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동군연합과 유사한 형태최왼관계를 맺고 있었던 티베트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1913년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중국 세계에 "만주족의 나라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하였다. 달라이 라마티베트 정부는 네팔, 영국, 부탄 등과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로서 몇몇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영국은 내외몽골처럼 티베트를 분할하여 외티벳(서티베트)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내티벳(동티베트)중국령 티베트(사천 서부 서강, 청해, 운남, 감숙의 티베트지구)로 삼는 타협권했으며, 한편으로는 티베트를 인도 지역 이권 수호를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무기를 지원해주고 영국 공관을 설치, 공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914년 티베트 정부는 영국령 인도제국과의 국경을 맥마흔 라인으로 확정하였다.


중화민국 당시 청말민초의 난세로 티베트에 세력을 뻗칠 여유가 없어 종주권 주장만 하였다. 1932년 사천성 군벌 류원후이와 티베트 사이에서 중국-티베트 전쟁이 벌어져 금사강경계선이 되었으며, 중화민국캄 지방서강성(西康省) 설치하였다. 

하지만 2차 대전 종전 후 영국이 인도를 상실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 승리를 거두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 상황은 달라졌다. 

공산당 정부는 이 지역의 영유권을 선언했고,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0일 티베트를 침공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10월 19일 전투 한 번 치르고 협상을 제시했다. 참고로 전투에서 티베트는 중과부적으로 패전한다.  


공산당 정부와 달라이 라마 측 몇 차례의 협상을 해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 협의'라고 한다. 

그 후 차근차근 반종교정책, 토지개혁과 같은 공산화 정책시행되자 기득권인 승려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서 이 지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1958년중국 전역에서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원래부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티베트의 반중 감정은 폭발하게 되었다. 1959년 이곳에서는 반중국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를 중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많은 티베트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 네팔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달라이 라마 14세티베트 내각티베트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州)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 지금에 이르고 있다. 


즉 티베트의 근세 이후 역사는 청나라와 최왼관계->독립국(1913년~1950년)->중국의 자치구(1950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