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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AS

카나자와성 구금소 위치를 잘못 잡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0567에 따르면

위에 하시즈메문 근방 붉은색 동그라미 화장실 위치가 구금소였음.




1. 암장지를 찾으려는 노력.

8.15 광복 후에 당연히 윤봉길 의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다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음.

특히 윤봉길과 인연을 뗄 수 없는 백범은 광복 후 바로 임시정부유해발굴단을 조직했고, 박열이 책임자가 됨.

그리고 재일조선인들이 모여서 유해발굴에 참여함.

3월 4일부터 이들은 카나자와 노다산에서 유해가 묻힐만한 곳을 수소문해서 3일동안 파봤지만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었음.


결국 참다못한 발굴단 사람들이 노다산 묘지 관리인을 협박해서 위치를 알려달라 했는데

묘지 관리인도 함구령이 내려졌던터라 제대로 된 위치는 말하지 못했고

대신에 시신을 매장할 때 염불을 했다는 여승을 알려줌.

그리고 이제 여승을 찾아가 위치를 물어봤는데, 여승이 알려준 곳을 가보니 이전글에 설명했듯이

이시카와현 전몰자묘지 밑에 쓰레기를 태우는 소각장이었고, 그곳은 발굴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쉬던 곳이었음.

소각장을 파보자 거기서 관이 나왔고, 발굴단 모두 지금껏 여기 계신줄도 몰랐다며 울었다고 함. 

이전에 말했듯이 암장지 위에 이시카와현 전몰자묘지에선 봄가을마다 초등학생들이 

이곳을 청소하기 위해 방문했고, 거기서 모은 나뭇가지나 쓰레기들을 소각장에서 태웠음.

즉 당시 재일조선인 중에서도 자신도도 모르게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던거임.

후에 언급할 박인조 암장지보존회 회장님도 그 경우였음.



당시 유해발굴단의 사진. 가운데 나무 십자가 모양이 윤봉길 의사 사형 당시 묶었던 형틀이라고 함.



14년만에 찾은 윤봉길 의사의 관.


시신은 카나자와의대 2학년 주정균이 수습하였는데 안타깝게도 208개의 뼈 중에 201개만 찾고 7개는 찾지 못함.

시신을 수습한후 카나자와의 조선인연맹 이시카와현 본부에 이틀간 모셔졌다가 3월 8일 도쿄로 옮김.



카나자와에서 이틀간 시신이 모셔져있던 곳인데 현재는 내과병원이 있음.



2. 죽어서 도착한 해방된 조국.


도쿄에서 우선 유품이었던 양복과 모자 등을 조선으로 보냈고

그 유품들은 4월 29일 서울에서 윤봉길 의사 기념대회 때 진열됨.

그런데 행사 후에 그 유품들이 분실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져서 이제는 그 유품들은 볼 수 없음.


그후 46년 5월 15일,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드디어 부산항으로 옮겨짐.

고국을 떠난지 16년, 죽은 후 14년만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게 됨.

이 삼의사의 시신은 현재는 폐교된 부산 제7국민학교(후에 동광초등학교가 됨)에 모셔짐.

6월 15일에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추도식이 열렸는데 약 5천명이 모였다고 함.

그 때 사형 당시 윤봉길 의사를 묶었던 피묻은 십자가 모양의 형틀이 추도장에 들어올 때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고 탄식했다고 함. 

6월 16일 삼의사의 유해는 특별열차인 '해방자호'를 통해 서울에 도착했고, 조계사에 빈소가 차려짐. 

그리고 7월 6일 삼의사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한 후에 현재 효창공원에 모시게 됨.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

맨 오른쪽부터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묘임.

가장 왼쪽에 있는 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모시기 위해 만들어놓은 임시 묘임.



윤봉길의사 암장지보존회 박인조 회장님 이야기까지 하려고했는데 분량이 만만찮군.

박인조 회장님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도록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