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의 유명한 분야는 의외로 해적인데, 특히 한반도의 동해 방면에서 악명높았다. 이미 고대 읍루 시절부터 해적질을 자행해온 탓에 옥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숨었다는 기록도 남아있었다. 고려 시대 지방행정제도에서 군사적 성격강한 행정 구역인 양계 중 동계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여진족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고, 이 해적질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에는 고려의 제후국우산국을 사실상 멸망시켰고, 일본 규슈지역까지 원정을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는데, 고려와 접촉한 후 이들이 이 족속을 '도이(刀伊)'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해적질당한 사건을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부르게 된다. 


사실 여진족들의 활동 지역인 만주에는 평야 지대도 있었지만 숲과 큰 강도 있었기 때문에 초원에서 방목만 하는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생활방식이 크게 달랐고 어업 역시 여진족들의 주업 중 하나였다. 즉, 원래도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민족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역시 동여진 해적과 숱한 전투를 치뤘다. 특히 1009년에 현종이 즉위 하자마자 등주75척의 과선을 배치하여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비하게 하였다. 하지만 1011년 6월 동여진 해적이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다. 1011년 1월 2차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1018년에는 동여진 해적으로부터 일본인들을 구출했는데 이때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갖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현종거란뿐만 아니라 여진과도 전쟁을 수행한 것이다.

이후 금나라가 북송과 전쟁할때 송흠종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고 대신 여진과의 싸움에 잔뼈가 굵은 고려 송에게 "걔네 물에서도 잘싸우더라"라는 나름의 조언(...)을 해주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