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군 OSS 소속 일본 육군 중장 무타구치 렌야 선생님:


그는 1888년 10월 7일 일본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7년에는 29세의 나이로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언제부터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단신의 몸으로 일본제국과 수만 일본군을 단신으로 없애버림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더욱 앞당긴 분이셨다. 


 그분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1. 중일전쟁이 벌어지기 전 자신의 휘하 부대원 중 하나가 출석을 하지 않자(그 부하는 이후에 멀쩡히 잘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 중국군이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고 판단(하는 척을 하여) 대대적인 중일전쟁을 시작하였다. 당시 렌야 선생님은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면서 팔에 깁스를 하고 나와 전투 중에 다친 군인의 모습을 기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용맹한 군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파간다의 정석을  찍어 주시었다.


2. 싱가포르 전투 당시에 그는 수류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그 사유는 아래와 같다. 부대에서 술 잔치 벌이다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으려다가 날아온 수류탄의 파편을 맞고 다친 것이다. 이러한 업적과 당시 일본군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구조와 그의 특유의 인맥을 활용하여 1943년 3월 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하게된다.


3.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도 유명한 임팔 작전을 실행하게 되는데 이 작전의 전체적인 맥락은 아래와 같다.

일본군이 인도를 점령하여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점한다라는 기본적인 원칙 아래에서 일본육군만으로 해군의 도움은 필요 없으며 공군도 필요없고 보급 또한 필요없다. 일본인은 원래 초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초록색이 넘치는 정글에서 일본군은 보급을 할 필요가 없으며 정글이기에 소와 말과 같은 동물들을 데리고 가서 그 동물들이 물자를 수송하고 배고프면 그 동물들을 잡아먹는 이른바 "징기스칸 전략"을 정식으로 채택하였으며 이 전략으로 9만3천명의 일본군의 1만명으로 줄여버렸다. 당시 서로 전투를 벌일 정도로 사이가 더럽게 좋지 않았던 일본 육군이 제발 해군한테서 보급 받으라고 사정사정할 정도였지만 우리의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 선생님은 자기 상관들 말을 다 씹고 일본군의 패망을 앞당기시었다. 

 참고로 보통 군사학에서 군대의 25퍼센트가 전투불능상태에 빠지게 되면 전투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한다. 즉 무타구치 렌야 선생님은 9만의 일본군을 전멸 수준이 아닌 절멸시키는 독립군으로써의 위대한 업적을 세우신 것이다. 


4. 이러한 위대한 업적으로 그는 일본군을 단신의 몸으로 결딴을 내는 것에 성공하였으며 수많은 할복요청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나서 전범재판을 받을 때까지 요직에 있는 것을 성공하였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전범처리재판을 겪게 되었을 때 그는 같은 편이었던 미군에게 대접을 너무 잘받아 오히려 살이 쪄서 왔으며 당연히 무죄를 받았다.


5. 참고로 이 분의 위대한 점은 이렇게 굶고 다니면 당연히 주변 민가를 약탈하거나 할려고 할텐데 이 분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써 굶고 다니는 자신의 일본군한테 주변 민가 약탈 절대 금지에다가 상대편 전쟁포로에 대한 전쟁범죄 절대 금지를 내걸면서 진정한 독립운동가로써의 긍지를 보여주셨다.


아.... 그립습니다 렌야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