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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삼모사(朝三暮四)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장자』 제 2편 제물론에 실려있다.


대체로 일상에서는 조삼모사의 뜻을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이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거나,  '똑같이 7개의 도토리를 주는데 그것도 모르고 아침에 많이 주니 눈 앞의 득만 보고 좋다고 하는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으로 쓰인다. 하지만 장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런게 아니다.


원숭이들 입장에서는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받는다는 선택지가 옳지 않을수 있으며, 그 반대인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받는 선택지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저공(원숭이 키우는 사람)은 처음에는 원숭이들의 입장을 모르고 처음 제안을 했다가 원숭이들이 반대한다. 그러자 저공은 제안을 바꾼다. 즉, 원숭이들의 입장을 받아들여 다시 제안을 하고, 원숭이들을 만족시킨다. 


그러니까 저공은 자신의 관점을 원숭이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원숭이들의 관점을 수용해서 이 갈등을 끝낸다. 여기서 이분법적인 사고에 찌들었다면 처음 제안이 막힐 때 원숭이들이 어리석구나 하고 그냥 넘어가거나 화를 내거나 하겠지만, 저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연적인 가지런함'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쩌면 소통과 관련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위 해석은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해석이고, 다른 해석도 있다.


깨치지 못한 인간, 즉 위 우화에서는 원숭이들이 사물의 양면을 동시에 보지 못함과, 궁극적인 실재가 하나임을 모르는 것을 지적한 철학적 의미를 함축한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 원숭이들의 문제는 눈 앞의 득만 보고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영악스럽게 따지고 계산하는 이분의 세계, 분별의 차원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경지를 통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지금 믿고 있는 신념 체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독선에 빠진 것이다. 장자 눈에는 그 당시(춘추전국시대)에 서로 다른 이론을 내놓고 자기들만 옳다고 배타적인 주장을 하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모두 이렇게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한쪽만을 절대시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이 이야기의 원숭이를 비웃고 돌을 던질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치극단주의자들, 남녀갈등, 세대갈등 등이 다 이런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모두 저 이야기의 원숭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