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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법학게이야.


저번 시간 글 마지막에 증거인멸과 관련해서 쓰겠다고 이야기했지?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증거인멸 관련해서 시사현안이 많았었는데, 난 그런 사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순수하게 형법상 조문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만 할 거야. 그 부분을 기대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난 그 사안에 대해서 증거를 본 것도 아니고, 변호사와 검사가 법정에서 논쟁을 벌이는 걸 본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형사소송법에서의 증거야. 민사소송법에서의 증거는 다루지 않아. 내가 민사소송법은 관심이 없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성적도 개판쳐서 뭐라 할 말이 없거든. 착한 냥붕이들은 관심이 없다고 성적을 개판치진 않았으면 좋겠어. 어떻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가 있는거지


그럼 바로 시작할게. 말이 중간중간 좀 과격해줘도 이해해줘.


참고로 요청받은 위법성 조각사유 이야기는 이 글 다음에 쓸 거야. 아무래도 준비한 거 먼저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저번 글을 못 읽은 사람은 읽어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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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증거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엄청 길어질 수밖에 없어. 내가 보는 형사소송법 교과서는 그렇게 두껍게 쓴 책이 아닌데도 거의 140페이지를 증거와 그 관련 내용에 할당하고 있을 정도로 분량이 많거든. 이 교과서가 겨우 700페이지도 안 된다는걸 생각하면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이번에는 글을 좀 짧게, 증거의 종류 정도만 언급할 거야. 그리고 그 관련 내용만. 아마 교과서로 따지면 증거법 서설 정도가 되겠네. 각 증거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할 기회가 언젠가는 있을거야.


먼저 증거란 뭘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형사소송이라는 건 심판 절차야. 그 절차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피고인이 있고, 피고인을 심판하기 위해서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해. 당연하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누군가를 심판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증거와 증명이야. 증거는 사실관계의 확인을 위한 자료고, 이걸 갖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을 증명이라고 해. 증명의 대상이 되는 사실관계를 요증사실이라고 부르고, 증거와 증명하려는 사실과의 관계를 입증취지라고 불러. 복잡하지.


그렇다면 증거라는 것이 모두 다 같은 증거일까? 그렇지 않아. 증거는 형사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야. 이미 증거재판주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증거에 의해서 사실관계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이 밝혀져야 유죄가 되거든. 그러니까 증거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할 수가 없고, 아무거나 증거로 인정해주면 무죄가 나올 여지가 없어지게 되지. 이렇게 되면 판사 마음대로 판결하는, 법치(法治)가 아니라 인치(人治)가 되고 말아. 우리에게 알려진 마녀재판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이해가 좀 쉬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이래서 증거에 관한 내용이 형사소송법 교과서에서도 가장 복잡하고 내용이 많은거야.


그런데 증거의 개념이 뭘까? 사실관계의 확인을 위한 자료가 증거라고 했는데, 이 자료라는 건 증거방법과 증거자료를 합쳐서 말한 내용이야. 증거방법이란 사실 인정에 사용될 수 있는 수단을 말해. 증거방법에는 보통 증인, 감정인, 증거물, 증거서류 같은 게 포함되고, 이런 증거방법에서 내용을 획득하고 감지하는 절차가 있는데, 이걸 증거조사라고 해. 증거조사를 거쳐서 나온 내용이 증거자료야. 증거자료는 증인의 증언, 감정인의 감정의견, 증거물의 성질과 상태, 증거서류의 의미내용 같은 것이 증거자료라고 할 수 있겠네.


증인이라는 걸 예시로 증거방법, 증거조사, 증거자료를 한 번 이야기해보자. 증인 그 자체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증거방법이야. 증인은 사실 인정에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니까. 하지만 증인 자체로는 내용이 있는 게 아니잖아? 목격자 A를 그냥 법정에 데려다 놓았다고 해서 그게 증거가 되는 건 아니지. 목격한 내용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러면 형사소송에서는 증인신문이라는 절차를 해. 아주 일반적으로 보면, 드라마 같은 곳에서 자주 나오는 검사가 증인에게 질문하고, 증인이 답변하는 것. 그리고 검사의 질문이 끝나고 변호사가 질문하고 증인이 답변하는 식 (이걸 반대신문이라고 불러) 증인신문을 하지. 이 절차가 증거조사라고 볼 수 있어. 그리고 그 답변 내용이 증거 자료가 되지.


자, 그럼 다음으로 본증과 반증을 보자. 본증이란 거증책임을 지는 당사자가 제출하는 증거야. 거증책임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주장에 대해 증명할 책임이 거증책임이야. 보통 형사소송에서는 검사가 거증책임이 있어. 바뀌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한데, 여기서 말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하여간, 검사는 자기가 제출한 증거를 통해 어떤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럼 반대쪽은 그걸 두들겨 맞아야할까? 당연히 아니지. 반대되는 증거를 제출하거나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을 하는 식으로 본증에 의해 증명될 사실을 부정하는 증거를 제출하는데, 이걸 반증이라고 불러. 만약 예외적인 사례로 거증책임이 전환되면, 피고인이 제출하는 것이 본증, 검사가 이에 반해서 제출하는 것이 반증이 되겠네.


또, 증명과 소명이라는 개념도 있어. 이건 법관이 가져야 할 심증의 정도에 관한 구별인데, 법관이 요증사실에 대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심증을 가지면 증명이야. 보통 형사소송에서는 유죄판결을 위해 법관이 '증명'을 통해서만 유죄 판결을 내리도록 하고 있지. 이것과는 다르게 그냥 주장하는 사실이 있다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의 심증만 갖게 하면 소명이야. 뭐가 다르냐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면 소명인거지. 증명은 확신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물론 형사소송은 대부분 증명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소명으로도 가능한 경우가 몇 가지 있어서 언급해봤어. 뭐냐고? 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은 그 사유를 소명하면 되고, 증언을 거부할 때 증언거부사유는 소명하기만 하면 되거든.


기피신청사유를 통해서 소명의 예시를 들어볼까?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냥붕이는 법대생이야. 그러면 학교 선배 중에 판사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 지잡대를 다니든 인서울을 다니든 지거국을 다니든 판사를 한 명도 배출 못하는 법대는 극히 드무니까. 그런데 마침 판사가 냥붕이랑 같은 학교 출신이야. 얼굴을 알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같은 학교 출신이잖아? 그러면 검사는 기피신청을 해. "냥붕이랑 판사가 같은 학교 출신이다. 편파적인 판결을 할 우려가 있다. 그러니 이 판사는 안 된다." 그러면 이게 소명된 거야. 냥붕이가 아싸 중의 아싸라서 아는 선배도 없고, 혼자 다녀서 동기나 후배들도 냥붕이를 모른다고 해도 어쨌거나 후배라고 봐줄 수 있다는 추측은 가능하거든. 학연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러면 소명이 된 거야.


마지막으로 증거능력과 증명력이라는 이야기만 하고 마무리지을게. 증거능력이란 증거가 엄격한 증명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 법률상의 자격을 말해. 전에 증거재판주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엄격한 증명의 법리에 따르지 않은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어. 전에 올라왔던 냥드립 카테고리의 글을 링크해둘게. 이 사례는 경찰이 '법에 정해진 음주단속절차'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음주단속으로 인한 음주측정이 증거능력을 상실해서 무혐의가 된 거야. 법정으로 끌고가면 판사가 무조건 "너 왜 절차 안 지켰어?" 하면서 무죄 때린다고. 이게 증거능력이야. 증명력이란 증거의 실질적 가치, 그러니까 신용성을 말해.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하고, 이걸 자유심증주의라고 하지.


그러면 두 개는 비슷한 걸까? 아니야. 달라. 증거능력은 형식적이고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거야. 예를 들면, 음주측정절차는 행정적으로 결정이 되어있어. 그 절차를 위반하면 증거능력을 상실하지. (그렇다고 그 절차를 고의로 못하게 하면 그 자체로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법관은 여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 증거능력이 있으면 증거로 사용할 수 있고, 증거능력이 없으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거야. 만약 자기 주관 같은 걸 개입시켜서 인정하거나 부인하면 바로 상급심(2심이나 3심)에서 박살이 나고, 징계도 각오해야겠지. 하지만 증명력은 달라. 증거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증거가 이 사건과 얼마나 관련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잖아? 예를 들면 증언을 통해 "이 사람이 평소에 음주운전을 자주 했다"는 증거능력이 있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치자고. 근데 이 사건에서 그 사람이 평소에 음주운전을 한 게 지금 이 사건에서 음주운전을 했다는 증거일까? 소명은 되지만 증명은 안 되겠지. 평소에 음주운전을 하니까 그럴 수 있어. 정도에서 멈추는거야. 이걸 판단하는건 판사가 주관적 판단을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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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증거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야.


오늘은 내용을 길게 가져가지 않을테니까 증거의 종류 같은 건 나중에 또 다룰 기회가 있을거야.


다음 글에서는 이어서 내가 진짜로 하려고 했던 사례 기반 "증거인멸"을 써야하지만, 위법성 조각사유 이야기가 있어서 어떤 걸 쓸지 모르겠네.


다들 건강 조심하고,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