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옥폐(玉幣)를 얻는 데 7가지 길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자에 대답해 말하기를 "음산의 옥돌이 한 가지요, 연나라 자산(紫山)의 백금이 한 가지요, 발과 조선의 무늬 있는 가죽이 한 가지요, … (중략) … 이것들(7가지의 옥폐)을 일컬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당한다고 하고, 좁은 (곳에서 나는) 것으로 넓은 (곳에서 나는) 것을 당한다고 합니다. 천하를 셈하는 법이 경중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관자』 규도편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과 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과 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자』 경중 갑 편 


-전국시대


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로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위략 


이후에 (조선후의)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졌고,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천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조선이 마침내 약해졌다.
위략


연의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진번·조선을 공략하여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다. 

사기》 조선 열전 


-진-한 교체기


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 아들 이 즉위했다. 

《위략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 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염철론》 비호편
 

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사기》 조선 열전 


-위만조선


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 태수가 곧 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기》 조선 열전 


(위만의 왕위는)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까지 이르렀다. (중략) 진번과 진국이 천자께 글을 올리려 했으나 조선이 계속 가로막고 있어 한나라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한서(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조선(朝鮮)의 기록


-1-2차 왕검성 전투 전후


한 무제 원봉 2년, 한나라 사신 섭하가 조서를 (고조선에) 들고 우거 임금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으나 그는 끝내 황제의 조서를 받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한나라와 고조선의) 국경인 패수에서 마부를 시켜 자신을 배웅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죽이고 강을 건너 요새로 돌아와서 천자에게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천자는 더이상 죄를 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 도위로 삼았다. 조선의 병사들이 섭하를 습격해 죽였다. (직전)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그해 가을,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으로 하여금 제나라 지역으로부터 발해를 건너가 우거를 치도록 명하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에게는 5만의 병사를 주어 요동으로 나아가 우거를 치도록 했다. (1차)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천자(天子)는 두 장군의 전세가 유리하지 않다고 여기고,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右渠)를 달래게 하였다. 우거는 사자(使者)를 보고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기를, "항복하기를 원하였으나 장군이 신(臣)을 속여서 죽일까 두려워했는데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항복을 받아주길 청합니다."하면서 태자를 보내 들어가 사죄하게 하고 말 5천 필을 바침과 아울러 군량(軍糧)을 내어 주었다.

사람들 만여 명이 병기를 지니고 막 패수(浿水)를 건너려 할 때 사자와 좌 장군은 그들이 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태자에게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에게 병기를 지니지 말라고 명하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 장군이 속임수를 쓰는 것인 아닌가 의심하여 끝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1차)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좌 장군은 일찍이 연과 대 지역의 군사를 거느린 경험이 있고 천자를 직접 모셔서 총애를 받은 적도 있으나 성질이 사나웠다. 더욱이 작은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타서 교만하게 조선을 급히 공격하도록 군사의 출동을 서둘렀다. 누선은 우거와의 싸움에 패하고 나서 제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도망가는 병졸들이 많았고, 병졸들이 모두 우거를 포위하고 있기는 했어도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때 우거의 대신이 누선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시도했다. 좌 장군은 수차례 누선에게 같이 싸우자고 재촉했으나 누선은 우거와 화해할 의사를 가지고 있어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좌 장군이 우거의 항복을 받으려 해도 우거는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두 장군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2차)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마한, 진국


(준왕은)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기를, 기자와 그 친족들이 나라에 있으면서 한씨를 사칭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韓)인들 중에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 열전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 호(戶)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진번(眞番)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정사 삼국지』의 「오환선비동이전」


-신라(사로국) 건국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삼국사기 


-법률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한서>


-음악


公無渡河歌 (공무도하가)


公無渡河공 무 도 하 임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 경 도 하 임은 끝내 물을 건너셨네.
墮河而死타 하 이 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 내 공 하 가신 임을 어찌할꼬.





그래도 생각보다는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