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40년대. 일본과 미국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때까지 일본은 1차대전기에 이미 종언한 "거함거포주의"에 목을 매고 있어서 크고 강한 전함을 만드는 데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해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2차 대전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이었다.




야마토급 전함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전함이었고, 전함 대 전함으로 싸울 경우 야마토를 일대일로 대적 가능한 전함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야마토의 주포탑 1개의 무게가 일본의 아카스키급 구축함 한 척보다도 무거웠으니 그 규모가 쉽사리 와닿지 않는다. 좀 더 이해가 쉽게 설명하자면, 야마토급 전함의 길이는 263미터에 육박했는데, (안테나를 제외한)63빌딩의 높이가 249.6미터이다. 즉 이 새끼를 들어서 세로로 세우면 63빌딩보다도 더 높다.


이런 정신나간 전함이 취역하여 바다를 헤집고 다니며 "황국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바랐던 일본군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 해전의 패러다임은 전함 대 전함으로 포를 쏘며 싸우는 거함거포주의가 막을 내리고 항공모함에서 전투기를 적극적으로 산개하여 교전하는 항공전력 중심의 전투방식이 뜨고 있었다. 1차 대전기까지는 기껏해야 복엽기 수준을 간신히 넘는 수준의 전투기가 대부분이라 전투기가 전투의 핵심이 될 수 없었지만, 2차 대전기에는 이미 전투기가 모든 전투의 양상을 거머잡을 수 있을 정도로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군부도 이런 사실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항공모함이 모든 전투의 주축이 되어야 하며 다른 전함들은 항공모함의 호위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군사가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미군의 항공모함 중심 전술을 목도한 일본 군부는 이대로 있다가는 다 조지겠다고 판단하여 전략을 급선회한다.


당초 야마토급 전함은 8척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대부분 취소되고 1번함 야마토, 2번함 무사시, 3번함 시나노 3척이 건조될 예정이었는데, 일본 군부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시점은 야마토와 무사시가 이미 취역하고 시나노가 건조중이던 시점이었다. 일본 군부는 방향을 급선회하여 시나노를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으로 만들기로 결정을 내린다.


당초 전함으로 계획되었던 시나노의 설계안


시나노를 갑자기 항공모함으로 개수하겠다고 하니 기술진은 뒷목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기술진은 총력을 다해서 시나노의 무게중심과 함체를 항공모함형으로 바꿔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 시나노는 항공모함으로 아주 멋지게 재탄생할 수 있었다.



항공모함이 된 시나노는 원래 덩치가 큰 놈이었기 때문에 만재하면 130기 이상, 즉시 발진 가능한 상태로 유지해도 40기를 넘는 전투기를 탑재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미 해군의 에식스급이 발진 가능한 상태로 100기 가까이 싣고 다니는 걸 고려하면 문제가 있지만, 아무래도 일본 전투기들은 날개를 접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고질적인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길고 커다란 갑판의 디자인 덕분에 이착함도 더 안정적이고, 전함을 개조한 놈이라 대공무장의 수준도 엄청나서 미 공군 전력에 대한 대응능력도 최대한으로 키웠다.


그러나 이 시나노의 진정한 능력은 따로 있었다. 애초부터 야마토급 전함은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하여 적들이 쏘는 걸 다 맞아 주면서 씹고 돌진할 것을 상정하고 디자인되었고, 그 두꺼운 장갑과 방어력은 웬만한 전함의 주포 가지고는 뚫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신나간 방어력이 항공모함에 그대로 옮겨왔다. 어지간히 두들겨서는 가라앉히기는커녕 유효타조차 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불침 해상기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침내 이 엄청난 항공모함은 1944년 10월 8일에 진수되었다. 시나노는 대략 1개월간 항구에서 썩다가, 본격적으로 11월 19일 취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첫 번째 전투에 투입되기 위해 11월 28일, 멋진 나팔소리를 울리며 전투기를 보급받으러 첫 항해를 야심차게 시작하였다. 이때 시나노는 일본 서부 세토내 해에 자리잡은 구레 기지로 이동하기 위해 몇 척의 호위함만을 데리고 이동하였다. 당시 일본 주변에 있던 미군 공격이 언제 가해질지 몰랐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서 보급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기를 보급받을 날짜는 11월 30일이었다.


















그리고 11월 29일 새벽, 첫 항해 17시간(!)만에 미국 잠수함한테 어뢰맞고 격침.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