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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편 : https://arca.live/b/dogdrip/22112528 (10편 맨 위에 있음)

11편 : https://arca.live/b/dogdrip/22177169


조금 정리를 해봤어. 스크롤이 너무 늘어나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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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조 시기에 이순신이 언급되는 기사를 알아볼 시간이다. 영조 시기에 이순신이 언급되는 것은 후손인 충민공 이봉상에 관한 기사에서다. 이인좌의 난 당시의 일을 다룬 기사인데, 영조 4년 3월 15일 을축 6번째 기사를 보자.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하였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적이 또 진영(鎭營)에 들어와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에게 항복하라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면 장차 크게 등용하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참(斬)하겠다."

하니, 남연년이 꾸짖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하였다. 적이 꿇어앉지 않는 데 노하여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 있었는데 적이 부르니, 박종원이 투항하였다. 이인좌가 자칭 대원수(大元帥)라 위서(僞署)하여 적당(賊黨) 권서봉(權瑞鳳)을 목사(牧使)로, 신천영(申天永)을 병사(兵使)로, 박종원(朴宗元)을 영장(營將)으로 삼고, 열읍(列邑)에 흉격(凶檄)을 전해 병마(兵馬)를 불러 모았다.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을 흩어 호궤(犒饋)하고 그의 도당 및 병민(兵民)으로 협종(脅從)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淸州)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이봉상은 무능하다고 파직시키라는 상소가 올라왔던 사람인데, 원래 도성의 훈련대장으로 있다가 충청도병마절도사로 내려간 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무능한 사람조차도 나는 충무공 집안이니 죽이라고 말할 정도다. 사관들도 이봉상에 대해 기록할 때 이순신의 후손이라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같이 사망한 남연년은 집안 이야기가 없는데, 충무공 집안이라는 게 얼마나 강조되는지 알 수 있다. (대접이 무슨...)


이 이봉상이 죽은 것에 대해 세월이 지나니 이순신의 고향에서 상소가 올라온다. 영조 7년 2월 9일 임인 3번째 기사다.


충청도 아산(牙山)의 유학(幼學) 변세구(卞世矩)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고(故) 충신(忠臣) 이봉상(李鳳祥)을 그의 할아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묘(廟)에 추배(追配)하여 조정에서 표충(表忠)하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해조에 명하여 복계(覆啓)하게 하였다.


조금 더 세월이 지나 영조 11년, 다시 이순신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영조 11년 1월 20일 신묘 1번째 기사를 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형조 판서 장붕익(張鵬翼)이 아뢰기를,

"지난 겨울에 별군직(別軍職) 윤필은(尹弼殷)이 상소하여 전선(戰船)의 제도를 바친 것으로 인하여 신이 왕명을 받들고 이삼(李森)과 더불어 전선과 거북선[龜船]을 개조하였는데, 전선의 2층 위에 장식이 너무 무거워서 바람을 만나면 제어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위층의 방패(防牌)를 별도로 제도를 만들어서 때에 따라 눕혔다 세웠다가 하고, 선두(船頭)에는 곡목(曲木)을 덧붙여서 그 모양이 마치 오리의 목과 같으나 조금 뽀족하여 비록 풍랑을 따라서 나가더라도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주 빠르며, 혹시 암석에 부딪히더라도 곡목이 먼저 파손되기 때문에 매우 편리합니다."

하니, 그 제도의 모형을 내전으로 가지고 들어오게 한 뒤에 비국(備局)에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장령 김정윤(金廷潤)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한세유(韓世愈)·장응규(張應奎) 등의 사건은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어제 내시사(內試射)에서 합격하지 못한 자에게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려 주라고 명하였는데, 어찌 충신의 후손과 조카라고 하여 함부로 규격(規格) 이외의 은전(恩典)을 베풀 수가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한범(李漢範)에게 급제를 내려준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한범은 바로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서 이봉상(李鳳祥)의 조카였다. 헌납 서명형(徐命珩)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후손이자 이봉상의 조카 이한범이 아마도 과거(무과인지 문과인지는 모르겠다)에 합격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영조가 명을 내려 합격시키라고 했다. 이러니 신하들이 아무리 충무공의 후손이자 충민공의 조카라도 불합격인 애를 합격시키는 건 규정이 아닌데 그러시면 안됩니다. 철회해주세요. 했는데, 영조가 거부해버렸다.


또, 이번엔 이순신 때문에 물을 먹은 사람도 있다. 영조 20년 2월 27일 을해 2번째 기사다.


황해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당선(唐船)이 어채(漁採)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여름이 되면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이를 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등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의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과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각 2백 민(緡), 상정미(詳定米) 50곡(斛)을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황해 수사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있는 것입니다만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어리(漁利)가 4,5천 냥에 가까워서 그 재력이 호곤(湖閫)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떻게 영곤(營閫)에 있는 물력(物力)의 풍박(豐薄)에 대해 비교하여 진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주진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여기서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유명한 그 박문수가 맞다. 박문수가 황해도 해군사령관으로 갔는데, 중국 배가 불법 조업을 심하게 해서 배가 필요했다. (얘들은 이때도 이랬나보다) 그래서 예산을 청구했는데, 영조가 말하길 이순신은 전쟁 중에도 자기가 알아서 배 만들고 하는데 넌 평시에 왜 못하냐? 라고 대답함. 비교 대상이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는 경연에서도 나온다. 영조 23년 10월 13일 경오 1번째 기사를 보자.


※ 경연 : 왕이 신하들에게 유교 경전을 배우고,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도 하는 자리


유신(儒臣)을 불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강(講)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당(辛讜)이 임협(任俠)을 오로지 한 것이 조적(祖逖)이 닭 울음을 듣고 일어나 춤춘 것만 못하다."

하니, 부수찬 임상원(林象元)이 말하기를,

"조적과 같은 사람이 평상시 임사(任使)를 잘하였다면 난(亂)에 임했을 때에도 역시 힘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김시위(金始煒)는 말하기를,

"사람의 전포(展布)란 때를 만나는데 달려 있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이 임진년(壬辰年)을 만나지 않았다면 일개 고을의 읍재(邑宰)에 머무는 데 불과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신년(戊申年) 남연년(南延年)의 사건도 역시 ‘질풍 경초(疾風勁草)’라고 말할 만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알지 못하는데, 누가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느냐? 홍임(洪霖)이 그 당시 처했던 일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하니, 김시위가 말하기를,

"일찍이 남연년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완실(完實)했고, 홍임은 다만 유복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여기서 사람의 전포라는 말은 그 사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라는 의미 같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진짜 능력은 때를 만나는 것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또 이순신의 예를 든다. 아니, 자치통감을 강연하는데 예시가 또 왜 이순신이야... 그리고 영조는 이에 화답하듯이 이인좌의 난 때 죽은 남연년과 홍임을 언급한다.


경연 기사가 또 있는데, 여기서도 이순신이 언급된다. 영조 26년 1월 23일 정묘 3번째 기사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성학집요》를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정(先正)의 일생 정신은 이 책에 있다고 하겠다."

하니, 검토관 임석헌(林錫憲)이 말하기를,

"경장(更張)과 붕당 두 가지 일에 더욱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나라 신종(神宗)은 너무나 조급하게 다스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른 사람을 쓰게 된 것이다. 선정이 임진년 무렵에 생존했더라면 왜변을 어떻게 주선했었을까?"

하니, 임석헌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나라에 액운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선정이 생존했더라면 어찌 파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이순신(李舜臣)의 일을 진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얻기가 참으로 어렵다. 나도 이제는 늙었는데 유신(儒臣)은 어떻게 나를 돕겠는가?"


하니, 임석헌이 말하기를,

"옛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모두 나이가 늙었었으나 지치(至治)를 이루었습니다. 전하께서도 성지(聖志)를 분발하신다면 숨어지내는 선비들이 제발로 걸어올 것이요, 그렇지 않으시면 사방의 호걸스런 선비들이 모두 마음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그 말에 그윽이 느낀 바가 있다. 내가 비록 분발한다 하더라도 숨어지내는 선비가 어찌 응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선정이라는 것은 율곡 선생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날 경연에서 강의한 성학집요는 율곡 선생이 쓴 정치철학 저서로, 이를 강연하면서 율곡을 칭찬하는데, 여기에 다시 이순신의 일을 이야기한다. 영조는 이 말에 동의하면서 사람을 얻는 것이 어렵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반년 뒤, (전에 이순신을 예시로 까인) 박문수가 현안 상소를 올리는데 여기서 다시 이순신이 언급된다. 영조 26년 7월 3일 계묘 3번째 기사를 보자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상서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양역(良役)의 폐단은 하늘에 사무쳤으니, 어찌 소소한 경장(更張)과 추이(推移)로 구제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당초에 신이 양역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제감하자는 것이었지 1필만 감하자는 것이 아니었으며, 크게 변통하자는 것이었지 조금만 추이하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용관(冗官)을 줄이고 주현(州縣)을 합치며, 진보(鎭堡)를 감하고 불급한 군병을 도태시키며, 그 위에 어염세를 더 증설하여 부족한 양만을 헤아려서 아주 가볍게 호구마다 거두고 2필의 양역은 혁파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용관을 줄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관원이 잡다하면 정사만 방대하여집니다. 지금의 각사(各司)로 말하더라도 전혀 맡은 바 직무가 없는 곳이 있으니, 이는 전부를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직사를 나누어 맡은 곳이 있으니, 이것은 합쳐야 하는 것입니다. 인원은 많고 일은 없는 곳이 있으니, 이것은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현을 합친다 함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고을이 적으면 부역은 많아져서 백성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전에도 묘당에 호소하여 고을을 혁파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한 일이 있으니, 그 정상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6도 내에서 작은 고을 5, 60곳을 큰 고을과 합치면 백성의 힘도 풀리고 나라의 비용도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유사(有司)에게 조칙을 내리기를, ‘관청을 늘려 관리를 둔 것은 백성을 위하려는 것인데 지금은 호구는 줄어들고 관리가 오히려 많으니, 관리를 감축하고 주현을 줄여라.’ 하였습니다. 이에 모두 4백여 고을을 줄이고 관리도 감축하여 열에 하나만 두었습니다. 이는 한 번 호령함에 불과하였지만 조치의 정당함이 이와 같았으니, 중흥(中興)의 영주(令主)임에 손색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진보를 감하자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진보는 매우 많아서 삼남으로 말하더라도 5리, 10리, 20리에 소소한 진보가 겹겹이 잇대어 있으나 있고 없고가 완급에는 별 상관도 없이 앉아서 호령하고 병졸만 못살게 굴며 제 욕심만 채워 백성에게 폐만 끼치는 것이 모두 그러합니다. 설치한 본의를 생각해 보면 임진년에 병란을 겪은 땅이라 하여 대비하려고 함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적의 출몰은 본래 정해진 형적이 없어 신라와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략이 관동에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관동 9군(郡)에 다만 월송(越松)의 쇠잔한 진보 하나만이 있으니, 대비하는 도리에 있어서 한 곳에는 듬성듬성하고 한 곳에는 빽빽한 것은 화살을 따라다니며 과녁을 세우는 것과 비숫하지 않겠습니까?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통영도 이러한데 소소한 진보는 말할 것이나 있겠습니까? 하물며 이순신 당시에도 이렇듯 허다한 진보가 있어서 힘이 되어 주었습니까? 이제는 그 중 긴요치 않은 진보 4, 50곳을 혁파하고 가장 요해처에 대진(大鎭)을 두어 방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용병을 도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름이겠습니까? 국고를 탕갈시킴은 쓸데없는 군병보다 더함이 없습니다. 지금 서울에 있는 군문으로 말하더라도 군영의 이름이 너무 많고 쓸데없는 비용도 심히 많아 식자의 깊은 걱정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금위영의 설치는 다른 영문보다 가장 늦어서 전후로 여러 신하들이 혁파를 청한 것만도 한두 번에 걸쳐 그친 것이 아니므로 공의를 알 수 있겠습니다. 지금 양역에 폐가 생겨 장차 나라가 망하게 되는 데에 이르게 될 판국이니, 군문을 그대로 두고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과 군문을 혁파하고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과는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그러나 오위(五衛)에서 번을 세우던 제도를 지금 갑자기 회복하기도 어렵고, 사직을 보위하고 적을 방어하는 도리를 조금도 늦출 수는 없으니, 오래 된 훈련 도감과 어영청은 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실시한 금위영마저 파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금위영를 파하면 두 군영만이 남는데 서울[輦下]의 친병(親兵)을 온전히 훈련 도감에 소속시키면 그 권한이 무거워지고, 어영청은 평상시에 거느릴 칠색 표하병(七色標下兵)과 오초(五哨)의 향군(鄕軍)뿐이니 그 권한이 가벼워집니다. 그러나 일국 내에 다만 이 두 군문만이 있게 되어 병권(兵權)을 편파적으로 중하고 경하게 할 수는 없으므로, 훈련 도감의 친병을 반으로 나눠 어영청에 이속시키고 어영청의 향군을 1만 명으로 감하여 그 절반을 훈련 도감에 이속시켜 위세가 고르고 힘이 대등하기를 한(漢)나라남북군(南北軍)151) 의 제도와 같이 한다면 실로 장수도 어거하고 군병도 절제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이 밖에 수군(水軍)으로 말하자면 전선(戰船)은 따로 연해(沿海)에 두고 수군은 산군(山郡)에 흩어져 있으므로 산군의 무명을 거두어다가 토병(土兵)을 대신 세운 값으로 주니, 육번(六番)은 기왕 고용(雇傭)에서 나오는데 번포(番布)는 달마다 진영에 실어 보내지고 있습니다. 또 바다에 일이 없은 지가 1백여 년이 되었으니, 변장(邊將)이 된 자가 한 달에 받은 것을 삭감하지 않고 제대로 대립자(代立者)에게 줄 리가 있겠습니까? 연해의 전선에는 병졸 하나 없이 허다한 번포(番布)는 모두 변장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당초에 조정에서 설치한 의도만은 참으로 좋았지만 이제는 유명 무실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변통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의당 빨리 고쳤어야 했는데, 하물며 이렇듯 크게 경장(更張)하는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제는 마땅히 베만 내는 수군은 혁파하여 연해의 각 고을을 전선이 있는 진영에 전속시켜 모두 수군을 만들고 봄가을로 조련을 시켜, 만에 하나 불의의 사태가 발생하여 아침에 영을 내리면 아침에 모이고 저녁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모이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바람이 잔잔한 6개월간만 실시한다고 하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의 이른바 육번(六番)은 병졸 하나의 입번자(立番者)도 없지를 않습니까? 비록 전선이 있는 각 고을로 말하더라도 베를 내는 수군도 없이 다만 조련에 나가는 속오군(束伍軍)만 있으니, 이번에 전속시키면 어찌 전보다는 크게 낫지 않겠습니까? 양역을 혁파하면 각 진영, 각 고을에서 사사로이 모집하던 것도 파하라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파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일국의 양정(良丁)이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될 것이므로 양정마다 쌀 몇 말씩을 받아 정미(丁米)라고 이름하면 2필, 1필의 고역은 쌀 몇 말로 내려져서 백성의 힘이 펴질 것이며, 칠반 군보(七般軍保)라는 천한 이름도 바뀌어 정(丁)이 되니, 민심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감축된 것을 말하자면 용관이 줄고, 주현이 합쳐지며, 진보가 감소되고, 금위영이 혁파되며, 수군(水軍)이 폐지되고 양역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얻어지는 것으로 말하면 용관이 줄어지니 소득이 있고, 주현이 합쳐지니 소득이 있으며, 진보가 감소하니 소득이 있고, 금위영이 혁파되니 소득이 있으며, 수군이 혁파되니 소득이 있고, 양역이 없어지니 소득이 있으며, 어염세가 생기니 소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득을 가지고 아주 가볍게 호구마다 고루 부과하는 것이 신의 본뜻이었습니다."

하였다. 박문수는 또 소에서 스스로 그만두겠다는 뜻으로 아뢰었는데, 조재호(趙載浩)와 조당(朝堂)에서 다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가 들어가자 임금이 재촉하여 나와서 기다리라고 하였으나 끝내 명에 응하지 않자, 정리(廷吏)에게 내렸다가 이어 폄(貶)하여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삼고 삼남의 어염(魚鹽)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개혁 상소에서 말하길, 통제영을 세워 수군을 다 모은 건 매한가지인데 원균은 군대 전체를 말아먹고, 이순신은 그러고도 가는 곳마다 이겼다. 그러니까 장수를 잘 써야지 쓸데없는 수군 진지만 많이 세운다고 다가 아니라고 건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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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재위기간이 길기 때문에 아직 조금 남았다.


계속 이어서 쓰도록 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