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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곧 일본에서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하는 냥붕이야.


오늘은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비일본산 영화가 한국만큼 일본에서 크게 흥행을 못 끄는 이유에 대해 고찰해보려고 해.


이건 내가 10년 전 학부생 시절에 일본어 수업을 들었을 때 안 것, 그리고 4년 정도 서브컬처 분야에서 일 → 한, 한 → 일 번역을 하면서 겪은 거라 팩트라고 봐도 좋을 거야.


썰을 풀기에 앞서, 한국에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AV라고 불리는 '에디 202호'에 대해 개인적인 사견을 좀 풀어볼까 해.

솔직히 말해서 난 왜 저게 그 정도로 고평가를 받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품 중에 똑같이 여친과 데이트 하는 컨셉이면서 몸매, 얼굴도 더 괜찮고 연기도 더 잘 하는 배우들 많았거든. 에디 202호가 원탑은 아니란 거지.

그래서 곰곰이 분석을 하다가, 저 작품에 어떤 번밀레가 한국어 자막을 친절하게 만들어서 배포하고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원인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
야스도 야스지만 인물들 대화를 이해하면서 보는 게 좀 더 몰입하는 데에 도움을 주지 않겠어?


이건 굳이 AV까지 가지 않고 양지의 작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건데

박지훈이 '가망 없음', '어머니……'따위의 주옺같은 오역을 양산하면서 몰입도를 반감시켰을 때

황석희 번역가는 작품에 걸맞은 찰진 번역을 쏟아내면서 작품의 지명도를 더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지.


이처럼 자막은 작품의 흥행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 잘 모르던 사람들도 질 좋은 번역 덕에 입덕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번역가들이 원문을 최대한 담아내면서 양적으로도 비슷한 초월 번역을 뽑아내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며 작업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자 그럼 일본어 자막은 어떨까?


일본어 자막은 희한하게도 최대 2행, 한 행 당 최대 10자까지라는 엿같은 글자수 제한이 있어서 한 번에 최대 20자밖에 못 보여줘. 위키피디아의 '일본어 자막'(日本語字幕) 문서(링크)에 의하면 옛날엔 한 줄 당 13자였다고 하니 더 규정이 빡빡해진 거지.

게다가 대사 1초당 글자 4개 이내, 즉 20자로 꽉꽉 채운 자막은 최소 5초는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서 한국어 자막처럼 빠르게 넘겨서 보여주기도 힘든 실정이야. 아무래도 히라가나, 가타카나 뿐만 아니라 한자를 같이 쓰는 언어다 보니, 분명한 내용 전달을 위해서 마련된 규정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한자라 하더라도, 예를 들면 縁(인연)과 緑(녹색)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헷갈리기 쉬운 글자들이 많으니까.


혹 일본에서 자막 딸린 외화를 본 적 있다면,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와 자막이 뭔가 묘하게 안 맞는다고 느꼈던 냥붕이들 있을 거야.

이게 다 저 개똥 같은 자막 글자수 제한 때문에 그래. 인물이 전하는 대사가 많은데 글자수와 표시 시간에 제한이 걸려 있어서 뭉뚱그려서 의역해버리는 경우가 많거든. 경우에 따라선 디테일한 정보는 그냥 다 날려버리는 경우도 볼 수 있어.


그래서 소설이나 다른 장르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선행 지식이 없으면 다른 나라에서 만든 자막으로 봤을 때보다 해당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몰입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기도 해.


이게 일본에서 자막 딸린 영화가 늦게 개봉되는 주요 이유이기도 하고, 아직까지 극장에서 일본어 더빙판 영화를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해. 자막판에 비해 원래 내용을 더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어서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거든.


물론 일본에선 애니메이션 산업의 내수가 잘 돌아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영화가 치고 들어올 자리가 부족한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일본에서 그다지 힘을 못 쓰는 데에는 저 엿같은 자막 시스템도 한몫 했다고 봐.


그런데 이런 원문을 충실하게 담아내지 않는 번역 현상이, 비단 영화계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야.


요즘 한국 웹툰 시장이 많이 커져서 히트작들은 일본으로도 수출되고 있는 거 알지?

한국의 웹툰이 일본어로 번역돼서 넘어갈 때도 비슷하게 글자수 제한이 걸리는 건지, 윤문 과정에서 디테일한 정보가 삭제되는 경우를 내가 직접 경험했어. 이거 말고도 옛날 한국에서 방영했던 더빙판 애니메이션들처럼, 원작 인물들이 현지화 돼서 국적이 바뀌는 바람에 최악의 경우 몇몇 컷은 일본용으로 재구성되는 등의 특징도 있긴 한데, 이건 그냥 넘어갈게.


한국어로 번역하는 건 전술한대로 원문 내용을 최대한 살리는 게 업계의 기본이니까, 평소에 하던대로 한국어 대사를 전부 일본어로 번역을 해서 넘겨줬는데

나중에 최종 편집본이 인터넷에 떠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비교해보니까 몇몇 간단한 대사를 제외하면 거의 창작 수준으로 번역이 바뀌어있더라. 개중에는 윤문을 이상하게 해서 맥락상 의미가 엉뚱해진 경우도 있었어. 원래 이런 건 최초 번역자한테 피드백을 해서 '이렇게 문장을 다듬어도 되는가'라고 상의한 다음에 바꿔야 하는 건데, 당시 번역 단가도 엄청 쌌던 걸 보면 내가 맡은 업무가 소위 '초벌 번역'이라 불리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 2차 저작권도 나한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귀여니의 소설들이 중국어로 번역됐을 때, 번밀레들이 원작에 있던 이모티콘도 다 없애가면서 리메이크한 덕에 중국에서 한류 열풍을 이끌었다고 하는데,

한국 웹툰들이 이런 식으로 수출되는 현실을 접하니까 조금은 안타깝더라.

물론 일본 만화 자체가 원체 다른 나라 작품들이 쉽게 비빌 수 없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도 있지만, 애초에 이런식으로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담아내지 않는 일본 웹툰 업계 현실도 원인이 아닐까 해.

일례로 마사토끼의 Man In The Window는 일본으로 수출될 때 편집자가 멋대로 내용을 수정하려고 했다가 결국 1권만 발매되고 파토났어.


일본 웹툰 업계에 한국 웹툰 작품들이 이제 막 진출한 것이기도 하고, 과거 한국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현지화로 수입됐다가 지금은 원작 그대로 방영하는 것처럼, 언젠가 한국 웹툰 작품들도 현지화 없이 일본에 그대로 수출되는 날이 오리라고 봐. 그때는 좀 더 인기를 끌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하는 편이고.

요약


1. 일본어는 자막에 글자수 제한이 있어 원래 내용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 그래서 더빙판이 나오기 전까진 비일본산 영화가 일본에서 잘 흥행하지 못하는 것 같다.

3.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전하지 않는 건 웹툰 쪽도 똑같고, 심하면 일본판은 내용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히트친 웹툰들이 일본에서 크게 기를 못 쓰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