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요인이 있으나 온건파, 즉 '구미협조' 메타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감소하게 된 것은 대정 시대와 대미개전 이전까지의 기간을 간단히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사회불안은 끊임없는 전쟁으로 얻은 국가부채와 빡빡한 통제 등으로 인해 증가하는데 기성 정치인이란 작자들은 복지 같은거엔 전혀 상관안했고, 이런 '불만'이 잔뜩 쌓인 상황에 사회주의는 성장, 1925년엔 보통선거권으로 민중이 정치 행위자로 등장하면서 그 욕구가 분출된 시점부터 '포퓰리즘화'는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2. 물론 정치권도 이를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으나 그 방법론은 단순히 욕구를 '통제'하는 '사회치안법' 등의 탄압 성격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연히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티테제인 '극단사상'을 내포한 이론들에 힘이 실리기 시작합니다. 막부 말기에 존황양이의 인기가 드솟은걸 연상시키지만 그 작동 머케니즘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더 가깝습니다.


3. 그리고 이 사상은 군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문제가 뭐냐면 이 친구들은 무기를 들고 있어서 조금만 자제심이 낮아도 바로 실행에 옮긴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실례가 바로 2.26사건이나 루거우차오 사건 등입니다. 총사령부 차원에서는 당연히 군기준수와 상명하복을 고수했으나 실제로 엄벌에 들어간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고, 오히려 다들 쉬쉬하여 군부 스스로의 자정작용이 박살났습니다.


4. 한편으로는 명치유신 이래 진행되온 작업인 '속세의 지도자, 입헌군주 천황'의 이미지가 심상치 않게 변하는데, 충분한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사건임에도 이를 굳이 이슈화하여 '천황폐하의 공정하고 성스러운 판단'을 받아내는 케이스가 늘어남에 따라 법치주의의 훼손에 신호탄을 울렸습니다.


5. 특히 천황기관설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 이토가 목지한 '입헌군주화'에 입각하여 꾸준히 진행되오던 '법 아래의 군주'는 극단사상 신봉자들이 내건 '절대자 천황'의 이미지에 공격을 받아 크게 훼손되었으며, 그동안 표면적으로라도 유지해오던 '권력분립'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 미증유의 사건이 계속 겹쳤음에도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민중은 '자신들이 믿는 사상을 현실에 충실히 재현하는 행위자'로서의 군부와 이론가들을 열렬히 찬양했고, 이것이 '절대자 천황'과 결합하면서 결국 상황은 답이 없어집니다.


7. 이를 가장 잘 이해한 자가 코노에 후미마로인데, 문제는 이 양반, '구미협조'의 대표 원로인 서원사공망의 후계자입니다...그들 딴에는 폭주하는 민중과 군부를 진정시키고 구미협조를 관철할 생각으로 그를 뽑은건데 정작 코노에가 한 짓은 민중에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8. 결국 명치유신이 내건 '근대화의 기치'를 스스로의 손으로 모두 박살낸 일본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고, 미국이 헐 노트를 보내 손절 시그널을 보내면서 일본은 명백하게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이런 말도 안되는 개판이 몇십년간 계속되니 일본인들 스스로 극단파가 되거나 온건파를 고로시해서 폭주 브레이크가 박살난거지 독립운동가들이 온건파 죽인다고 해봤자 일본인 쪽수가 워낙 많아 그런거 없습니다



출처: 군사갤러리
https://m.dcinside.com/board/war/1711747



읽어보기 좋은 글이라 생각되서 허락 받고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