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1편: https://arca.live/b/dogdrip/21567053

비틀즈 2편: https://arca.live/b/dogdrip/21632470


-마지막 투어, 그 이후


'Paperback Writer'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1966년, 마지막 투어 직전에 7집 'Revolver'가 발매되었어 6집 'Rubber Soul'에 이른 비틀즈의 실험 정신이 드러난 이 앨범은 또다시 고평가를 받았지. 특히 수록곡 'Tomorrow Never Know'는 백마스킹, 스튜디오 녹음 기법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록 계에 큰 파장을 불어왔어. '사이키델릭 록'의 시작인 거지. 곧이어 8월 29일, 비틀즈의 공연은 막을 내렸어.

(8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앨범 커버)

1966년 11월 부터 비틀즈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녹음에  들어가, 무려 700시간이 넘는 녹음 시간을 비롯해 온갖 파격적인 실험을 계속한 끝에 그 중 먼저 나온 싱글 'Strawberry Fields Forever'은 비치 보이스의 리더 브라이언 윌슨이 새로운 앨범 'SMiLE'를 작업하던 중 이걸 듣고 경쟁을 포기할 정도였지(비치 보이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훗날 다루기로.). 앨범의 모든 수록곡이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준 이 앨범은 훗날 '콘셉트 앨범'의 사실상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수년 후 '프로그래시브 록'에도 영향을 주게 되. 여담으로 한국에선 앨범 커버에 작게 들어간 마르크스 때문에 발매가 금지되었다고 하네..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

67년, 비틀즈 모두가 힌두교에 관심을 가진 사이, 그들의 메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스트레스로 인한 약물 중독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게 돼. 비틀즈가 너무 거대해지자 자신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 자신의 성적 지향(브라이언은 게이였다.) 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거지. 멤버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엡스타인의 죽음은 멤버들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분멸의 조짐을 보이는 계기가 되.

(9집 'Magical Mystery Tour'의 앨범 커버)

1967년 12월 이 앨범의 발매와 함께 동명의 영화가 상영되었어. 그리고 조낸 망했지... 대놓고 완전한 쓰레기라는 혹평을 받은 영화는 미국에서는 방송되진 못했어. 물론 앨범 'Magical Mystery Tour'은 사이키델릭함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


-갈등의 시작

(1968년,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68년 1월, 비틀즈는 뮤지션을 발굴하고 그들을 돕겠다는 취지로 애플사를 설립해. 하지만 넷 모두 경영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뮤지션들이다 보니 애플은 금새 경영난에 시달리고, 이는 불화와 갈등을 촉진시켜.

영화 수록곡 'Yellow Submarine'

같은 달, 비틀즈는 애니메이션 영화 'Yellow Submarine'에 출연하지. 같은 해 6월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 영화는 음악, 유머, 비주얼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 

(10집 'The Beatles'의 커버)

영화가 개봉한 이후, 68년 11월 더블 앨범  'The Beatles'가 발표되. 이전까지의 그 어떤 앨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오로지 이름만이 있는 새하얀 앨범 커버는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지. 그렇게 붙은 별명이, 바로 '화이트 앨범'이야. 하지만 이 앨범을 만들며 분열은 가속화 되고 있었어. 방황하던 이들은 마하리시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인도 리시케시로 와 3달 간 앨범 수록곡 중 60%에 달하는 18곡과 그 외 많은 곡들을 만들었지만, 링고가 열흘 만에, 매카트니가 1달 만에 영국으로 떠나고, 남은 둘도 마하리시가 자신들을 이용하려 한다는 의혹과 그가 여성 참가자들에게 성적으로 접근한다는 의혹에 두 달 만에 떠나고 말아.

앨범의 레코딩 세션이 이어지는 동안, 링고 스타가 무려 2주간 밴드를 떠나버려 매카트니가 드럼 스틱을 잡아야 했고, 레논과 매카트니의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지. 레논은 매카트니가 만든 곡들을 멸시하고, 스튜디오에 애인을 데려오지 않는다는 암묵적 약속을 깨고 오노 요코를 데려오려 고집했지. 레논은 "모든 트랙이 개개인의 트랙이고 비틀즈의 음악은 없다. 존과 그의 밴드, 폴과 그의 밴드, 조지와 그의 밴드"라고 말할 정도였고 매카트니도 "만드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라고 밝혔지. 그리고 둘 다 이 일이 비틀즈 해체의 시작이었다고 동의했어.

11월 발표된 이 앨범은 200만 장 이상의 선주문과 한 달 만에 400만 장 가령 팔리는 대박을 차지했지.


롤링 스톤 선정 비틀즈 10대 명곡에 들어간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발매 당시에는 최악의 노래라는 평을 받았지만, 현제는 한국을 비롯해 널리 사랑을 받는 'Ob-La-Di Ob-La-Da'


-'Abbey Road'와 'Let It Be'

1969년 1월, 애플 사옥 옥상 공연에서 연주된 'Don't Let Me Down'

그들의 마지막 앨범  'Let It Be'는 사실 12집 'Abbey Road'를 발표하기 전 거의 다 만들어졌지.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앨범을 만들고 밴드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라이브 공연을 재개하자는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추진되었지만, 이미 관계가 최악이었던 멤버들 때문에 프로젝트는 개판이었어.  세션에 대해 레논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조지 해리슨은 "내 평생 최악의 세션"이라 말했고 레논과 매카트니 모두에게 열받은 해리슨은 5일간 밴드를 떠난 뒤 라이브 공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고 새 앨범 'Get Back'에 대한 작업을 집중하지 않으면 밴드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지. 어쨌든 간에 이제 공연을 촬영해야 할 때가 되었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바다 한가운데 배 위, 정신병원, 튀니지의 사막, 콜로세움 등이 나온 끝에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1월 30일 애플사 옥상에서 마지막 공연을 하게 되.

거기에 이어 엡스타인의 뒤를 이을 재정 고문을 임명하려 할 때, 또다시 갈등이 벌어지는 데. 레논, 헤리슨, 링고는 앨런 클라인을 원했지만 매카트니는 자신의 처남 존 이스트먼을 원한데다 일시적으로 두 명이 동시 기용되어 분쟁을 초래했지. 결국 5월 8일 앨런 클라인이 단독으로 비틀즈의 매니저가 되었어.

Get Back 세션이 존망하자 매카트니는 사실상 마지막 앨범을 준비하게 되. 바로 'Abbey Road'지.

(12집 앨범 'Abbey Road'의 커버.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 냈다.)

이 앨범은 첫 면은 각자의 곡으로, 다음 면은 메들리로 구성하게 되어있지. 각자의 갈등이 너무 심했던 탓이었어. 결국 69년 8월 20일. 비틀즈 모두가 한 스튜디오에서 함께한 마지막 날이 되었지. 'Abbey Road'는 발매뒤 3달이 안 되 400만 장이 팔리고 17주 동안 영국 차트 정상을 지켰지. 여담으로 이미 이 앨범 수록곡에서 균열은 잔뜩 암시되었어.


수록곡 'Come Together'

이 노래는 1절-2절-3절-후렴-4절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절은 비틀즈의 멤버(링고-조지-존-폴 순)를 소개하는 내용이지만, 4절, 그러니까 폴 매카트니 만이 다른 절과 떨어져 있지.

1970년 1월, Get Back 앨범을 위해 마지막 곡을 녹음했지만, 레논은 참여하지 못했어. 3월에는 앨범의 타이틀이 'Let It Be'로 바뀌었지. 그러나 매카트니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가 자신의 방향대로 되지 않은것에 분노했어 5월 8일, 마지막 앨범  'Let It Be' 가 발매되었고, 마지막 싱글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20번째 빌보드 1위 곡이 되지.


-다음 이야기

그렇게, 비틀즈는 역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