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 시간 후.

피곤에 절은 얼굴로 집으로 돌아온 메티스를 반겨주는 것은 발소리를 듣고서 버선발로 달려나온 헬라였다.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아직 가게의 유니폼을 입은 채였던 헬라는 메티스를 반겨주려다가 그녀의  양 손에 들려있는 봉투들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식욕을 자극하는 매콤한 냄새와 그을린 냄새를 풍겨대는 그 봉투들을 받아들고나서야 헬라는 메티스를 보고 입을 열었다.

"언니. 다녀오셨어요?"

"응. 으아아... 피곤해 죽겠어. 헬라, 이거 식탁에 가져다두고 접시 좀 꺼내줘. 나 금방 씻고 나올게."

"알았어요. 근데 이건 뭐에요? 엄청 좋은 냄새 나는데..."

"꼬치야. 간만에 생각나서 좀 사왔어."

"아, 그래서 저녁 해놓지 말라고 하셨구나.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꼬리가 있다면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렸을 정도로 자신을 반겨주는 헬라의 모습에 메티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자신을 반겨주는 것만큼 꼬치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단추를 푼 그녀는 잠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샤워가 끝난 뒤.

축축해진 금발머리 밑으로 흰 수건을 목에 두르고 나온 메티스는 푸하 하고 숨을 크게 내쉬며 부엌으로 향했다.

손이 어찌나 빠른지 스무 개가 넘어가는 꼬치를 접시에 먹기 좋게 담아둔 헬라는 식탁의 긴 의자에 앉아 메티스를 보고 손짓했다.

물을 묻히고 나와서인지, 아니면 퇴근 후의 피로 때문인지 무거워진 몸으로 의자에 털썩 앉은 메티스는 꼬치를 하나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소금이 잔뜩 발려있는 돼지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오자 조금은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그녀는 그제서야 헬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헬라. 옷은 왜 안 갈아입은 거야?"

"아, 아르바이트 끝나고 나서 생각할 게 있어서요. 침대에 누워서 생각만하다가 까먹었어요."

"생각할 거?"

"네. 저기, 언니한테도 말씀드려야 하는건데..."

접시 위에 올라가있는 꼬치 두 개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우물쭈물거리는 헬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메티스는 손에 쥔 꼬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냉장고에 잔뜩 들어가있는 탄산음료 중 사이다를 하나 꺼내와 벌컥벌컥 들이킨 그녀는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 애를 쓰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저기..."

쉽게 말하기가 힘든 내용인지 헬라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 하고 연두색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머뭇거렸다.

그런 모습에 헬라가 무슨 말을 하든 놀라지 않을 준비를 단단히 한 메티스는 헬라의 입이 살짝 열리자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열었다.

"사실은 학교에서 숙제를 내줬거든요... 가족이랑 주말동안 한 체험활동을 감상문처럼 써서 내라고요."

"...그게 다야?"

"네? 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내용에 메티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랬을 뿐, 헬라가 꺼낸 말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시면 저기 그, 시간 좀 내주실수 있으신가 해서요..."

"당연히 내야지. 그걸 왜 그렇게 어렵게 말해?"

"주말은 언니 쉬는 날이잖아요. 괜히 쉬시는 거 방해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조심스럽게 말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헬라를 바라본 메티스는 앞에 있는 그릇을 헬라의 옆 자리로 옮겼다.

그 전에 손에 쥔, 빨간 양념이 잔뜩 묻은 꼬치의 고기를 하나 뜯어먹은 메티스는 헬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런 걱정 하지 마 헬라. 우리는 가족이잖아."

"...고마워요 언니."

메티스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며 짧게 어리광을 부린 헬라는 곧 몸을 떼고 꼬치를 집어들었다.

방금 얘기를 꺼내는 데 신경을 많이 썼는지 이제야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꼬치를 먹는 그 모습에 메티스는 작게 웃으며 물었다.

"근데 뭐 할지 생각해둔 건 있어? 나는 이렇다하게 생각나는 게 없는데."

"아니요. 한참 고민해봤는데 아직 생각이 안 나서요... 생각나는대로 말씀드릴게요."

"응. 그럼 이거 다 먹고 같이 생각해보자. 꼬치는 어때? 맛있지?"

"네. 엄청 쫄깃쫄깃해요. 아, 음식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빵 같은 거 굽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렇게 메티스와 헬라는 저녁식사가 끝나고도 체험활동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이렇다할만한 걸 찾지 못해 자기 전까지도 뭘 할지 정하지 못 한 메티스는 찝찝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헬라랑 같이 뭘 해보지... 내가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학교는 뭘 이런 숙제를 내줘?'

괜히 학교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내뱉은 메티스는 내일 고민해보자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잠든 꿈에서도 메티스는 헬라와 마주보고서 그 얘기에 대한 토의를 계속해나갔다.

"하아..."

"방금 걸로 스무 번 채웠으니까 오늘 점심은 메티스 니가 사라."

"네?"

"출근하고서 아침동안 들은 한숨소리만 스무 번째라고. 무슨 일이길래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한숨을 쉬어대?"

어지간하면 자신이 뭘 하고있든 신경쓰지 않는 서장이 의자를 길게 빼앉아 묻는 것을 보고 메티스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부터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고민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던 메티스는 퀭한 눈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주말에 헬라 숙제로 체험활동을 해야 되는데 뭘 할 지 모르겠어서요. 어제 저녁부터 계속 생각했는데 도저히 정하질 못 하겠어요."

"학교 숙제? 그런 거면 그냥 대충 해도 넘어가주잖아. 뭘 그렇게 고민해?"

"그래도 이왕에 하는 거 제대로 된 걸로 하고 싶어서요. 근데 제가 아는 게 있어야 하든지 하죠. 그래서 계속 그 고민 하고있었어요."

"주말에 체험활동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길 것 같았던 서장은 의외로 턱까지 괴어가며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에 혹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까싶어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는 메티스의 기대에 부흥하듯 서장은 곧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조, 좋은 생각 있으세요?"

"당연히 있지. 아주 기가 막힌 걸로 있으니까 넌 이제 걱정 그만하고 업무에나 집중해. 주말이면 내일 모레니까... 충분하겠네."

"뭐 생각이 있으신 것 같긴 한데 왜 말씀을 안 해주세요?"

이젠 고민이 사라지고 호기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 메티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장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가보면 알아. 1박2일로 갈 건데 상관 없지?'

"1박 2일요? 상관은 없는데... 서장님도 같이 가시려구요?"

"어. 내가 끝내주는 체험활동 시켜줄테니까 잔말말고 짐이나 잘 챙겨서 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따로 챙겨오고."

보통이면 귀찮다고 잘 나서지 않는 서장이라는 걸 알기에 메티스는 그 적극적인 모습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일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은데 헬라한테도 물어보고요."

"그래? 그럼 지금 문자해둬. 오늘 내로 준비 끝내두게."

"근데 왜 말씀 안해주시는 거에요? 뭐 엄청 대단한 거라도 돼요?"

미심쩍어하는 메티스의 질문에 서장은 그저 씩 웃어보일 뿐이었다.

곧 헬라에게서 좋다는 문자를 받은 메티스가 그 말을 전해주자 웬 일로 눈에 활기를 띈 서장이 키보드를 두들겨대기 시작했고, 그렇게 조금은 들뜬 분위기로 하루의 업무도 별 일 없이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서 앞으로 늦지 말고 새벽같이 오라는 서장의 말에 고개를 대충 끄덕인 메티스는 가게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ㅡ 아, 언니!"

"오늘은 좀 빨리 끝내달라고 하면 안 돼? 서장님이 내일 늦으면 죽는다고 신신당부 했단 말이야."

"일곱시까지 30분 밖에 안 남았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분주하게 가게를 청소중이던 헬라는 종소리가 들리자 선반에서 몸을 돌려 메티스에게 탁탁 뛰어왔다.

오늘 아침에 자신이 해준 연두색의 양갈래 머리를 찰랑거리며 뛰어온 그녀는 입구 근처에 있는 의자를 꺼내 내어주고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다가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곳에선 까치발을 들어 낑낑대며 청소를 하는 작은 뒷모습을 보고 빙긋 웃은 메티스는 그런 자신이 어색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어색함 때문인지 괜히 입을 연 메티스는 진열된 물건들을 바로세우는 헬라에게 물었다.

"헬라. 뭐 챙겨야할지는 생각해뒀어?"

"어... 여행은 엄청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서요.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속옷이랑 옷 챙기면 반은 챙긴 거라는데 잘 모르겠어요."

"그래? 사실 나도 여행은 몇 번 안 가봐서. ...근데 여행 가는 게 맞긴 한가?"

"이모가 아직도 말씀 안해주셨어요?'

"...그 이모라는 말은 몇 번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한 메티스는 헬라에게서 눈을 돌려 넓은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어느 한 곳 빠짐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진열대들은 언뜻 보기에도 손을 여러 번 댄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보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생각이 든 메티스는 입구 쪽에 꽂혀있는 책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헬라. 일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돼."

"네? 아, 아니에요. 그냥 손 가는 만큼만 하고 있는 거에요."

"아니긴? 엄청 신경쓴 거 보이는데. 잘 했어."

무심하니 내뱉는 메티스의 칭찬에 헬라는 부끄러운지 어깨를 살짝 움찔였다.

그걸 미처 보지 못 한 메티스가 책의 제목들을 의미없이 읽어보고 있는동안 시계의 시침이 7이라는 숫자로 딸깍 하며 넘어갔다.

그 시간에 정확히 맞춰 들어온 주피터와 인사를 나눈 메티스는 교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헬라의 손을 잡고 도시의 중심에 있는 큰 마트로 향했다.

입구에 있는 큼지막한 카트를 끌고 자동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메티스는 북적북적한 내부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들 엄청 많네."

"오늘 금요일 밤이잖아요. 다들 일과 끝나고 여기로 온 것 같아요."

얼른 장을 보고 돌아가고 싶었던 메티스는 꽤 힘들어질 것 같은 장보기에 대비해 한숨을 푹 내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의 알림으로 떠있는 메신저를 키자 보이는 것은 머큐리와 아르고스가 찍어보낸 사진이었다.

'언니. 오늘 금요일인데 뭐 하세요? 저희는 퇴근하자마자 술집 왔어요.'

'여기 고기가 맛있는데 언니도 다음에 와서 같이 먹어요.'

그 위로 둘끼리 떠들어댄 메시지가 잔뜩 쌓여있는 걸 무시하고 핸드폰을 집어넣은 메티스는 매장 안을 둘러았다.

"옷 같은 건 다 집에 있으니까 먹을 것만 사면 되지?"

"네. 온 김에 다음주에 먹을것도 사두고요. 혹시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먹고 싶은 거야 많은데..."

음식 얘기에 고민에 빠져드는 메티스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만 올린 헬라는 가장 앞에 있는 과일칸으로 향했다.

"이따가 둘러보면서 말씀해주세요. 과일은... 안 터질만한 걸로 사는 게 좋겠죠?"

"어디 험한 데로 가는 건... 아마도 아닐테니까 너무 물렁한 것만 아니면 돼."

"그러면 사과랑 자두랑... 바나나는 안 되겠죠?"

"음... 그건 그냥 집에 가서 먹자."

간만에 장을 보러 나와서였을까, 신이 났는지 흰 뺨을 발그레 물들인 헬라는 과일들을 하나씩 들어 비교해보며 카트에 하나씩 실었다.

집에서 간식으로 먹을 것도 생각해 넉넉하게 과일을 챙긴 헬라와 메티스가 다음으로 향한 곳은 빨간 고기가 가득한 정육 코너였다.

생고기 뿐 아니라 소세지나 베이컨, 육포까지 갖가지 고기들이 있는 걸 보며 눈을 빛낸 메티스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갈빗대가 그대로 붙어있는 고기를 보며 요리하기에 재밌어 보인다 생각하던 헬라는 다른 고기들도 둘러보며 그런 그녀를 따라갔다.

발걸음만 봐도 들떠있는 게 보이는 메티스가 선 곳애는 자르지 않고 통채로 있는 큼지막한 돼지고기가 있었다.

흰 비계 아래로 두터운 살코기가 있는 삼겹살을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메티스가 재밌었던 헬라는 말 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참동안이나 그 고기만 쳐다보다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 메티스는 기대감에 가득찬 얼굴로 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헬라. 우리 이거 사갈까?"

"저는 상관없는데, 이걸로 뭐 해드시려고요?"

"어디 보니까 통째로 구워먹는 것도 있던데 나는 그건 못 하겠고... 그냥 잘라서 구워 먹으면 되지. ...너무 많나?"

"언니가 있어도 세 명이서 먹기엔 조금 많은 것 같아요. 다른 것도 먹어야 하잖아요."

"그, 그렇네... 저건 다음에 사먹어보자."

말으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 하는 메티스의 모습에 헬라는 마음이 약해져왔다.

꼼꼼한 성격 탓일까, 음식이 남는 것을 보지 못 하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여행이니 괜찮을 거라 자신을 설득한 헬라는 메티스 대신해서 그 고깃덩이를 집어들었다.

"대신 언니가 많이 드셔주셔야 하는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나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으니까."

카트에 고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는 메티스의 눈이 반짝이는걸 보자 헬라는 괜히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쇼핑을 시작한 카트에는 음식 재료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해 어느새 카트가 가득 차 층을 이룰 정도가 되었다.

조금만 운전을 잘못해도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재료들을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은 헬라는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언니. 이 정도만 사면 될 것 같은데요..."

"흐음... 그래. 오래 가는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만 사자. 헬라 너는 사고 싶은 거 다 산 거야?"

"네. 저는 새우 소금구이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 해보려고요."

여행준비에 신이난 것일까, 평소보다 훨씬 들떠있는 목소리로 말하는 헬라를 보며 메티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르 재료들은 보자 그미소가 더 깊어진 그녀는 짝 소리나게 박수를 한 번 쳤다.

"자. 쇼핑은 이 정도로 하고 그만 돌아가자. 아, 헬라 배고프지?"

"조금요. 가게 보다가 쇼핑까지 해서 그런지 뭐라도 먹고싶어요."

"그럼 이거 계산하고 오늘은 외식하고 들어가자. 헬라,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아니요. 언니 드시고 싶으신 걸로 고르세요."

"흐음... 저번에 먹은 피..."

자가 맛잇었는데.

라고 말하려던 메티스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헬라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기름기 가득한 피자에 시원한 맥주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헬라를 보며 그 마음을 접어둔 그녀는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떠올렸다.

"오늘 저녁은 레스토랑 가서 밥 먹고 들어가자. 헬라 너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도 돼."

"레스토랑이요? 어... 전 그럼 오무라이스 먹을래요."

"그것만? 고기 같은 것도 먹어도 되는데."

"전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내일 여행 가서 언니랑 같이 있으면 엄청 많이 먹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음, 그건 그렇지."

그런 별 다른 내용 없는 대화를 나눈 둘은 쇼핑을 마친 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지친 헬라는 졸음으로 눈이 반쯤 감긴 채였지만 짐을 정리해야 한다며 메티스의 말을 듣지 않고 봉투를 부스럭거렸다.

그런 헬라를 번쩍 들어올려 침대에 눕혀버린 메티스는 혼자 주방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음식들을 집어넣었다.

"......"

혼자 살 때는 인스턴트 음식과 물 밖에 들어가있지 않던 냉장고에 여 러 음식과 재료들이 들어가있는 것을 보자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실감된 메티스는 잠시 손을 멈추고 감상에 젖어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바쁘게 움직인 메티스는 그 많던 재료들을 모두 냉장고에 옮긴 뒤 피로에 지친 몸을 소파에 던졌다.

"후아... 여행 준비만 하는 건데도 힘드네. ...근데 음식 재료만 가져온 거지 준비는 하나도 안 한 거 아닌가?"

그제서야 옷과 세면도구 같은 것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 메티스는 머리를 쥐어싸며 낮게 신음했다.

그렇다고 해서 더 움직일 힘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메티스는 내일 아침 헬라를 조금 일찍 깨워야겠다 생각하며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셋이서 주말 여행이라...'

헬라야 그렇다쳐도 카두케우스가 가는 것까진 생각하지 못 했던 메티스는 소란스러워질 것 같은 여행에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런 두근거림을 오래 느낄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든 메티스는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쉬기 시작했다.

=*=

"야, 야야! 그렇게 와서 오늘 안에 오겠다! 안 뛰어?!"

"가, 가고있어요!"
"헥...헥..."

토요일 아침.

이른 아침부터 양 손에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하나씩 든 메티스는 내려쬐는 태양 아래에서 숨을 허덕이며 뛰고있었다.

그 옆에서 헬라가 한 손으로는 캐리어 가방을 질질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가방을 들고 오는 것을 본 서장은 고개를 젓더니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메티스. 넌 애한테 이런 걸 들게하고있어?"

"그, 그거, 헤엑... 헤엑... 벼, 별로 안 무거운 거에요!"

"무겁고 가볍고가 중요해? 하여튼 기본이 안 돼있다니까. 헬라, 잘 지냈지?"

자신이 들고있던 옷가방을 뺏어들어 어깨에 걸치는 서장을 본 헬라는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이모. 네. 잘 지내고 있었어요."

"아직 볼이 그렇게 푹 들어간 거 보니까 좀 더 먹어야겠다. 메티스, 너 헬라 제대로 먹이고 있는 거 맞아?"

"아이씨. 제가 그럼 대충 먹이겠어요?"

투덜거리는 메티스를 보고 피식 웃은 서장은 서 앞에 주차해둔 커다란 빨간색 SUV를 향해 걸어갔다.

평소 보지 못 했던 그 차에 고개를 갸웃거린 메티스는 헥헥대면서도 서장에게 물었다.

"저 차는, 후우... 뭐예요?"

"여행 간다고 빌려왔지. 세 명 가면 짐도 많을텐데 내 차로 갈 순 없잖아?"

"역시 서장님이시네요."

"당연하지. 그런데 메티스. 너 손에 든 그건 뭐냐?"

아이스박스에 관심을 가지는 서장의 목소리에 메티스는 숙이고있던 고개를 확 쳐들었다. 그리고선 반짝이는 두 눈으로 서장을 바라본 그녀는 신이 잔뜩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여행 가서 먹을 거요."

"...대충 예상은 했는데 니 입으로 들으니까 놀랍네. 어디 피신가냐, 피신 가? 피난민들도 이렇게는 안 싸."

"푸흡!"

자신의 말에 헬라가 웃음을 터뜨리자 기분이 좋아진 서장은 계속 메티스의 옆에서 그녀를 놀려댔다.

그런 서장 때문인지, 아니면 헬라가 웃은 것 때문인지 입을 삐쭉 내민 메티스는 차의 뒤까지 와서야 아이스박스를 조심스레 내려두고서 허리를 쭉 폈다.

"흐으으읏...! 와, 이거 들고 오느라 진짜 죽는줄 알았어요."

"그러게 왜 그렇게 무식하게 많이 들고와? 내가 너희 굶길 것도 아니고 거기에도 먹을 거 당연히 있는데."

"그럼 그것도 먹고 이것도 다 먹으면 되죠."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하는 메티스를 보며 서장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머쓱한 표정을 지은 헬라는 서장이 열어준 트렁크 안으로 캐리어를 밀어넣고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모. 오늘 어디 가는 거예요?"

"음... 그건 도착할때까지 비밀. 이모가 너 데려가는 곳이라 신경 좀 썼거든. 미리 말하면 재미 없잖아?"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서장은 헬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이 싫지 않았는지 헬라는 잠시동안 눈을 감은 채 머리가 만져지는 감촉을 즐겼다.

"읏차...! 짐 다 넣었어요 서장님. 이제 출발하는거죠?"

"어. 근데 메티스. 너는 햇빛이 이렇게 센데 애 모자 하나도 안 씌워줬어?"

"와... 서장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제가 쓰라고 했는데 헬라가 불편하다고 해서 가방에 넣어둔거예요."

"그랬어? 헬라. 이런 날씨에 이렇게 나오면 피부 다 상해. 이모가 하나 줄테니까 쓰고있어."

"네? 저, 저는 괜찮은데..."

헬라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움직인 서장은 차 뒷자리에서 검은 야구모자를 하나 꺼내 헬라의 머리 위에 푹 씌워주었다.

사이즈가 조금 크긴 했지만 푹 눌러쓴 모자가 귀여웠는지 서장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모 선물이니까 헬라 가져도 돼."

"정말 괜찮은데..."

"헬라, 감사하다고 해야지."

"아, 네. 감사합니다 이모. 잘 쓸게요..."

서장은 다시 한 번 배꼽인사를 하고서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듯 야구모자의 챙을 만지는 헬라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 이제 출발해보자. 이틀밖에 없으니까 재빨리 가서 신나게 놀아보자고."

"네이."

"네! 저 여행은 처음이라 엄청 기대돼요."

"오, 그래? 그럼 이모가 더 잘 놀아줘야겠네."

헬라의 말에 메티스는 어깨를 작게 움찔였지만 서장은 오히려 잘 됐다는듯 신이 나서 운전석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은 메티스와 헬라는 안전벨트를 매고선 엔진 소리와 함께 차에 시동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요즘 마구마구쓰는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