는 골목 안에서 연극을 하듯 말한 아슈토레스는 카카의 뒤를 느릿느릿 쫓아갔다.

그리고 그 느린 속도가, 자신이 두 아이를 들고 뛰는 속도보다 빨라질 것이라는 걸 아는 카카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두기 위해 숨까지 참아가며 골목길을 달렸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해도 이미 망가진 몸으로 둘이나 들고 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카카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왜 그렇게 필사적인지 모르는, 머릿속이 꽃밭일 아이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할 뿐이었다.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그나마 겁을 조금 먹은 표정이었지만 그런 게 전혀 없었던 누나 쪽은 카카의 허리에 안긴 채 질문을 던졌다.

"언니, 지금 술래잡기 하는 거에요?"

"......"

"근데 저희는 왜 들고 뛰시는 거에요?"

"......"

카카의 얼굴에는 급박한 게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지만 여자아이는 위험을 눈치채지 못 하고 아무 말이 없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빨리 도망쳐야 돼.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골목에서 아슈토레스가 자신보다 빠르게 앞질러 갔던 것을 보았던 카카는 얼마 가지 않아 그녀에게 따라잡히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어도 이 아이들만큼은 골목에서 벗어나게 하고싶었다.

설령 아슈토레스가 제정신이 아니더라도 길 한복판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하진 못 하리라.

어떤 근거도 없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으며 카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안 그래도 심리적으로 몰려있던 데다가 체력도 이미 방전에 가까운 상태였던 그녀가 갈 수 있었던 거리는 고작 해야 백 걸음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도 뛰는 걸 멈추지 않았지만 결국 한계를 느낀 카카는 발을 헛디뎌 딱딱한 길 위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몸이 바닥과 부딪치는 거친 소리가 걸려왔지만 그 와중에도 카카는 아이들을 꼭 안아 다치지 않게 보호해주었다.

"꺄아아악!"

"어, 엄마아... 흐아아아앙!!"

"읏..."

혹시나 다쳤을까봐 걱정이 앞섰지만 카카는 아이들을 보기에 앞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하다는듯 아슈토레스가 따라오고 있었다.

너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이라도 하는것처럼 걸어오는 모습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차갑도록 푸른 눈은 카카 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등에 소름이 끼칠 정도의 살의에 몸이 얼어붙어버린 카카는 아이들을 안은 팔에 손을 풀고 어서 도망치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목소리가 나오지 못 하게 꽉 닫혀버린 입, 닫혀버린 마음 속에서 연기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크읏...!"

"흐아아앙! 훌쩍, 흐윽...!"

"우, 울면 안 돼 미트라. 착하지?"

자신도 놀랐으면서 울먹거리고 있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애써 울음을 참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카카는 예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다른 것은 그녀의 동생인 카쿠스 역시 우는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었지만 눈 앞의 남자아이는 하늘이 무너진듯 서럽게 울고있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면 카쿠스는 나한테 약한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지. 선생님한테는 달랐으려나.'

카카는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아이들보다 자신이 먼저 죽는 것 뿐이라 생각한 카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은 채 아슈토레스에게 등을 돌리고서 아이들을 끌어안았다.

아직까지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한 아이들은 카카에게 안긴 채 울상을 지으며 아슈토레스가 다가오고있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타닥 타닥 타닥!

그리고 들려오 빨라진 발소리에 눈을 질끈 감은 카카는 곧 의식이 멀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저벅저벅

탁 탁 탁!

하지만 카카는 곧 골목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두 개라는 걸 눈치챘다.

여전히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자신이 들어온 곳에서 다급하게 뛰어오는 발소리.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카카는 입을 열어 여기에서 도망치라 말하고 싶었다.

"읏... 크윽...!"

그럼에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 하고 괴로운 소리를 내는 카카의 앞쪽에서 그 발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져왔다.

그리고 곧 골목 입구까지 도착한 발소리와 함께 마구잡이로 휘날리는 검은 생머리를 한, 흰 셔츠위에 가디건을 입고 색이 바랜 청바지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빨간 눈을 급하게 움직인 그녀는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했고 이내 안도하는 얼굴을 했다.

"엄마아아아!!"

"흐아아앙!!"

'저 사람이 얘들 엄마구나.'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여자를 본 아이들은 마음을 놓고선 방금보다 더 서럽게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의젓한 척을 하려 울음을 참던 여자아이도 우는 걸 보자 카카는 씁쓸한 마음과 함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안도감이 스쳐지나가는 것도 잠시, 멀리서 다가오는 아슈토레스를 본 여자의 얼굴은 온기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칼날 같은 모습이 되어있었다.

급하게 달려왔는데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과 빠르게 상황을 살피는 눈.

당장이라도 움직이기 위해 청바지 아래로 긴장시키고 있는 다리를 본 카카는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하지만 특히나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강렬했다.

카카가 방금 아슈토레스에게서 느낀 살의에 가슴이 찔린 것 같았다면, 눈 앞의 여자의 분위기에는 완전히 잠겨버려 숨도 쉬지 못 할 지경이었다.

"흡...!"

실제로도 숨을 제대로 쉬지 못 해 카카가 괴로운 목소리를 내자 여자의 눈이 그녀를 잠시 관찰했다.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본 여자는 다시 아슈토레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아슈토레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즐거운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손님은 한 분 뿐일 줄 알았는데, 계속 늘어나네요? 한 번에 네 명이라... 이건 일기에 적어둬도 괜찮겠어요."

"......"

도발이라고도 하기 힘든, 상대를 완전히 깔보는 말투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슈토레스가 어떤 여자인지 이 사람은 알기나 할까?

그럴 리가 없었다.

조금 범상한 정도로는 저 미친 여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

방금까지 아슈토레스에게 공포를 느끼고있던 카카는 자신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으, 으읍...!"

'애들 데리고 도망치라고 말해줘야 되는데...!'

설마 했지만 그 말이 전해진 것일까, 여자는 작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온 말은 아이들을 넘겨달라, 도망치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들 눈 가리고있어."

"...?"

무슨 소리냐, 얼른 도망쳐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지금 카카가 할 수 있는 건 그 말을 따라 아이들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묻어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는 순간, 스니커즈를 신은 여자의 발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의 모습은 카카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잠시 멍하니 있던 카카는 옆에서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으으읍!"

"우으으읍!"

자신의 품에서 아이들이 버둥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여자의 말을 기억한 카카는 손에 힘을 꽉 줘 품을 벗어나지 못 하게 하고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거기에는 아슈토레스의 양 손을 팔에서 말 그대로 뽑아낸 채 들고있는 여자와 놀란 표정도 짓지 못 하고 있는 아슈토레스, 그리고 허공에 흩뿌려지는 피가 보였다.

카카는 못 해도 오십 걸음은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날아가 아슈토레스를 제압한 여자의 모습이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이 잠시 기절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 착각을 할 정도의 상황에 입까지 살짝 벌려가며 놀라고 있는동안 여자는 아슈토레스의 입으로 손을 쑤셔넣었다.

이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입에서도 피가 뿜어져나왔지만 여자의 얼굴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를 못 내게 하려는 건가?'

영화에서 나와도 과장됐다는 욕을 듣기 딱 좋은 장면이 눈 앞에서 벌어지자 카카는 놀라다 못 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모든 일을 1초도 되지 않아 해낸 여자는 냉기가 쏟아져내리는 얼굴을 한 채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메이, 미트라. 저 분 따라서 큰 길로 나가있을래요? 밖에 아빠가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엄마는 이 분이 많이 다치신 것 같아서 도와드리고 갈게요. ...아이들 좀 부탁드릴게요."

"......"

"훌쩍... 언니, 가요. 미트라. 언니한테 잘 붙아있어.

"응..."

놀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아빠라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아이들은 엄마 쪽은 보지도 않고 카카에게 폭 안겨왔다.

자신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여자의 시선을 계속 받아낼 수가 없었던 카카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서 골목 밖으로 걸어갔다.

힘이 빠진 몸으로는 어린아이 두 명을 안고 나가는 것도 힘들었지만 들어왔던 길을 거꾸로 간 카카는 멀리서 빛이 들어오는 처음의 골목까지 겨우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거기에 한 인영이 비추는 것을 본 카카는 그게 여자가 말한 남자일거라 생각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그를 보자마자 내려달라고 말하며 품에서 바둥거렸다.

그런 두 아이를 조심스럽게 내려준 카카는 혹시나 넘어지지는 않을까싶어 둘의 뒷모습을 걱정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

자꾸 그 둘에게서 자신과 카쿠스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생각한 카카는 고개를 털며 자신도 빛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슈토레스를 암살하기 전 먹었던 약이 마지막이었던 걸 떠올리는 순간 흔들리는 시야에 벽을 짚고서 간신히 선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약을 꺼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약을 입에 넣는 순간  어떤 소리도, 예고도 없이 거친 손이 카카의 목을 졸라왔다.

순식간에 숨이 막혀 의식이 날아갈 것 같은 고통에 카카는 몸부림 한 번 치지 못하고 켁켁거리는 소리만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아랑곳 않고 목을 잡은 손 그대로 카카를 벽으로 밀어넣은 손의 주인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빨간색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보러 갈 것 같은 얼굴에 죽음을 예감한 카카는 눈을 감으려 했지만 그 전에 여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천천히 목을 풀어주었다.

"콜록! 콜록콜록!"

"이름."

여자는 손을 떼자마자 카카를 골목 안쪽으로 밀치며 물었다.

힘이 들어가있지 않았는데도 뒤로 몇 발자국이나 밀려난 카카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을 뻥긋거리긴 했지만 정작 말을 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보며 여자는 어느정도 그걸 예상했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선 허공에 손을 가볍게 휘젓자 파란색을 띈 홀로그램 화면이 카카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이름."

거기에 가볍게 턱짓을 하자 카카는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카카」

"카카. 여기는 왜 온 거지?"

「방금 그 여자를 죽이러」

"이유는?"

"......"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지? 보아하니 내 아이들을 도와준 것 같은데, 그건 고맙다고 말해둘게."

「도와주려고 한 거 아니야」

망설이면서 쓰는 글에 어깨를 으쓱인 여자는 더 물을 게 없다는듯 홀로그램을 꺼버렸다.

골목 바깥에서 남자가 아이들을 달래주고 있는 걸 한 번 슬쩍 본 그녀는 카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 눈에 망설임이 담겨있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카카는 여자가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소음기 달린 총의 소리에 빨간 눈동자를 담은 그 눈은 가늘게 떠졌다.

검은 머리칼의 끝을 태운 총탄이 바닥에 작은 소리를 내며 박히자 카카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였다.

자신을 노렸다면 그대로 죽었을 거라는 생각에 카카가 얼어붙어있는 사이 여자는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골목의 벽을 몇 번 차는 것만으로 앞쪽 건물의 옥상에 날아오르듯 올라갔다.

방금 아슈토레스에게 달려갈 때도 그랬지만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에 카카가 놀라운 눈을 뜨고있는동안 저격수의 목을 꺾어버린 여자는 그 사람을 허리에 끼고서 가볍게 골목에 착지했다.

4층은 되는 높이었는데도 가벼운 먼지바람만을 일으키며 내려온 여자는 그 사람을 카카의 옆에 툭 하고 던져두었다.

왜 그걸 확인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새인지  남자와 아이들이 사라져있는 걸 본 카카는 마음 속으로 안도하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카카의 모습을 전부 보고 있었지만 여자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홀로그램을 부르며 물었다.

"말해. 한 패야?"

「전혀 몰라. 그리고 당신이 아니라 나를 쫓아온 걸 수도 있어」

메티스의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이 쐈던 사람을 기억해낸 카카는 자신이 타겟이 됐을 가능성을 생각하며 말했다.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눈 앞에 있는 여자에게 무언가를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카카는 그렇게 대답했다.

카카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여자는 골목 밖을 슬쩍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도 카카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조금은 부드러워지는 그녀의 눈길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와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눠보기 전까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겠지만, 누군가와 닮아있는 그 눈빛에 카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이들과 남편의 모습을 확인한 여자는 금방 고개를 돌렸고 카카도 깨문 입을 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단은 얘기를 좀 더 해봐야겠네. 우리 집까지 따라와. 이 마을에 오래 있는 건 그다지 내키지가 않아서."

"......"

카카의 머리속은 카쿠스에 대한 생각과 자꾸 흘러들어오는 과거의 기억들로 가득찬 상태였다.

도저히 여자와 얘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하난 것이 제안이 아닌 명령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카카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역시 카카를 데리고 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약하게 썼다.

그런 마음을 티내려는듯 혀를 일부러 크게 쯧 하고 찬 그녀는 곧장 골목 바깥을 향해 걸어갔다.

'...카쿠스.'

그 뒤에서 동생의 이름을 속으로 작게 불러본 카카는 천천히 여자를 따라갔다.

그녀를 따라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이 거역할 수 없는 흐름에 카카는 몸을 맡기기로 했다.

8년 전, 그 때처럼.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