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https://arca.live/b/dogdrip/21325922

2편 : https://arca.live/b/dogdrip/21368832

3편 : https://arca.live/b/dogdrip/21392297

4편 : https://arca.live/b/dogdrip/21444580


이걸로 서원듀스 47 마지막 글이다.

저번 편에서 대한민국에 있는 서원은 전부 끝냈는데, 조선이 대한민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북한 지역에도 서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서원 중에도 서원듀스 47에 들어간 서원이 있다.


여기서 쓰는 행정구역은 가능하면 북한의 행정구역을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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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평양직할시 무열사


명(明)의 병부상서 석성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사당.


석성은 명의 문관으로, 예부시랑과 병부상서 등을 지냈다. 예부시랑 시절에 역관 홍순언과의 인연으로 조선의 종계변무를 해결해주었고 병부상서 시절에는 조선에 출병할 것을 만력제에게 상주하여 조선에 구원군을 파병하게 한다. 조선 선조 시기에 건립되어 건립된 해에 사액을 받았고 이후 명의 장수인 이여송, 양원, 이여백, 장세작을 함께 배향하였다.



37. 개성특별시 숭양서원


▲ 이게 숭양서원의 사진이라고 하는데,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를 기리며 그가 살던 집에 세운 서원.


선조 시기에 숭양이라고 사액받았고, 현종 이후 김상헌 등을 추가로 배향하는 등의 일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사우에는 정몽주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서경덕·김상헌·김육·조익·우현보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고 한다. 영조 시기에는 영조가 친필로 사액을 내려주기도 했고, 서원 안에 이와 관련된 유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알 수 없다. 어필사액을 받았기도 하고, 정몽주라는 충신을 배향한 서원이기 때문에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8. 황해남도 배천 문회서원


조선 중기 지방 유림의 공의로 현유(賢儒)의 위패를 모시고 지방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해 창건한 서원


선조 시기에 문회라고 사액받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왜란 후에 중건하였고, 사신으로 온 명의 서도가 주지번이 쓴 편액을 받았다. 숙종 시기에 박세채가 송시열과 상의하여 주자(朱子)의 남강현학규(南康縣學規)를 본떠 서원을 동서의 양사(兩祠)로 조성하고, 이 고을 출신으로서 학덕이 높았던 안당, 신응시, 오억령, 김덕함을 동사(東祠)에, 그리고 이 고을과 관련이 있는 국가적 명현 이이, 성혼, 조헌을 서사(西祠)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이후 박세채를 서사에 추가로 배향했다. 어째서 서원철폐령에서 예외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



39. 황해남도 은율 봉양서원


문순공 박세채를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숙종 시기에 건립한 서원. 건립 이듬해에 사액을 받았다. 박세채를 배향한 서원이 적기 때문인지 서원철폐령 당시에 훼철되지 않았다.



40. 황해남도 해주 청성묘


백이, 숙제를 배향한 사당.


백이, 숙제는 중국 상(商) 말기에 살았던 형제로, 변방 영지의 후계자였다. 주(周)가 상에 반역할 때, 백이가 주 무왕에게 간언하기를,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효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신하 국가이다. 어찌 신하가 임금을 주살하려는 것을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주 무왕이 격노해 죽이려 했으나 태공망으로 알려진 무왕의 신하 강상이 의인을 죽일 수는 없다 하여 말렸다. 주(周)가 상을 멸망시킨 후 이들은 주의 녹을 먹지 않겠다고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 그런 백이와 숙제에게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하니 고사리조차 먹지 않고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청성묘는 숙종 시기에 충절의 상징인 백이숙제를 제사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건립 당시에 이제묘라 했으나 숙종이 청성묘로 사액을 내려 청성묘가 되었다. 충절의 상징인 백이숙제를 제사하는 사당이기 때문에 훼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41. 황해북도 평산 태사사


고려의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과 충절공 유검필, 무공공 복지겸, 무열공 배현경을 배향한 사당.


고려 성종 시기에 건립되었지만 서원으로 건립된 것도 아니니 때문에 최초의 서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조선 정조 시기에 삼태사사라고 사액을 내렸지만, 무열공 배현경이 빠진 것이었기 때문에 추후에 이것이 잘못되었다 여긴 조정에서 삼태사사라고 사액을 내릴 당시의 승지를 파면하고 이름을 태사사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정조 21년 8월 1일 정유 1번째기사) 이후 서원 철폐령 당시에도 고려 시기의 공신을 모신 사당이 없기 때문인지 훼철되지 않았다.



42. 평안남도 평원 삼충사


촉의 충신 제갈량, 송의 충신 악비, 문천상을 배향한 사당.


조선 선조 시기에 촉의 충신인 제갈량을 제사하기 위해 건립되었고, 초기에는 와룡사라 불렀다. 현종 시기에 와룡사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았는데, 숙종 시기에 송의 충신인 악비를 배향하도록 하고, 영조 시기에 송의 충신인 문천상을 배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3인의 충신을 배향한 사당이라 하여 삼충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충절을 강조한 사당이기 때문인지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43. 평안남도 안주 충민사


정묘호란 당시 순절한 남이흥과 수하 장수들을 배향한 사당.


남이흥은 정묘호란 시기의 인물로, 후금이 침공하자 주변 수령을 규합해 후금군을 저지하기 위해 분투하다 안주에서 전사했다. 숙종 시기 국가에서 직접 나서 안주에 건립했으며, 건립 이듬해에 충민사라는 이름으로 사액했다. 국가에서 건립한 사당이므로 서원철폐령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44. 평안북도 영변 수충사


조선 중기의 승려 휴정을 모신 사당.


휴정은 서산대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정조 시기에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에 그를 제향하는 표충사(表忠祠)가 건립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묘향산의 암자 옆에도 사묘(祠廟)를 세우고 화상을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 평안도관찰사 이병모의 청원으로 조정에서 수충사라는 현판을 내리고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고, 지방관방 하여금 제전(祭田)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승려들에게 이를 운영하게 하였다. 휴정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규합한 인물이기 때문에 서원 철폐령 당시 승려를 배향한 사당임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45. 평안북도 정주 표절사


홍경래의 난 당시에 순절한 임신7의사(壬申七義士)를 배향한 사당.


임신7의사는 군민을 모아 대항하려던 가산군수 정시와 항복을 거부한 한호운, 백경한, 박지환, 허항, 제경욱, 김대택을 말한다. 이후 평안도의 선비와 민중에 의해 이들을 기리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이를 장령 박영현이 임신7의사를 기리는 사당이 있음을 보고 조정에 상소하여 표절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지방관에게 봄·가을 향사(享祀)에 제수(祭需)를 지원하도록 했다. 이러한 경과로 인해서인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았다.



46. 함경남도 북청 노독서원


지방유림의 공론으로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항복은 광해군 시기에 관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다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그 유배지가 북청이었다. 유배지에서 이항복이 주변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이를 계기로 이항복이 신원된 후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이곳에 유배된 바 있었던 김덕성과 정홍익을 추가 배향하고, 숙종 시기에 노독서원이라 사액을 받았다. 사액 후에도 민정중과 오두인, 이상진, 이세화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 시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았으나 그 뒤 북청향교(北靑鄕校) 터에 옮겨졌다가 1908년에 승덕학교(承德學校)로, 1911년 이후에는 북청농업학교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47. 경기도 안성 덕봉서원



※ 실수로 경기도 지역 서원 하나 빼먹었는데 안성시민 여러분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관인 충정공 오두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


오두인은 조선 후기의 문관으로, 숙종 시기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쫓겨날 때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중전 폐출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인현왕후 폐비 불가 상소를 주도하였다. 이를 보고 진노한 숙종이 상소를 쓴 이들을 잡아들여 취조하였는데, 오두인은 70이 넘은 노구에도 취조 과정을 의연하게 견디며 폐비불가론을 주청하였다고 한다. 취조 끝에 숙종은 오두인의 셋째 아들이 현종의 막내 딸 명안공주와 결혼한 사돈 집안이라 하여 사형을 면하고 의주로 유배를 보내는데, 유배길에 파주에서 사망했다. 이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킬 때 목숨을 걸고 옳은 말을 했다 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원이 건립되었고, 건립 2년 후에 사액을 받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목숨을 걸고 옳은 말을 한 사람의 서원이라서인지 훼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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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원듀스 47이 끝났음.


관심있으면 한 번 가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