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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지막으로 이거 쓰고 마무리하려고 함.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한국으로 옮겨진 이후에도 이야기는 남아있기 때문에.


1. 재일조선인 박인조

경북 영천 출신인 박인조는 가족들과 카나자와로 이주함.

이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소년항공병으로 징병되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하기도 한 사람이었음.

이후 윤봉길 의사의 유해발굴 작업 때 형인 박동조, 박성조는 참여했으나 박인조 선생은 참여하지 못했다고 함.

그리고 2번 글에 적었듯이 초등학생 때 이시카와현 전몰자묘지에 청소를 하러 와서 모은 나뭇가지와 쓰레기를

밑의 화장터에 태우곤 했었는데 그 화장터가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였다는 걸 뒤늦게 알고 탄식했다고 함.

그래서 그걸 참회하는 의미로 평생을 암장지 보존에 헌신함. 


이후 한 영상제작자가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조사하면서 암장지를 다른 곳으로 기록해버리자

당시 발굴작업을 기억했던 이들이 이걸 수정하면서 다시 이 사실이 알려짐.

그리고 교포와 여러 사람들의 노력 끝에 암장지 근방에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가 세워짐.


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2. 암장지에도 기념비를 세우자.

그런데 추모기념비가 세워진 당시에 암장지는 그냥 울타리만 쳐져있는 상태였고

박인조 선생은 이곳에도 꼭 추모비를 설치해야한다고 주장했음. 

카나자와 시청에서는 당연히 거부하고, 교포 사회 및 한국 정부도 이미 기념비가 세워졌으니 소극적으로 나왔다고 함. 

이유를 더 찾아보니 재일교포 사회의 고질병인 이념 문제가 얽히는 바람에 뭉쳐지지 않았다고 함.

박인조 선생은 이 사업은 이념을 떠나야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진영을 규합하려 노력했다고 함.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200만엔의 성금을 모으고 윤봉길 의사 순국 60주년인 92년에 암장지에 비석을 세움.

사실상 허가도 안받고 그냥 세워버렸다고 하는데, 당시 시장이 혁신계였는지 그냥 묵인해줬다고 함. 



지금은 카나자와시로부터 영구임대를 받아서 관리 중이라고 함.



3. 암장지 옆에 묻히다.

박인조 선생은 2009년에 사망함.

그리고 박인조 선생의 묘비가 암장지에서 걸어서 지척인 거리에 있음.

암장지 계단길 말고 옆길로 가보면 묘지로 내려가는 샛길이 있는데 거기로 내려가면 됨.

만약에 여기를 방문할 일이 있다면 박인조 선생의 묘비도 한번 찾아보는 것도 좋음. 

감사비에 보면 "나는 죽어서도 윤봉길 의사를 곁에서 모셔야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함. 




현재 보존회는 박인조 선생의 조카인 박현택씨가 회장으로 있음. 

2019년 1월에 여기 방문했다가 뵌 적이 있는데, 암장지 화이트보드에 있던 연락처로 전화를 했더니

한참 눈내리고 있었는데 고령이신데도 차를 몰고 오시더라고. 

그분께서 이런저런 이야기 많이 해주셨는데, 위에 적은 박인조 선생 이야기나 발굴 이야기 상당수는 그분 설명이심.

근데 한편으로는 씁쓸한 이야기도 해주셨음.

위에도 언급했듯이 일본 내 교포 사회는 고질병인 이념 대립 때문에 잘 뭉쳐지지 않고

한국 내 윤봉길 의사 추모사업도 분열되어서 잘 안되고 있다고 안타까워 하시더라고.

근데 현재 시장이랑 우익은 또 암장지가 눈엣가시라서 툭하면 시비걸고 있다고 하고. 


나중에 눈길에 돌아가기 힘들다고 자동차로 카나자와역까지 태워주셨음.

그분께서 나중에 결혼하면 카나자와 좋으니까 여행 한번 오라고 하시던데

회장님 그건 아무래도 결혼을 못할 거 같아서 어려울 거 같습니다란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재일한국인 하면 교토의 고려미술관 설립자 정조문 선생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는데

그분 이야기도 나중에 시간나면 할게.